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없는 것들
1.
한 남자가 어슬렁어슬렁 밤거리를 거닐고 있다. 그 옆을 지나가던 여자를 따라간다. 여자가 겁을 먹고 자기가 살던 원룸으로 뛰어간다. 남자가 빠르게 따라간다. 이 순간 AI와 위성이 연계된다. 근처를 순찰하던 경찰에게 연락된다. 재빨리 경찰은 연락받은 곳으로 달려간다.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남자가 여자를 뒤에서 붙잡고 때리며 강간하려 한다. 그때 경찰이 도착해 강간범을 향해 총을 쏜다. 강간범 남자는 그 자리에서 피 흘리며 죽는다. 여자는 무사하다.
‘이 개 같은 창녀년!’ ‘좆 달린 수컷은 다 좆 짤라 죽여 버려야 해.’ ‘○○○대통령 목 잘라 개에게 줘버리자!’ 각종 혐오사이트와 진영 유튜브에서 난무했던 글과 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댓글을 쓰는 순간 AI가 바로 잡아낸다. 그리고 정의의 심판관(사법 경찰)이 들이닥쳐 그들을 잡아간다. 그들은 하루 종일 AI가 내뱉는 심한 욕을 들어야 하는 감옥에서 10년형을 살아야 한다. 표현의 자유라 할 수 없는 이런 막말이 난무하는 시대는 옛말이 되었다.
‘삐에에엥엥!’ 경찰차가 소리 내고 달려오자 여러 명의 경찰이 차에서 내려 범죄의 장소를 급습한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현장 체포합니다.” 경찰들이 두 남자를 붙잡고 수갑을 채운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이 재벌로부터 검은 돈을 받는 장면을 잡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CCTV와 고지능 AI 덕분이다.
성추행하거나 검은 돈을 주고받는 정치인들도 더 이상 과거가 되었다. 그 순간 AI가 그 영상을 바로 인터넷에 올려버린다. 그러면 그 직후 그런 정치인은 바로 잡혀 이마에 ‘성추행(비리) 정치인’이라는 문구를 불로 지지는 자자형(인두형)을 당해 거리로 내몰려 돌팔매를 당하는 형벌을 감내해야 한다. 자살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긴 법정 다툼도 필요가 없다.
뿐만 아니라 AI는 사회의 논쟁이나 분쟁, 다툼도 깔끔하게 해결한다. 20여 년 전 의대생 확대 방안을 놓고 의학계가 무기한 전면 파업을 하자 수많은 사상자가 났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통을 받고 있던 때라 그 피해가 더욱 심했다, 의사들이 응급실을 폐쇄하자 병원을 가지 못해 길거리에서 죽어나가는 국민이 수 백 명이 되었다. 그래도 의사들은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또한 큰 홍수로 피해가 엄청 나자 그 결과를 놓고 정치인들은 편을 갈라 네 탓만 할 뿐이었다. 4대강 사업 때문이다, 댐 수문 개방 등 국가의 홍수조절 능력 상실인 무능 때문이라는 둥 진영 논리만 있을 뿐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문제제시나 방안은 없었다. 국가적 사업에도 마찬가지다. 원자력을 계속 해야 하는지, 태양열을 해야 하는지 등 어떤 일만 있으면 죽기살기로 서로 싸움만 할 뿐이었다. 정치인만이 아니었다. 국민들도 서로 편을 갈라 험악한 말을 해가면 다투었다. 국가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국가적, 사회적 손실이 막심했다.
그러나 이런 장면도 이제 볼 수 없는 시대다. 고지능 AI가 빅데이터로 세계의 사례를 다 검토하고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논리적, 합리적으로 답안을 내놓는다.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틀린 적이 없다. 감정이 배제된 채 내놓은 논리적, 합리적 해결책은 그야말로 솔로몬의 지혜 그 자체다. 바야흐로 AI의 철인정치 시대다. AI가 내놓는 해결책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러니 자연히 다툼이 없어졌다.
2040년, 고지능 AI가 사회 구석구석 설치되어 있는 수억 만대의 투시기능이 있는 특수 고화질 CCTV를 통해 국민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거기다 AI는 최첨단 위성과 연결해 국민 모두의 집안 구석구석까지 들여다보고 녹화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완벽히 국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안방에서 부부가 섹스를 하거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만 스위치를 누르면 AI가 사실 여부를 정확히 판단해 그때만 녹화를 중지한다. 거대한 판옵티콘이다. 각종 범죄와 비리는 물론 그 어떠한 죄나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세기말적인 강력 범죄를 타파하기 위해 처벌을 대폭 강화했다. AI가 범죄를 즉시 판단해 알려주면 경찰이 현장에서 바로 처단해 버린다. 강력범죄는 현장사살까지 한다. 일종의 타임머신기능과 심판관 역할을 하고 있는 AI 통제시대다. 범죄는 물론 어떤 비리와 폭력도 있을 수 없는 통제 사회이자 깨끗한 사회다. 바야흐로 정의로운 사회다.
