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엄마의 어린 시절
엄마는 평안도 철산에서 태어났다.
지도를 보면 토끼 입 근처이다.
위로 언니, 아래로 남동생 둘.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는 키가 늘씬하고 피부가 유난히 고운 동네에서 일등가는 미인이었다.
그러나 말 수가 없는 분이었다.
남편의 부재와 지독한 가난 때문에 말을 잃었던 것일까?
내 기억속에도 할머니는 선하고 슬픈 눈에 말수가 극히 적은 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특출 나게 잘생긴 한량이었다.
평생 직업을 가지지 않았고
살면서 일원 한 장 벌어보지 못했던 그는
엄마의 어린 시절 늘 부재해 있었다.
할아버지는 치과의사였단다.
치과의사? 엉? 배운 사람?
아니다. 6.25 전쟁 이전 당시에는 치과의사 자격증이란 게 딱히 없이
무면허로 남의 이빨을 함부로 뽑고 치료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애초부터 성실하게 일하여 처자식을 먹여 살리겠다는 생각은 일도 없었던 것 같다.
뭔가 한탕해보겠다는 허황된 생각에 끊임없이 두리번거렸고, 사람을 만나 무언가를
도모하며 허황된 꿈을 꾸었다. 잘난 외모가 이것에 기름을 부었을까?
타고난 역마살이 도지면 다섯 식구를 팽개치고 만주로, 서울로 훌쩍 떠나버리곤 했다.
할머니와의 초기 삶에서 잽싸게 5명의 아이들을 줄줄이 난 후 번식의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했을까?
참. 5명의 아이중 엄마의 바로 아래 딸이 있었지만 3,4살때 죽었단다.
유난히 말 잘하고 영특했다던 내 이모는 어디가 아픈지 모르게 앓다가 죽었고
내 짐작에는 어쩌면 영양실조가 죽음을 재촉했다는 추측이다.
엄마의 7살에도 할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만주에 가있었다.
혼자 남은 할머니는 인근 바닷가에서 잡은 물고기를 떼어다가
읍에 나가 팔아서 생계를 해결했다.
교통수단도 없이 할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옹이 져 올리고는
무거운 광주리를 한 손으로 붙들고 나가 며칠이고 읍에 머물면서 생선을 다 팔고
집으로 돌아왔다.
올망졸망한 4남매는 어머니가 잔뜩 지어놓고 가신 솥의 밥을 데우고
김치를 먹으며 엄마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엄마의 귀가가 예상보다 늦어지고 해 놓은 밥이 떨어지면
밥을 해 먹어야 했다.
작은 키에 턱없이 높은 부뚜막에 놓인 무쇠솥에 밥을 하기 위해서 엄마는 부뚜막 위로 기어올라
쌀과 물을 붓고 무거운 뚜껑을 질질 끌어 덮고 장작을 지펴 밥을 해서 동생들과
먹었단다. 엄마는 지금도 그때의 광경을 어제일처럼 기억한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면 이런 모습을 그려 볼 텐데.
큰 키에 머리에 무거운 광주리를 지고 휘청거리며 길을 떠나는 가녀린 할머니와
누추한 부엌에서 몸보다 커다란 솥에 몸이 쏠려 빠지지 않으려 애쓰면 밥을 하는 일곱 살 소녀.
수년간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사방을 떠도는 할아버지의 소식이 바람에 따라 들려왔다.
서울에서 한 여자와 같이 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와중에 전쟁은 터졌고
4남매를 홀로 키우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한 할머니는 몇몇 친척들과 남하를 결심했다.
엄마의 또 하나의 또렷한 기억.
사람들과 작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
인민군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는 곳에서 모두 물속 들어가
굵은 갈대줄기를 입에 물고 줄기 끝을 수면 밖으로 내어 숨을 쉬며
강을 건넜단다.
구사일생으로 남으로 넘어와
네 아이들의 손목을 끌고 할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한량이 기거하는 숙소를 찾아냈단다.
여기서도 의문이 든다. 통신수단이 있을 리 만무하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울 한복판에서 어떻게 그 난봉꾼을 찾아내었을까?
사람들의 목격에 의지해 서울을 뒤졌을 텐데
참으로 지난한 과정이었거나, 이북 출신사람들이 모여사는 지역이 따로 있었을까?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남산 아래, 신앙촌, 즉 남대문 가까운 곳에 실향민들이 무허가 판자촌을 이루며
무리 지어 살았다는 엄마의 회상이 생각난다.
어찌 되었든
엄마의 기억에 의하면 우여곡절 끝에 만난 아버지 앞에 할머니는
4명의 아이들을 놓아두고 다시 홀로 북으로 향했다.
그때의 엄마의 또 하나의 사진처럼 선명한 기억.
주린 배를 이끌고 남루하게 도착한 4남매에게
할아버지의 여자는 흰쌀밥에 뜨끈뜨끈한 두부부침을 내어 주었다.
엄마는 지금까지 그렇게 맛있는 두부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회상한다.
주린 배를 채워준 기억 때문일까?
엄마는 할아버지의 여자가 마음도 모습도 무척 고왔다고 회상한다.
자녀를 남편에게 던지고 돌아서 북으로 향하던 할머니는 발길을 돌려
다시 서울로 후퇴했다.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였을까? 아니면 당시의 전시상황이
다시 북으로 넘어가기 위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돌아온 것일까?
할아버지는 그 여자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방을 하나 얻어 6 식구가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그 맘씨도 모습도 고왔다던 그 여자는 참 운도 좋았다. 난봉꾼을 떠났으니.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고 뜬구름만 잡는 남편에게 기댈 수 없었던 할머니는
다시 머리 위에 과일, 떡등의 광주리를 이고 행상을 나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이미 어디론가 또 사라진 남편.
할머니는 부산의 영도다리 근처 언덕에 골판지와 나무 등을 얻어 판잣집을 만들어
잠자리를 마련하고 곧 피난민들로 이루어진 시장통으로 나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길거리 행상을 하였다.
그리고 서울이 수복되어 다시 올라왔다.
엄마는 잠깐 있었던 그 시절의 부산,
당시 다녔던 변변찮은 학교와 길거리에서 만난 미군이 던져주는 초콜릿을 가끔 회상한다.
아! 전쟁과 피난 와중에도 부모들은 시장판과 부두의 노동판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냈구나. 이 말릴 수 없는 한국의 교육열.
전쟁이 끝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엄마는 그 이후 한 번도 부산에 가지 못했다.
여행을 엄두도 못 내는 성격 탓일까?
쉽게 갈 수 있는 국내여행인데도 엄마는 50년이 넘도록 TV에서만 부산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70이 될 즈음
나는 삼대가 함께하는 여행이라며 딸과 엄마를 끌고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갔다.
그리고 많이 바뀐 모습 탓에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 힘들지만 영도다리 근처를
쏘다니며 엄마의 판잣집을 예측해 보았다.
저기 어디쯤인 것 같다.
엄마는 멀리서 언덕 위를 보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엄마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그려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