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31

이름 없는 자들의 서사

by 강순흠


종잇장처럼 얇은 책이었다.
누렇게 빛바랜 표지, 닳아 헤진 모서리, 얼룩진 내지 한 귀퉁이에 연필로 적힌 이름 – ‘민중의 역사’.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견뎌낸 자의 기억이다.”

순형은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읽었다.
처음에는 아무 느낌이 없었다. 단지 낡은 좌익 서적의 흔한 수사처럼 여겨졌고, 어느 인쇄소에서 나온 불온문서를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단단한 껍질이 가슴을 눌렀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이상하게 손끝이 식어갔다.
단순히 추운 탓만은 아니었다.
‘견뎌낸 자의 기억이라…’
순형의 머릿속에 한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야학 교실, 무너진 벽돌더미에 앉아 먹을 것을 나눠 먹던 아이들,
한 소년의 "이젠 내 방식이에요"라는 말,

그리고 늘 그림자처럼 서서 그들을 지켜보던 두석의 눈빛.
정지된 기억 한 편에, 격섭이 툭 내던지듯 말하던 소리가 덧붙었다.

우린 끝까지 말할 거예요.
우릴 죽이진 못했으니까요.”

말한 자는 죽었고,
그 말을 들은 자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는,
이제야 그 말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책장을 덮은 순형은, 그 책을 천천히 가슴 안에 숨겼다.
누가 보지 않도록. 들키지 않도록.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태평양 건너의 누군가는 대본영을 외쳤고,
그의 상관은 “대동아공영의 마지막 희망”이라 불렀다.
하지만 이 책은 단지,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낸 자들의 입 없는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묻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의 방식으로 살아왔는가.

순형은 책을 가슴팍에 숨긴 채, 마치 무기를 감추듯 그 자리를 떠났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과거로 흘렀다.


금당도의 바람, 비에 젖은 교실,
순형이 물었을 때, 두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자 몇 자 가르치는 게 세상을 바꾼다고 믿어?”
“나는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야.”
두석은 천천히 분필을 들어 칠판에 ‘사람’이라는 글자를 썼다.
그리고 말없이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단지, 사람이 되자는 거야.”
그 순간, 순형은 이상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 단순하고 맑은 문장이 왜 이리 무거운지, 왜 목구멍을 막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그는 도망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두석으로부터, 두석이 품은 ‘진심’으로부터.
‘나는 그를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그 자신으로 살고자 했을 뿐인데…’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책상 위, 찢긴 명령서.
그 옆에 놓인 영재의 보고서.
그리고 거울.
거울 속의 사내는 낯설었다.
흠잡을 데 없는 제복, 곧게 선 어깨, 감정 없는 눈빛.
그러나 그 속엔 어떤 열망도, 분노도, 기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누구를 위해 싸웠는가.”
“나는 무엇을 지키려 했는가.”
그는 다시 책을 꺼냈다.
《민중의 역사》, 그 낡은 표지를 쓰다듬으며,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아닌,
누군가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선택하려 했다.
그날 밤, 순형은 처음으로 총을 내려놓았다.

바람은 거칠었고, 하늘엔 별이 없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누군가 여전히 그 별빛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작가의 말
역사란 무엇일까요.
기록된 사실? 승자의 연대기?
저는 이 글을 쓰며 ‘기억’이라는 말을 오래 생각했습니다.
이름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 말을 잃고도 끝내 침묵하지 않았던 이들, 그리고 살아남아 끝내 ‘묻기 시작한’ 사람들.
《민중의 역사》는 그런 존재들의 조용한 외침입니다.
순형은 국가의 이름으로 살아왔지만, 그 안에서 한 번도 자신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누구의 방식으로 살아왔는가.”
질문은 때로 총보다 무섭고, 기억은 때로 권력보다 강합니다.
두석의 ‘사람이 되자는 말’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기를,
그리고 이 이야기가 누군가의 ‘기억’에 닿을 수 있기를, 조용히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