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개봉한 ‘가타카’라는 SF영화가 있다. 유전자 편집이 일반화된 미래의 어느 날, 빈센트는 (오늘날 우리가 사랑의 결실이라고 부르는, 유전자 편집 없이) 세상에 태어난다. 다른 아이들은 유전자 편집 기술로 유전병의 잠재적 위험성을 모두 제거 했으며, 지적인 능력과 운동 능력이 향상된 채로 태어났다. 빈센트의 부모는 빈센트가 사회에 스며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선택(사랑의 결실)이 틀렸음을 직감하고 빈센트의 동생을 임신하는 과정에서 유전자 편집 기술을 받아들인다.
청소년기의 빈센트는 우주선을 바라보며 우주비행사의 꿈을 꾼다. 빈센트는 시력이 나쁘기에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써야 했고, 팔다리는 젓가락처럼 빼빼 마른 아이였다. 빈센트와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만 될 수 있는 우주비행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빈센트의 부모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 빈센트에게 매우 현실적인 충고를 한다.
‘정신 차려, 너에게 맞는 직업은 우주비행사가 아니라 청소부야.’
빈센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집을 나오기로 하고 동생과 마지막으로 수영시합을 벌인다. 동생과의 수영시합에서 이겨본 적이 없었지만 어쩐 일인지 이날은 빈센트가 유전적으로 더 뛰어난 동생을 이겼다. 훗날 빈센트와 재회한 동생은 ‘그날의 수영경기’에서 어떻게 자신을 이길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난 돌아갈 힘 따위는 남겨두지 않았어.’
빈센트의 대답이었다.
나는 성해나 작가가 혼모노를 통해 한국 사회의 갈등과 문제들을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문학의 영역으로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정확한 문제인지 파악할 수도 없는, 그래서 때로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잊게 만들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결국 우리가 침묵하게 만드는 그런 일들을 이야기로 만들어 낸 것이다. 게다가 그 이야기에는 독창성이 넘치고,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극찬하는 이유다.
성해나 작가는 혼모노에서 대놓고 독자들에게 묻는다.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지를. 진짜와 가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안다고 생각하는 분들께는 조금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생각보다 분명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던지는 물음의 시기 또한 이 얼마나 시의적절한가.
옛날 서양사람들은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고 믿었다. 플라톤은 이데아(진리, 본질, 진짜)가 천상에 있고 지상에는 이데아의 복제(미메시스)품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세상의 풍경을 그린 그림은(이데아를 복제한 복사품) 그보다 더 격이 떨어지는 복제품인 시뮬라크르였다. 이렇게 변하지 않는 본질의 존재를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는 믿음은 어떤 걸까? 내 생각에는 아마도 그리스교도와 같이 천국에서의 영생과 같은 믿음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그러니까 현실에서의 삶은 잠깐뿐이고 진짜 삶은 천국에서 계속된다는 그런 믿음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다. 어떤 이들은 의미(진짜)는 차이와 생성의 반복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는 유전자 복제과정과도 매우 유사하다. 유전자는 복제과정에서 100% 완벽한 복사본을 만들지 못한다. 낮은 확률로 돌연변이를 포함하게 되는데, 이것이 지구상의 생물 다양성의 한 축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원본 유전자가 진짜인가? 복제된 유전자는 가짜인가? 복제된 유전자가 가짜라면, 지구상의 최초의 세포만이 진짜고 지금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가짜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어떨 때는 의미란 계속 미끄러지며 해석되는 과정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따라서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로 정의되는 고정된 자아’라는 것은 없다고 본다. 계속 변화하는 어떤 것의 순간을 포착해 ‘지금이 진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원본과 복제품의 경계는(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더욱 모호해져 간다. 앤디 워홀의 팝아트 작품을 보면, 이제 복제의 복제라는 시뮬라크르의 평가는 반전이 되었다. 가짜라고 여겨졌던 게 이제 진짜가 되기도 하는 것이 현대 사회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은 또 어떠한가? 옛날엔 본질이 실존을 규정했다면, 이젠 그 관계가 역전되었다. 이젠 실존이 본질을 규정하게 된다. 여기가 바로 내가 혼모노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은 지점이다. 혼모노의 리뷰에 앞서 가타카의 줄거리를 조금 가져온 이유는 내가 이해한 혼모노와 가타카의 결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시대에 태어난 빈센트는 우주비행사가 아닌 청소부가 되어야 했고, ‘신내림’이 ‘진짜’를 규정하는 무당 세계에서 신이 떠난 문수는 신애기에게 이렇게 조롱당한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여기엔 일종의 권력구조가 존재한다. 진짜에겐 어떤 힘이 주어져서 가짜를 조롱할 수 있으며 가짜 또한 이를 내적으로 수용한다. 혼모노의 진짜와 가짜 담론에는 ‘이것이 정당한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인가’라는 담론이 내포되어 있다.
문수는 자신의 극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애기에게 옮겨간 할멈에게 분노하며 신당을 뒤집어엎는다. 그 과정에서 문수는 뭔가 깨달은 듯이 미친 듯이 웃는다. 단순히 할멈상이 가볍게 느껴져서였을까? 아니면 그 가벼움에서 그동안 할멈이란 무게에 짓눌려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 허망한 것이었음을 깨달아서였을까?
유전적으로 열등한 빈센트는 우주비행사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다. 동생과의 마지막 수영시합에선 승리하기 위해 목숨까지 건다. 되돌아올 힘을 남기지 않고 모든 힘을 쏟아 부어 저항하는 빈센트의 모습이 피투성이가 되어 춤을 추는 문수에게 오버랩된다.
‘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큭큭, 큭큭큭큭.’
이제는 문수가 신애기를 조롱한다. 마치 진짜와 가짜가 역전되어 그 권력구조마저 뒤집힌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뭔가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요인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노력만으로 진짜가 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성해나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본질을 잘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 않고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현상이 사회에 만연한다며, 진짜 뜻을 잃어버리고 조롱으로 남은 단어가 혼모노라고 말한다.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인터넷에 떠도는 조롱기 섞인 이 말에는 오타쿠적인 집착을 조롱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성해나 작가는 ‘자신의 본질에 가닿기 위한 노력을 조롱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혼모노를 통해 ‘진짜’의 명예를 복권하려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은 좋은 책이지만, 한편으로 비판할 점이 한 가지 있기는 하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라고 말하고, 하이데거는 ‘인간은 아무런 의미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말한다.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압력이 느껴지는 말들이다. 우리는 정말 문수처럼 피투성이가 되어서야만 비로소 ‘진짜’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때론 우리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