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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바라기 Sep 18. 2023

4. 관계의 가지치기

아프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여기저기서 말들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본디 악하다고 했던가..

내 편이라고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차가운 반응 속에 저절로 처절하게 인간관계의 가지치기가 시작됐다.


내가 너무 순진했던가 아님 어렸던걸까..

한국에 내가 돌아온걸 들은 한국에 있던 친구들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내 상황을 모르고 있는 친구들이였기에 난 아무 생각없이 솔직하게 지금 내가 암에 걸려서 밖에서 만나기는 좀 그렇고 집으로 올지 물어봤지만, 생각지도 못한 대답들이 들려왔다.


“엄마가 그러는데, 암도 옮을 수 있다고 못가게 하네..”

“나는 너무 가고 싶은데 부모님이 못가게 하시네..”

“그럼 죽는거야..??”


17살이라는 나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미성숙한 나이였나보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하려고 하면서도 마치 나를 벌레보듯 점염병 환자 보듯 가까이 가서는 안되는 친구로 취급하는 그들이 참 너무 했다 싶었다.


그렇게 난 원래도 잦은 전학으로 한국에 몇 안되는 친구들 대부분 모두 연락이 끊겼다. 괜히 얘기했나 싶을 정도로 소문은 빨리 퍼졌고, 그렇게 잘났던 애가 곧 죽을거라니까 나도 의사도 모르는 원인찾기에 다들 재미가 들렸다.


애 엄마가 애를 쥐잡듯 잡았다며?
원래 어디가 안 좋았다는데?
미국가서 인종차별 당한거 아니야?
미국에서 무슨일 있었나보네
그러게 왜 외동딸을 혼자 그렇게 보냈대?
혼자서 너무 힘들었나보다 부모가 못할짓 했네
애 하나 있는데 죽으면 어쩌나
뭘 잘못했길래 저렇게 벌 받나


나와 가족들은 별로 친하지도 않던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 내리락하며 안주거리 가쉽거리가 되어 그 더러운 혀에 아그작 아그작 씹혀야만 되었다. 사람들에게 이미 난 죽은 사람이였고 우리 부모님은 이미 죄인이였다.


친하지 않은 사람만 그러면 다행이지.. 정말 내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심지어 가까운 친척들에게 느낀 배신감과 상처에 부모님의 속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서로만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불필요하고 표면적이었던 관계들이 알아서 가지쳐진 대신 그 빈자리엔 건강하고 튼튼한 관계들이 새로 자라기 시작했다. 알고 지낸지 얼마 안된 교회 몇몇 친구들이 매일 병문안을 와 줬다. 바쁜 고등학생인데도 불구하고 학교 끝나고 학원 끝나고 꼭 시간을 내서 나를 보러 와줬다.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도 친구들이 오면 내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고 한다. 민머리가 된 내 추한 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 한번도 거울을 본적이 없고 사진한장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친구들은 유일하게 그런 내 모습까지도 본 친구들이다. 이들도 다른 내 친구들처럼 어렸지만 성숙했다. 친구가 시체처럼 바싹바싹 매말라가는 모습이 충격적이였을 수도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해줬다.


힘이 없어 눈도 못뜨고 있을때면 그저 아무말 없이 침대 옆에 앉아서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다 갈때도 있었고, 듣기만 하라고 하면서 일상의 이야기들을 들려줄 때도 있었다. 나는 몰랐지만 내가 너무 힘든날이면 직접 보지는 못해도 어김없이 찾아와 병실 문앞 복도에서 한참을 앉아있다가 간적도 있다고 했다.


컨디션이 좀 괜찮은 날엔 같이 침대에서 만화책을 쌓아놓고 읽을 때도 있고 남자 친구들은 병원 복도에서 나를 휠체어로 놀아줄때도 있었다. 고등학생이라 야자가 있는 날이면 야자 끝나고 집에 가기전에 들리기도 하고 바쁜날이면 얼굴만이라도 잠깐 보고 갈때도 있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긴 투병생활을 어떻게 버텼을까 싶다. 그 당시에는 카카오톡도 다른 SNS도 없던 시절이라 모든관계에서 단절되어 홀로 있던 나에게 정말 이들은 내 버팀목이였고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게 위로가 되었던 또 하나의 인연들은 바로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보던 레지던트들. 어느 대학병원이던 레지던트들의 모습은 비슷하다. 잠자고 밥먹을 시간이 부족히고 늘 시간에 쫒겨 해야할 처치나 설명만 하고 바쁘게 하루종일 병원을 돌아다니는 이들. 내 레지던트들도 그랬다. 항상 부시시한 머리에 다크서클 드리운 얼굴..


