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분열의 시작
1945년 12월의 바람은 유난히 싸늘했다.
모스크바에서 날아온 한 장의 성명서가 조선 땅을 두 동강 내기 시작한 그 겨울, 사람들은 더 이상 기뻐할 이유를 잃어가고 있었다.
"신탁통치…?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읍내 서점 앞, 신문을 받아든 영재가 얼굴을 붉혔다.
‘미·영·소·중 4개국에 의한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라는 활자가 도드라졌다.
"우릴 또다시 나라 없는 백성으로 만들겠단 말이오!"
한 노인이 지팡이를 바닥에 찧으며 소리쳤다.
금세 모인 군중들 속에서 누군가 신문을 찢어 바람에 날렸다.
그날부터였다. ‘찬탁이냐 반탁이냐’라는 말이 거리마다 독버섯처럼 퍼지기 시작한 건.
봉강회도 흔들렸다.
두석은 교실 안, 동지들과 마주 앉아 벽에 붙은 모스크바 3국 회의 관련 신문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석 형… 형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기홍이 물었다.
“신탁이라는 말은… 감옥살이만큼이나 역겹소.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기 시작한단 거요.”
그의 말에 모두 침묵했다.
회담의 진의를 둘러싼 정보가 넘쳐났고, 좌파 청년들은 “조선의 자주 정부 수립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며 찬탁을 외쳤다.
반면 우익 청년들은 이를 ‘제2의 식민지화’라 규정하며 봉강회의 일부 동지들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 봉강회 내에서도 첫 이탈자가 나왔다.
김경모는 반탁 시위를 위해 읍내 청년단으로 들어갔고, 이민재는 찬탁파라며 낙인찍혀 고향을 떠났다.
밤례는 부엌에서 장작불을 지피다 말고 문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재수는 벽에다 ‘반탁 구호’를 따라 써보고 있었고, 현수는 봉강회에서 받아온 책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세상이 너무 시끄럽구먼… 애들은 그냥, 따뜻하게 자랄 수는 없는 걸까.”
밤례의 속삭임에, 뒤에서 두석이 조용히 말했다.
“따뜻한 봄은… 추운 겨울을 견뎌야 오는 거요.”
그의 손에는 찢긴 전단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찬탁파 배척하자! 조선은 조선인의 손으로!’
“그럼, 우리도 찬탁입니까?”
밤례가 물었다.
두석은 한참 말이 없었다.
“…우린, 어떤 식이든 스스로 설 준비가 된 사람들 편이요.
외세든, 우익이든, 좌익이든…
이 땅을 도구처럼 쓰는 자들 편은 아니오.”
며칠 뒤, 봉강회는 폐허가 된 양조장을 옮겨 새로운 장소에 뿌리내렸다.
도청하는 이들을 피해 노래로 의사를 전하고, 배급된 교과서 대신 자필 유인물을 돌렸다.
그리고 새벽이면, 두석은 영단을 품에 안고 바닷가를 걸었다.
파도는 여전히 밀려왔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유난히 길고 어두운 겨울이었다.
#작가의 말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는 조선 민중에게 또 다른 분열의 씨앗을 남겼습니다.
‘신탁통치’라는 단어 하나로 이념의 갈래가 나뉘었고, 해방의 기쁨은 곧 서로를 향한 증오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도 ‘두석’처럼 싸움을 피하지 않고, 이념을 넘어서 이 땅의 자주와 사람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봉강회’는 그 기억의 상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