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길고양이 같아서> 38화
가을바람이 불어오던 오후,
낙엽 하나가 발치에 떨어졌다.
나는 문득 너의 이름을 떠올렸다.
부를 수 없지만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오래된 사랑은 이름 하나 남긴다.
가을바람이 문득 마음을 스친다. 발밑엔 수없이 떨어진 단풍잎들이 작은 소리로 바스락거린다. 그 소리는 누군가의 귓가에 속삭이는 말처럼 다정하고 조심스럽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한 장의 낙엽을 바라본다.
불현듯 당신의 이름을 써보고 싶었다. 안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낙엽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그리운 이름을 새겨본다. 잊은 줄 알았던 이름, 젊은 날 내 입술에 익숙했던 그 이름이다.
이름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전 생애가 스쳐 지나간다. 그 이름을 부르던 계절, 몰래 속으로 수없이 되뇌던 날들, 가끔은 누군가의 이름이 단 하나의 언어가 되어 온 마음을 붙잡기도 한다.
사랑은 늘 언어보다 먼저 다가오지만, 이름이라는 언어를 통해 세상에 남겨진다. 그 흔적이 오늘, 낙엽이라는 작은 무대 위에 조용히 새겨졌다.
가을은 늘 뭔가를 떠올리기에 좋은 계절이다. 잊은 줄 알았던 마음, 스쳐 지나간 인연, 그리고 다시 떠오르는 한 사람의 이름.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도, 나뭇잎처럼 바람에 흩날려 떠났지만, 그 기억은 이상하게도 사라지지 않는다.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연인(The Lover)』을 읽으며 나는 첫사랑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사람의 마음에 남는지를 배웠다. 그녀는 떠나간 사랑을 기억 속에서 꺼내어, 마치 낙엽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펼쳐보듯 기록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랑은 잊힌 것이 아니라,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살아나는 감정이라는 걸.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도 조엘은 기억을 지우지만, 사랑의 감정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논리보다 정서가 깊다.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서랍 속 어딘가에, 그 사람의 이름은 여전히 숨 쉬고 있다.
나도 그랬다. 당신을 잊기 위해 애썼던 수많은 계절. 그러다 어느 날, 길가에 떨어진 낙엽 하나에서 당신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건 기억의 복원이 아니라, 감정의 환기였다. 잊은 줄 알았던 마음이 다시 피어나는 순간. 사랑은 그렇게 우리 안에 숨어 있다가, 한순간의 바람에 되살아난다.
낙엽 위에 적힌 당신의 이름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되뇐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 사소한 말들과 웃음들, 사랑했던 날들의 기척들. 이름은 하나의 단어에 불과하지만, 그 이름을 부르면 함께 따라오는 기억은 셀 수 없이 많다. 이 낙엽 위의 이름은, 단순한 낭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직 마음 한구석에 살아 있는 감정이 나도 모르게 손끝을 움직이게 만든 것일 테다.
사랑은 늘 거창하지 않다. 이름 하나로 다시 살아나고, 바람 한 줄기로 흔들린다. 우리는 그 이름을 통해, 사랑이 아직 내 안에 존재함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름을 나의 마음에 오래도록 새기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통해, 나는 내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낙엽 위의 그 이름은 내가 품었던 계절의 온도와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손끝으로 어루만진다.
마치 당신의 체온이 느껴지듯, 아직 따뜻하다.
당신은 지금 내 곁에 없지만, 당신의 이름은 내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그 이름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문장이자 사랑이라는 말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계절은 흐르고, 낙엽은 지고, 바람은 분다. 그러나 나는 안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은 다시 피어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것뿐이다.
나는 오늘도 그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위에서 내 마음 깊은 곳에 다시 새겨진, 젊은 날의 당신이 이름을. 그 이름이 내게 남긴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되어 언젠가 다시, 낙엽 위에 적힌 당신의 이름처럼, 어느 가을 오후, 내게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