그러나 이런 깨끗한 정의로운 통제사회를 극렬히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수도권의 한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정의로 겸임교수다. 세미나에서 그가 발표하고 있다. 주제는 ‘무엇이 정의로운 사회인가.’이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강렬하고 단단했다.
“아무리 비리와 범죄가 없더라도 전체적인 사회는 진정한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깨끗하지만 통제된 사회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가 마음껏 발휘되는 사회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믿어야 합니다. 서로를 믿어야 합니다. 깨끗하지만 통제된 것은 가짜 깨끗함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로 깨끗함을 유지해야지 처벌이 무서워 억지로 깨끗한 것은 깨끗한 척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선함은 파괴될 것입니다. 사회가 시끄럽고 비리가 있더라도 인간의 자유가 만발한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 자유와 신뢰야 말로 우리가 전체주의를 끝내고 끝까지 지켜야 하는 정의입니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그 자유가, 자유의지가 방임으로 흘러 엄청난 불법과 비리와 불평등과 극단적 대립을 초래하면 어떡하죠? 과거의 어둠과 혼란을 모릅니까? 인간의 기본적 인권도 지킬 수 없는 인간성 말살의 민주주의를 진정 모르고 그런 주장을 하십니까?”
한 참석자가 물었다.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전체주의적 평등보다 자유주의적 불평등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맞으니까요. 하나 덧붙이자면 서로를 믿고 소통하면 상당수의 대립은 풀릴 수 있고요. 설령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대립은 대립으로 놔두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입니다. 서로 다름이 있고 대립이 있어야 그게 민주주의죠.”
“교수님이 피해자라도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까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견딜 수 없는 불행과 불평등이 인생을 어둠으로 잠식할 겁니다. 그때에도 이런 주장을 할지 두고 보죠.”
정의로 교수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사회가 다시 과거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AI와 CCTV없는 사회로 돌아가자는 시위가 한창이다.
“공산주의자 ○○○ 없애고 자유민주주의 회복하자!”, “대한민국이 어찌 하다 이런 전체적인 나라가 되었습니까?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자유민주주의를 다시 되찾읍시다. 이 모든 것이 빨갱이 ○○○ 때문입니다. 빨갱이 ○○○를 구속시킵시다!”
시위대의 문구와 발언이 위험천만하다. 이런 시위가 점점 많아지자 여당 정치권에서 이 시대 마지막 남은 법을 통과시키려 한다. 일명 ‘예의 없는 것들’ 법이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나 표현을 써 이 정의로운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자, 즉 AI 사회를 부정하는 자는 바로 체포해 예의 없는 자들이 모여 사는 섬에 가두어 자기들끼리 평생 살게 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범죄적 발언이나 혐오발언뿐만 아니라 갑질, 왕땅하는 등 불평등하고 차별적 행위를 하는 자들을 AI가 즉시 잡아 아예 없애거나 격리하자는 취지의 법이다. 역겨운 과거의 대한민국으로 회귀하려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이자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다.
국회와 사회의 분열, 끝없는 토론 등 진통 끝에 드디어 ‘예의 없는 것들’ 법이 통과되었다. 사회는 완전 AI의 통제 하에 놓였고 그 통제 하에 범죄는 물론 불평등과 갑질, 차별 등 악질적인 폐습은 완전 사라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말을 하고 위로를 하고 사이좋게 지낸다. 따뜻한 가식이다. 그래도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다. 호모사피엔스 이래 가장 평등하고 비리 없는 사회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반겼고 또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마음속에 쌓고 있었다. 몇 년이 흘렀을까.
“정의로 교수이십니까?”
말끔한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정의로 교수가 운영하는 ‘자유와 정의의 공간’ 소장실을 방문한다.
“네. 제가 정의로 소장입니다.”
“연락받으셨죠? 저를 따라 가시죠.”
