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작은 유치원 특강 시간이었다. 복숭아(딸, 현 12세)가 5세 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동네 유치원에서는 6세 때부터 하루 30분씩 영어 특강 수업을 했다. 이 아이의 본격적인 영어 공부가 선생님을 따라 영어로 노래를 부르며 알파벳을 깨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특강이라 담임선생님 대신 외부 강사가 와서 수업을 진행했는데, 유아 사교육 시장에 어지간히 무지했던 나조차 들어본 적이 있는 대형 영어 교육 업체 소속이었다. 그곳에서 제공한 교재는 한눈에 봐도 알파벳조차 잘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읽기에 어려운 동화책이었다. 하지만 한글을 읽지 못한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책을 안 읽어주냐는 강사의 반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것... 인가요... 아, 그렇군요.... 그래서 그렇구나..."
영어 선생님과의 첫 상담은 그렇게 짧고 쉽게 끝났고, 그때부터 나 역시 유치원 영어 수업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당장 인터넷 서점에서 제일 잘 팔리는 영어동요 CD를 주문했다. 노래는 차만 타면 틀어줬고, 유치원에서 받아 온 동화책은 자기 전에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읽어주었다. 맘 카페에서 입소문 난 영어 보드 게임을 사서 함께 놀기도 했고 7세 때는 무려 동네 아줌마들과 우르르 학원에 몰려가 방학 특강으로 개설되었다는 영어 캠프에 등록했다. 아침 9시부터 2시까지 4주 코스 영어 수업에 120만 원이었다. 점심밥은 주지만 교재비는 별도였다.
5개월 치 유치원비에 해당하는 금액을 일시불로 긁고 온 날, 가슴이 두근거려 밤늦게까지 말똥 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 답답한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난다. 내 머릿속에서는 '한글도 제대로 못쓰는 아이에게 왜 벌써 영어를...'이라는 생각과 '아이들의 뇌는 말랑해서...'로 시작되는 영어 선생님과의 상담 내용이 충돌하여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나마 위로가 됐던 건 복숭아가 그 영어 캠프를 즐겁게 다녔다는 사실이었다. 하원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면 신발을 신고 나온 아이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날 있었던 일을 종알종알 얘기해줬다.
"오늘은 Block Area 랑 Book Area에서 놀았어. 너~무 재밌었어."
왜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재밌었다 하고 빨리 내일이 오기를 기다리며 잠이 들었으니, 확실히 말랑말랑한 뇌라 그런가 싶기도 하고, 전문가는 역시 다르긴 다르네 싶기도 하고, 벌써부터 이렇게 돈이 들면 앞으로 어떻게 하지 싶기도 하고, 아유 그래도 내 새끼 공부시키는 일에 돈을 아낄 수는 없지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겠군 다짐도 하고, 그래서 구멍 난 팬티를 꿰매 입던 그 옛날 어머니들의 악착같은 교육열을 떠올렸다가, 그렇게 공부시켜서 대학 보내봤자 제 잘나서 간 줄 알지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는 중년 부인의 헛헛함을 미리 맛보고 긴 한숨을 쉬기도 하고. 하지만 좋다 하니까... 재밌다 하니까... 이렇게 해도 된다는 허락을, 당사자인 복숭아에게 받았으니까. 아이를 키우는 것은 처음이라 아는 것 없는 내가 나 자신에게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전문가로부터 해야 한다는 협박같은 강요를 받아 했을 뿐인데, 그냥 그렇게 따라서 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아이에게 받은 기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생이 되었다.
1학년 반모임에 나가보니 많은 아이들은 이미 복숭아가 한 영어에 코웃음을 칠 정도로 저 멀리까지 달려가 있었다. 누구는 무슨 노블을 읽네, 누구는 문법 공부를 시작했네, 누구는 수학 학원 어디에도 합격해서 다니네... 방학 때 영어캠프 4주 코스를 보내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이 교육에 열혈인 엄마임을 자부하고 있었던 나는, 그 자리에서 끽소리도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모임에서 주워들은 영어학원 이름을 검색해보고 몇 군데 전화를 돌려 상담을 요청했다. 상담을 받으려면 그전에 레벨테스트를 봐야 한다는 얘기에 테스트 예약을 했고 테스트 한 자리에서 바로 똑, 떨어졌다는 결과를 들어야 했다. 레벨 테스트 결과 통보가 곧 상담인 셈이었다.
