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50

완도 민간인 희생사건 (최종화)

by 강순흠



완도 민간인 희생사건 ― 국가폭력의 기록


완도 민간인 희생사건은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이르기까지
전라남도 완도군 일대에서 발생한 국가 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적법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좌익’, ‘부역 혐의자’라는 이유로 체포·구금되거나
즉결 처형, 총살, 수장 등의 방식으로 생명을 잃었다.
당시에는
「국방경비법」이나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등
재판과 형 집행을 규율하는 법적 장치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완도 지역에서 발생한 다수의 희생 사건에는
이러한 법률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박탈하거나 신체의 자유를 제한할 경우
정당한 사유와 적법한 절차를 따라야 함에도,
이 사건의 가해 주체인 경찰은
그 기본 원칙을 이행하지 않았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상당수 희생자들은
자신의 부역 행위를 부인하거나
자진 출두·자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살해되었다.
가해 주체와 국가 책임
조사위원회는
개별 희생자에 대해
구체적인 가해자를 모두 특정하지는 못했으나,
사건의 가해 행위가
완도경찰서 경찰관 또는
그 지휘·명령·감독 체계 하에 있던
의용경찰, 대한청년단원 등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1차적 책임은
당시 완도경찰서를 관할하던 경찰 책임자에게 귀속되며,
아울러 전시 상황이라는 이유로
경찰 조직의 공권력 남용과 불법 폭력을
통제·예방하지 못한 국가에도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조사보고서는
전시 사회 혼란기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비무장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살해 행위는
어떠한 정당화도 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희생 규모와 특징
조사 결과,
이름·성별·주소 등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희생자는 506명에 달한다.
그러나 이는
진실화해위원회에 사건을 신청하지 못한 피해자와
기록에서 누락된 사례를 고려할 때
최소 수치에 불과하다고 판단된다.
위원회는
완도 민간인 희생사건이
단일 사건이 아닌
약 65건 이상의 개별 사건으로 이루어졌으며,
국민보도연맹 사건,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등이
중첩되어 발생했음을 확인했다.
확인된 희생자 251명 중 여성은 22명(약 8.7%)이었으며,
대다수는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던
평범한 주민들이었다.


또한
1954년 작성된 「경찰연혁사」에는
완도 지역 좌익 피살자가 272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공식 통계조차 사건의 실상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반복된 죽음
희생은 한 시기에 집중되지 않았다.
1947년 5·1 메이데이 집회 이후부터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그리고 전쟁 발발 이후
경찰이 완도에서 후퇴했다가
1950년 10월 초순 재진입한 뒤까지
희생은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특히 조사 결과는,
일부 희생자들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경력이나
해방 후 인민위원회 활동 경력으로
이미 낙인찍힌 상태에서
전쟁이라는 상황을 계기로
다시 ‘부역자’로 규정되어 살해되었음을 보여준다.
인민군 점령기 동안
실제 부역 여부와 무관하게
피난을 갔다가 돌아온 주민들 역시
자수 또는 체포 이후
처형 대상이 되었다.


기록이 문학이 되는 이유
이 보고서는
국가가 저지른 폭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문서이자,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죽음에 이름을 부여한 기록이다.
그러나
보고서가 담아내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밧줄에 묶여 바다로 끌려가던 순간의 공포,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던 밤,
아버지와 형의 죽음을 목격한
열세 살, 열다섯 살 아이의 심장 소리다.
그래서 이 사건은
문학으로 다시 기록된다.
『노란 개나리』와
『다시 핀 동백』은
이 조사보고서를 사실적 토대로 삼아,
숫자와 통계 뒤에 가려진
사람의 얼굴과 감정을 복원하려는 시도다.


이 글은
과거를 다시 처벌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기 위한 이야기다.
국가가 침묵시켰던 죽음들이
이제는
말을 건네도록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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