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꿈

by 방정민

유령의 꿈

1.

누구세요?

김영훈 씨 아닙니까?

그 사람 돌아가셨습니다.

김영훈 씨한테 전할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 죽었다니까요.

몇 번이나 여기까지 듣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더 듣고 싶어 끊지 않았다. 수화기 넘어 들리는 기계음보다 더 낯선 기계 같은 사람의 목소리…

김영훈 씨! 아무리 삶이 지치고 힘들더라도 절대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계속 들으니 기계음인지 사람소리인지조차 헷갈린다. 아무튼 내가 반응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말을 하지 않는다.

포기하면요?

삶이 자신을 속인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끝까지 견뎌내야 합니다. 포기한다고 거기서 끝이 아니니까요, 삶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자신의 삶이라고 해서 온전히 자신의 것만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죠. 부디 어리석은 판단하시지 않기 바랍니다.

내 삶을 내가 선택하지도 못한단 말입니까.

잘못된 선택의 결과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일 수 있으니까요.

너무 힘듭니다.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김영훈 씨. 그래도 견뎌내야 합니다. 삶은 고해니까요.

뭐라는 거야. 씨발!

통화가 끝났다. 짜증스런 통화가.

아버지와 연락을 끊은지 10년이 넘었다. 그런데 지난 달 시청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이다. 시신과 유품을 가져가라는 것이다. 그럴 의사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두 번 다시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 말은 냉정했지만 말 후에 남은 기분은 더러웠다. 무슨 감정인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생물학적 아버지인 것만은 분명하나 그는 나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최소한 내 마음으로부터 오래 전에. 그런데도 그의 부고 소식을 전혀 모르는 한 시청 직원으로부터 들으니 그 기분은 정말 묘했다. 짜증났다. 화가 치밀었고 슬펐다. 그러다 분노했다. 조금 지나자 멍해졌다. 최종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 묘한 감정들이 뒤섞여 엉망이었다.

시청으로부터 한 번의 전화와 문자가 더 왔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뒤늦게 그 생물학적 아버지의 주검을 보러갔다. 시신을 수습하러 간 것은 아니었다. 장례치를 돈도 없었고 그 과정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그저 죽은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 그의 얼굴을.

저 김영훈 씨 시신을 볼 수 있나요?

어떻게 되시죠?

아, 아는 지인인데요.

가족 아니면 안 됩니다.

저, 그래도 생전에 가까웠던 사이라… 얼굴 한번만 보면 안 되겠습니까?

직원은 컴퓨터와 무연고시신 관련 서류를 뒤적이더니 아버지 시신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놀라 물었다.

네? 아니 누가 찾아갔습니까?

가족이요. 따님 되는 분이 찾아가셨는데요.

가족이라니. 가족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잠시 머뭇거리면서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그 직원이 말했다.

아, 김영훈 씨 유품 하나를 안 가져갔네요. 시신 수습한 딸이 전화도 안 받고. 혹 그 딸과 어떤 사이에요?

네? … 아, 사촌입니다. 여기 신분증.

그러면 가족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여기 사인하시고 이거 가져가셔서 그 따님에게 전해주실래요?

내 신분증을 슬쩍 보더니 귀찮은 사건 하나 해결했다는 듯 직원은 만족해했다.

이렇게 해서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휴대폰이다. 어쨌든 아버지의 죽은 얼굴은 끝내 보지 못했다. 15년 가까이 어떻게 늙었는지, 죽을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 휴대폰 어디에도 그 단서는 없었다.

단절과 외로움, 무관심과 불안함… 그 사이 어디에서 꿈틀대는 가족이라는 생물학적 관계가 나를 늘 괴롭혔다. 알 수 없는 아픔과 불편함이 나를 따라다녔다.

띠리리링!

또 다시 아버지 휴대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김영훈 씨이십니까?

네, 그런데요.

당신은 김영훈 씨가 아니잖아요.

