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개나리 55

뿌리 뽑힌 사람들

by 강순흠


개혁인가 숙청인가, 북에서 남으로 흐른 사람들

평안도에서 온 교회 청년 김치근이 종이에 싸온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봉투엔 ‘순화리 신앙촌’이라 쓰여 있었다.
강두석은 조심스레 그 글을 펼쳤다.
“우리 교회는 해산당했습니다.
목사님은 반동이라 불리며 끌려갔습니다.
밤마다 ‘지주’를 색출한다는 인민위원회의 확성기 소리에
아이들이 울지 않고 떨며 잠듭니다…”
밤례는 손끝으로 떨리는 글씨를 따라 읽었다.
“사람이 사람을 고발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어요.”

1946년 3월. 북조선 임시정부 성격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
구호는 그럴듯했다.
하지만 그 안엔 전쟁보다 더한 내란이 숨어 있었다.
“지주의 딸이라면, 신랑도 이장도 될 수 없소!”
“고발하면 내 땅 생긴다네!”
북의 농촌은 고발과 배신이 일상이 되었다.
양반이란 이름은 ‘반동분자’로 바뀌었고,
조선총독부에 협력했던 친일 지주들은 처형되거나 추방당했다.
그러나 그 속엔 정직하게 살았던
그저 부유했던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평양에서 목사님이 내려왔습니다.”
영재가 말했다.
두석은 낯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내 이름은 이계실입니다.
...목회를 했고, 지금은 쫓기듯 내려왔습니다.”
그는 고요히 말을 이었다.
“저희 교회는 기독교가 ‘서구 자본주의 잔재’라며 불법화된 후
철야 예배도, 성탄도 사라졌습니다.
가장 참혹했던 건,
믿음을 지킨다는 이유로 내 아내를 떠나보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의 눈동자엔 타지 않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서울역 광장에는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은 토지개혁과 사상 탄압, 종교 해산, 공장 국유화로 인해
터전을 잃고 쫓기듯 남쪽으로 내려왔다.
“공장도, 땅도 다 국유화됐다더라.”
“내 조상 땅인데, 문서 찢어버리고 말이야…”
“하나님을 부르니 공산주의를 부른다며 목사님을 끌고 가더군.”
그들의 얼굴에는 분노보다 더 깊은
상실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밤례는 여인들 틈에서 아이를 안고 오는 이의 손을 잡았다.
“여긴 괜찮아요. 조금은 더디더라도,
믿고 살 수 있는 곳일 거예요.”

밤이 깊었다.
두석은 복도에 앉아 이계실 목사의 말을 되새겼다.
“사람을 바꾸는 개혁이라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학살입니다.”
그는 일제에 부역한 자들이 떵떵거리는 남쪽을 떠올렸다.
또 북쪽에선 자기 아버지를 고발한 소년이 영웅이 되는 현실도.
“이대로 가다간…
조선은 두 개의 ‘비극’으로 갈라지겠지.”

#작가의 말
북조선의 토지개혁은
일제를 등에 업고 누렸던 이들의 부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과정엔 ‘복수’가 있었고,
사람의 신념과 종교, 가정까지 무너지는 ‘숙청’도 있었다.
개혁이 ‘뿌리’를 뽑는다면
그 자리에 무엇이 심기게 될까.
그것이 미래를 위한 씨앗이 아니었다면,
그 땅은 오랫동안 피를 흘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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