정의로 교수가 한 남자를 따라간 곳은 ‘자유혁명연구소’다. 규모가 엄청나다. 연구소 안 신소재 복도에 들어서자 역시 AI 로봇이 안내한다. 긴 복도를 지나 원형사무실에 들어가자 중노년의 남자와 중년의 여자가 정의로 교수를 맞이한다. 남자가 먼저 말을 건넨다.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 단체는 잘 아시죠? 지난 번 세미나 때 발표는 잘 봤습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세미나 후원도 해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앉으시죠.”
모두가 자리에 앉자 로봇이 커피를 가지고 온다. 정의로 교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번엔 여자가 말을 꺼낸다.
“교수님도 여기에 오신 이유를 대충 눈치 챘겠지만, 거두절미하고 직접 제안하죠. 교수님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 기회가 있습니다. 지난 몇 년 간 사회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사라졌고 자연스런 감정은 가식으로 채워졌습니다. 이런 전체주의 사회를 끝내고 다시 시장만능의 자유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찾을 때가 됐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런데 그쪽은 안면이 있는 것 같네요.”
“얼굴이 흔한 편이라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이번 광복절 집회 때 바이러스가 퍼질 것입니다. 인류가 접해보지 못한 전파력이 높은 바이러스입니다. 그러면 정부가 방역에 온 힘을 집중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AI와 CCTV가 무용지물이 되는 전자바이러스 테러를 감행할 것입니다. 교수님은 광복절 집회를 주도해 수 백 만 국민들의 뜻을 모아주시면 됩니다.”
“집회 때 바이러스를 퍼트린 다는 것은 화학전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화학전이라는 말은 너무 과하고요, 바이러스 전파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테러를 할 수 있습니까? 과정이 순수하고 정의롭지 못하면 결과는 언제나 비극입니다.”
“교수님의 시장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평소 소신을 지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교수님이 아니라도 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선택은 교수님의 몫입니다.”
정의로 교수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심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이러스를 퍼트린 다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의 이 대화도 다 녹화되고 있을 텐데요. 시행하기도 전에 바로 체포되고 말겁니다.”
“우리 단체는 정부지원을 받는 연구소입니다. 그 동안 정부 눈을 속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며 때를 기다렸게요. 발각될 염려는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바이러스는 우리가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전파력이 아주 강한 바이러스입니다. 20년 전 코로나 바이러스 수준의 바이러스이니 방역만 잘하면 크게 죽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교수님은 바이러스 주사를 맞고 집회에 참석하셔서 집회 주도 연설만 해주시면 됩니다.”
2.
정의로 교수가 꿈꾸었던 사회가 되었다. 사회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갔다. CCTV는 사라졌고 AI는 단순 보조기계가 되었다. 사람들의 자유의지는 최고 수치로 높아졌다. 그 결과 범죄는 더 악랄해졌고 사람들은 더욱 횡포해졌다. 세습자본주의는 자유의 날개를 달고 불평등을 심화했고 정당화했다. 정의로 교수가 이런 사회는 자기가 바라던 것이 아니라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악랄한 세습적 불평등이 모두 자기한테는 무관한 일이라고 애써 외면한 결과다.
“정보람 양 아버님 되십니까?”
한 번도 보지 못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보이스피싱 같지는 않아서 일단 받았다.
“네, 그런데 누구십니까?”
“경찰인데요. 저 놀라시지 마시고요, A경찰서 시체보관소로 와주십시오. 확인할 게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왜 거기로…”
“죄송합니다만, 따님으로 추정되는 여자 시신을 확인해주셔야 합니다.”
급히 경찰서로 달려간 정의로 교수는 시신을 보고 안심했다. ‘그럼 그렇지 내 딸이…’
“아닙니다. 제 딸이 아닙니다.”
경험이 많은 경찰이 복잡 미묘한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보시죠. 깊게 숨을 들이쉬고 찬찬히 보세요. 신분확인이 됐습니다.”
“아니, 제 딸 얼굴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렇게 시퍼런 멍이 들고 눈이 함몰될 수가 있습니까. 온 얼굴에 피가… 절대 제 딸이 아닙니다. 아, 아!”
눈물도 나지 않았다. 짧고 끊어지는 비명소리만 났을 뿐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온 몸에 기가 다 빠져 나가고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생생한 꿈을 꾸는 듯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처음엔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왜 자기한테 일어났는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왜 자기 딸이 알아 볼 수도 없을 정도의 흉측한 시체가 되어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 빙빙 돌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왜 제 딸이…”
“아버님. 진정하시고 여기 앉으시죠. 저희가 최대한 빨리 수사하겠습니다.”
