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철학으로 『어린왕자』 읽기
2) 찾아가는 인문학
부산시에서 찾아가는 인문학 강의 ‘휴먼북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천편일률적으로 강의는 강의실이라는 고정된 공간에 모여 하기 마련인데 사고의 유연화를 시도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부산시의 ‘휴먼북 프로그램’이다. 부산시민이 이 사이트에서 강사를 신청하면 신청한 사람이 사는 근처 카페에 강사가 가서 인문학을 강의하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발상이 신선하고 좋아 나는 이 프로그램 강사로 일하고 있다.
한 시민이 하이데거 철학으로 『어린왕자』에 대해 분석해 달라는 신청이 있었다.
♣ 하이데거 철학으로 『어린왕자』 읽기
흔히 <어린왕자>를 어른이 읽어야 하는 동화라고 한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동화라고 반드시 어린이만 읽어야 하는 법은 없지만 세상 살다보면 자연스레 어른들은 동화를 멀리하게 된다. 그러면서 초심을 잃고 방황하며 인생을, 세상을 힘들게 살아내고 있다. 세상의 가혹함, 인생의 무게를 경험한 어른들은 어떤 초심을 잃어버렸을까? 무엇이 어른들을 힘들게 할까? 이 힘듦이 어른의 문제일까, 아니면 세상의 문제인가?
거두절미하고 이 문제를 조금 어렵게 분석, 해부해 볼까 한다. 글 청탁(부산광역시 휴먼북 사업- 인문사회학 분야에 관심있으신 분이 연락하면 찾아가서 인문사회학 관심있는 분야 무엇이든 강의하는 서비스입니다)이 들어와서 정말 오랜만에 <어린왕자>를 다시 읽었다. <어린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의 시대가 실존주의 철학, 또는 현상학이 서양사를 휩쓸던 때라 이 지면에서 <어린왕자>를 하이데거 철학으로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어른들이 무엇을 잃고 있으며 왜 방황하고 있는지 그 근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자이다. 전자를 그를 현존재라고 하면서, “이 존재자, 즉 무엇보다도 묻는다는 존재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를 우리는 현존재(現存在)라고 술어화한다.”고 하면서 후자는 다시 용재자(用在者, Zuhandenes)와 전재자((前在者, Vorhandenes)로 구분하는데, 이는 존재자를 대하는 현존재의 그때그때의 태도에 달려 있다. 즉 구체적 삶 속에서 현존재가 존재자를 사용물(도구)로 삼으면 용재자가 되고 단순한 관찰의 대상으로 대하면 전재자가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 자기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인 셈이다.
현존재는 스스로 있으면서 이 있음 자체를 가장 큰 문제로 삼고 있는 존재자이다. 현존재에게 가장 큰 문제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자기자신의 존재이다. 그리하여 현존재는 묻는 존재자이면서 동시에 물음이 걸리는 존재자이다. 그런 현존재에게 존재란 그때마다 그 자신의 존재이다. 현존재는 어쨌든 살고 있으면서 자기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이것을 실존(Existenz)이라고 한다. 결국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는 것이다. 즉 ‘내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 수 있는가.’로 질문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현존재는 두려움을 타는 정상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두려운 것을 개시한다. 이에 반해 불안은 우리를 위협하는 대상이 없다. 따라서 불안의 대상은 특정한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아니다. 완전히 무규정적이다. 세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무의미해지는 것, 그것이 불안이다. 불안의 대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데도 없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무(無)라고 한다. 결국 불안거리는 무이다. 무가 두려운 것이다. 불안이 직면하는 그것은 ’세계-내-존재‘ 자체이다. 불안이 스스로 불안해하는 그 불안의 대상은 세계-내-존재 자체임을 의미한다. 불안해하는 자는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 자신인 것이다. 현존재는 세계 속 자기를 상실하고 으스스함 속에서 단독적으로 자기의 실존을 결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불안의 이유이다.
이 불안을 근본적으로 안고 살고 있는 인간인 현존재는 끊임없이 비본래성에 더 힘들어한다. 비본래성이란 실존론적으로 현존재가 세계 내부적 존재자와 교섭하면서 사는 존재양식- 세인의 존재양식과 퇴락적 존재양식-을 가리킨다. 한 마디로 존재하는 것(존재자)과 교섭하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은 모두 비본래적이다. 우상숭배, 욕망에 찌든 종교활동 등이 그 예이다. 자기의 본래성을 망실한 현존재는 비본래성에 몰두하는 비본래적 존재양식이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본래성이란 현존재가 실존론적으로 본래적 자기에 입각해서 자기의 존재를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즉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여 독자적 자기를 회복하는 경우를 본래적이라 한다.