"기초가 안돼 있네요. 좀 더 공부해서 오세요."
학원의 부원장은 레벨테스트 비용 2만 원에 딱 맞는 10분을 나에게 내주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책을 많이 읽고 동영상도 많이 보고 단어도 더 알아야 합니다."
"학교 갔다 '똔'마려우면 집에 와야 하는 1학년인데요, 뭘 더 얼마나..." 하는 나의 외침은 그저 나약한 에미의 징징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내 얘기를 들은 엄마들은 복숭아 같은 아이들이 다닐만한 학원과 과외선생을 추천해주었다. 참, 착하고, 친절하신, 분들이었다.
복숭아는 5년째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다. 4학년 때까지만 해도 오후 7시면 학원 수업이 끝나 집에 와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는데, 5학년이 된 지금은 7시부터 10시까지 수업을 한다. 수업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 학원을 옮겨야 하나 싶어 집 근처에 전화를 돌려보니 초등학교 고학년 대상 수업은 대부분 그 시간대라는 답을 받았을 뿐이었다. 계속 다니던 영어학원을 이제 와서 그만두자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는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 앞만 보고 달릴 줄 아는 경주마였는데 눈가리개를 풀고 좌회전과 우회전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나에게 앞만 보고 달려도 된다는 면죄부를 부여한 당사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어렸을 때부터 학원의 영어 수업에 단련이 되어있는 복숭아는 바뀐 수업 시간에 별 상관하지 않는 눈치다. 시간대가 바뀌어도 같은 반 아이들 모두 계속 다니는데 뭐가 문제냐 되려 반문한다.
일주일에 두 번, 10시에 맞춰 학원 앞으로 데리러 간 지 2주가 지났다. 화요일보다 목요일 교통난이 더 심해서 목요일만큼은 남편과 2인 1조가 되어 가야 한다. 한 사람이 건물 앞에서 복숭아를 기다렸다 데리고 나오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차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불법 주정차 단속이 심한 지역이라 어쩔 수 없다. 실제로 석 달 전 여기서 나 혼자 아이를 기다리다 주정차 위반 과태료를 부과받은 적 있다. 밤에는 더 심하게 단속할 것이었다... 싶으니 남편에게 같이 가자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제는 차를 세운 지 3분이 채 지나지 않아 경찰차 대여섯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도로에 들이닥쳤다.
"차 빼세요. 차 빼십시오. 단속합니다. 지금 당장 차 빼십시오."
확성기의 외침과 동시에 누군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여기다 차 세우시면 안 됩니다. 차 빼십시오. 지금 빼십시오."
침묵했던 어두운 도로 위는 경찰차 사이렌의 번뜩이는 불빛과 경고음, 아이를 기다리는 학부모들 차의 비상등과 깜빡이가 뒤섞여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난생처음 만난 경찰 아저씨를 보고 당황한 나는 수업 끝나는 시간이 5분 정도 지났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됐었다는 미련과 불안이 뒤섞인 채 급히 차를 뺐다. 이 새까만 밤, 어디서 딸을 만나야 하나 골목을 돌던 중 남편과 통화가 됐다. 가까스로 남편과 딸의 모습을 본 나는 소리를 질렀다.
"여기야!!! 빨리 타!!!"
그 찰나의 순간, 경찰 아저씨는 또 형광 연두의 조끼를 번뜩이며 불쑥 등장했다. 친절하게도 뒷좌석 문을 닫아줌과 동시에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다시 경고한다.
"제가 닫아드리겠습니다. 대신 앞으로 여기다 차 세우지 마십시오."
죄송합니다, 앞으로 절대 다시 불법 주정차를 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천장을 빤히 쳐다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 집 천장은 내 한숨에 언젠가 깊은 구멍이 뚫릴 것이다.
경찰 단속을 피해가며 해야하는 학원 라이딩이라니. 영어란 무엇이고 학원이란 무엇인가. 열두 살 난 아이에게 적합한 교육은 무엇인가. 밤 열 시에 수업을 마치는 학원과 아이들을 기다리는 학부모들의 차량이 주정차하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경찰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현명하고 열심이며 옳은 사람이 되는 걸까.
이 숨은 언제까지 내쉬게 될까. 이런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