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품은 자,별이되리
봉강학당
두석은 봉강정 사랑방 마루를 열어젖히고 다시 아이들과 어른들을 불러 모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건 글자요.
글을 모르면 속을 봐도 뱀인지 지렁이인지 모른다!"
그는 비릿내 나는 굳은 손들을 모은 이웃들에게
가로쓰기 연습을 시켰다.
사람들은 더듬더듬, 처음엔 부끄러워하며 펜을 들었지만,
곧 웃음과 눈물이 섞인 글자들이 마당 가득 번졌다.
글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세상을 달리 보았다.
"우리 이름, 우리 마을 이름, 우리 아들 이름…
우리가 몰라서는 안 된다."
문맹 탈출.
그것이 두석이 피운 첫 번째 불씨였다.
가난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무지는 부끄러움이다.
다음으로 그는 염전과 바다를 품은 섬 사람들에게
조심스럽지만 확고한 말을 건넸다.
"남이 시키는 대로만 살다 보면,
우리 소금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 바다는 우리의 것이 아니오."
그래서 그는 "자조회(自助會)"를 만들었다.
김을 뜨는 법, 미역을 키우는 법, 공동어장을 관리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일본 상인들이 와서 싼값에 사갈 때,
우린 우리끼리 팔 길을 열어야 하오."
경제 자립.
그것이 두석이 심은 두 번째 씨앗이었다.
조선에도 봄은 오는가
그날, 두석은 낡은 신문조각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말했습니다.
‘모든 민족은 스스로 자기 운명을 정할 권리가 있다.’
그걸 ‘민족자결’이라 부릅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조선 사람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조선어를 쓰는 입을 감추지 마십시오.
조선 이름을 가진 걸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 짚자리에 앉아있던 격섭이 일어섰다.
“정말… 우리도, 일본 놈들처럼 당당할 수 있다는 말이오?”
두석은 빛나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우리도 이 땅의 주인이오.
우리 말로 노래하고, 우리 글로 기록하며, 우리 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봉강정 사랑방의 문이 바람에 덜컥 열렸다.
어디선가 매화꽃 한 송이가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두석은 손에 잡힌 매화가지를 들어 말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핀 이 매화처럼,
우리는 비록 지금 힘겹지만,
봄은 반드시 우리 편입니다.”
민족 자결,
모든 민족은 스스로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두석이 심은 세 번째 바람이었다.
그날 이후, 봉강학당은 단순한 야학이 아니었다.
• 조선어 글짓기 대회,
• 손수 만든 태극기 봉제,
• ‘독립이란 무엇인가’ 강연회,
• 여성 직업교육(재봉틀, 김 양식 기술 전수)까지.
밤례는 여인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재봉틀을 돌렸고,
근임은 염전 소금 자루를 모아 굶주린 이웃에게 나눴다.
복례는 아이들에게 한글 동요를 가르쳤다.
“봄이 온다, 봄이 온다, 우리 땅에 봄이 온다…”
두석은 작은 손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며 속삭였다.
“너희 이름 하나가, 이 땅의 별이 될 것이다.”
바다를 품은 별들
그해 여름, 봉강정 마당에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퍼졌다.
"바람아 불어라~ 별을 태워라~
우린 바다를 품은 별이다!"
염전 끝자락, 늙은 노인이 수줍게 글을 읽었고,
배를 타던 젊은이들이 밤마다 학당에 모여 김치를 넣어 만든 김밥을 쥐고 글을 배웠다.
밤례는 장독대 옆에 조용히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했다.
"이 땅의 아이들이, 남의 발밑이 아닌 하늘 아래 서게 해주소서."
#작가의 말
강두석이 심은 건 단순한 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글로 굶주림을 이기려 했고, 말로 노예의 삶을 거부하려 했습니다.
섬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피어난 '문맹 탈출', '경제 자립', '민족 자결'의 불씨는
결코 작은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심히 부르는 이름 하나, 글자 하나에도
그 시대의 숨죽인 싸움이 새겨져 있습니다.
"글을 품은 자, 스스로 별이 된다."
봉강정 사랑방의 바람은 그렇게,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어 퍼져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