아니, 뭡니까? 당신 장난칩니까? 그리고 당신 사람이야 기계야?

내가 사람인지 기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당신이 나와 통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겁니다.

뭐라는 거야. 그래서요?

모든 삶이 그러하듯 완벽한 관계는 없습니다. 조그마한 결여 하나씩 등에 지고 아픔과 사랑을 동시에 가슴에 품고 사는 겁니다. 관계를 회복하세요. 그러면 삶이 조금은 덜 외로워집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진짜 당신 정체가 뭐냐고요?

뚝, 전화가 끊겼다. 이상한 전화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했다. 일 주일에 한 번씩 오던 전화가 더 이상 오지 않으니 기분이 묘했다. 오면 귀찮고 언짢았지만 오지 않으니 허했다.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무엇을… 이상한 기계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아무하고도 좋으니 대화를 원하고 있었던 것인지, 아주 오래전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아버지라는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나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외롭고 허허로웠다.

그런데 아버지 시신은 누가 가져간 것일까. 딸이 가져갔다니.


2.


어서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

30대 중반의 한 여자가 상담 받으러 왔다.

일단 이 상담질문지에 솔직히 적어주시겠어요? 이 질문지를 보고 상담할 겁니다.

여자는 꼼꼼히 상담지를 써내려간다. 10여 분 후 나는 상담지를 보고 여자와 상담한다. 내가 먼저 질문한다.

아빠와 엄마, 오빠가 있었는데 지금 혼자 사시나 봐요?

다 죽었어요.

아, 죄송합니다. 이런 질문이 힘드시겠지만 사고였나요?

뭐, 사고라면 사고고, 운명이랄까… 근데 요즘 오빠와 아빠 꿈을 자주 꿔요.

어떤 꿈인가요?

아빠가 제 손목을 붙잡고 저를 막 어디로 데려가요. 저는 거의 끌려가고 있어요. 근데 오빠가 아빠를 가로막고 밀치면서 저를 안고 도망가요.

사고 전 아빠와 오빠 둘 사이는 어땠나요? 좋았나요? 그리고 박연희 씨와의 사이는요?

……

답하기 힘드시면 여기에 그림을 하나 그려 보실래요?

나는 상담관계 종이를 그녀에게 건넨다.

관계가 좋을수록 크게 그리시고, 안 좋았으면 작게 그리시면 됩니다. 지금 내 인생에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면 X 좌표 쪽에, 반대면 Y 좌표 쪽에 그리시면 됩니다.

그녀의 그림은 이상했다. 사실 미술심리치료의 한 방면인 그림치료는 해석하기 나름이다. 상담자가 그리는 그림이 반드시 내담자의 심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거짓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내담자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상담하다보면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의 심리상태나 성격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아빠가 가정폭력을 하셨나요? 그림을 보면 아빠와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네. 그런데 아빠와 사이가 꼭 안 좋았던 건 아니었어요.

아빠가 가정폭력을 하셨는데 박연희 씨와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음, 그런데 오빠는 방관자였나요? 아니면 같이 박연희 씨를 때렸나요? 오빠 그림이 조금 묘하네요. 오빠 얼굴은 작은데 X 좌표에 그리셨어요. 거기다 바로 옆에 연희 씨 얼굴도 그렸고요. 오빠와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또 오빠 얼굴은 작게 그리셨고요. 무슨 비밀이라도 있나요?

