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길고양이 같아서> 36화
가을은 생각보다 더 많은 걸 품고 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아래에는 오래된 기억이 숨어 있고,바스락거리는 낙엽 아래에는 오래된 기억이 숨어 있고,
스치는 바람에는 지난 계절의 감정이 남아 있다.스치는 바람에는 지난 계절의 감정이 남아 있다.
그 기억의 가장자리엔 언제나 네가 있다.
사라지지 않는 이름처럼.
가을이면 네 생각이 난다. 그날도 이런 날씨였지. 바람은 잔잔했고,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어 바닥에 겹겹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공원 한쪽, 우리는 조용히 벤치에 앉아 있었다.
특별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내 기억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아마도 그날의 우리 사이에는 침묵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흘렀기 때문이겠지. 어떤 말보다 진한, 감정의 결이 있었다.
나는 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네 눈썹 사이,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그 아래 맑게 젖어 있는 눈빛. 너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순간의 너는 어딘가 멀리 있는 사람 같았다. 마치 내 옆에 있으면서도, 다른 계절의 시간에 앉아 있는 듯했지. 나는 조심스럽게 너의 손등 위로 내 손을 얹었다. 그 작은 접촉이 모든 대화를 대신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놀란 것도, 반가운 것도 아닌 그 눈빛은 마치 오래전부터 내 손이 거기 있었던 것처럼 익숙해 보였다. 말없이 받아들여지는 감정이, 때로는 말보다 더 따뜻한 위로가 된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가을은 왜 이렇게 조용할까?”
그날 네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나는 웃었다.
“조용해서 좋은 거 아닐까?”
우리는 그 이후로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온했고, 그 가운데 너와 내가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사이였다. 이름조차 불러본 적 없는 마음, 손끝에서 간신히 이어지는 감정. 말 한마디면 쉽게 이어질 것 같으면서도, 그 말 한마디가 모든 걸 깨트릴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사이.
시간은 너무 조용히, 그러나 너무 빠르게 흘렀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소리를 죽여놓은 것처럼. 그리고 우리는 결국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길 내내 나는 무언가 말해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꼈지만, 말하면 깨질까 봐, 이 순간이 부서질까 봐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도 그랬던 걸까.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런 계절의 순간이었다.
그 벤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나는 해마다 이맘때면 그곳에 가곤 한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앉아 있으면 조심스레 주변을 서성이고, 자리가 비어 있으면 조용히 앉아본다. 앉아보면 늘 그날의 온도가 손끝에 남는다. 낙엽은 여전히 바닥을 덮고 있고, 바람은 그날처럼 불어온다. 다만, 그때의 너는 없다. 이제는 나 혼자서 그 벤치에 앉는다. 그리고 가끔, 그 벤치의 나뭇잎 위로 우리의 흔적이 스쳐 가는 듯한 착각에 잠기곤 한다.
나는 여전히 그날을 기억한다. 그날의 침묵, 그날의 눈빛, 그리고 짧았던 손길.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날 너는 내 손을 어떻게 받아주었더라. 그날 우리는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이 될 수 있었던 가능성이었을까.
어쩌면 그것도 중요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날의 벤치에 앉아 있던 ‘우리’는 분명 존재했으니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가을은 매우 아름답다. 그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짧은 ‘우리’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