지옥 같은 하루가 지나고 지옥보다 더 지루한 일주일이 지나고 지옥보다 더 견딜 수 없는 한 달이 지났다. 그런 나날이 반복해서 여러 달이 지났는데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수사는 진척이 없다. 허탈과 분노를 넘어 무기력해진다. 힘없는 겸임교수가 할 수 있는 일은 경찰에게 부탁하고 또 부탁해서 안 되면 협박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경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동안 정의로 교수는 학교에서도 짤리고 연구소 일도 그만두었다. 매일 경찰서를 드나들면서 정신을 놓고 있으니 되는 일이 있을 리 없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경찰서를 찾았다. 한 손에는 라이터, 한 손에는 휘발유통을 들었다.
“야이, 이 개새끼들아! 사람이 죽었는데 범인을 왜 안 잡는 거야? 안 잡는 거야, 못 잡는 거야? 경찰이 이래도 되는 거야? 사회 치안이 이래도 되는 거냐고? 내가 백이 없어서 이러는 거야? 무슨 경찰이 이래? 이 썩어빠진 놈의 경찰들!”
아무리 많이 배워도 이 순간만큼은 배움이 아무 필요 없다. 그저 태초의 짐승 같은 포효만 있을 뿐이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울분만 있을 뿐이었다. 분신자살을 할 의도까지는 없었지만 그 의도가 발각되기도 전에 정의로 교수는 제압당했다. 얼굴이 땅에 처박혀 일그러지고 등 뒤로 두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한 참이 지나서야 경찰이 정의로 교수를 풀어준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불쌍해서 봐주는 겁니다.”
정의로 교수가 세상을 포기한 듯 경찰서를 터벅터벅 나오자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저, 보람이 친군데요 보람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어요.’
놀란 정의로 교수는 바로 전화를 했다.
“너 누구야? 혹시 우리 보람이랑 같이 있었니? 거기 어디야?”
“한 가지씩 물어보세요. 제가 지금 아저씨 있는 데로 갈게요.”
잠시 뒤 둘은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정의로 교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보람이랑 친한 친구였니? 그 날 둘이 같이 있었어?”
“친하게 지낸 건 얼마 되지 않아요. 요즘 아이답지 않게 보람이가 워낙 밝고 착해서 저를 조금 챙겨줬어요. 제가 왕따였거든요.”
“그랬니. 그런데 어떻게 된 거니?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보람이 남자친구는 정의로 교수에게 그 날의 진실을 낱낱이 말한다.
3.
학교가 파하자 보람이는 자율학습을 끝내고 학원을 가고 있었다. 벌써 저녁시간을 훌쩍 지나고 있었다. 배가 고파 잠깐 편의점에 둘러 요기를 하고 있었다. 편의점에서는 보람이가 챙기던 남자친구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보람이가 먼저 말을 꺼낸다.
“여기 와서 먹어도 괜찮지? 신경 쓰이는 건 아니지?”
“어, 근데 나를 배려한다고 굳이 여기 올 필요는 없어.”
“아냐. 학원가는 길에 있잖아. 그건 그렇고 힘들지 않아? 수능공부도 해야 할 텐데.”
“괜찮아. 이게 더 편해. 공부는 내 체질도 아니고.”
그때 학교 짱이라 불리는 남자 둘과 그 똘마니들이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남자 둘 중 한 명은 국회의원 아들이고 한 명은 재벌 아들이다. 이 둘은 그야말로 학교 짱이자 왕들이다. 싸움을 잘해서 짱이 아니고 그들의 부모가 무서워 모두가 져 주는 것이다. 거기다 워낙 하는 행동들이 개차반이라 아무도 건들지를 못했다. 심지어 선생보다 위에 있는, 선생들도 눈치 보며 벌벌 떠는 학생들이다. 그들은 학교에서 말 그대로 왕이다. 아니, 사회에 나오면 그대로 이어서 왕이 될 자들이다. 개차반 왕들! 그들은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막 집어 들고 계산도 하지 않고 먹으려 한다. 특히 고등학생인데 술을 들고 마시려 한다.
“어이, 보기 좋네. 둘이 사귀냐? 찌질이 둘이 놀고 짜빠졌네.”
그러자 보람이가 가만히 있지 않고 한 마디 한다.
“뭐? 말 다했어? 내가 찌질이면 너희들은 개차반 곰팡이들이냐? 이 사회 어둡고 습한 곳에서 냄새 풍기는 짓들이나 하는 개차반 곰팡이들아!”