이제는 하이데거 철학의 배경과 사상사적 의미를 살펴보자. 하이데거 사상이 20세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우리 시대의 위기가 근원적으로 어디서 발원하는지를 철저하게 반성하였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현대를 ’세계는 황폐하게 되고 신들은 떠나버렸으며 대지는 파괴되고 인간들은 정체성과 인격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해버린 시대‘라고 규정하였다. 인간들 비롯한 모든 존재자들이 독자적인 생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용가능하고 수단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자들은 인간에게 이용가능한 에너지로만 취급되었고 자연과 대지는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고향은 현대 기술문명에 대한 대칭개념이다. 현대의 기술세계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들을 계산 가능한 에너지원으로서 무자비하게 동원하는 세계인 반면 고향은 인간과 모든 존재자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존재를 발현하면서도 서로 간에 조화와 애정이 지배하는 세계다. 그러나 이러한 고향이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와 전적으로 다른 신비한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물들에 대한 지배의지에서 벗어나 순연한 몸과 마음으로 세계와 사물에 접할 때 우리의 지배의지 때문에 그동안 은폐되어 있었던 자신의 충만함과 깊이를 드러내는 일상적인 세계 그 자체다.
하이데거는 ’우리는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지만 사물과 자연 그리고 인간들이 갖는 본래의 충만함과 생생함을 지각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대지를 보지 못하며 새소리를 듣지 못하고 인간들 사이의 언어는 자연을 조작하기 위한 정보를 교환하는 황폐한 언어가 되었다.
하이데거는 단순 소박한 자연을 존재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가 단순 소박한 자연의 소리인 존재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존재의 빛 안에서 모든 사물들을 그러한 존재의 현현으로서 존중할 때만 우리가 사는 터전은 고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고향은 하늘과 대지, 인간과 신, 그리고 모든 사물들이 각자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가 되는 곳이다.
하이데거는 「근거율」이라는 강의에서 안겔루스 질레지우스의 시를 인용한다. 장미는 실로 이유없이 핀다. 그러나 과학은 장미는 왜 피는지, 어떻게 하면 장미를 더 아름답게 꽃피게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런 질문은 우리가 장미를 우리의 통제하에 두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는 정작 장미 자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물의 조건과 원인을 따져 묻는 사유방식을 하이데거는 ’계산적 사유‘라고 부른다.
인간은 인간인 한, 이렇게 로봇처럼 살면서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없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사물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드러내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부른다. 인간은 사물들의 고유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장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과 사물들의 고유한 존재를 드러내면서 그러한 존재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만 자신의 삶에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다.
우리가 존재자들의 근원적인 존재를 경험하려면 자신의 진리를 내보이면서 다가오는 존재자들에게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태도를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함(sein-lassen)”이라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 모든 조작적인 태도를 멀리하는 노자의 무위(無爲)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모든 지배의지를 떠나서 자연을 그 자체로 보려고 하는 하이데거의 입장과 무위자연을 말하는 노자의 입장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가까움이 보인다.
하이데거 세계에서는 존재자들 사이의 위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역으로서의 세계도 사물에 깃드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사물은 단순히 세계 내의 사물이 아니라 세계를 모으는 것으로서 사유되는 것이다. 사물은 세계라는 심연을 모으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세계의 깊이를 간직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인간은 또한 존재자를 지배하는 주체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계가 사물에 깃들고 사물이 세계를 모으는 사건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그것들로 하여금 각각의 고유한 본질을 발현케 하는 현-존재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현존재에게 촉구되는 태도는 사물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외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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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하이데거 사상으로 이제 <어린왕자>를 분석해보자. 보아뱀을 그린 여섯 살 주인공은 끝내 어른들로부터 보아뱀이라는 것을 인정받지 못했다. 어른들은 다들 모자라고 한 것이다. 그 후 주인공은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사막에 불시착했다. 그곳에서 어린왕자를 만났다. 이는 곧 책 속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어렸을 때의 작가 생텍쥐페리 자신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끊임없이 묻는자라고 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 수 있는가.’로 질문하는 자가 바로 존재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린왕자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진정한 존재자이다. 어른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위에서 시키는 일만 맹목적으로 할 뿐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다. 진정한 존재자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어린 왕자>는 하이데거에 의하면 진정한 존재자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동화인 셈이다.
현존재의 본질은 실존에 있으며 실존에서 고민하는 현존재는 항상 불안에 휩싸여 있다. 어린왕자는 조종사에게 양 한 마리 그려달라고 계속 부탁한다. 이런 행위는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한, 즉 실존에 허덕이는 어린왕자가 자신의 존재를 현실에서 찾기 위해 취하는 실존적 행태이다. 양이 무엇을 상징하든 어린왕자에게 양은 자신의 실존을 찾는 행위인 것이다.
