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버리다
“이름은 나를 부르는 첫 번째 기억이다.
그해 우리는 스스로를 부르지 못했다.”
— 봉강정 일기 중에서
1940년 봄.
완도 금당도.
마을 앞 바닷바람이 거세게 불던 날, 면사무소에 통지문이 붙었다.
“창씨개명 실시. 모든 조선인은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할 것.”
그 밑에는 어렴풋한 글귀가 덧붙었다.
“이는 조선인을 대일본제국의 충성된 신민으로 삼기 위한 조치다.”
두석은 면서기 출신 동생 영석에게 들은 내용을 곱씹었다.
며칠 뒤, 신고서가 배달됐고
강두석이라는 이름 아래, 일본어 음차된 새로운 이름이 적혀 있었다.
大道 永年 — 다이도 에이넨.
‘큰길처럼 살고, 영원히 이어지라’는 뜻이라 했다.
두석은 그 종이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뒤편에 손 글씨로 적었다.
“나는 강두석이다. 그 길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밤례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게 이름이여? 그럴싸하게 포장만 했지,
결국 우리 족보를 지우는 거 아녀요?”
“염광학교란 곳, 들어보셨소?”
저녁 무렵, 동생 영석이 입을 열었다.
“해주 쪽이라더군요. 민족학교요. 그곳 선생들과 아이들 백 명이 넘게 창씨개명을 거부했다는군.”
두석의 젓가락이 멈췄다.
“그래서?”
“학교는 폐쇄됐고, 교장은 총독부에 끌려가 나흘 만에 시신으로 돌아왔답니다.
교사들은 직위 해제, 학생들은 제적. 그중 절반은 지금도 행방을 몰라요.”
두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버텼군.”
그는 그 학교 교장의 이름도, 학생들의 얼굴도 알지 못했지만
‘염광’이라는 두 글자를 몇 번이고 마음속에 되뇌었다.
빛을 밝혀 이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두석은 창밖 저물어가는 어둠을 향해 중얼거렸다.
“우리가 비록 껍데기를 뒤집어쓴다 해도, 속의 이름은 빼앗기지 말아야 하오.”
그해 여름, 마을에 또 다른 명령이 떨어졌다.
‘금속 공출’
놋그릇이며 주발, 숟가락, 대야, 솥까지
무조건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시아버지 제사 지내던 놋그릇도 가져가면
우린 뭘로 밥을 먹고,
무슨 그릇에 조상의 밥을 올린단 말이오?”
바느질을 하던 마을 노파가
울음을 삼키며 밤례에게 털어놓았다.
밤례는 자신의 유품 중
시어머니가 물려준 놋수저 한 벌을 조심스레 싸서 두석에게 건넸다.
“이것만은 지켜줘요.
당신 아버지 밥 올리던 수저예요.”
그러나 이틀 뒤,
문 앞에 헌병이 들이닥쳤고
수색 끝에 그 수저까지 빼앗아갔다.
“몰래 숨겼다”는 죄로
두석은 지서에서 밤늦게까지 심문을 당했고
돌아온 손엔 피멍이 가득했다.
그날 밤, 밤례는 아무 말 없이
남편의 손을 따뜻한 물에 담그며 말없이 울었다.
말보다 큰 분노와 무력감이
그들의 손끝에서 떨고 있었다.
금당도에 있던 아이들은
일본식 교과서로 공부하는 국민학교로 끌려갔다.
조선어는 교실 안에서 금지됐다.
“오늘부터 너희 이름은 ‘다카하시 히로시’, ‘야마다 사쿠라’다.”
교장은 조선아이들을 일본식 이름으로 부르며 궁성요배를 강요했다.
교실 맨 끝에 남아 있던 작은 아이는
자기 이름을 잊지 않으려
손바닥에 ‘송일호’ 세 글자를 몰래 새기고 있었다.
그 맨 앞줄에, 아들 강군수가 앉아 있었다.
작은 어깨를 움츠린 채,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다이도 겐지!”
이름을 부른 선생의 소리에 군수는 소스라쳤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입술은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군수는 집에 돌아와
말없이 구석에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두석은 아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사람은 이름을 얻고,
그 이름으로 세상을 건넌단다.”
아들은 그 말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만은 깊게 마음에 남았다.
밤례는 밤마다 자수를 놓았다.
낡은 손수건에
‘강두석’ 세 글자를,
붉은 실로 꿰맸다.
“이건 당신 이름이에요.
언젠가 잊히더라도…
이건 내가 기억할 거예요.”
두석은 그녀의 손에서 그 수건을 받아
일기장 사이 깊숙이 숨겼다.
그곳은 아직 지울 수 없는
진실의 자리였다.
#작가의 말
그해 봄, 조선의 수많은 이름이 사라졌다.
‘창씨개명’은 단지 칙령이 아니라
존엄을 부정하는 폭력이었다.
이름을 바꾸라는 명령은
결국 말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조상까지 부정하라는 말이었다.
놋그릇 하나, 수저 하나까지 빼앗기던 시대.
그것은 단지 전쟁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삶을 갈아 넣는 제국의 체제였다.
두석은 칼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글을 적었고,
이름을 지키려 했고,
그릇을 품었다.
밤례는 자수를 놓았다.
그녀는 기억을 짰고,
그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묻는다.
당신의 이름은 어디에 있는가?
그 이름은 여전히 당신을 부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