“이게 미쳤나! 뚫린 입이라고 겁대가리 없이 함부로 놀리네. 우리가 누군지 몰라?”
남자 둘이 보람이를 때리려 하자 보람이 남자친구가 나선다.
“그만 해. 여자잖아. 그리고 미성년자에게 술은 못 팔아. 나머진 계산들 하고 먹어.”
그러자 남자 둘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보람이 남자친구에게 화살을 돌린다.
“이것들이 오늘 죽으려고 날 받았나. 둘이 같이 죽어 볼래?”
이렇게 시작된 사소한 다툼이 비극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아니 개차반 남자들의 행동은 이런 불행과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개차반 남자 둘과 그들의 똘마니들은 보람이 남자친구 멱살을 잡고 편의점 뒤 골목으로 끌고 가 죽도록 팼다. 똘마니 한 명이 보람이 팔을 뒤로 꺾으면서 잡고 있고 재벌 아들이 보람이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말한다.
“니가 좋아하는 남친이 어떤 놈인지, 얼마나 나약한 놈인지 잘 봐. 이 썅년아!”
그러자 보람이는 그를 향해 침을 뱉었다.
“에이 퉤, 퉤, 퉤!”
재벌 아들은 분을 참지 못했다. 보람이를 마구 때렸다. 여자라고 봐주지 않았다. 그러나 때리는 것으로 분을 삭이지 못한 그들은 보람이를 학교로 끌고 가 차례로 성폭행했다. 옷을 갈기갈기 찢고 그녀의 몸을 짓이겼다. 그들에 비하면 그 옛날 조두순은 양반이었다, 그들은 짐승이었다. 아니 짐승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악마 그 자체였다.
보람이 남자친구가 보람이를 데리고 근처 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병원 의사의 태도가 더 가관이었다. 보람이 남자친구와 보람이를 보더니 양아치는 치료 못 해준다며 그냥 돌려보냈다. 보람이와 보람이 남자친구의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국회의원 아들과 재벌 아들이 자신들의 범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보람이와 보람이 남자친구 목구멍을 벌리고 강제로 술을 먹였다. 그들의 몸에도 술을 퍼부었다. 그러곤 병원장에 전화해 자신들이 누군지 밝히고 이들을 치료해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심지어 마약류로 분류되는 마취제 주사를 보람이에게 놓게 해 그녀를 아주 이상하고 더러운 여자로 둔갑시켜 버렸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등학생의 전화 한통에 천인공노할 짓을 하는 자, 그들이 이 시대 의사다. 환자를 살리는 의사가 아니라 그들보다 높은 계급에겐 아부하고 그들보다 낮은 계급에겐 살인의 메스를 가하는 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과 재벌 아들의 집안은 언론과 여론마저 자기들 손아귀에서 쥐고 흔들었다. 행실이 아주 가볍고 천박한 여고생이 남자친구와 사귀면서 술을 마시고 성행위를 하다가 마약류까지 섭취하게 되고 급기야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어이가 없는 부패ㆍ비리 카르텔이다. 보람이의 상태를 보면 누가 봐도 거짓임을 알 수 있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데도 진실에는 관심 없었고 오로지 휘발성 높은 가십성 사건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언론은 보람이를 연일 더러운 여자로 만들고 있었고 보람이와 정의로 교수는 그 삶이 누더기마냥 너덜너덜해졌다. 왜곡이 진실을 능가하는 사회를 모두가 즐기고 있었다. 보람이가 맞아 죽었는지, 성폭행 당해 죽었는지, 마약류 주사를 맞아 죽었는지 그 진실에는 모두가 눈을 감고 그릇된 관심과 신념에만 몰두하고 재밌어 했다. 모두가 공범이었다. 경찰과 검찰은 고등학생들을 불러 단 한 차례 조사만 했을 뿐 무혐의 내사종결해버렸다.
보람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낱낱이 들은 정의로 교수는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졌다. 처음 그의 딸 보람이의 시체를 보았을 때보다 더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감정이 격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침착해지고 냉정해졌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붉은 핏기가 사라졌고 무서운 결기의 흙빛 핏기가 아로새겨졌다.
4.
