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의 적들
세상은 낮에도 어둡고, 밤이면 더욱 까맣게 젖어 있었다.
해는 뜨기 전, 어둠은 가장 짙다.
그 밤의 한복판에서, 순형은 작은 종이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광리 절터 근방, 새벽 세 시, 접선 예정.
정체불명의 자가 김상진과 연락을 취할 것으로 추정됨.
그의 눈에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이건 기회였다. 누군가를 무너뜨릴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을 더 위로 밀어올릴 수 있는 계단 하나.
문제는그 계단 위에 누가 쓰러져 있을지를 자기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정보, 확실해?"
영재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감정을 접어두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다.
"위에서 정리하라더군. 한 번에. 상진이든 그 일당이든."
순형은 말없이 종이를 찢었다. 한 번, 두 번, 바람결에 날려가도록.
그러고는 나직이 물었다.
"너는… 지금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냐?"
영재는 잠시 정적에 잠겼다. 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조심스레 한 권의 책을 올려두었다.
《민중의 역사 – 저자 미상》
“…이런 걸 아직도 가지고 있냐?”
"버릴 수 없더라. 가끔, 나를 기억하게 해줘서."
순형은 눈을 피했다. 과거의 그와 지금의 그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지금 서 있는 바닥조차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숲속의 움막.
순형은 그곳에서 초라한 행색의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아무 말 없이 뜨거운 수수죽을 내밀었다.
“이걸… 왜 주지?”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게, 저희 방식이니까요.”
“네 방식이 아니라, 김상진의 방식이겠지.”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젠 제 방식이에요.”
그 순간, 순형은 멈칫했다.
어린 소년의 말 한마디가 가슴을 찔렀다.
사람은 누구의 방식으로 살아가다, 어느 순간 자기 방식으로 바뀌는 것.
그게 진짜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닐까.
하루코는 차분한 손길로 순형의 와이셔츠에 단추를 달고 있었다.
실과 바늘이 그녀의 손을 따라 유려하게 움직였다.
마치 상처 위에 덧대는 붕대처럼, 그녀는 오늘도 그를 수선하고 있었다.
"당신은 오늘 또 사람을 쫓겠지요."
그 말은 평온했지만,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가야 해. 이건 내 길이야."
하루코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엔 굳은 의지와 함께 묘한 허기가 서려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게, 명예예요? 권력이에요?
아니면, 누군가를 이기고 싶은 거예요?"
순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따뜻했지만, 깊은 슬픔으로 식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당신과 함께 할게요.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누군가는 버려야 하고, 누군가는 선택해야 하니까요."
그녀는 입을 다물었고, 눈빛으로 말했다.
이 사랑은 대가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지불하고 있다.
한편, 영재는 다른 방향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민중들 속에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며 동시에 그들을 감시했다.
그의 방식은 ‘희생’이 아닌, ‘통제’였다.
그에겐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선 수단이 정당화됐다.
“민중이 중요하다고?
그들이 얼마나 무지한지, 얼마나 쉽게 조작되는지,
넌 정말 몰라서 그래?”
영재는 술에 젖은 듯 비웃었다.
그러나 그 눈빛에는 슬픔이 아닌, 냉정한 경멸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날 밤, 순형과 영재는 별도의 명령 없이 움직였다.
김상진의 동선을 쫓기 시작한 건, 그저 의무가 아니었다.
서로를 이기기 위한, 가장 잔혹한 증명의 과정이었다.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손에 넣을까."
"그걸 두석이 안다면 뭐라고 할까."
그들은 웃었지만, 웃음 속엔 빈틈이 있었다.
그 이름.
강.두.석.
그는 아직 아무것도 갖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순형과 영재가 내심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김상진은 혼자서 골목을 지나고 있다.
어두운 그림자가 벽을 따라 미끄러진다.
그 뒤를 조용히 밟는 순형의 구두 소리.
그의 눈은 냉정했고, 그의 주먹은 꽉 쥐어 있었다.
“나를 증명할 시간이 왔다.”
#작가의 말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거울이 아닌, 상대의 눈빛 속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이번 이야기는 바로 그 ‘거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권력의 꼭대기를 향해 기어오르려는 순형,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영재,
그리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다만 곧은 길을 걷는 두석.
이 세 인물은 모두 시대와 신념 앞에서 각자의 선택을 해야 했고,
그 선택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갈라섭니다.
어린 소년의 말 한마디, 아내의 떨리는 손끝,
마주보는 동지의 침묵.
작은 장면들이 쌓여 그들을 흔들고, 깨우고, 결국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끝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었는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