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여 전, 처갓집에 볼일이 있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정읍에 다녀왔다. 천주교신자인 우리가족은 정읍에서 일요일을 맞이하게 되어 미사를 드리기 위해 정읍시내에 있는 S성당으로 갔다. 미사가 끝난 후,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사제관(교육관) 옥상에 있는 예수님 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금은 고인이 되신 K 신부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K 신부님을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89년 봄, 정읍 S성당의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였다. 학생들 교육에 남달리 관심이 많으셨던 K 신부님이, S성당으로 부임하시자 마자 주일학교 교사들을 학교 선생님들을 비롯한 엘리트들로 교체한다는 소문을 듣고, 직업도 변변치 못하고 고졸출신이던 나는 자진 사퇴하기 위해 신부님께 내 이력서를 제출하였다. K 신부님은 그 자리에서 내 이력서를 훑어보더니, 뜻밖에 주일학교 교사를 계속 맡아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K 신부님이 내게 보인 첫 번째 신뢰였다.
그로부터 4개월후, 이모부의 농장에서 일하던 나는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서울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떠나기는 떠나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던 차에 K 신부님께 “주일학교 교사를 그만 두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러 찾아갔더니, K 신부님은 아무런 대책도 없던 내게 “공소(신부님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외진 산골마을 같은 곳에 세워져 있는 천주교회)에 가서 그곳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활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하셨다. 신부님이 내게 보인 두 번째 신뢰였다. 공소에 있는 숙소며 시설물, 200여평이 넘는 공터를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약속을 받고 나는 산골마을의 공소에서 5개월 여를 순박한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K 신부님으로 인해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가슴속 깊이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산골공소에서의 어느 날, 밤10시쯤 되었을 때, 밖에서 “계시오?”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누구세요?”라고 말하며 문을 열어 주었는데, 갑자기 아이들 둘과 함께 중년의 남자가 불쑥 안으로 들어오더니 내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는데, 중년남자는 “문수 애비입니다. 돈벌려고 객지에 나가 있다 몇 달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들에게 잘해 주셨다고 해서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문수는 초등학교 4학년쯤 되었던 아이로 어머니는 가출한 상태였고 아버지는 돈벌러 객지에 나가 있어 늙으신 할머니가 문수남매를 돌보고 있었는데 동네에서 무슨 물건이라도 없어지면, 동네사람들은 어김없이 문수를 의심하였으며 동네어른들은 아이들이 문수와 함께 놀지 못하게 하였고 자연스럽게 문수는 산골마을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혼자서 밥을 지어먹던 나는 문수와 문수의 여동생을 불러 함께 밥을 먹는 횟수가 많아졌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문수가 순수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엉뚱한 오해도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문수를 왕따 시키는 것이 잘못된 행동이며, 문수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함께 어울려 놀도록 하였고, 그런 소문이 문수 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산골마을 아이들을 가르치던 공소에서의 생활중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일은, 공소에서의 생활이 3개월쯤 되었을 때, 돈도 다 떨어지고 식량도 바닥나 짐을 다 싸놓고 시내에 나가 대구에 있는 친구에게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걸어 서울집으로 돌아갈 테니 내 통장으로 차비를 입금시켜 달라고 한후 공소로 돌아왔을 때, 방한쪽 구석에 못 보던 비료부대가 있어 열어보았더니 쌀이 가득 들어 있었던 일이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내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사람들이 내가 조금 더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집집마다 한 공기씩 쌀을 모아 거둬 왔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산골마을사람들의 정성에 감동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셨던 기억을 나는 지금도 가끔씩 떠올리곤 한다.
이듬해 여름, 나는 정읍시내 외곽에서 양계장을 하는 외삼촌의 집요한 설득과 무일푼의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산골공소를 떠나 외삼촌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잠을 잔후, 아침에 농장으로 출근하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대입시험이 두달여밖에 남지 않은 어느 날, 성당에서 안면이 있던 재수생 J가 며칠째 공부를 하지 않고 TV를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뭐하고 있느냐?”며 J를 질책하였더니, “시험에 붙으면 뭣해요? 등록금도 없는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J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우유배달등을 하며 자신의 학비를 스스로 벌며 공부해온 학생이었는데, 대학입학 등록금을 도저히 장만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K 신부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네가 대학교에 합격만 하면, 등록금은 어떻게든 구해줄테니 쓸데없는 걱정하지말고 공부나 해라.”고 말하였다.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J에게 “빌려준 등록금은 네가 대학교를 졸업한 후, 회사에 취직해서 갚으면 된다. 그 대신 2학기 등록금부터는 네가 벌어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 날부터 J는 공부에 전념하였고, 두달이 지난 어느 날 저녁, 한동안 모습을 보기 힘들었던 J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였으며, 내일이 등록마감날인데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연락했다고......
나는 약속대로 J의 대입등록금을 마련해 주었고, J는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학비를 벌며 열심히 공부해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집도 장만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K 신부님에 대한 나의 믿음이 방황하던 한 소년에게 한 가닥 희망을 주어 공부에 전념케 하였고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이듬해 봄, 나는 어머니의 병환등 집안에 우환이 겹쳐 정읍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집으로 가야만 했고, 신부님께 아무런 말씀도 못 드리고 정읍을 떠나 가족들 곁으로 돌아갔다. 집안일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나니 이십팔세의 나이에 가진 것도 없고 누구하나 돌봐주고 이끌어줄 사람도 없었던 나의 앞날이 문제였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었고 92년 1월 나는 천안에서 교도관이 되어 있었다.
