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길고양이처럼> 40화
시간이 흐르면 사랑도 닳는 걸까.
어떤 감정은,
오래 신은 구두처럼 발에 익고 마음에 남는다.
낡았지만 버릴 수 없는 구두처럼,
잊었다고 믿었던 마음이 다시 발끝에 맺힌다.
가끔은 오래된 물건이 마음을 더 깊이 건드릴 때가 있어요.
시간이 지나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들이, 낡은 구두 한 켤레 앞에서 다시 피어났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지금, 나는 그때의 당신을 생각합니다. 함께 걷던 길, 나란히 맞던 계절, 그리고 그 발걸음 속의 조용한 사랑을요.
오늘 아침, 신발장을 정리하다가 낯익은 구두 한 켤레를 마주쳤어요.
한때는 매일 신었던 구두인데, 밑창은 다 닳고 가죽은 주름져 있었죠. 그렇게 낡아버렸지만, 이상하게도 버릴 수가 없더군요. 당신과 함께 거닐었던 골목들이, 그 구두의 주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같았어요.
당신과 나는 참 많이도 걸었죠.
약속 장소까지 뛰어가던 이른 봄의 오후, 비 오는 날 우산 하나를 나누며 발끝을 조심스럽게 맞추던 저녁, 여행지에서 길을 잃고 웃으며 걷던 밤거리. 우리는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며, 사랑을 배우고 익혀갔어요. 구두는 언제나 그 걸음을 함께했죠. 낡은 신발일 뿐이지만, 그 안에 쌓인 시간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문득, 영화 <비포 선셋>이 떠올랐어요.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두 사람이, 함께했던 기억을 하나씩 꺼내며 대화를 이어가던 장면. 그들의 눈빛 속엔 말하지 않아도 아는 감정들이 흐르고 있었죠. 우리도 그랬던 것 같아요. 세월이 흘러도, 가끔은 하나의 사물만으로도 그때의 마음이 되살아나는 순간들. 내가 구두를 보며 당신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에요.
기억하나요?
당신이 내 구두를 보며 웃으며 했던 말. “이 구두가 당신보다 우리 얘기를 더 많이 알고 있을 거야.” 그땐 웃어넘겼지만, 이제 와서 그 말이 자꾸 떠올라요. 이 구두는 알고 있었을 거예요. 내가 당신에게 숨기고 싶었던 불안함도, 당신이 말없이 참았던 외로움도. 우리는 말을 아끼는 대신 자주 걸었고, 그래서일까요.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많은 것이 오갔다는 걸 이제는 알아요.
시간이 흐르고, 구두는 점점 낡아갔어요.
그리고 우리의 사랑도, 마치 오래 신은 구두처럼 조금씩 틀어지고 어긋나기 시작했죠.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시간이 고맙습니다. 함께 걸은 기억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당신이 떠난 지금도, 나는 이 구두를 신으면 당신과 함께 걷는 느낌이 들어요. 마음 한쪽에 여전히 살아 있는 추억이, 발끝으로 전해지거든요.
사랑이 꼭 영원할 필요는 없다는걸, 우리는 조금 늦게 배운 것 같아요.
소중했던 시간이었기에, 이별이 더욱 조심스러웠던 거겠죠. 당신이 떠나던 날, 나는 말없이 현관 앞에 벗어둔 구두를 오래 바라봤어요. 마치 “이제부터는 혼자 걸어야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정말, 그 이후로 나는 이 구두를 다시 신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 오랜만에 그 구두를 꺼내어 닦아봤어요.
먼지를 털고 가죽을 문지르며, 우리 함께한 계절을 하나씩 떠올렸어요. 여름날의 햇살, 가을 저녁의 바람, 겨울 아침의 얼어붙은 공기까지. 어쩌면 이 구두는, 우리가 걸었던 시간을 기억하는 또 하나의 나일지도 몰라요.
당신은 지금 어디를 걷고 있나요?
나와 함께 했던 구두가 아닌, 새로운 구두를 신고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겠죠. 괜찮아요. 당신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 따뜻하길 바랄 뿐이에요. 그리고 나는, 이 낡은 구두를 간직한 채 나만의 속도로 또 다른 길을 걸어보려 해요. 언젠가 그 길 끝에서 다시 당신을 마주한다면, 말없이 웃으며 묻고 싶어요.
“이 길, 우리 함께 걸은 적 있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오늘도, 이 구두를 신습니다.
여전히 내 마음 어딘가에 머무는 당신과 함께 걷는다는 마음으로.
당신을 잊지 못하는, 오래된 걸음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