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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Oct 08. 2024

‘엄마 잘 가요’

꿈같았다. 별세에서 고향 선산에 골분骨粉을 모시기까지의 그 사흘이.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전해준 요양원 관계자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입소한 후 요양원에서는 이 삼일에 한 번꼴로 어머니의 동향을 알려왔다. 대체로 우울한 소식이었다. 부종이 심하다, 소변을 잘 보지 못한다. 정상적인 식사가 어려워 콧줄을 삽입하여 영양식을 공급한다, 약을 먹는 것도 거부하며 집에 가겠다는 말만 반복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요양원 전화번호로 문자나 전화가 올 때마다 긴장되었다. 밤에도 머리맡에 휴대전화를 두고 잤다. 9월 XX일 새벽 두 시경이었다. 요양원 전화번호가 뜨면서 전화벨이 울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한밤중에 전화가 온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긴장되며 좋지 않은 소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태가 위독하니 급히 오라는 등의. 바로 응대를 하자 “보호자님, 어머니 방금 소천하셨습니다”라는 착 가라앉은 소리가 들렸다. 요양원에 입소한 지 꼭 3주가 되는 날이었다. 그때 내가 무어라고 대응을 했는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네? 뭐라고요? 네? 아니, 아니, 어떻게” 아마 그런 식의 말을 되풀이했던 것 같다. 어머니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큰일’을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흘 전에 면회를 갔을 때도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상대방은 어머니가 방금 소천했다는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너무 뜻밖의 소식이었다. 전화를 끊고 택시를 불러 아내와 딸과 함께 요양원으로 갔다. 어머니는 요양원 입구 대기실의 이동식 침대에서 잠자듯 누워 있었다. 이제까지 누군가의 주검을 본 적이 두어 번 있었다. 아버지의 주검을 보았는지는 기억이 없다. 내가 어릴 때였으므로 어른들이 만류했을지도 모르겠다. 15년 전에 돌아가신 작은아버지의 주검은 보았던 것 같은데 그 또한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10여 년 전 일본에서 일할 때 예전 회사 동료였던 일본인의 주검을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주검을 유리 상자에 넣어 문상객에게 공개한다. 단정하게 누워 있던 그분의 얼굴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참 많이 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어머니와 함께했던 그 고단하고 신산했던 시간이, 흔한 비유로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설움이 복받쳤기 때문이다. 임종을 못했다는 죄책감도 더해졌다. 상조회사에 알리고, 장례식장을 수배하고, 친지와 지인들에게 부고를 전하고, 문상객을 맞고, 마침내 화장장에서 한 줌 가루로 변한 어머니를 고향 아버지 산소 옆에 안치하기까지의 그 사흘 동안은 그야말로 꿈처럼 지나간 시간이었다. 한없이 긴 시간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문상 온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100세까지 장수하셨으니 호상이라며 덕담을 해주었지만 사흘 내내 나는 생전의 어머니, 그리고 주검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요양원 직원이 전화로 말해준 “보호자님, 어머니 방금 소천하셨습니다”라는 말이 귓가에 잉잉거렸다. 염습과 입관을 할 때 장례지도사가 말했다. 이렇게나 정성스럽게 수의를 준비한 경우는 처음 본다고. 어머니는 오래전에 당신의 수의를 준비해 놓았다.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전에 내가 직접 수의를 본 적은 없었다. 어머니 방 벽장 속에 당신의 영정 사진과 함께 소중하게 보관돼 있었다. 장례지도사 말로는 어머니가 준비한 수의는 한 벌이 아니었다. 수의를 입기 전에 입는, 일종의 겉옷 같은 얇은 옷도 있었다. 그런 겉옷이 두세 벌 되었다. 입관할 때 생전에 어머니가 즐겨 읽으시던, 손때 묻은 불경 몇 권과 염주를 넣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갑자기 ‘엄마 잘 가요’라는 말이 떠올라 나는 울먹이며 이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외쳤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배웅하듯이. 이 말은 소설가 김주영 선생의 장편소설 제목이다. 작가의 어머니를 소재로 쓴 소설인데 김주영 선생이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작별의 인사말로 쓴 것일 것이다(나는 소설이 출간된 2012년에 샀으면서도 아직까지 읽지는 않았다. 이분의 소설을 대부분 읽었지만 왠지 나는 이 소설 읽기를 차일피일 미루어 왔다). 왜 이 제목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장례가 끝나고 집에서 가족들과 이야기 도중 이 말을 했더니 큰딸이 ‘아빠는 그 상황에서도 책(제목)을 생각해 냈구나’ 하며 ‘역시 아빠다워’하며 어이없어(?)했다. 본견명정과 우단관보가 덮이고 입관 절차는 완료되었다. 어머니의 주검은 일시 보관 장소로 다시 돌아갔다. 다음날 새벽 5시 반에 발인하여 화장장으로 갔다. 화장이 끝난 골분함을 인수하여 고향 선산으로 갔다. 버스가 출발할 때 내리던 비는 서울 시내를 벗어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치고 날씨는 개었다. 추석이 아니라 하석夏夕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낼 정도로 극성스럽게 무덥던 날씨도 완연하게 달라졌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 떠나기를 그렇게도 원했던 생전의 어머니의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다. 어머니의 분골을 아버지 산소 옆에 묻었다. 묻었다기보다 그냥 뿌렸다고 하는 게 맞겠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뼛가루는 곱고 부드러웠다. 이게 몇 시간 전까지 보았던 어머니의 ‘모습’이라니,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이제 어머니는 60년 동안이나 떨어져 있던 아버지 곁으로 돌아갔다. 생전에 어머니는 가끔 말씀하셨다. 다음 생은 아버지에게 사랑받으며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고.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런 바람을 가졌을까. “엄마 잘 가요” 장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이 말을 반복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어디로 가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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