<어느 날 책을 선택했다>
한 권의 책을 읽어도 제대로 읽으라는 조언이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제대로' 또는 '완벽하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텍스트와 콘텍스트(맥락)의 충분한 이해와 추론과 비판적 사고까지 이어지려면 상당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한 집중이 필요한데, 책을 읽으면서 충분하다고 느낄 만큼의 사고력을 발휘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자기 계발서 또는 자신의 독해 수준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쉬운 난도의 책은 그나마 이해가 쉬워 맥락을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고전을 비롯한 '명저'라 불리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는 문장의 이해와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맨날 자기 계발서 수준의 책이나 읽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면서 읽었다고 하는 책도 알고 보면 핵심을 놓치거나 빠트리기 일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은 독자가 읽으면서 저자와의 상호 소통에 의한 재해석에 의해 완성된다고 할 정도로 읽는 사람의 역할이 크다. 독자의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사고력의 힘은 곧 독자의 자격 조건의 1순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독서라는 행위 자체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책벌레'나 '독서광'에게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니까. 고전이나 제목을 잘 알고 있는 책들을 읽을 때에는 제대로 읽으려는 욕심부터 내려놓았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은 과감히 뛰어넘으면서 읽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철학과 사상, 수학과 물리학 관련 책들은 정말 어려웠다. 좋은 책이라 생각하면 닥치는 대로 골라 읽은 대가는 책상머리에 앉아 끙끙 앓는 것이었다. 책에 대한 욕심이 과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멈출 수는 없었다. 한 번 읽고 이해하지 못하면 비슷한 분야의 책을 여러 권 읽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도 어려우면 해당 책에 대한 해설서나 평론서를 골라 읽었다. 어렵다고 알려진 책은 읽기 전에 해설서 비슷한 책을 읽어 사전 지식을 얻은 후에 도전했다. '제대로' 읽기 위한 노력은 한 권이 아닌 여러 권의 독서로 이어졌다. 한 권을 제대로 읽는 것보다는 입문서를 읽어 배경지식을 쌓거나 서툴게 읽어도 여러 권을 읽으면서 결국은 제대로 읽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노렸다.
책은 '완벽하게' 읽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독서의 큰 가치 중 하나는 즐거움이다. 지적 유희를 빼놓는다면 책 읽기는 어쩌면 노동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노동이 가치 있는 일이고 때로는 신성하다고 말할 수 있기도 하지만, 독서를 노동에만 그치게 한다면 독서의 가치 중 상당 부분을 포기하는 일과 다름없어 보인다. 책 읽기는 생명이나 영혼이 없는 사물과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다. 재미를 우선으로 할 수도 있는 독서이기에 때로는 '제대로' 읽지 않아도 괜찮고 어려운 책은 그렇게 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고력의 발휘가 부담을 넘어 억압과 강박이 된다면 즐거운 독서는 불가능하기에 어려운 책은 오히려 제대로 읽는 것보다는 '진도'를 빨리 뽑으려고 노력했다. 어려운 책을 끝까지 읽었다는 자부심이나 뿌듯함을 느끼는 게 우선이었다. 읽은 책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도 개의치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기록하는 요약 내용 역시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핵심이라 여겨지는 부분은 가급적 독서일지에 남겼다. 이해하지 못하는 용어나 이론은 특별히 표시를 해두거나 밑줄을 쳐 다음에 볼 때에 금방 눈에 띄게 했다. 어렵지만 꼭 알고 있어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용어나 이론은 별도의 공책에 적어두었고, 그 내용은 강연할 때에 유용하게 써먹기도 했다.
독서의 즐거움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책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읽으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타인의 평론 혹은 서평을 읽으면 책을 읽을 때 큰 도움을 받는다. 각 영역별로 전문가 혹은 지식인들의 평론이나 서평을 읽다 보면 해당 책을 읽으면서 놓친 부분이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귀중한 내용을 건질 때가 많다. 같은 책을 읽고도 읽는 사람마다 다른 시각과 관심 및 분석의 깊이 차이가 드러난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책으로 발간한 서평을 읽을 때는 대개 놀라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나의 초라한 서평이 더욱 도드라져 부끄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런 과정도 조금이라도 배울 마음으로 지속하다 보면 할 만하다. 모든 배움에는 수모가 따르기 마련이니까. 서평가로 잘 알려진 사람들의 책을 우선 골라 읽었다. 나도 언젠가는 그들 수준의 서평가가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많은 책을 읽다 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내용으로 인해 읽기가 수월해진다. 저자가 어떤 이론이나 자기주장을 펼칠 때에는 주로 다른 책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한다. 인용하는 책 중에서 내가 이미 읽은 책이라면, 그래서 그 내용을 훤히 알고 있다면 저자의 주장을 훨씬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다. 독서의 힘, 독서의 능력, 독서의 가치 따위는 다독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한 번 간 길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도 여러 번 또는 수십 수백 번을 가면 예리한 눈과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기억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 번 읽은 책이지만, 이후에 다른 수많은 책에서 인용되거나 핵심과 가치의 재평가 혹은 재확인이 이루어지면서 '제대로' 읽기라는 목표에 근접할 수 있다. 한 번밖에 읽지 못하여 핵심은커녕 줄거리조차 생각나지 않을 때에도 다른 책에서 인용되는 것을 보면 그 책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한 권의 책을 부족한 이해로 읽더라도 또 다른 책으로의 독서 여정이 지속될 때에는 놓친 부분까지 어느 정도는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언은 사변적인 조언에 그칠 때가 많고 상황에 따라 다른 적용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한 권을 읽어도 제대로 읽으라는 말 역시 모든 경우에 완벽하게 들어맞지는 않는다. 제대로 읽으려 노력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나중을 기약하며 일부러 건너뛰는 부분도 있어야 한다. 한 권의 책을 이해하려고 온 힘을 다 쓰다가 지쳐버리면 곤란하다. 책에 길이 있다면 나만의 길일 것이다. 아무도 걷지 않았던 곳으로 내가 걸으면서 새로운 길이 된다. 독서를 통해 나만의 길을 만들고 싶다. 내가 걸으면서 만든 새로운 길이 정말 길이 되었다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을 때까지 나만의 방법으로 책을 읽고 싶다. 그래서 다 늦은 나이에 책을 선택한 이유를 증명하고 싶다. 꼭 그렇게 되길 바라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