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유행했던 시집으로 류시화 시인이 엮었었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이라는 시로 유명해진 류시화 시인이 낸 시집이라 그 시인의 작품을 기대하고 구매했는데, 다른 시인들의 시를 엮었던 책이라 나는 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시집 안에 수록된 어느 시인의 시 제목이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었고, 그 시 제목이 책 제목이 되었다.
다시 읽어도 큰 울림을 주는 시다.
아니다. 실은 그때 난 이 시에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니, '다시 읽으니 큰 울림을 줬다.'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단순히 이 시의 제목만 들으면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에알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먼저 생각하게 한다.
가보지 않은 길처럼.
사람들은, 그리고 나 또한 과거로 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하고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길 기대한다.
그래서 수많은 타임슬립 드라마나 영화들이 나왔을 것이다.
단짝이 사고로 죽은 지 18년이 되는 날이다.
단짝은 일찍 결혼을 했었다. 단짝은 남편을 ‘오빠’라고 불렀고, 나 역시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단짝의 남편을 ‘오빠’라고 불렀었다. 그 둘과 나는 자주 어울렸었다.아니, 그 둘이 나와 자주 놀아줬었다. 결혼 후 5년 정도 되었을 때, 단짝과 ‘오빠’는 여름휴가를 갔었다. 휴가를 가기 전 단짝과 만나기로 했었지만, 작업을 하느라 지쳐있던 난 휴가 다녀와서 보자고 약속을 미뤘었다.
그리고 그날, 난 해외공연 제의를 받고 여권을 만들기 위해 사진을 찍었었다. 여권 사진은 치아가 보이면 안 된다는 것도 모르고 치아를 훤히 드러내어 웃으면서, 평소 입지 않는 빨간 원피스를 입고 어깨도 훤히 드러낸 채 아주 즐거운 소풍을 가듯 찍었었다. 사진을 찍고 나서 단짝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다.
‘어~이, 김 씨. 웬일이냐?’ ‘유니야.’ ‘어, 오빠.’ ‘정이가 죽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놀라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울어야 할 거 같았다. TV를 보면 그런 상황에서 다들 눈물을 글썽이며 오열하고는 했었으니까.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이 나에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그래서 난 ‘그게 무슨 말이야?’ 를 반복하며 울었다.
울면서
'이게 맞는 건가?'
생각했었다. 심장은 아무 느낌이 없지만 울어서 상대방에게 내가 놀랐음을, 단짝의 죽음을 슬퍼함을 알려야 할 거 같았다.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장례식장에 가서 단짝의 사진을 보았다. 급하게 영정사진을 준비하느라 주민증에 있는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했었다. 사진을 보자 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는 울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먼저 울음이 나왔다. 단짝의 사진을 봐서 그랬는지, 사진을 보자 실감을 했던 건지 정확하지는 않다. 그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어서 엉엉 울었고, 와중에 조의금을 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눈물 콧물 범벅된 얼굴로 엉엉 울면서 봉투에 돈을 넣었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표현이 상황에 맞는지는 모르지만, 진짜로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해서 ) 돈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울면서 조의봉투에 돈을 넣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었다.
그때, 장례식이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를 위한 것이란 걸 깨달았다.
단짝의 시신도 보지 못했고, 사고현장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말로만 단짝의 죽음을 전해 들은 채, 장례식을 하는 동안 단짝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었다.
휴가 가기 전 만나기로 한 약속 미룬 것을 내내 후회하면서.
이후, ‘오빠’는 나에게 전화를 했었다. 가끔보다 자주, 늦은 밤에.
나도 단짝의 죽음이 너무 힘들었는데, ‘오빠’의 한숨과 힘든 마음을 들으면 난 숨을 쉬기도 힘들어졌었다. 더구나 늦은 밤에 취약한 난 조금씩 '오빠'의 전화를 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단짝의 생일에 납골당을 찾았었고, 우연히 ‘오빠’를 만났었다. ‘오빠’는 계란을 한 판이나 삶아왔었다. 그것을 보자 웃음이 났었다. 삶은 계란을 유난히 좋아했던 내 단짝이 생각났고, 단짝이 좋아하던 삶은 계란 위에 초를 꽂아 죽은 아내의 생일을 살아있을 때처럼 축하하는 '오빠'가 짠하기도, 웃음 짓게도 했었다. '오빠'는 단짝이 살았을 때에도 삶은 계란을 생일선물로 줬었고, 단짝은 그걸 나한테 자랑했었다.
우연히 만난 그날, ‘오빠’는 나에게 복어를 사줬다. 처음 먹어보는 복어는 부드럽고 맛있었다. 삶은 계란 한 판은 옆에다 두고, '복어가 너무 맛있다.'를 연발하며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해서 그랬는지, 복어가 맛있어서 그랬는지, 시간이 흘러서 그랬는지, 단짝의 생일이어서 그랬는지, 오랜만에 '오빠'와 단짝의 이야기를 편하게, 오래 했다. 그리고 울었다. 우리는 다시 각자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어느 해, 단짝의 기일 즈음에 납골당에 갔다가 단짝의 안치단 바로 옆 안치단에 있는 ‘오빠’의 유골함을 보았다.
너무 놀랐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단짝의 언니한테 전화를 걸어 ‘오빠’가 죽은 이유를 물었는데, 언니는 ‘오빠’의 죽음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해, 배우자와 사별한 사람들이 겪는 우울함이 너무 커서 자살률이 높다는 신문기사를 읽었었다. '오빠'가 자살을 했는지, 아팠는지 사고였는지 난 모른다. 하지만 그 기사는 내 마음에 돌덩이가 되었다. '오빠'의 힘든 마음을 들어주지 못한 나의 잘못이 너무 크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이번에 엄마를 그 납골당에 모시며, 단짝과 '오빠'의 안치단도 보러 갔었다.
사랑하는 엄마를 잃고 혼자 남겨져서 단짝보다는 '오빠'한테 더 이입이 되었다.
'오빠도 힘들었겠구나.'
'오빠가 이렇게 일찍 세상을 떠날 것을 알았다면 전화를 피하지 말 걸.'
후회가 들었다.
그러면서 류시화 시인이 엮은 그 시집의 제목이 생각났던가 보다.
내가 미래의 일을 알고 그때 '오빠'의 힘겨움을 들어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럼 오빠가 죽지 않았을까?
왜 죽었는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그러나 또 다르게 드는 생각은,
오빠가 죽을 것을 알고, 힘겨움을 참고 숨이 안 쉬어지는 그 전화를 계속 받았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몰랐던 이유는 그때는 그만큼만 아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