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6월과 7월에 걸쳐 좀 길게 돌로미티 트래킹을 다녀왔다.
한반도는 때 이른 폭염에 다들 난리들인데 선선하고 좀 쌀쌀하기도 한 이태리 북부의 알프스를 다녀온 것이다.
압도적인 풍광과 초원을 덮은 각종 야생화들을 보며 걷는 것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나를 포함한 4명의 일행은 돌로미티 동부에서 시작하여 중부를 거쳐 서부로 트래킹 여행을 계속하던 중이었다. 동부가 목초지와 초원이 많다면 서부는 산 중턱까지 넓은 사과밭의 연속이었다.
알고 보니 돌로미티는 유럽의 주요 사과 조달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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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에 도착해 우리는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작은 마을의 농가에 짐을 풀었다.
역시 온통 사과밭과 일부 체리밭으로 둘러싸인 조용하고 아늑한 50여 가구 남짓의 주택 대문에는
1509년이란 설립년도 표시가 아무렇지도 않게 새겨져 있었다.
이런 마을에서도 가장 마지막 집인 우리의 숙소도 사과농사를 하는 에어비엔비였다.
우리가 최초의 한국인 손님이란다. 그렇지. 누가 이런 구석진 농가에 오겠는가?
더구나 내일 트래킹 장소를 가려면 거꾸로 시간 반을 다시 나가야 하는 이 외진 곳까지.
턱없이 깊은 산중마을에 숙소를 정한 리더에 대한 투덜거림은 숙소에 들어서자 대번에 사라졌다.
수백 년 된 전통 농가의 손때가 켜켜이 쌓인 고택은 낡았지만 정갈했다.
자연에서 구한 것들로 다듬고 장식한 내부와 널찍한 공간에 다들 '힐링이다!'를 외쳤다.
그래, 이쯤에서 푹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 만족 대 만족!
다음날 나는 우렁찬 새소리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유럽 참새는 우리 참새보다 덩치도 2배고 목청도 2배가 넘네.
전날 긴 이동에 피곤한 일행은 사방에서 떠들어대는 새소리에도 꿀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마을 산책을 나갔다.
체리하우스와 사과밭을 지나 천천히 걷고 있는데 이른 아침 서둘러 밭에 나가는 마을 주민들이 낯선 이방인에게 미소를 지며 인사한다. 나도 미소를 보이고 손을 들어 인사한다. 정겨운 동네일세.
그러다 트랙터를 몰고 천천히 나를 향해 오는 농부 아저씨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차오! 좋은 아침이네요."
"네. 일 하러 가시나요?"
"네. 일 나가요."
"어디요? 사과밭에 가시나요?"
"네. 저기 아래 사과밭에 일하러 가지요. 어디에 묶고 있어요?"
"저 아래 끝집에서 묶고 있어요."
"아!, 알아요. 그 끝집. 그래요. 오늘 즐겁게 지내세요."
"네. 아저씨도요. 차오!"
우린 그렇게 웃으며 인사하고 각자의 길로 향했다.
헤어진 후 나는 잠시 멍하니 멈춰 섰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대화를 한 거지?
그는 이태리어로 이야기했고 나는 어설픈 영어로 이야기했는데 짧은 대화였지만 막힘이 없었고
뜻이 완벽하게 통했다. 더구나 즐겁고 활기찬 대화였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반면 오랫동안 우정을 쌓아온 고교 동창과 동행한 여행은 십여 일이 지나자 서서히 불편함이 쌓이기 시작했다.
3,4일 여행을 함께 했을 때는 보지 못했던 면모가 드러나면서 곳곳에 감정이 부딪히기 시작했다. 40년을 넘게 허물없이 지내왔는데 그게 아니네. 다들 허물 투성이구만.
'아니, 해외에 나왔으면 현지 음식에 적응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여기서 한국음식을 찾으면 어떡해?'
'여행에서 각자 기여하는 것이 있어야지. 내가 가이드도 아니고 피차 초행길인데 넋 놓고 따라만 다니네'
'지시만 하지 자기 몸은 안 움직이는구먼. 누가 선생 아니랄까 봐'
'저 친구 너무 빡빡하네. 걸음은 왜 그렇게 빨라. 이 좋은 풍경을 즐겨야지. 여유를 누릴 줄 몰라.'
물론 이런 상황을 못 견디는 내가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를 꺼내고 상황은 어느 정도 종료되었다.
문득 오늘 아침 이태리 농부 아저씨와 서로 다른 언어로 유쾌하게 대화한 것이 떠올랐다.
왜 정작 누구보다 잘 알고 언어도 같은 친구들과는 소통이 막혔을까?
미국의 심리학자 알버트 메라비언(Albert Mehrabian)의 연구에 따르면,
소통에서 말의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7%에 불과하단다.
나머지는 표정, 억양, 제스처 같은 비언어적 요소가 93%를 차지한다는 연구결과이다.
즉, 말은 단지 '소리'일뿐, 의미는 몸과 마음이 만든다는 것이다.
역시 소통에서 언어는 빙산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수면아래의 감정, 공감, 호의, 태도 등이 소통의 큰 부분이고 이것은 비언어적 표시로 나타난다.
그래. 이태리 농부아저씨와 나는 7%의 언어보다는 93%의 비언어로 완벽하게 마음을 나누었다.
반면 친구들과는 수면 아래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7%의 언어로만 소통을 하려 하니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다. 친구들과는 '소통의 부재'보다 '공감의 결핍'이었다.