그녀는 말을 빙빙 돌린다. 비밀을 아직 틀어놓을 단계가 아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라포가 더 형성되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저도 더 노력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주 어렵게 혼자의 힘으로 대학을 나오고 상담학과 대학원까지 나왔다. 대학 때부터 온갖 아르바이트와 막노동을 해가며 다닌 대학과 대학원이라 그 기간이 길었다. 군대까지 합쳐 17년이나 걸렸다. 왜 심리학에 이끌렸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꿈도 삶에 대한 의지도 없던 10대 후반과 20대 초 아무 대학이나 들어갔다. 긴 방황을 한 끝에 상담학과 대학원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악착같이 논문을 써서 박사논문을 통과했다. 그러고 나니 주위 대학원 때 알고 지냈던 지인이 내가 불쌍한지 대견한지 한 상담소를 소개해줬다. 사무실 한 편에서 공동으로 상담하고 있다. 박사논문이 통과되었는데도 대학에서 강의는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상담학과 학생이 적은데다 이미 기존의 교수나 강사들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백이 없는 내가 강사 한 자리도 차지하기는 계급사회인 이 나라에서는 불가능하다. 가끔씩 특강이나 땜질하는 식으로 강의를 하는 정도다.

박사논문에 상담까지 하고 있지만 가난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상담만으로는 돈이 되지 않았다. 다른 일을 해야 했다. 알바는 내 인생의 둘도 없는 친구다.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상담하는 상담학 박사가 바로 나다. 이런 타이틀을 가지고 산지도 벌써 6년째다.

안락할 수 없는 곳이지만 안락한 곳, 평생 이 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음침한 동굴 같은 곳, 16평 원룸이 내가 사는 공간이다.

쿵쾅쿵쾅!

또 난리다. 윗집에서 나는 소리다. 일주일에 두세 번 쿵쿵거리며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 혼자 사는 것 같은데 자주 남자의 소리가 들린다. 무엇을 집어던지는지 박살나는 소리도 들린다. 원룸에서 이렇게 시끄러우면 임차인끼리 크게 싸움 나는데 참지 않으면 뉴스에 나올 것이다. 원룸 주인한테 연락해야 하나 잠시 망설인다. 조용한 시간이 흘러간다. 그렇게 5분이 지나갔다. 이제 조용하겠거니 싶어 잠자리에 누웠다. 밤 12시가 넘었다. 잠자리에 누운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여자의 비명소리가 났다.

아, 아~ 악! 살려주세요!

여자의 비명소리와 함께 윗집 대문소리가 쾅 나더니 여자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윗집의 여자가 원룸가 골목으로 뛰쳐나와 울부짖으며 소리 질렀다. 곧바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여기저기서 불이 켜졌다. 나도 밖을 내다보지 않을 수가 없어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자정이 넘었지만 가로등이 밝아 다 보였다. 여자가 맨발로 골목을 서성이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옷과 팔에 피가 흥건히 묻어있었다. 정확히 옷이라고 하기엔 그렇고 속옷 차임의 슬림이었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제발!

다행히 한 원룸의 남자가 나와 이불로 여자를 감싸주었고 진정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앵앵앵,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가 나타났고 경찰 여러 명이 내가 사는 원룸으로 들이닥쳤다. 윗집까지 올라와 윗집 초인종을 누르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지만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한 경찰이 총까지 꺼내들었다. 진짜 총인지 가스총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분위기는 심각했다. 한 명의 경찰은 총을 겨누며 계속 노크하고 있었고 다른 경찰은 어딘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집주인한테 연락을 한 모양이다. 곧바로 집주인이 와서 만능키로 윗집 문을 열었다. 또 다른 경찰은 복도로 나와 지켜보고 있는 나를 비롯한 몇 명의 입주민에게 위험하니 들어가라고 했다. 당연히 들어가는 척 지켜보고 있었다. 경찰 두세 명이 긴급하고 조심히 들어갔으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남자의 저항은 없었다. 오히려 남자는 차분히 의자에 앉아있었고 남자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 피를 닦으며 지혈시킨 경찰은 남자를 연행했고 여자는 앰뷸런스에 태웠다. 의외로 싱거웠다. 그렇게 한 40 여 분의 시간 동안 난리를 피우고 나서 경찰과 경찰차는 떠났고 웅성웅성 구경 나온 사람들도 각자의 원룸 집으로 들어갔다. 내가 사는 원룸의 복도와 대문, 그리고 원룸가의 골목에 피를 뿌린 이 난리가 끝나자 더 휑하고 을씨년스러운 시간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3.


