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스즈키 유이

by 대니

모든 것을 말했다니? 제목만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오만함’이었으나 이는 나의 오해였다. 괴테의 다양한 작품을 읽어 보진 못한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책을 읽어 보니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기보다, ‘모든 것에 대해 말하고 싶어 했다.’가 더 가깝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이 말은 농담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인간의 문명사를 살펴보면 괴테와 같은 사람이 더러 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의 세종대왕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도 괴테처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스의 시인 아르킬로코스는 이런 말을 했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


이 말은 인간을 두 부류로 구분하고 있다. 고슴도치는 하나의 근본 원리로 우주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사람들로 대표될 수 있다. 여우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사물의 다양한 측면을 살피며, 다채로운 경험을 기반으로 대상을 본질을 파악하려 한다. 이렇게 살펴봤을 때, 괴테는 여우 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 적어놓고 생각해 보니 물리학자와 시인을 표현하는 말 같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 책은 위의 명언의 출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위의 저 문장이 갖는 의미가 점점 드러나고,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혼연일체’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휴먼 드라마 같은 가슴 따듯해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그래서 저 문장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저 문장, 마음에 안 든다. 영어나 독일어로는 매끄럽고, 세련된 문장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살펴봐도 저 문장 특히나 혼동이라는 뜻의 confuse라는 단어에서 너무나도 위화감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좀 더 의역해서 멋진? 문장을 만들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운 감정이 든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과 조직의 관계는 개인의 희생과 조직을 위한 협력의 관계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국가에서부터 가족까지 다양한 크기와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동양의 경우와 서양의 경우가 조금 다른데, 서양의 경우 개인의 자유를 더 중요시하고, 동양의 경우 조직의 협력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성이 나타난다. 또한, 작금의 자본주의와 미디어는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결승점(삶의 의미와 목표)을 제공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을 과도한 경쟁으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여기에 어떤 문제라도 있는가? 있다.


에밀 뒤르켐은 ‘자살’이라는 문제가 사회적 환경에 따라 통계적 경향성을 보인다는 사실을 실증했다. 뒤르켐은 자살이 개인적 문제만이 아니고, 사회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사회적 통합, 규제의 정도에 따라 자살이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혹시 지금 당신이 느끼는 사회적 압력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주변에 기댈 사람이 있는가? 외롭진 않은가? (사회적 연대감이 지나치게 부족하지 않은가?)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지나친 희생을 강요당하진 않는가? (집단의 가치만 중요시되는가?) 세대 간의 갈등이 극심하게 느껴지진 않는가? (급변하는 환경으로 인해 기존 규범의 파괴에 따른 혼란)


얼마 전에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책을 읽었다. 여기서 주인공인 다자키 쓰쿠루는 자신에게 ‘색채’ 그러니까 자신만의 개성도 없고, 뚜렷한 의견도 없음 때문에 괴로워한다. A는 지적이고, B는 운동도 잘하고 자신감 있으며, C는 재미있고 말도 잘하는 데 비해, 넘치지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자신이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걸맞은 색채를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스즈키 유이는 이 책에는 무지개의 색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지개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곱 개의 빛깔로 색이 늘어났다는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 다양한 색채가 존재한다면, 우리에게 더 많은 색채를 부여할 수 있다. 빨간색이 되기 위해 경쟁할 수는 있지만, 빨간색이 되기 위해 목숨 걸고 달려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다시, 이 문장으로 돌아와 보자. 내가 이해하기로, 저 문장에서 ‘색채’는 섞이지만, 다시 분리될 수 있다. 프리즘으로 빛을 분해하면 무지갯빛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무지갯빛은 다시 섞여서 빛이 된다. 조물주의 사랑으로 우리는 개인의 색채를 잃지 않고서도 하나가 될 가능성을 부여받았다. 나는 저 문장에서 이와 같은 의미를 발견했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비관용과 양립 불가하다.’ 내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들어주는 사람의 관용 때문이다. 관용도 일종의 사랑이 아니던가? 사랑 없이 우리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조차 없다.


어벤져스에서 베너가 헐크의 변신 비밀에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난 항상 화나 있지.’ 요즘 사회를 돌아보면 사람들이 항상 화나 있다. 의견이 달라서, 교통 신호를 위반해서, 질서를 지키지 않아서, 그리고 유튜브와 같은 미디어는 우리의 화는 정당하다고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이 옆에서 우리의 화를 부추긴다. ‘이거 봐, 네가 옳아, 쟤가 잘못한 거야. 다시는 아무 말도 못 하게 만들어! 경찰에 신고해! 고소해서 쓴맛을 보여줘!’


“당신은 왜 그렇게 화가 난 건가요?”


화는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자주 안아주도록 하라. 그것이 우리 문명의 무관용과 폭력성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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