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35

제국의 야욕과 피로 쓴 지도

by 강순흠


일본은 더 깊숙이 광기로 질주하고 있었다.
만주를 삼킨 제국의 야욕은 이제 중원 대륙을 집어삼키려 했다.
1937년, 일본군은 상하이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본격적인 중일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야.”
두석은 지인의 밀서로 받은 소식지를 들여다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하이를 장악한 일본군은 곧장 난징으로 진격했고, 거기서 인류사에 남을 지옥을 펼쳐냈다.

난징대학살.
겨우 몇 주 사이, 30만에 가까운 중국 민간인과 포로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
여인들은 능욕당하고, 아이들은 총검술의 표적이 되었으며, 거리는 시체로 뒤덮였다.
죽은 이보다 살아남은 이들이 더 끔찍한 기억을 짊어져야 했다.
그들은 그것을 ‘정복’이라 불렀고, ‘영광’이라 포장했다.
하지만 실상은 피비린내 나는 약탈과 살육이었다.

두석은 그 밀서를 읽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들이 ‘황국신민’을 말하며 우리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이유가 이것이라면, 우린 이미 그들의 전쟁에 희생양으로 묶인 것이야.”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외쳤다.
모든 아시아 민족이 하나가 되어 서양 세력에 맞서야 한다는 허울 좋은 구호 아래, 제국은 피의 사슬을 조였다.
조선, 만주, 대만, 필리핀, 인도차이나,

모두가 일왕의 발아래에 무릎 꿇기를 강요받았다.
‘황국신민서사’는 그들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언어였다.
“우리는 신민이다. 일왕의 자손이며, 충성된 백성이다. 조선어를 버리고, 일본어를 쓰고, 천황을 섬겨야 한다.”
이것이 곧 제국의 윤리요, 식민의 규율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탐욕은 결국 제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중국의 저항은 거셌고, 일본은 남쪽으로 침략을 확대해 인도차이나, 동남아시아를 노렸다.
자원을 향한 전쟁이었다.
이에 미국은 결단을 내렸다.
1941년 7월, 일본의 침략 행위에 반발하며 석유를 포함한 전략물자의 수출을 전면 금지한 것이다.
석유는 전쟁의 피였다.
연료가 끊긴 일본은 숨통이 막히기 시작했고, 그들은 가장 무모한 결정을 내린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진주만, 하와이.
“도라, 도라, 도라.”
짧은 교신 한 줄로 시작된 공습이 태평양을 뒤흔들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 일본 해군 항공대는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했다.
전함 애리조나호가 불타고, 군함은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수천 명이 숨도 쉬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다음 날,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태평양 전쟁의 서막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부터였다.
일본 제국의 패망의 시계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 시각, 충칭에서는 또 다른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의 참전을 기회로 삼아, 조선이 ‘전쟁의 피해국’이 아닌 ‘전쟁의 당사자’ 임을 알리기 위해 분투했다.
김구는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고,
조소앙은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한 건국 강령을 외교 전략의 핵심으로 제시했다.
지청천은 광복군을 정비하며 연합군과의 공동 작전을 타진했다.
“우리가 스스로 국가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 싸움은, 단지 총칼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지워진 이름을 되찾기 위한, 존재의 선언이었다.

#작가의 말
일본 제국주의가 중일전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침략 전쟁에 돌입하고, 난징대학살을 통해 인류사에 남을 범죄를 저지른 시기, 그리고 그것이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환점을 조명했습니다.
광기의 제국 일본은 더 많은 땅과 자원을 원했고, 그 대가는 셀 수 없는 민간인의 피였습니다.
주인공 강두석은 이제 이 거대한 전쟁의 회오리 속에 놓이게 됩니다.
강요된 충성, 왜곡된 역사 속에서 조선인은 누구였고, 무엇을 지켜야 했는가.
이제 그의 싸움은 더 거세지고, 선택은 더 무거워집니다.
역사는 거대한 전쟁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작은 민들레 씨 하나가, 먼지처럼 떠다니다 어디선가 뿌리내리듯
강두석의 신념 또한 그 시대에 조용히 저항의 씨앗이 되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