안녕하세요. 그 동안 잘 계셨어요? 상담은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게 원칙인데 이주 만에 오셨네요. 바쁜 일이 있으셨어요?

박연희 씨가 이주일 만에 다시 상담 받으러 왔다.

……

아무 말이 없다. 얼굴이 굳어 있다. 상담 분위기가 좋지 않다.

저,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요? 죄송하지만 컨디션이 안 좋으면 다음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그냥 하시죠. 그런데 질문 하나 해도 되요?

네. 하세요.

선생님은 왜 상담사가 되신 거예요?

글쎄요. 저도 그걸 완벽히 잘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아픈 가족사가 있고 트라우마가 있겠지만 저도 어릴 적 상처 때문에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상담 쪽에 무의식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해요. 제 적성이 상담 같은 인문학에 맞는 것도 있고요.

선생님은 무슨 상처가 있는데요?

하하, 제가 내담자가 된 꼴이네요. 박연희 씨도 이 쪽 공부를 하시면 훌륭한 상담사가 될 자질이 있네요.

어떻게 하면 상담사가 되는데요?

일단 이쪽 공부를 하셔야 겠죠. 공부와 별개로 상담은 공감 능력이 우선입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면 아무리 상담 공부를 많이 해도 좋은 상담사가 될 수는 없어요. 뛰어난 상담사가 될지는 몰라도.

그럼 선생님은 어떤 공감 능력이 있으신데요?

이런, 오늘은 제가 완전 당하는 날이네요.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제가 대답을 해드려야 오늘 상담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죠?

죄송해요. 여러 상담 받아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거든요. 상담 선생님들이 별 공감 능력이 없는 것 같아서요.

아, 네. 근데 제가 공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드리면 될까요? 제 마음을 꺼내 보여드릴 수도 없고.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라포형성이 상담에는 굉장히 중요한데, 라포형성은 말로 되는 게 아니라 상담하는 가운데 상담자와 내담자가 서로 신뢰를 하면 저절로 생기는 거라서…

알았어요. 죄송해요. 상담하시죠.

당황스러웠다. 전문적으로 상담한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대학원 이후 수 십 건 이상 상담해봤는데, 이렇게 내담자가 공격적이고 비협조적이면 상담 효과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결과는 모르는 거다. 효과가 안 좋을 것 같다는 초반의 예상과 느낌이 맞을 때도 있고 정반대의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솔직히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고 밥 벌어 먹기 위해 이 일을 한다고는 차마 말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난감했다.

그럼, 이 질문지에 자세히 적어주시고, 그 다음에 최근에 꾼 꿈에 대해 말해 볼까 합니다.

이번에도 그녀는 정성껏 질문지를 작성한다. 질문지를 작성하는 그녀의 눈이 함초롬하다. 세상의 세파를 많이 겪은 여성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맑은 눈동자에는 슬프고 고단한 삶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저, 박연희 씨께서 적어주신 내용에 의하면 가장 행복했던 순간도 어릴 적 아빠와 오빠랑 같이 살던 때이고, 가장 불행했던 순간도 아빠와 오빠와 같이 지냈던 때라고 하셨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 물론 행복과 불행이 같은 시기에 있기도 하고, 동전의 양명처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상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건 선생님 말씀대로 라포형성이 더 생기면 말씀드릴게요. 오늘은 요즘 제가 자주 꾸는 꿈에 대해 말하고 싶어요.

네. 그렇게 하세요. 어떤 꿈을 꾸세요?

어떤 남자가 저를 자꾸 때려요. 칼로 위협하기도 하고요. 피해서 달아나기만 하면 계곡으로 바로 떨어져요. 그러면 꿈에서 깨요. 그 다음날도 어떤 남자가 때리고 저는 달아나고… 그런데 남자들이 자꾸 바뀌어요. 한 남자를 피해 달아나면 다른 남자가 나를 막 때리고 그러다 어두운 웅덩이나 계곡 같은 곳으로 떨어지고. 그러면서 울면서 꿈에서 깨요.

