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48

숨결 없는 깃발 아래

by 강순흠


순형은 해방의 소식을 들었다.
거리마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누군가는 만세를 불렀고, 누군가는 하늘을 향해 주먹을 쥐었지만, 그는 입을 닫았다.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두려웠다.
‘이제, 나는 어디에 서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동경 유학 시절, 두석과 나란히 걸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야학을 만들고, 금서를 돌리던 밤들, 철야하며 조선의 내일을 설계하던 젊은 날의 열기.
그러나 모든 것은 끝났다.
그 시절의 의형제는 여전히 하늘을 보지만, 그는 이제 땅을 본다.
“순형아, 이제는 우리가 말할 수 있어.”
며칠 전, 두석이 찾아와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가슴 어딘가가 뜨겁게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게 다가 아니야, 두석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9월, 미군정이 들어섰다.
순형은 연락을 받았다.
과거 전남 경찰부에서의 경험, 일본어 능력, 행정 실무에 익숙한 자.
그는 재등용되었고, 새로운 조선 주둔군정청 산하에서 경찰행정 실무를 맡게 되었다.
그날 밤, 그는 혼자 앉아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건 기회다.
두석처럼 살아서는… 내 가족도, 나 자신도, 지킬 수 없어.’
순형은 넥타이를 맸다.
마치 그것이 자신을 새로 포장해 줄 방어막이라도 되는 듯.
거울 속 눈동자에 힘을 실어보았지만, 어딘가 비어 있었다.
그는 이제 ‘감시’를 맡고 있었다.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들, 좌익 계열 운동가들, 해방 후 각지에서 생겨나는 수 많은 조직들.
그 명단에는 두석의 이름도 있었다.
파일을 넘기던 손끝이 멈췄다.
‘이름을 보았을 뿐인데, 왜 심장이 이렇게 뛸까.’
밤이면 그는 악몽을 꾸었다.
땀에 젖은 셔츠를 벗어 던지고, 탁자 위의 증류주를 들이켰다.
어느 밤, 그는 벽에 붙은 조선지도를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왜 나는… 조선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죄인처럼 숨이 막히는 걸까.”
그리고 며칠 후.
두석이 또다시 그를 찾아왔다.
복도 끝, 불 꺼진 행정실 앞에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마주 섰다.
순형은 눈을 피했다.
“아직도… 두려워?”
두석의 질문에 그는 조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려운 게 아니라, 나는… 나는, 살아야 했어.”
“네가 포기한 건 생명이 아니라, 너 자신이야.”
그 말에 순간, 그의 안쪽 어딘가에서 불쾌한 진실이 꿈틀거렸다.
그는 돌아서며 말했다.
“나는 지켜야 할 게 있어. 가족도, 이름도…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만이 옳은 건 아니야.”
발걸음을 돌렸지만, 마음은 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날 밤, 순형은 두석의 이름이 적힌 보고서를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나는 살아남았지만, 나는 나인가.”
그 물음이, 오늘도 순형의 목을 조였다.

#작가의 말
‘기회주의자’라는 말은 때로 너무 쉬운 낙인이 된다.
순형은 누군가의 배신자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가정을 지킨 가장이었고, ‘살아남기 위한 조선인’이었다.
그는 깃발을 들지 않았다.
심장을 다친 채, 숨을 죽이며 오늘을 건너는 자였다.
해방의 공간은 영웅들만의 무대가 아니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무대이기도 했다.
한때 조국을 사랑했으나 조국 앞에 침묵할 수밖에 없던 한 남자의 초상이다.
순형, 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이름 앞에 붙을 마지막 한 줄을, 우리는 끝까지 지켜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