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이 지나간 자리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 경교장 앞.
태극기가 펄럭이는 그날, 정오의 태양 아래
세 발의 총성이 조선을 관통했다.
여운형, 사망.
그가 쓰러졌을 때, 피에 젖은 땅 위로
그가 품고 있던 ‘좌우 합작’의 희망도
같이 쓰러졌다.
강두석은 목포의 신문사 구독소에서 이 소식을 접했다.
활자 위로 떨어지는 땀방울을 닦지도 못한 채,
신문을 접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날 저녁,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책상 위엔 미완성 원고가 놓여 있었다.
제목은 ‘분단의 서곡.’
그 무렵, 순형은 서울 경찰청을 다녀온 뒤였다.
여운형 암살범은 ‘자유청년단’ 소속 백의사 계열의 한 청년.
그러나 배후는 알려지지 않았고, 곧 ‘단독범’으로 종결되었다.
그건 누구에게나 조작처럼 느껴졌지만, 누구도 말할 수 없었다.
경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일부는 오히려 묵인하고 있었다.
“이건 우리에게 기회입니다.”
서울 정보부 고위 간부가 순형에게 말했다.
“좌익은 지도자를 잃었고, 대중은 겁에 질렸습니다.
이 틈을 이용하면, 전남 지역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어요.”
순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두석이 떠올랐다.
한때 동경의 서재에서 함께 독립을 논하던 친구.
지금은 검거 대상 3순위.
하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꺼지지 않는 주저함이 있었다.
며칠 뒤, 순형은 목포로 내려와 비밀 회의를 열었다.
그는 각 면의 이장과 면서기를 불러
“지역 내 좌익 인물 및 민간운동가 명단 제출”을 지시했다.
그중에는 두석도 있었다.
‘사상적 확산 우려’라는 이유 하나로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회의가 끝나자 그는 문을 닫고 혼자 남았다.
주머니 속에 있던 두석과 함께 찍은 동경 시절 사진을 꺼내
한참을 바라보다가, 결국 구겨서 버리진 못하고 서랍 속에 넣었다.
한편, 두석은 정희의 석방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희는 정판사 사건 이후 간접 연루자로 분류되어
증거 없이 구금되어 있었다.
그녀는 야학 교사로, 해방 후 자발적 노동 교육을 조직했지만
그 ‘의욕’조차도 이제 ‘의심’이 되고 있었다.
두석은 자신이 직접 석방 청원을 넣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그의 모든 움직임이 이미 순형의 사찰 기록에 들어가 있다는 것.
그날 밤.
순형은 홀로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엔 반쯤 찢긴 두석의 원고 복사본이 놓여 있었다.
그 원고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말했다.
“우리가 싸운 적은, 사상이 아니라 불의였다.
그리고 그 불의는, 때때로 가장 고운 얼굴로 다가온다.”
순형은 눈을 감았다.
그 구절을 되뇌며, 자신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생각했다.
총성이 멈춘 자리엔 침묵이 있었고,
그 침묵을 틈타, 어둠은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작가의 말
여운형의 암살
그는 좌우 협력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었지만,
그의 죽음 이후, 조선은 분단의 불가피한 길로 미끄러졌습니다.
이제 강두석은 말할 수 없는 고립 속에,
그리고 순형은 불의한 체제의 손길 아래에서,
서로를 향한 갈등과 망설임을 키워갑니다.
역사는 총성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총성은, 단지 이미 움직인 것의 결과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