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사람들
노구교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교외의 작은 다리에서 시작된 그 총성은 조선을 삼키는 불길이 되어 번져왔다. 중일전쟁. 대륙을 향한 일본의 야욕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고된 일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전쟁은 길어졌고, 조선은 더 깊이, 더 철저하게 짓밟혔다.
"전쟁은 북경에서 시작되었고, 죽음은 이 땅으로 흘러들었다."
— 봉강정 일기 중에서
전장은 대륙이었지만, 피비린내는 조선까지 번져왔다.
“황군의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조선의 청춘은 정식 군인이 아닌 ‘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징집되었고,
여학생들은 '정신대'라는 미명 하에 사라졌다.
그날 이후, 마을의 골목길마다 바람이 무겁게 불었다.
“도쿄는 천왕의 어명을 받들어 총력전 체제로 들어간다.
조선 또한 그 예외일 수 없다.”
총독부의 포고가 나왔다.
학교마다 충성 맹세와 황국신민 서사가 울려 퍼졌다.
두석은, 무너지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았다.
글을 가르치려던 칠판은 어느새 총검술 훈련장이 되었고,
노래 수업은 ‘군가’로 바뀌었다.
두석 선생, 공출 서류가 내려왔습니다. 학교도 농가도 다요.”
면사무소의 젊은 관리가 조심스레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그 속엔 곡식 수량, 인원 동원 계획, 징용 대상자의 명단이 적힌 문서들이 들어 있었다. 서릿발 같은 한 줄의 이름들. 어떤 이름은 겨우 열일곱이었다.
두석은 말없이 문서를 들여다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더 이상 교사가 아니오.”
그는 이미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학교에서도, 강단에서도 밀려난 몸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여전히 꺾이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터 진짜 싸움이었다.
밤례가 속삭였다.
“이제 사람들이… 더 이상 웃지 않아요. 입을 다물고, 꿈을 숨겨요.”
두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일기를 펼쳤다.
그의 일기는 더는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살아 있는 자들의 묵비권이요,
죽어간 자들의 유언장이었다.
“김순자, 열다섯, . 사라진 날 1938년 음력 정월 열이틀. 마지막으로 본 장소, 큰무섬 갯가.”
김봉렬, 1908년생. 조선어 교사. 불온문서 소지 혐의로 체포.
정미숙, 17세. 공장 취업 명목으로 간도로 이송. 이후 행적 불명
“조성환, 스무 살, . 학도병으로 끌려간 뒤 종적 끊김. 어머니의 편지 보관 중.”
그는 편지를 접어 노트에 끼우고, 얼굴을 감싸 쥔 채 소리 없이 울었다.
“밤례야, 나... 기록을 남기려 하오. 우리가 본 것을, 우리가 들은 것을… 잊히게 두지 않으리다.”
그날부터 두석은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
밤례는 언젠가부터 말이 줄었다.
그녀는 빨래통 속에 흰 천을 비비며, 사라진 소녀들의 이름을 외듯 중얼거렸다.
“미숙이… 선애… 향분이…”
두석은 밤마다 그녀 옆에 앉아 붓을 들었다.
그녀는 기억했고, 그는 기록했다.
말 없는 연대였다.
한 사람은 눈으로 울고,
다른 한 사람은 손으로 울었다.
그렇게 두석은 일기를 썼다.
“조선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은 전장이 되었다.
소년은 군화 속에서, 소녀는 이름 모를 이국의 방 안에서 죽었다.
누가 그들을 기억할 것인가.
#작가의 말
전쟁은 총칼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그것은 펜을 꺾고, 언어를 묶고, 사람의 영혼을 침묵시키는 방식으로 더 깊고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의 하늘 아래에도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비는 총알보다 무서웠고, 굶주림보다 더 오랫동안 사람들의 내면을 갉아먹었다.
그 시절,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간 수많은 젊은이들.
그들은 어디로 갔으며, 무엇이 되었을까.
그 물음 앞에서 나는 기록하는 자 ‘강두석’의 눈을 빌려 울고, 그의 손을 빌려 적었다.
두석은 저항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기억했다.
기억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조용하고도 강력한 저항이다.
사라져 가는 친구들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는 그의 손끝에서,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배워야 할 ‘책임의 윤리’를 본다.
밤례는 그 곁에서 아무 말 없이 천을 삶고, 아이들의 이름을 읊는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잊지 않는다.
그녀의 기억은 무릎 꿇은 삶 속에서 피어난 작고 단단한 별빛이다.
우리는 그들의 울음을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이 한 편의 글이,
그들의 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작은 묘비가 되길 바란다
그 혼돈 속에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슬픔과 분노를 ‘기억’으로 바꾸는 한 지식인의 걸음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그날들을 기억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