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32

잡는 자와 쫓기는 자

by 강순흠


바람은 북쪽으로만 불었다.
산 너머에서 짙은 안개가 내려오던 초겨울 새벽, 금당도 바닷가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평소 같으면 어시장 사람들의 고함과 돛배의 북소리가 울려야 했지만, 그날은 기척조차 없었다.
김상진은 그날 밀짚모자를 쓰고 어부로 위장해 나타났다.
손에는 마른 명태 꾸러미를 들고, 발걸음은 평온했지만 그 눈빛엔 서늘한 경계가 어렸다.
그를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었고, 소문으론 그가 조선을 떠났다는 말도 돌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덫이었다.
그를 잡기 위해 일제 경찰들은 반년 넘게 함정을 짜왔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열쇠가 되어준 것이 영재였다.

“거기 멈춰!”
어디선가 거친 함성이 터졌다.
순식간에 바닷가 양쪽에서 총을 든 경찰들이 튀어나왔다.
바다 쪽으론 일본 순시선이 포를 겨눈 채 다가오고, 육지 쪽에선 말 달린 순사들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김상진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젠 내가 전설이 아닌 모양이지.”
그는 명태꾸러미 속에서 짧은 권총을 꺼냈다.
탕! 탕!
몇 발의 총성이 바닷가를 갈랐다.
하지만 수십 명의 포위망을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를 쓰러뜨린 건 총이 아니었다.
눈을 피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믿었던 후배의 이름이었다.

“순형아.
넌 한때
나와 함께 꿈을 꾸었던 사람이었다.
내가 총을 든 건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지, 너와 싸우려는 게 아니야.”
순형의 손이 떨렸다.
며칠전, 순형은 영재에게서 쪽지 한장을 받았다.

"고흥에서 금당도로 올 예정,신변확보 가능"


김상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갯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그래, 이런 날도 오는구나. 조선이 끝나가는 날이.”

그가 포승줄에 묶여 끌려나오던 순간,
멀리서 울음이 터졌다.
김상진의 체포는 시대의 비명이고 등불의 꺼짐이고 민중의 절망 이었다.
한 할머니는 벗겨진 고무신을 움켜쥐고 땅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그 울음은 이내 사람들의 울부짖음으로 번졌다.
누군가 그를 향해 절을 했고, 어떤 이는 아이를 안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순간,
하늘도 울었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북풍에 바닷가의 등대를 끄고 지나갔다.
민중의 희망이, 한 사람의 이름과 함께 쓰러지고 있었다.

두석은 오래도록 말을 잃었다. 가슴 속이 타들어 갔다.
김상진, 그 이름은 그들에게 ‘불가능에 맞선 자’, ‘진짜 독립운동가’의 상징이었다.
그런 그를… 영재가 팔아넘겼다.


가슴께가 얼어붙었다.
누가 내게 돌을 던졌던가.
누가 이 나라의 허리를 꺾었단 말인가.
나는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분이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분이… 그렇게 허망하게?
하지만… 더 참담했던 건,
그를 잡은 이가
순형이란 이름이었다.
같은 시대를 견디고, 같은 스승 밑에서 붓을 들었던 이.
내 어깨에 기대던 그 밤,
민족의 앞날을 두고 입술을 깨물던 그 얼굴이
이제 조선총독부의 휘장을 달고 그분의 손에 포승을 채웠다니.
무너졌다.
사람을 믿는 일이,
친구를 믿는 일이,
진실을 붙드는 일이
이리도 허무하게 깨질 수 있는가.
그러나 나는
무너질 수 없었다.
울 수 없었다.
상진 선생이 걸었던 길을 생각하면,
그분이 마지막으로 본 하늘을 떠올리면—
나는, 일어나야 했다.
대놓고 칼을 들 수는 없었다.
내 곁엔 내가 지켜야 할 아이들과, 야학의 촛불,
글을 배워야 할 이 나라의 내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숨어서 싸우기로 했다.
불처럼 드러나지 않되, 뿌리처럼 무너지지 않는 길을.
그분의 걸음을 이을 자는
전설이 아니라,
이름 없이, 그러나 결코 꺾이지 않는 이 땅의 평범한 사람이어야 하니까.


며칠 뒤, 완도경찰서
순형은 상진 체포 보고서를 넘겼다.
그 자리에서 상급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순형이, 이제 팔자 피게 됐군.”
“경성에서 부르겠지. 내 자리도 치고 올날도 멀지 않았어.”
사람들은 웃었다.


며칠 후, 장터 어귀.
지서앞에 순형이 새 계급장을 단 제복을 입고 나타났다. 군국주의 교본을 껴안고 허리를 곧추세운 모습은 낯설었다.

두석과 순형은 우연히 마주쳤다.
말없이 눈빛만 오갔다.
두석은 먼저 말했다.
“누구를 위해 그 칼을 들었나.”
그리고 그대로 돌아섰다.
그 말은 비난이 아니라, 결론 없는 질문이었다.
순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돌아서는 두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처음으로 강두석의 ‘비폭력’이 자기보다 더 큰 싸움임을 느꼈다.

그날 밤, 순형은 벽에 계급장을 던졌다.
텅—.
금속 소리가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순형은 혼자 술잔을 들며 중얼거렸다.
"나는 내 선배를 잡고 그 피위에서 계급장을 달았다..."


두석은 그날 밤 혼자 마루에 걸터앉아
그는 결심했다.
“정면으론 안 된다. 들키지 않게, 더 깊숙이 숨어들어야 한다.”

중일전쟁이 터지고, 마을엔 ‘징병 영장’과 ‘공출 서류’가 매달렸다.
농촌은 비워졌고, 학교는 군사 교육의 훈련장이 됐다.
이젠 교과서는 없다.
오직 입으로 전했다.
“조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잊지 않으면, 조선은 언젠가 다시 깃발을 올릴 겁니다.”
그의 눈은 여전히 빛났다.
두석은 이제 더 이상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배신과 탄압의 시대를 살아가는, 조용한 불꽃이었다.


#작가의 말
역사는 영웅과 배신자만으로 쓰이지 않습니다.
누구는 총을 들고, 누구는 고개를 숙이고, 또 어떤 이는 입을 다문 채 밤마다 촛불을 지폈습니다.
잡는 자와 쫓기는 자, 그리고 침묵 속에 몸을 낮춘 이들.
그들 모두, 시대의 벼랑 끝에서 각자의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정말 마주해야 할 질문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때, 누구의 등을 밀었고, 누구의 불꽃을 꺼뜨렸는가.”
꺼진 듯 보이는 그 불빛이,
어쩌면 지금 우리가 딛고 선 희망의 등불이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