어릴 때의 가족 경험이 꿈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요? 지난번에 말씀하시다가 그만 두셨지만, 가정 폭력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네, 맞아요. 어릴 때 아빠가 엄마를 자주 때리셨어요. 저를 직접 때리진 않았는데 두 분 싸움이 격해지면 말리다 제가 간접적으로 맞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아빠 기분이 좋거나 두 분 사이가 좋을 때는 나에게 잘해주기도 했어요.

오빠가 있다고 했는데 오빠는 어땠나요? 아빠가 오빠도 때렸나요? 아니면 엄마를 때릴 때 오빠가 어떻게 했나요?

아빠는 오빠나 저를 직접 때리지는 않았는데, 두 분 싸움 때문에 오빠가 반항하거나 말리면 오빠를 때리기도 했어요. 그럴 때 오빠는 아빠에게 대들기도 하고 저를 보호해주기도 했어요.

오빠와의 사이는 어땠나요? 지난번 그림에서는 상반되게 그리셨는데?

오빠는 저의 보호자이기도 했고 연인이기도 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연인이라니요?

그건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실례지만 무슨 일 하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주로 옷을 파는데, 옷 외에도 이것저것 팔아요. 액세서리 종류 등.

네. 정말 죄송한데 지난번에 혼자 산다고 했는데 만나는 남자는 없나요?

장사하면서 계속 보는 남자들이나 단골손님과 가볍게 만나고 있어요. 처음에는 마음도 주고 정말 잘 해줬는데 결국 남자들이 그렇잖아요, 맨날 바람피고. 그래서 저도 언제부턴가 가볍게 여러 남자들 만나고 있어요.

처음부터 성격을 대충 파악했지만 그녀는 정말 너무 솔직하다. 발칙할 정도로 공격적이다.

그런데 조심스럽습니다만, 꿈에서 자꾸 남자들이 바뀌는 건 박연희 씨의 남자에 대한 성향인 것 같습니다. 가령, 어떤 여자가 있는데 다섯 번 만난 남자들 모두가 기생오라비라면서 팔자타령에 신세한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신세 한탄 할 일이 아니라 자신의 남자에 대한 성향이 그렇기 때문이에요. 기생오라비처럼 말 잘하고 멀끔한 남자들이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거죠. 진실한 남자이지만 고리타분한 남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이죠. 결국 팔자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남자에 대한 성향을 바꿔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야 여자의 인생이 바뀌는 겁니다. 이처럼 박연희 씨도 여자 인생은 엄마의 인생 대물림이다, 남자들 전부 믿을 수 없다, 이런 말 하시지 마시고 남자에 대한 성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높이고 홀로 설 수 있는 심리적, 물적 토대, 즉 심리적ㆍ경제적 독립을 하는 겁니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이니까요.

결국 제 문제라는 거네요?

아니, 꼭 그런 말이 아니고. 그러니까 용기를 가지고 독립적 생활을 하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거죠. 남자든 여자든 결국 자신이 홀로 서야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거든요.

네. 빤한 말이지만 알겠습니다.