조종사가 그린 양에게서 어린왕자는 보아 뱀과 코끼리를 보았다. 이것은 바로 어린왕자라는 존재자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 불안을 떨쳐버리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타인, 또는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어른이 된 자신과 어렸을 때의 자신이기도 하다) 불안이 제거되거나 완화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불안은 무라고 했다. 無인 불안이 바로 ‘세계-내-존재’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양을 그려달라는 어린왕자의 부탁은 바로 자기의 존재를 세계에서 확인받고자 하는 행위로 어쩌면 그것 자체가 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존재자인 인간은 자신의 본래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질문하고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어린왕자의 행위는 바로 이런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단순 소박한 자연을 존재라고 부르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단순 소박한 자연의 소리인 존재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존재의 빛 안에서 모든 사물들을 그러한 존재의 현현으로서 존중할 때만 우리가 사는 터전은 고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고향은 하늘과 대지, 인간과 신, 그리고 모든 사물들이 각자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가 되는 곳이다. 그런데 어린왕자는 고향을 상실한 인물이다. 이는 생텍쥐페리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책 속의 조종사이기도 하다. 모든 존재가 그 존재 자체로 존중받을 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느끼며 살 수 있는데 현대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의 존재는 이용가능한 수단으로만 취급되고 계산적으로만 이용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 자체의 본래성을 잃어버리고 정신적 방황을 하는 존재인 것이다. 실낙원처럼 고향을 근원적으로 상실한 존재인 것이다. 어린왕자가 끊임없이 별을 이동하며 무엇을 찾는 행위는 바로 자신의 본래성을 찾기 위한 행위로 고향을 상실한 현대의 인간을 대변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사물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드러내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한다고 했다. 우리가 존재자들의 근원적인 존재를 경험하려면 자신의 진리를 내보이면서 다가오는 존재자들에게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태도를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함(sein-lassen)”이라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 모든 조작적인 태도를 멀리하는 노자의 무위(無爲)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모든 지배의지를 떠나서 자연을 그 자체로 보려고 하는 하이데거의 입장과 무위자연을 말하는 노자의 입장 사이에는 간극이 거의 없다.
어린왕자가 일곱 별을 찾아 나서며 결국 지구에 오는 과정은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함’이다. 이는 노자의 無爲 사상과 거의 같다. 노자의 무 사상은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사상이다. 장미꽃이 피는 이유를 서양은 분석적으로만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장미꽃을 진정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장미꽃도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자연을 동등한 존재자로 인식하며 모든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일, 그것이 노자의 무위사상이며 하이데거의 현존재 철학이다. 분석과 원인적 사고는 반드시 차이와 차별을 잉태한다. 가령, 당신이 공부를 못하는 원인은 공부를 안 하기 때문이며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는 근원적으로 차이와 차별을 잉태한다. 그러나 근거적 사고는 ‘공부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이다. 도대체 공부가 무엇이기에 반에서 몇 등을 해야 잘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가, 라고 되묻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노자의 사상에서 공부란 반에서 1등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에게 자신의 고유성과 본래성을 찾아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등수는 중요하지 않으며 모든 학생, 나아가 모든 자연을 동등하게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공부다. 존재의 근거를 가르치는 것이 바로 공부인 셈이다. 따라서 장미꽃과 인간 모두 동등한 존재자로서 어린왕자는 이런 자신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별을 찾아 여행을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남과 떠남을 반복한다. 하나 밖에 없는 꽃에서 친절과 사랑과 실망을 느낀다. 그리고 허영심 많은 왕을 만나고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한 술꾼을 만나고 숫자에만 골몰하는 사업가를 만나고 무의미한 가로등 관리인을 만나고 덧없고 무의미한 지리학자 노인을 만나고 헤어진다.
