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북풍, 서북청년단
쫓겨온 자들이 쫓는 자가 되기까지
1946년 이후, 북에서 수많은 이들이 내려왔다.
그들은 평양의 성서학당에서 쫓겨난 목사였고,
토지개혁으로 땅을 빼앗긴 지주였고,
교회가 불타는 걸 바라보다 도망친 신자였다.
“우린 공산당에게 모든 걸 잃었습니다.
신앙도, 가족도, 조국도요.”
-장대현교회 난민소 일지-
서울에서 ‘서북청년회’가 창립되었다.
‘청년이 앞장서 공산주의를 몰아내야 한다’는 외침 아래,
수천 명이 모였다.
그리고 그 중심엔,
몰락한 신념과 분노로 무장한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말한다.
“우릴 죽인 건 공산당이오.
똑같이 갚아줘야 하지 않겠소.”
1946년 11월, 서울에서 결성된
서북청년회(서청)는
초기엔 “북에서 피란 온 기독청년들의 상호부조 단체”였다.
하지만 곧, 그들의 표면 아래
강한 반공주의와 폭력적 선민의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모집 전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공산주의와 타협할 수 없다.
고향을 빼앗긴 우리는, 이 땅에서 다시는 뺏기지 않을 것이다.
청년이여, 조국을 지키기 위해 뭉치라!”
지원 조건:
• 북에서 월남한 20세~30세 청년
• 기독교 신자 우대
• 공산주의 피해 경험자 우대
• 신체 건강한 남성
•
강령과 행동
서북청년회는 다섯 가지 강령을 내세웠다.
• 조국 대한민국의 수호와 반공주의 실현
• 공산주의자와 동조자의 절멸
•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청년 도야
• 미군정에 협조하여 질서 유지
• 월남자와 피란민의 구호와 조직화
•
그러나 현실에서 그들의 ‘절멸’은
법과 윤리가 아니라
몽둥이와 칼자루로 이뤄졌다.
이후, 서청은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사병 조직’의 기능으로 전락했다.
그들은 노동자 집회를 깨부쉈고,
학교 안 야학을 폐쇄시켰고,
좌익 계열 교사와 학생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았다.
“서북청년회는 권력의 민간 도구였다.”
밤례는 시립구호소에서 봉사하며
서북청년단 출신 청년 하나를 만난다.
그는 경쾌하게 말했지만,
눈동자는 어디에도 머물지 못했다.
“아줌마, 이젠 우리가 칼자루 쥔 거 아시죠?”
밤례는 일기에 썼다.
‘쫓겨난 자들이 누군가를 쫓기 시작했다.
불에 그을린 손이,
이젠 다른 이의 목을 조이려 든다.’
두석은 민의(民意)의 글을 준비하며 중얼거렸다.
“저 청년들 속에도 진실은 있지.
허나, 진실은 칼이 되면 진실이 아니지…”
그는 백성들에게 호소하는 글을 썼다.
“사람이 사람을 짐승이라 부르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피의 숙명뿐입니다.”
그들은 총 대신 곤봉을, 사상 대신 분노를 들었다.
#작가의 말
서북청년단은 하나의 단체가 아니라, 시대의 거울이다.
그 안엔 믿음을 빼앗긴 신자의 절규도 있었고,
가족을 잃은 이의 분노도 있었다.
그러나 그 분노가
폭력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때,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무기화한 사람들이었다.
국가는 그 분노를 이용했고,
사회는 그들에 침묵하거나 동조했다.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 분노는 누구의 것을 대신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