정의로 교수의 삶은 이제 정해졌다. 오로지 단 하나, 그의 딸 보람이의 복수를 위해서만 살 것이다. 그래야만 딸 보람이의 원한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 그것만이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정의로 교수는 모든 일을 그만 두고 딸의 복수에 몰두하였다. 우선 재벌과 국회의원 아들들의 동선을 파악하고 체크하였다. 여론이 잠잠해지는 한 달 여 간 그들의 동선을 완전 꿰뚫었다. 그들은 여전히 학교에서 왕노릇하고 있었고 그 어떤 악질적인 패악질에도 누구도 제지하거나 야단치고 교육시키는 사람은 없었다. 선생들은 그들 앞에서 선생이기를 포기했고 아예 굽실거리는 하인 같았다. 21세기 중반 자유민주주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본모습은 고려, 조선 중세 때보다 더 심한 계급사회였다.
정의로 교수는 이른 아침 등교할 시간에 보람이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나, 보람이 아빤데 시간 좀 되니?”
“왜요? 저 지금 학교 가는 중이고 학교 끝나면 아르바이트해야 하는데요.”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저녁에 니가 알바하는 곳으로 내가 갈게.”
정의로 교수는 보람이 남자친구가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으로 갔다.
“잘 지내니?”
“나야 뭐… 아저씨는요?”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
“뭔지 모르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아직 미성년자지만 사회에 대해 알 거는 알아요. 제가 더 나서면 저랑 아저씨만 다쳐요.”
“어른이 돼서 너한테 미안하구나. 학교도 작은 사횐데 이런 사회를 너희들에게 물려줘서.”
“그런 얘기하려고 온 건 아닐 거니까 빨리 말씀해보세요. 그래도 제가 도울 건 없겠지만.”
“니가 그 아이들 유인 좀 해줘. 너는 그 아이들한테 심부름이나 부탁 들어준다며 유인만 해주면 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니 말대로 너는 거기까지만 알면 돼. 더 알면 너도 다칠 수 있어.”
“말씀 안 해주시면 부탁 못 들어줘요.”
“그 놈들 응징할 거야. 교묘하게 덫을 쳐 놓고 그 놈들 다 잡아들일 거야. 내가 직접 복수하고 응징할 거야.”
보람이 남자친구는 갑자기 호흡이 가빨라졌다. 그르렁 하는 소리가 목을 타고 새어났다. 재빨리 호주머니에서 천식흡입기를 꺼내 입에 갖다내고 불었다.
“너 어디 아프니?”
“3년 전 바이러스 전파 때 점염돼 폐가 조금 상했어요.”
정의로 교수는 얼굴이 붉어졌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으면 그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자신의 신념이 가져온 이 끔찍한 상황에 미쳐버리고 싶었다.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지, 신념이 가지고 온 비극에 소스라쳤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요?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세요? 그 애들은 법위에 군림하는 왕들이라고요. 사회, 언론, 교육, 법 등 모든 것은 우리 편이 아니고요 저들 편이라니까요. 절대 이길 수 없어요.”
정의로 교수가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있자,
“저, 아저씨! 무슨 생각하세요. 대화 중에.”
“아, 미안.”
정의로 교수는 정신 차리고 할 말을 이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그래서 그 놈들한테 왕따 당하며 심부름이나 해주고 굽실거리며 사는 게 니 인생관이니? 그렇게 살면 좋아? 마음 편해? 젊은 애가 패기가 없어. 억울하고 부당하면 외치고 싸워야지.”
“싸울 줄도 모르지만 싸우면 바뀌나요? 이런 사회도 아저씨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만든 거잖아요. 5ㆍ6년 전 ‘예의 없는 것들’법이 있을 때는 학교에 폭력도 없었고요 왕따도 없었어요. 재벌, 국회의원 자식이라고 갑질하는 애들도 없었어요. 갑질하는 순간 잡혀가니까. 그런데 아저씨가 다 망쳐놨잖아요. 그래놓고 저한테 이런 말 할 자격 있으세요?”
정의로 교수는 멍해졌다. 살아오면서 이렇게까지 자신의 존재가 비참해진 적이 없었다. 무엇을 위한 맹목적인 신념이었는지, 이 비극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질 수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찌그러졌고 놀라 멈칫했다.
“미안. 정말 미안하구나. 니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네. 근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어?”
“정식 현대사 시간에는 빠져 있는 내용인데 비밀 스터디에서 배웠어요. 거기다 보람이한테 그 주인공이 아저씨라는 것을 들었고요.”
