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ma Jun 08. 2023

[엄마, 안녕] 14. 엄마가 미안해.

자식도 다 같은 자식은 아니었다.

첫째 딸은 묵묵하게 집 안 살림을 보태어줬지만, 찬찬하지 못하고 늘 챙겨줘야 할 것 같은 걱정스러운 자식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한 첫째 딸이 새벽에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이 안쓰러워 가능하면 집안일은 시키지 않았었다. 그러다 보니 시집가서 밥은 해 먹고살지 늘 걱정이었고, 할 수 있는 한 국이나 반찬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2시간 이상, 머리 감고 화장하며 출근 준비하느라 차려 놓은 밥도 제 때 안 먹으면 부아가 나기도 했었다. 결국에는

“차려 놓은 밥도 못 챙겨 먹어?!”

잔소리를 했었다. 그럼 첫째 딸은 입이 댓 발 나와 투덜대면서도 밥상에 앉아 밥이 맛있다고, 반찬이 맛있다고 금세 웃었었다. 화를 내도 금세 풀리고 웃음 짓게 하는 편한 딸이었다.

막내딸은 늘 곁에서 눈이 되어주고, 손과 발이 되어주었었다. 까막눈이라 보아도 알 수 없는 것들을 물으면 설명을 해줬고, 소소한 일도 처리해 줬었다. 가장 오래 곁에 있어서 편하지만, 가끔 삐치면 오래가서 풀어줘야 했다.

아들은 남편 대신 의지할 수 있는 자식이었다. 찬찬하고 꼼꼼하게 일을 해서 믿음이 가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 혼자 처리하려다가 오히려 일을 더 크게 만들어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말을 안 하니 속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이제는 일이 잘 풀려서 '우리 윤사장'이라 부르는 자랑이 되었다. 하지만, 품 안의 자식이라고 일찍 곁을 떠나서 가정을 꾸리고 살다 보니, 조금 어렵게 느껴졌었다. 며느리가 깔끔한 성격이니, 음식을 보낼 때도 좋은 그릇에 담아야 할 거 같고, 한 번 더 살피게 되고, 아들도 점점 더 청결에 신경을 쓰는 거 같아서 조금 부담이기도 했었다. 그래도 아들은 든든한 자식이었다.     


그간 엄마의 말이나 행동을 생각해 보면, 엄마는 아마도 우리 삼 남매를 그렇게 여기셨던 거 같다.


오빠가 여수 일정을 조율해서 같이 병원에 가주는 것이 엄마는 미안하기도 하지만 든든하고 좋았을 것이다.    


       




새로운 주치의를 3일 후에 만났다. 명의를 만났던 진료실이었는데, 명의까지 3명이 진료를 보던 곳에서 간호사 1명과 주치의, 그렇게 단  2 이 있는 것을 보자 단출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 엄마와 오빠와 내가 함께 들어가니, 우리가 너무 많다는 느낌마저 들었었다. 간호사는 입구에서 의사의 지시사항과 일정을 정리하고 있었고, 새로운 주치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주치의는 명의가 줬던 폐암 소책자를 주면서 명의가 하던 설명을 했는데, 긴장했는지 버벅거렸다. 설명을 우왕좌왕하기에 우리는 이미 들었다고 말했다.

주치의는 대변을 받아왔는지 물었다. 대변을 받지 못해서 키트를 가져오지 못했다고 했더니, 대변 키트를 또 주려고 했다. 진료실 안에서 허둥지둥 키트를 찾기에 우린 키트가 집에 있다고 했지만, 주치의는 키트를 가지러 우리가 상담받았던, 그리고 내가 화를 냈던 곳으로 갔다. 간호사가 다녀오겠다고 하는데도 굳이 직접 갔었다.

주치의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간호사한테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물었다. 간호사는 아마도 수액을 맞고 다음 주 중에 항암치료를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주치의가 돌아왔다. 조금 진정이 된 듯 보였다. 잠시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주치의는 지난번 명의 진료 후 진행한 뇌 MRI 검사상 뇌전이는 없다고 했다. 또 피검사에서 크레아티닌이 2.3(정확한 수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저 정도의 수치였던 것 같다.)이 나왔다고 했다. 신장 수치가 안 좋아서 걱정되지만, 우선 수액을 맞고 월요일에 항암치료를 하자고 했었다.



엄마의 신장이 안 좋았구나.

고혈압과 당뇨를 앓고 있었기에, 그리고 70대의 노인이었기에 신장 기능이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또 신장 안 좋은 것이 항암치료랑 어떤 상관이 있는지도 정확하게 몰랐었다.  

  


명의가 처방해 준 신경통약(리리카캡슐)을 엄마가 먹고 나서, 엄마의 시야가 흐려지고 온몸에 기운이 없고, 떨림도 보여서 신경통 약을 먹지 않았다고 했다. 주치의는 그러라고 했다.

또 마약진통제 패치 교체할 때 약효가 발생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는데, 그때 엄마의 통증이 극심하니, 패치 교체 시, 허리 찜질을 해도 되는지 물었다. 약효가 생길 동안 찜질로 통증을 줄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마약성 진통제 주의사항에 열에 노출되지 않게 주의하라는 게 있어서 혹시나 하고 의사한테 확인을 했었다. 주치의는 그러라고 했다.