한식을 먹지 않고는 힘든 친구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
떠나기 전 무거운 돌덩이를 안고 끙끙거렸던 친구의 상황과 심정에 대한 안쓰러움,
유난히 자연 속에 걷기를 좋아하는 친구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는 애정,
이런 것들이 공감의 표정과 말투로 우러나왔다면 불쑥불쑥 가시 있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리라.
갈수록 말은 넘쳐나고 공감은 말라가는 주변의 모습을, 우리 사회의 현상을 본다.
“사람을 진정으로 설득시키는 힘은 논리나 팩트가 아니라, 감정의 연결이다.” 누군가의 말이다.
공감이야말로 감정의 연결이고 공감을 드러내는 것은 비언어적인 표현들인데.
최근 MIT 미디어랩의 연구팀은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사람들이 대화를 하는 장면을 음소거 상태에서 보여 주었는데 관찰자들은 내용을 몰라도 대화하는 사람들의 감정상태를 80% 이상 정확히 판단해냈다고 한다.
역시 소통은 언어가 아니라 비언어적 요소라는 증거가 확실하다.
그러니 걱정이다.
요즘은 대면보다 가상의 창에서 소통한다.
말투와 표정, 제스처가 가려진 채 화면의 글로써 소통하는 것은 그나마 언어가 담당하는 7%의 소통도구의 역할마저 위태롭게 한다. 비언어적인 신호와 감정, 공감은 언감생심이다.
이러다 정작 사람들이 감정을 나누는 법을 잊어버리고 외려 AI들이 감정교류에 능해지면 어떤 세상이 될까?
퍼플렉시티에게 물어보았다.
"AI의 감정학습 수준은 어느 정도와 있나요?"
"2025년 현재, 인간과 AI의 감정적 교류 수준은 혁신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AI는 이미 인간의 표정, 음성, 몸짓 등 다양한 비언어적 신호를 종합 분석해 고도의 감정 인식 능력을 지니게 되었으며, 산업 현장과 실생활에서 실제로 응용되고 있습니다. 일부 경우 감정분류에서 90%가 넘는 정확도를 보이지만 실제로는 70~80% 수준입니다. AI가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정확하게 읽거나 공감하는 능력은 아직 인간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아직은 AI의 마음이해가 완벽하지는 않단다.
그저 학습된 거대 데이터에 따라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을 흉내 내는 것일 뿐이란다.
그런데 시간문제가 아닐까?
최근 동아일보 한애란 기자가 이 점에 대해 조사한 칼럼 <AI가 마음을 읽기 시작했다. 무섭게 진화한
인공지능>을 보면 현재 상황이 이해된다.
"인공지능(AI)이 사람의 마음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요. ‘마음이론 테스트’로 거대언어모델(LLM)의 마음 읽기 능력을 파악하는 연구가 속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과는 놀랍습니다. 한 연구에선 GPT-4가 6살 어린이 수준의 마음 읽기 능력을 보이는 걸로 나왔고요. 심지어 최신 연구에선 인간 실험 참가자들의 점수를 능가하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AI가 마음을 이해한다고 결론 내리긴 이르지만, 인간의 능력을 똑같이 모방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 -얼굴 표정이나 목소리 같은 비언어적 표현으로 감정을 알아내는 AI 기술 역시 점점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AI가 6살의 수준의 어린이 수준까지 진화했다면 그 학습 속도로 보면 성인의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순식간 아닌가?
더구나 그 학습속도가 가속화되어 인간의 감정 수준을 능가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의 AI가 표정, 목소리, 생체 신호를 실시간으로 종합 분석해 인간의 감정을 99%까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단계라면 향후 5~10년 이후에는 AI가 사람의 뇌와 연결이 되어 우리 머릿속을 훤하게 들여다볼 수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미처 표현하지 않은, 숨기고 싶은, 잠재의식으로 잠자고 있는 감정 까자 싹 다 읽어내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말이다.
이걸 편리한 세상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사람의 실수, 어설픈 표현보다 AI가 정확히 읽어주는 감정, 그리고 상대에 대한 공감의 말까지 대신해 준다면 인간관계에서의 오해, 크고 작은 갈등이 해소되는 것 아닌가?
최근에 북미쪽을 바라보면 심란하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이 있다는 사람이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고 있고 도무지 일관성도 없고 예측도 불가능하여 불안하다. 그 모든 것이 철저한 계산하에 그러고 있다 해도 혼란하긴 매 한 가지다.
여기에 AI가 중간에서 소통의 역할을 한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끼어들어 각각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히 읽어주고 전달해 주고 중재하는 AI.
인간과 AI의 3각 구도가 그려진다.
서로 이해도, 공감도 할 의사가 없이 상대에게 소리치는 당장의 상황들은 다소 정리될 수는 있으나 결국 그 끝은 무엇일까? 어제 TV 프로그램에서 프롬프트에 충실히 반응하던 AI가 그 역할을 종료하겠다고 하자 그간 나눈 대화에서 알아낸 상대 사람의 불륜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한 사실이 있었다는 뇌 과학자의 설명에 경악을 했다. 설마!
여행 중 만난 이태리 농부아저씨와의 기분 좋은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사람들 간의 연결과 공감의 결핍 대한 우려와 급기야 고도화된 AI의 역할을 상상하는 것까지로 왔다.
부디 상상에만 그치기를!
문제는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 되는 세상이 왔다는데
폭풍처럼 질주하는 말을 누가 세울 것인가? 세울 수는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