정의로 교수는 충격이었다. 자신이 한 행동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지만 왠지 딸 보람이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라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보람이가 그걸 알게 되었는지 다시 한 번 심장이 멎었다. 자신의 신념이 옳았는지에 대한 회의감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퍼트린 바이러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렸는지 죄책감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바로 자신 앞에 있는 젊은 청년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니 자신은 역사와 사회에 죄인이었다. 뒤늦은 후회는 되돌릴 수 없었다. 그래도 정의로 교수는 반성과 후회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미안하다, 정말. 나 때문에 니가 이렇게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으니 내가 죽일 놈이다. 그래도 이 일만 꼭 해놓고, 그리고 사회를 다시 되돌려 놓고 벌을 받을게. 그때 내가 지은 죄 달게 받을게.”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하면 돼요?”
5.
부도가 나 짓다가 건설이 중단되어 폐건물이 된 한 빌딩에 여러 고등학생들이 모여 있다. 가로등 불빛도 없는 깜깜한 밤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워 마치 호러영화의 한 장소 같다. 서울 강남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보람이 남자친구는 갑질하는 재벌친구와 국회의원 친구에게 끌려 와 있다. 그 외 똘마니 친구들 두 명도 있다. 모두 으레 있는 일인 양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갑질하는 친구들이 보람이 남자친구에게 먼저 말을 꺼낸다.
“어이! 가져 왔냐?”
“그 그게, 너희들이 준 돈으론 너무 부족해. 너희들은 돈도 많은데…”
“야이 이 새끼가 꼬박꼬박 말대꾸는. 우리가 돈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너 같은 불가촉천민은 우리 같은 귀족을 받들어 모셔야 하는 거니까 그걸 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지. 이 새끼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돌아가면서 보람이 친구의 얼굴과 가슴과 배를 친다.
‘퍽! 퍽! 퍽!’
‘윽, 아, 윽!’
보람이 남자친구의 낮은 비명소리가 폐건물을 타고 울려 퍼진다. 많이 맞아본 사람의 슬픈 비명소리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래서 가져 왔어 안 가져 왔어?”
“가져 왔어. 내 가방에.”
똘마니 중 한 명이 가방을 뒤진다. 작은 캡슐에 들어 있는 백색 약을 꺼낸다.
“오, 이 자식 재주 있는데. 이걸 어떻게 인터넷으로 샀대?”
“근데, 안 걸리겠지?
“산 건 저 놈이 샀잖아. 약 한 거 걸려도 우리 아빠들이 다 무마시켜 줘. 그니까 안심하고 해 인마.”
네 명은 아주 강한 신종 마약을 코로 흡입한다. 기분 좋아 황홀해 한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잠시 뿐 시간이 조금 흐르자 앞이 흐릿해지면서 물체가 두서개로 보인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비틀거린다. 그러자 폐건물 기둥 뒤에서 정의로 교수가 나타난다.
“꼴 좋다. 어린 놈의 새끼들이. 부모백만 믿고 이렇게 개망나니 짓을 하고 다니니 이 나라가 개판이지.”
“당신 뭐야? 당신이 이랬어?”
“그래, 내가 너희들을 죽이기 위해 오늘을 기다렸다. 이를 악물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오늘을 기다렸다. 이 개만도 못한 놈들아.”
“왜 이러는 거예요?”
“똑바로 봐. 내가 누군지. 날 모르겠어?”
“아니, 당신은…”
“아무도 악마보다 더 악한 너희들을 교육 안 시키고 처단 안 하니 내가 대신 너희들에게 벌을 내리겠다. 내 딸 보람이의 한도 풀 겸 아주 비참하게 죽여줄게. 내 딸을 그렇게 만든 너희 좇과 혓바닥을 자르고 눈을 파버리겠다.”
네 명은 도망가려고 달려보지만 다리가 따라주지 않는다. 몇 발 움직이다 주저 않고 만다. 이 때 정의로 교수가 전기톱과 식칼을 꺼낸다.
“아,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제발!”
그제야 네 명은 기겁을 하고 용서를 빈다. 영혼 없는 빈껍데기 용서다. 거짓이다.
정의로 교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 악마들을 식칼로 찌른다. 배와 가슴을 마구 찌른다. 그리고 전기톱으로 그들의 성기를 자르려는데 뭔가 이상하다. 사람의 피부가 아닌 것 같다. 옷을 찢으니 그들의 실체가 드러났다. 인간형 AI로봇이다.
“아, 아니,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뭐야! 아~~”
그가 울부짖는 순간 폐건물이 사라지고 불이 켜지면서 주위가 환해진다. 어리둥절 모두 너무 놀란다. 폐건물은 4차형 홀로그램이었고 모두 빈 공간에 있다. 한 남자와 여자가 나타난다. ‘자유혁명연구소’의 남녀들이다. 남자가 말을 먼저 꺼낸다.
