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교도관 생활 중 가장 보람 있었던 때가 언제냐고 내게 물어본다면 나는 주저 없이 소년교도소에 근무할 때라고 말한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천안소년교도소에는 한때 1,300여 명 넘는 소년수용자들이 생활했었고 그중에는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최 모 군을 비롯하여 부모와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교도소에 오지 않아도 될 아이들이 많았다.
소년교도소에서는 소년수들을 번호로 호칭하지 않고 이름으로 부르고 일반교도소와 달리 교도관들과 소년수들 사이에 친밀감이 있었다.
초임 때 선배교도관들이 소년수들을 변화시키는 감동적인 모습들을 많이 보았고 소년수용자들은 나이 많은 교도관들이 따뜻하게 품어주고 보살펴주면 그 교도관을 아버지라 부르기도 했다.
박기성(가명)이라는 소년수는 소년교도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싸움과 폭행, 입실 거부 등으로 징벌방을 드나드는 아이였다. 모두 그 아이를 포기하였는데 사동팀장 K 선배가 그를 수시로 상담하며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써 주며 좋은 얘기를 해주었다. 박기성은 그런 사동팀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계속 징벌행위를 했는데 사동팀장은 변함없이 박기성을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어느 날 박기성이 울면서 큰소리로 “제발 나한테 잘해 주지 말고 신경 끄세요”라며 사동팀장에게 말했고 그런데도 사동팀장은 계속 박기성을 불러 얘기를 들어주며 박기성을 위해 기도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징벌 종료를 앞둔 어느 날 박기성이 내게 사동팀장님 때문에 더 이상 사고 안 치고 착실하게 살기로 했다고 말했고 징벌 종료 후 진짜로 입실 거부도 안 하고 미지정 거실에서 다른 수용자들과 어울려 잘 생활하는 것을 보며 선배교도관이 존경스러워 보였다.
2010년 천안소년교도소의 소년수가 500명 밑으로 줄어들어 천안교도소는 성인교도소로 전환되었고 소년수들을 모두 김천소년교도소로 이송을 보내게 되었는데 김천으로 가는 마지막 호송 버스 안에서 보았던 선배교도관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소년수들을 호송하는 임무를 맡은 선배교도관과 나, 그리고 동료 교도관 몇 명이 호송버스에 탄 소년수용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김천에 거의 도착하자 선배교도관 한 분이 호송 버스 안을 돌아다니며 소년수형자들의 한명 한명의 볼을 어루만져주며 “잘 살아라”라는 말을 해 준 후 자리에 돌아와 감회에 젖은 모습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가 싶더니 다시 일어나 소년수형자들에게 다가가 마치 자식을 먼 곳에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인 듯 “가서 잘 살아”는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을 소년수형자들과 함께 생활해오신 분이라 감회가 더 깊었으리라…….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선배님의 모습을 보며 선배님을 스쳐 간 수많은 소년수형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이러한 선배들과 함께 했던 천안소년교도소에서의 내 교도관 생활은 참으로 행복했으며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게 한 시간이었다. 부모가 화목하지 못함으로 인해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받는지, 우리 사회가 건전하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한 흉측한 범죄의 결과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