추가로 처방할 약은 없어서 월요일 아침 7시 피검사와 9시 반 진료를 예약한 후, 수액주사를 맞으러 갔었다. 엄마는 암 환자들이 항암주사를 맞는 곳에서 수액을 40 분가량 맞았다.

    

항암치료를 하자는 말이 엄마나 오빠 그리고 나한테는 이제 치료의 시작으로 느껴졌었다. 표적치료 검사 결과 일치하는 돌연변이는 없었고, 미국으로 보낸 '가던트' 검사의 결과도 아직 안 나왔고, 면역치료를 하는 것인지, 항암독성주사를 맞는 것인지 정확하게 몰랐지만, 이 큰 병원에서 엄마가 좋아질 것을 기대했었다. 그래서 신장이 안 좋다니 신장에 좋은 음식을 검색했다. 그 음식을 먹으면 당장에 신장이 좋아지기라도 할 것처럼. 엄마도 항암치료를 하려면 체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먹는 것에 의욕을 보였다.

엄마는 집에 가서 점심으로 오빠가 좋아하는 청국장을 끓이고 신장에 좋다는 양배추를 삶아서 먹자고 했었다. 그 말을 하면서 엄마는 암을 이겨낼 수 있다고 스스로 다독이는 거 같았다.

청국장 반 그릇, 밥 1/3, 양배추 조금.

아프기 시작한 후 가장 많은 양의 점심을 욕심으로 먹었다. 그리고 오빠가 가자, 엄마는 구토를 했고, 몸까지 벌벌 떨었다. 이후로도 내내 속이 메슥거리고 쓰리고, 가슴에 얹힌 듯하다가 뭐라도 먹으면 구토를 했다.

몸이 의욕을 따라주지 못했다.      


일요일은 오빠한테 엄마를 보살피게 하고 난 일정을 갔었다. 오빠는 나보다 차분하고 꼼꼼하니 별 걱정은 없었다. 몇 가지 사항만 전달했었다.      

오후 1시에 패치를 교체해야 하고, 교체 후 약효가 나타날 때까지 통증이 있을 것을 대비해서 허리 찜질을 하라고 전했었다.


오빠는 간혹 나한테 톡을 보내며 상황을 전달했다.

패치 교체 후 허리에 온찜질을 했고, 1 시간가량이 지나자 엄마의 허리 통증은 사라졌다고 했다. 그리고 3시간이 지나자 엄마는 어지러움을 호소했고, 손이 떨리고 기운이 없어 보이고, 눈을 아주 힘겹게 떴다고 했었다. 그래서 패치를 제거했다고 했다. 


찜질을 해서 잘못된 것인가? 난 덜컥 겁이 났었다.


패치를 제거하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엄마는 어지럽고 손이 떨리는 증상이 조금 나아졌다고 했다.


그 와중에 엄마는 콩나물국을 끓였다. 오빠는 괜찮다고 했겠지만, 엄마의 마음은 그게 아니어서. 

패치 교체 후, 통증이 가라앉은 엄마는 야쿠르트를 마시고 나서 콩나물국을 끓이기 시작했는데, 국을 끓이는 중에 구역감이 올라와서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가서 구토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온 엄마는

“엄마가 미안해.”

했단다.

오빠가 함께 있을 때 구토를 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늘 오빠가 가기를 기다렸다가 구토를 하곤 했었으니까.

오빠는 뭐가 미안하냐고 했을 것이다. 오빠도 구토를 한다는 사실은 나를 통해 알았지만,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 놀랐던 모양이었다. 그보다 엄마의 말이 더 마음 아팠다고 했었다. 아들인 자신을 어려워한다고.     


엄마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엄마는 자신이 아무리 아파도 자식한테, 특히 아들한테 맛있는 밥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고, 또 아직은 아들한테 맛있는 밥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깔끔하게 잘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엄마가 아들이 먹을 국을 끓이다가 아들이 있는 데서 구토를 했으니, 엄마는 또 얼마나 마음이 복잡했을까.






온도가 높으면 마약성분이 빨리 스며든단다.

오빠는 패치 교체 후 찜질을 한 것을 두고 내가 자책하자, 엄마가 콩나물국을 끓인다고 불 앞에서 오래 있었던 것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나를 위로했었다.

실은 오빠도 나도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아직도 모른다.

이런 무지한 자식들한테 엄마는 모든 것을 의탁했으니, 실은 우리가 했어야 할 말이었다.


"엄마, 우리가 미안해."




다음 날 새벽에 병원을 가야 해서 오빠는 집에서 잠을 잤었다.

엄마는 구토를 할 까봐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간혹 옥수수수염차만 입에 머금었었다.

계속 기운이 없어 보였고, 눈을 힘겹게 떴고, 간혹 몸의 떨림이 보였다.

그리고 12월 5일 월요일 새벽 항암치료를 하기 위해 병원으로 가서 피검사를 했다.

크레아티닌 수치가 6.7이 나와서 엄마는 항암치료못하고 응급으로 입원했었다.    

엄마의 통증을 줄이고자 했던 노력들이 엄마의 신장을 더 힘들게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병원 생활의 시작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 안녕] 13. 명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