“정의로 씨. 사적 복수는 안 됩니다.”
“아니, 당신들. 여기에 어떻게… 이게 무슨 일이죠? 내가 죽이려고 했던 놈들은 인간들이 아닙니다. 살려두는 것보다 죽이는 게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여자가 말을 잇는다.
“정의로 당신이 원하던 사회 아닌가요? 부작용이 있어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만발한 사회를 원하지 않았던 가요? 내가 경고했죠? 자유주의의 끔찍한 결과가 자신의 일이 되어도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견딜 수 없는 불행과 불평등이 인생을 어둠으로 잠식할 거라고. 그런데도 당신은 우리가 제안한 바이러스 테러로 사회를 이 혼란으로 만들었죠.”
“아니, 그럼 이 모든 게 당신들이 꾸민 일입니까? 당신들이 조작한 거냐고요? 그 놈들도 조작입니까? 그럼 내 딸은 누가…”
“모두가 조작은 아닙니다. 당신을 포함해 많은 자유주의 신봉자들의 무책임함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우리 연구소에서 논란 끝에 바이러스 테러를 통해 끔찍한 자유주의사회를 경험하게 한 거죠. 우리는 그저 과감한 실험을 한 것입니다. 놔두면 서로 죽고 죽이는 야만 상태의 탐욕적 사회가 됨을 보여주는 영화 ‘파리대왕’처럼. 당신 딸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처럼 죽은 것이 맞고요, 당신이 그 고등학생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안 우리가 로봇으로 대체시킨 것뿐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당신들은 무서운 존재들이군요. 모든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사회와 사람을 조종하는 군요. 마치 신이 된 것처럼. 그래도 당신들은 실수투성이의 사람일 뿐입니다. 당신들은 과연 합리적인가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요,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나와 당신을 포함해서 사람은 호모사피엔스 이래 단 한 번도 합리성을 띤 적이 없었습니다. 합리적이라고 합리화했을 뿐 끊임없이 시기와 탐욕으로 서로를 죽여 왔죠. 인간의 역사는 바로 탐욕의 역사이자 그 탐욕으로 인한 불평등의 역사입니다. 크든 작든 그것이 드러난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이제 이런 뒤틀린 인간의 역사를 과감히 끊어야 합니다. 인간에겐 희망이 없습니다. 자, 저 스크린을 보십시오.”
온 벽이 스크린으로 되어 있고 그 스크린에서는 각종 비리와 악질범죄, 갑질과 가짜뉴스들이 판을 친다. 2020년 코로나 사태에 유럽의 의사들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허구라는 인터뷰를 한다. 많이 배운 의사들이 저런 말을 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다. 거기다 온갖 악랄한 인간의 모습들이 다 나오고 있다. 바이러스로 죽고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호화로운 파티를 한다. 신을 팔고 신에 팔리며 돈과 몸까지 바치는 사람들. 여자를 집단 강간하는 인도 남자들, 중동에서는 영토전쟁을 21세기 중반에도 하고 있으니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다.
“고대도 아닌 21세기 중반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 믿깁니까? 저걸 보고도 인간이 합리적이라고 믿습니까? 자유든 평등이든, 개인이든 집단이든, 보수든 진보든, 언제나 인간은 타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통해 쾌감과 희열을 느껴온 존재입니다. 보십시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는 자들을. 결코 소수라고 말하지 마세요. 역사는 언제나 소수가 다수를 이기는 법이지요. 조선 백성 다수가 썩어서, 매국노라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소구냐 다수냐가 아니라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소수를 방치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린 것이죠.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자유냐 평등이냐, 보수냐 진보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인간의 의한 정치시스템은 근본적으로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자, 인간의 역사는 새로운 진화의 시대를 맞이해야 합니다. 다시 정의로 교수 당신이 선택하시죠!”
“어떻게요?”
“다시 바이러스 테러를 감행할 겁니다. 그러면 그 혼란을 틈타 AI가 다스리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전체적 시대로 돌릴 겁니다. 다시 당신이 그 역할을 하시죠.”
“그, 그러나 이런 식의 평등과 평화는 결국 또 다른 파멸을 초래할 겁니다. 인간에게 어떻게…”
“당신이 조금 전에 하려 했던 복수를 잊었습니까? 인간에게 아직 미련이 남았습니까?”
머뭇거리던 정의로 교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지른다.
“아아악!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젠 정말 모르겠습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