그렇지만 이들은 정말 ‘의사’였다. 나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있었고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인간적으로 대해줬다. 길고 험한 수술에 대해 최악의 상황들을 교수가 말해주고 가고 나면 나중에 다시 와서 나와 부모님을 안심시키고 최선을 다할거라고 말해주었다. 한밤중이던 새벽이던 업무가 끝나고나면 퇴근 전 꼭 내 병실에 잠시 와서는 내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작은 사탕이던 어떤날은 인형을 선물로 쥐어주고 갔고, 내가 자고 있으면 내 머리를 쓰다듬고 가곤 했다.


대형병원에서 오랫동안 병원생활을 하다보면 의사들과 간호사들에게서 상처 받을때가 많다. 당사자인 나는 정말 아프다고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아픔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일처리보다 못한 감정이라는 취급을 계속 받게 되면, 특히나 나처럼 혼자 할 수 있는게 거의 없는 중증환자의 경우 내 존재 자체가 암덩어리처럼 취급당하는 것 같아 심각한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치료하는 느낌이 아니라 사람이 괴물을 상대로 의료실험 하는 느낌이랄까.. 내 몸을 수없이 찔러대는 바늘들과 내 몸을 아무렇지 않게 이리저리 예고 없이 들춰대는 날이 반복되다 보면 자존심이 상하는걸 넘어서 수치심이 드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내 레지던트들의 따뜻한 말과 관심이 없었다면 길고 긴 피폐한 병원생활을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병원은 너무 싫은 악몽같은 곳이면서도 동시에 내가 위로받은 따뜻한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보다 더 나를 치료해 주고 싶어하는 의사들이 나를 24시간 케어 하고 있다고 느꼈기에 그들의 결정과 치료를 100% 신뢰했다. 환자에게 있어서 의료진들을 향한 신뢰조차도 치료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곧 내가 다시 회복할거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한테서 위로받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 누구도 어떤 사람을 완벽히 이해하고 공감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상황이기에 이해가 안되고 제대로 공감해주지 못하는건 당연한 것이다. 어찌보면 어설프게 공감하고 위로하려다 되려 상대에게 상처가 될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위로받기를 간절히 원한다. 나 없이도 잘만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 ‘나 여기 있다고!!’ ‘나는 지금 너무 힘들다고!!’ 듣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길 바라며 외치고 싶은 것이다. 그 누구도 위로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게 정당화되는것 같아 잔인하게 느껴진다. 잊혀진듯 한 나의 존재 가치를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확인하고 싶고, 나의 상처받은 존엄성을 회복하고 싶은 어쩌면 처절한 인간의 본능이지 않을까.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도 너의 슬픔 가운데 함께 서있다고, 그리고 지금의 너의 모습도 괜찮다고 기꺼이 내게 말해준 모든이들에게 너무 감사하다. 자신의 삶을 살기도 바쁜 우리 모두인데 누군가의 슬픔과 고난을 위로해준다는건 사실 쉬운게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어린나이였음에도 내 곂에 와준 친구들의 용기에 너무 고맙고,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나를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대해준 사명감 있던 의사들에게 감사하다.


이들이 없었다면 생사를 오가는 힘든 투병생활이 고통으로만 기억되었을거다. 이들의 진정어린 위로가 있었기에 남의 고통을 하나의 가쉽거리로만 삼는 이들이 전부가 아니라는걸 알았고, 사람을 가려 사귈줄 알게 되었고, 모두에게 내 마음을 줄 필요도 없고 또 모두가 내게 마음을 내어줄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아무말 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그 자리를 지켜주고 말을 들어주는 용기를 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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