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죄지은 사람이 몇 시간 혹은 며칠동안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벌을 주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 동그라미 밖을 벗어나지 않아 그 벌이 계속 유지되었으나 어느 순간 동그라미를 벗어나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동그라미는 벌로써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고, 동그라미 대신 높은 담을 만들어 죄를 지은 사람들을 가두게 되었고, 담을 넘는 사람들이 나타난 후론 튼튼한 지붕까지 만들게 되었으며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오늘 날의 교도소에 이르렀다고 한다.
동그라미는 우리들 개개인의 양심이며 또한 원칙과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양심의 동그라미를 벗어난 사람들을 눈에 보이는 동그라미에 가두어 놓기 시작하였다. 동그라미의 원칙과 약속이 깨어질 때마다 또 다른 동그라미가 그려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동그라미에 가두고 통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처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원칙과 약속이 깨어지는 것이 반복되면 될수록 우리 사회는 불신의 늪에 깊이 빠져들고 험악해지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각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도를 평가한 결과, 우리나라 학생들의 선생님 존경도가 최하위로 나왔다는 충격적인 방송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 이유가 선생님들이 원칙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용자들 중에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자신은 재수 없게 걸려서 교도소에 온 것이고, 더 나쁜 짓을 하고도 사회에서 버젓이 잘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죄를 지어서 교도소에 들어왔다기보다는 재수 없이 걸려서 교도소에 왔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원칙적인 얘기를 반복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매춘부이다. 다만, 우리는 양지에 서 있을 뿐이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의 이 말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되살아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5명의 친구가 학교에서 금지된 행위를 하고 있었는데, 그중 2명의 친구가 학생부 선생님께 적발되어 학생부로 끌려간 적이 있다. 끌려간 2명의 친구는 끝까지 함께 했던 3명의 이름을 대지 않았고 결국 2명의 친구는 정학을 받았다. 며칠 뒤 나머지 3명의 친구중 한 친구가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해 학생부에 가서 자수를 하였고, 그 친구 역시 이미 처벌을 받은 2명의 친구와 똑같은 처분을 받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양심을 속인 2명의 친구는 아무런 일 없이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였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상황이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교감선생님께 편지를 보내 항의하였고 교감선생님은 내 편지를 읽으신 후, 면담을 통해 자수한 친구에 대한 처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셨지만, 한번 내려진 처분은 되돌릴 수 없다는 말씀만 반복하셨고 자수한 친구에 대한 처분은 철회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는 어느 곳이든 원칙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리고 그 원칙의 뒤에는 예외라는 단서조항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되 불가피한 상황이라든가 어쩔 수 없는 상황, 정상참작이 되어야만 할 사안이 발생하였을 경우에 한하여 원칙을 벗어나는 행위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단서조항의 존재이유인 것 같다.
단서조항이 제대로 적용되었다면, 자수를 한 친구는 처음 처벌을 받았던 2명의 친구보다는 가벼운 처분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에게는 예외가 적용되지 않았고 그 결과 그 친구의 마음은 한동안 치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입었었다.
단서조항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을 때 편법이 되고 우리사회의 질서는 그만큼 어지러워지고 불신의 늪은 깊어지는 것 같다. 예외라는 단서조항은 가진 자들, 힘 있는 자들을 위해서 존재할 뿐, 힘없는 자들에게는 필요 없는 조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자신이 죄를 지어서 교도소에 들어왔다기보다 재수 없이 걸려서 왔다고 주장하는 수용자들처럼 자신의 죄를 반성하기보다는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적어도 교도소 안에서 만큼은 원칙과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때가 있다. 예외와 단서조항은 꼭 필요한때에 한하여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때가 있다. 그것이 수용자들 교정교화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때가 있었다. 현 세태를 개탄하며 우리사회의 썩어빠진 부분들, 그중에서도 썩은 세대들을 모조리 다 도려내야 한다고 그래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그렇게 떠들어 대던 어느 날, 내 자신도 도려내어야 할 썩은 세대인 기성세대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나의 잎도 온 나무의 말없는 이해 없이는
갈색으로 변하지 않듯이,
죄를 범하는 자도 우리들 모두의 숨은 뜻 없이는
범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예언자 칼릴 지브란의 말을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한다. 칼릴 지브란의 이 말은 우리사회가 범죄에 대해 어떠한 시각으로 접근을 해야 하며 예방을 해야 할 것인가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죄지은 자들의 잘못이 죄지은 자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으며, “내 탓이오!”라고 말하는 사회가 될 때, 죄지은 자들도 남의 탓을 하지 않고 자신들이 지은 죄를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동그라미라는 원칙과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동그라미 밖을 벗어난 것에 대한 면죄부가 주어지는 예외와 단서조항은, 편법행위를 한 자들이 빠져나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에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어서 동그라미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예외적인 상황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동그라미라는 원칙과 질서를 벗어난 사람들의 잘못이 그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는 시각을 가질 때 우리사회는 그만큼 밝아질 것이고 잃어버렸던 동그라미를 하나하나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