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을 읽고

나 홀로 볼링

by 로버트 D. 퍼트넘

by 대니

어딘가에서 많이 들어온 이야기가 있다. 동양은 집단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고, 서양은 개인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가 맞는지 아닌지는 잠시 제쳐놓고 생각을 해본다. 우리나라는 전쟁이 끝난 1950년대부터 급속히 발전해 온 나라다. 그래서인지 의도치 않게 ‘서양 사대주의’ 같은 것이 여럿 생겨났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개인주의 숭배다.


집단에서 하나의 톱니바퀴에 불과했던 개인이 이제야 비로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이런 현상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장점이라면, 개인의 개성과 재능이 주목받고 노력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아 성공의 계단을 하나씩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이다. 단점을 살펴보자면, 실패의 부담을 오롯이 개인의 어깨에 짊어져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사회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밤하늘의 ‘밝게 빛나는 별’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누구나 셀 수 없이 많은 별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이때, 개인주의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성장과 발전이 지체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밤하늘의 별빛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졌으며, 그곳에는 아무런 안전망이 없었다. 개인주의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개인에게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소유한 것에 ‘당위’를 부여했다.


일본에는 150만 명에 육박하는 히키코모리가 존재한다고 한다. 처음에 일본은 이 히키코모리 문제가 일시적인 문제로써 곧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20대였던 이들은 5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80대의 부모에게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한 사회적 문제도 계속되고 있다.


내가 일본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지금 발생하고 있는 문제도 일본과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하지 않고 ‘그냥 쉼’이라고 답한 청년이 7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적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10년까지 스스로 ‘은둔 고립된 생활’을 하는 청년과 중장년층의 인구는 100만 명에 가깝다는 말까지 나온다. (정확한 통계는 없음)


이들이 바로 별이 되지 못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진 이들이다. 은둔 고립된 생활을 청산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한 청년의 인터뷰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은둔 고립 청년들에게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자책하지 마세요.”


이 많은 사람은 왜 자책하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걸까? 나는 연계가 점차 해체되어 개인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회적 연계가 있었다면,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던 사건들은 더 있다. ‘송파 세 모녀 사건’은 고립된 생활을 해오던 한 가족이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사건으로 당시에도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다. 이들이 남긴 쪽지는 지금 다시 봐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주인아주머니께, 정말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들은 무엇이 그렇게 죄송했던 것일까? 그들을 괴롭힌 것은 ‘이 모든 잘못이 나에게 있음’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10여 년 전의 이 사건으로 하여 우리 사회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얼마 전의 ‘익산 모녀 사건’을 보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회가 점차 고령화되어 감에 따라 노인의 고독사 문제도 점차 심해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 연계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 홀로 볼링』이 책은 미국의 사회적 자본의 현상을 연구한 책으로 우리나라의 실정과는 비교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반적인 추론은, 비록 정답이 아닐지라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책을 보면 미국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사회적으로 잘 연결된 나라였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편견과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본은 서로 대립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선입견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어떤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 역할로 인해 개인의 자유는 축소될 수 있다. 하지만 시민 활동에 적극적이고 많은 사회적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행동과 반대의견’에 더 관용적이다. ‘표현의 자유는 불관용과 양립 불가능하다’라는 말처럼 관용과 자유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말은 사회적 자본과 개인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개인이 자율성을 갖고 주어진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준다. 반면 가족, 교회, 친구 등의 사회적 자본은 공동체의 의무와 목표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부담을 안겨주긴 하지만, 인생에 반드시 따라오는 실패의 충격을 완화해 준다.


“사회적 자본은 우리의 운명이 연결된 다양한 방식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힘으로써 우리의 처지를 개선한다. 타인과 적극적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은 보다 관대하고, 덜 냉소적이며, 다른 사람의 불행에 더 공감한다. 타인과의 연결 관계가 없는 사람은 일상적인 가벼운 대화나 혹은 보다 공식적인 토의 속에서 자기 생각이 옳은지 시험할 수 없다.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장 나쁜 충동에 지배될 가능성이 높다. 1999년 갑자기 늘어난 학교 내의 총격 사건 같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폭력 행위들은 주로 ‘외톨이’로 지내던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p476
“위기 상태의 어린이들은 사회적 자본이 없을 경우 특히 취약한 것으로 밝혀졌다. 매우 위험한 방치와 학대 상태에 놓여 있다고 판단된 대규모의 미취학 아동들을 추적했다. 어떤 아이가 성공적으로 그러한 문제들을 극복할 것인지 예측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지표는 어린이와 그 어머니가 자신들을 따뜻하게 대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 자신들을 도와주는 이웃 속에 사는 것, 그리고 교회에 규칙적으로 다니는 것이었다.” p493
“다른 특징들은 동일하지만 사회학적으로 단절된 사람들과 가족, 친구, 공동체와 긴밀한 유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서로 비교할 때, 전자는 후자에 비해 어떤 원인에서건 사망할 가능성이 2배에서 5배 높다.” p543


내가 사회적 자본에서 눈여겨본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었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의 안전망 구실을 하고 있었다. ‘외톨이’를 향한 관심은 귀찮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있을지 모를 총기 난사 사건을 막을 수 있고, 부모의 보살핌이 없어 보이는 이웃집 아이에게 내민 따뜻한 손길은 성가시지만, 어쩌면 생길지 모르는 범죄를 막는 길일 수도 있다. 이웃의 참견은 오지랖이 될 수 있는 동시에 당신이 심장마비나, 화장실에서 넘어져 큰 부상을 당했을 때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샤워실의 바보’처럼 보인다. 뜨거운 물을 틀었더니 너무 뜨겁다. 그래서 찬물 쪽으로 돌리니 또 너무 차갑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균형점을 찾는 지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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