그 해 여름 나는 정읍 S성당 사제관에 K 신부님과 마주 앉아 있었다. “이게 얼마 만이냐?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신부님은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다 갑자기 불쑥 나타난 나를 무척 반갑게 맞아 주셨다.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교도관이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신부님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빙그레 웃으시며 교도소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너하고 할 일이 있다.”며 따라 오라고 하시더니, 공사가 채 끝나지 않은 사제관 옥상으로 올라가시는 것이었다. “예수님 상을 세워야 하는데, 잠깐만 도와달라.”며 나에게 예수님 상을 잘 붙잡고 있으라며 신부님께서 직접 예수님 상을 고정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신부님 하필이면 왜 오늘 예수님 상을 세우시려고 그러세요?”라고 물어보았더니, “예수님 상만큼은 내 손으로 직접 정성스럽게 세우고 싶었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을 못하겠고 누구랑 같이 세울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네가 와서 무척 기뻤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것이 신부님이 내게 보여주신 마지막 신뢰였고, 그 후 나는 신부님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가끔씩 정읍에 가서 식구들과 미사를 드릴 때마다 슬그머니 성당 옆으로 빠져 나와 사제관옥상에 높이 서있는 예수님 상을 바라보며 신부님 생각에 잠기곤 한다. 내가 무엇이 되건, 무슨 일을 하건 간에 나라는 인간 자체에 깊은 신뢰를 보여주던 신부님의 모습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교도관이 된 내 모습을 바라보시며 흐뭇한 웃음을 짓고 계시던 신부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신부님과 함께 정읍 S성당 옥상에 예수님 상을 세운지도 벌써 10여년이 지났고, 천안소년교도소에서 교도관생활을 시작한지도 올해로 12년째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소년수용자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소년수용자들의 80% 이상이 결손가정,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시설에서 자란 아이들이나 고아, 부모가 있다 하여도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는 집안의 아이들이었다. 나 역시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는 집안에서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고, 스물아홉살때 교도관에 입문하기 전까지 변변한 직장 하나 구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안해본일 없을 정도로 갖은 고생을 다해가며 이렇다할 결실도 거두지 못한 채 암울한 청년시절을 보냈던 터라 불우한 환경의 소년수용자들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고 속깊은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가정환경만 좋았더라면 교도소에까지 오지 않았을 소년수용자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운동장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 놀고 있는 소년수용자들의 모습을 보며, ‘겨우내 죽은 듯이 앙상하게 메말라 있던 교도소 뒷산의 나무들이 인고의 세월을 잘 이겨내고 무성한 수풀을 이뤄 자신의 성숙된 모습을 한껏 드러내 보이고 있듯이 소년수용자들도 지금의 앙상하고 초라한 모습을 잘 견디어내면 먼 훗날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뽐낼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그들에게 K 신부님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다. “내나이 스물아홉살때에야 비로소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던 기나긴 방황의 터널을 벗어나 교도관이라는 연두색 옷을 입고 새롭게 태어났듯이, 너희들도 출소하여 몇 년의 세월을 끊임없이 준비하며 노력하다 보면 적어도 나보다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겠니?” 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수용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회에서 저들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여건만 제대로 갖추어 준다면 저들의 대부분은 틀림없이 나보다 훨씬 멋지고 눈부신 연두색 옷을 입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텐데......‘ 라는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생색내기 좋은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우리 사회의 회색빛 풍토가 진정으로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 사회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연두색사회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몇 달 전 내가 다니는 성당에서 대전지역의 교정사목을 담당하시는 신부님께서 ”잔인한 수법으로 무고한 사람을 몇 명씩이나 살해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어느 사형수의 이글이글 타는 야수의 눈빛이, 교도소에 들어온 지 한달 여만에 비로소 사람의 눈빛으로 변했으며, 그 사형수의 눈빛이 그렇게 변화된 이유는 그 사형수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교도관들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는 내용의 강론을 하신 적이 있었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이 얼마나 엄청나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게 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메시지였다.
지난 겨울, 서울 어머니 집에 갔다 오는 길에 서울역에서 수없이 많은 노숙자들의 지저분하고 궁색한 몰골을 보면서 우리 소에 수용되어 있는 수용자들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저들이 교도소에 들어오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안하고 아프면 치료해주고 저렇게까지 비참한 몰골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을 텐데......’라는 위험한 발상을 하다가, ‘소년수용자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범죄의 길로 빠져들어 소년원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다가 결국에는 교도소에까지 오게 되는 과정을 반복하지 않도록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이전에 자신을 추스르며 올바른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끌어 줄 수는 없는가?’, ‘저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이전에, 교도소보다 더 많은 돈과 인력을 투자하여 저들의 재활을 위한 시설을 마련하여 범죄를 예방할 수는 없는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나의 나뭇잎도 온 나무의 말없는 이해 없이는 갈색으로 변하지 않는 것처럼 죄를 범하는 자도 그대들 모두의 숨은 뜻 없이는 범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칼릴지브란의 말처럼, 범죄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책임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곳에 가면, 나는 멀리 산골마을 공소 쪽을 바라다보곤 한다. 가진 것은 별로 없었지만 내어줄줄 아는 삶을 살았던 내 젊은 날의 모습과, 불혹의 나이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움츠리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K 신부님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교도관이 된 내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시며, “그래, 네가 가야 할 길은 바로 그 길이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듯한 K 신부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부끄럽지 않은 교도관이 되리라, 소년수용자들에게 K 신부님의 모습으로 다가가 그들도 큰바위 얼굴이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심어주리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