결국 지구에서 노란뱀과 사막과 바위에서 진한 외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여우를 만나서 서로 ‘길들여짐’의 의미를 교환하며 좋아함, 친구, 조금씩 다가오기, 정성, 마음. 책임,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어린왕자는 끝내 사랑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함의 의미를 대뇌이며 떠나고 만다. 떠나기 전 의자를 조금만 옮기면 계속 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남긴다. 이는 진리, 즉 현존재의 본래성을 찾는 방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상대를 달리 보고 알아차리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방을 계산적 이용가치로만 보지 말고 정성을 다해 조금씩만 다가가면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외로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현존재의 책임이고 자신의 본래적 존재 의미를 찾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린왕자는 말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며 별이든 사막이든 집이든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야. 근데 지구인들은 이렇게 쉬운 것을 너무 못 찾는 것 같아. 행복은 마음으로 찾아야 하는데…” 이는 결국 작가 생텍쥐페리의 말이자 하이데거와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것들로 하여금 각각의 고유한 본질을 발현케 하는 현-존재로서 우리 모두는 존재한다고 했다. 노자는 존재론적 근거지움(모든 존재가 평등한 상생관계)으로 무위자연을 주장했다. 즉, 현존재에게 촉구되는 태도는 사물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외경이다. 이것이 바로 본래성을 찾는 길인 것이다. 생텍쥐페리가 어린왕자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도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결국 이 ‘본래성 찾기’라고 볼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외경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존재자를 평등하게 대하는 태도, 그 태도에서 사랑을 배우고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근원적 불안이나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지구 생태계 하 모든 현존재자의 책임이다.
부가적으로 <어린왕자>에서 나오는 의미를 알아보자. 숫자 325(소행성 B612), 자주색, 담비, 왕좌, 달력, 쥐는 ’왕의 별‘의 상징적인 의미이다. 숫자 325가 인간의 의미를 나타내고, 자주색, 담비, 왕좌는 인간이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 즉 권력, 권위, 부의 의미를 나타낸다. 달력, 쥐를 통해 이러한 욕망은 한계가 있다는 것, 즉 착각일 뿐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찬미하다‘의 뜻은 외양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모자는 겉모습에 만족하는 허영장이의 착각을 나타낸다. 술을 마시는 행위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한 망각의 의미이고 또 술을 마시는 이유를 밝히는 과정에서 인간의 부조리를 보여주었다. 이런 부조리는 술병을 통해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풍뎅이는 주기를, 파리와 꿀벌은 연대성과 근면을 나타낸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별을 소유하는 상인에게 자연의 주기나 연대성, 근면은 중요하지 않은 요소로 작용한다. 그리고 별을 세는 이유를 밝히는 과정에서 인간의 부조리가 다시 한번 나타나고 있다.
가로등은 시간의 개념이고, 붉은 색 사각무늬의 손수건을 통해 근면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꽃, 바다, 강, 도시, 산, 그리고 사막은 눈으로 보이는 영원성의 의미이고 고정적이라는 말은 정신세계를 배제함으로써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의 별과 허영장이의 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외부의 세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즉, 쥐의 소리를 듣고 백성이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왕의 모습과 박수소리로 인해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허영장이의 모습이 이를 의미한다.
상인의 별과 지리학자의 별은 눈에 보이는 외부의 세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들이다. 항상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별을 소유하려는 상인의 모습과 증거물을 통해 이를 확인하려는 지리학자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정리하면, 첫째, 눈에 보이지 않는 외부의 세계를 중요시하는 왕의 별과 허영장이의 별 사이에서 왕의 별은 외부의 세계로부터 시작된 착각이고, 허영장이의 별은 내면의 세계로부터 시작된 착각이다. 둘째, 주정뱅이의 별에서 알 수 있었던 부조리는 상인의 별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외부의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외부의 세계는 주정뱅이의 별을 사이에 두고 연결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점등이의 별은 왜 다섯 번째에 위치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여섯 개의 별들 중 가장 이상적으로 보이는 점등이의 별은 가장 나중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다섯 번째에 위치하는 이유는 지리학자의 별의 기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지구를 이루는 요소의 일부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어린왕자가 지구로 이동하기 위한 다리 역할을 하는 곳이 지리학자의 별이다. 그러므로 가장 나중에 위치를 해야 하는 점등인의 별은 지리학자의 별과 자리를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런 단어와 문장의 의미 분석은 위에서 말한 ‘현존재의 본래성 찾기’라고 봐야 한다. 인간(지구인)의 근원적 불안과 외로움은 모두 인간 위주의 사고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다른 존재를 이용수단과 하등의 것으로 생각하는 차별적 사고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더 말하지만 현존재의 본래성을 찾아야 하며 이는 모든 존재자를 평등하게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사랑’이고 ‘책임’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읽기’이고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나타남과 관계되는 다양한 의미를 주의깊게 분석한다. 동화의 직관적 통찰 인간 원형으로 다루어지는 삶의 다양한 모습과 관련해 현상학적 방법을 추구하였다. 하이데거는 살아있는 세계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의문과 실제적 활동에 관심을 집중했다. 결국 ‘어린왕자’는 하이데거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자’이자 ‘현존재’이며 ‘존재자의 본래성 찾기’를 하는 동화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