그녀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왔나. 거의 꿈을 꾸지 않는 내가 그녀와 상담을 하고 난 후 매일 꿈을 꾸고 있다. 꿈을 꾼다는 것은 과거 채워지지 못한 욕망이나 치유되지 못한 상처의 찌꺼기. 상처야 나도 누구 못지않게 많지. 대학 졸업 후 아버지를 떠난 후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으니까. 지긋지긋한 가족ㆍ혈연이라는 피를 다 뼈처럼 발라버리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와 따뜻했던 아버지 이 두 가지의 모습 중 진짜 아버지의 모습이 무엇인지 중년이 된 아직도 모르겠다. 한 없이 감성적이고 따뜻했던 아버지가 뭔가에 뒤틀리면 한 순간에 폭력적으로 바뀌는 모습에 커 갈수록 저항했던 나, 결국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와 나는 대학 졸업 후 영원히 남남이 되어 버렸다. 죽은 후에도 아버지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까. 아버지라는 존재와 그의 폭력에 대한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이지만 왜 아버지가 벌거벗은 내 등을 밀어주고 있는 걸까. 그리고 여긴 목욕탕인가. 알 수 없는 꿈 속 공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여자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내가 넘어져 있다. 나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내민다.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덥석 내 손을 먼저 잡는다. 그러더니 나를 끌어안는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숨만 고르고 있다. 그녀도 나도 맨몸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이다. 조금 전까지 내 등을 밀어주고 있던 아버지는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고 아버지가 사라진 곳에 한 여자가 있는 것이다. 모두 벗은 몸이다. 목욕탕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왜 모두 벗은 몸으로 있는 걸까. 청소년도 아니고 나이 마흔이 넘어 이런 이상한 꿈을 꾸는 이유가 뭘까. 혼자 사는 내가 성적으로 외로웠던 걸까. 아니면 유년의 아픔이 계속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인가. 왜 하필 그녀를 만나고 난 후 이런 꿈을 계속 꾸는 것인가.

4.


편의점 알바를 마치고 밤늦게 쌀쌀한 원룸집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여자의 실루엣이 내 앞에 가고 있다. 여자의 걸음이 너무 느려 내가 거의 따라 잡았다. 느낌이 든다. 같은 원룸에 사는 사람 같았다. 내 걸음을 늦춰야 하나, 더 빨리 걸어서 앞서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중 여자가 내가 사는 원룸에 먼저 도착했다. 같은 임차인이 맞았다. 그녀가 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서기에 나는 먼저 올라가라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올라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대문에 들어서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엘이베이터가 1층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안에는 그녀가 타고 있었다. 순간 당황했다. 내가 안 타고 복도에 그대로 있으니 괜찮다면서 타라고 했다. 고마워해야 할지 갑자기 의아한 쑥스러움이 스쳤다. 그래도 고맙다는 뜻으로 가벼운 묵례를 했다. 그녀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위층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녀는 5층 버튼을 눌렀다. 이런… 불길한 예상과 느낌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아니 빗나가지 않을 때만 기억하는 것이니 이는 운명이다. 그녀가 모자를 벗었다. 그래도 나는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화가 난 듯, 아니면 어이가 없다는 듯 드디어 말을 건넨다.

저, 지난번에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아, 아니 괜찮습니다.

칼부림까지 나는 사건은 저도 처음 경험한 것이라서 너무 놀랐어요.

아… 그렇죠. 저도 그런 사건은 뉴스에서만 봤지 처음이라서… 별 문제 없었나요? 많이 다치지는 않았고요?

네. 다 잘 처리되었어요.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요.

대화가 조금 진척이 되면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놀랐다. 긴가민가했다. 여자의 얼굴이 화장 여부에 따라 워낙 달라서 정말 처음에는 몰라봤다.

어, 어…

이제야 알아보시네요, 선생님. 원래 사람을 잘 못 알아보세요? 아니면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세요?

분위기 상 안녕, 하고 각자의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녀의 집으로 가기는 그렇고 해서 내 집으로 갔다. 그녀도 별 주저 없이 들어왔다. 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동굴 같은 공간, 이런 음침한 곳도 내가 쉴 수 있는 곳이라 편하긴 한 곳이다.

정말 깔끔하네요. 선생님 성격이 드러나는 것 같네요.

아, 그런가요. 제 성격이 어떤 것 같아요?

병자, 아니면 소시오패스?

네? 제가요?

농담입니다. 하하.

그런데 언제부터 여기 사셨어요? 제가 여기 사는 걸 아신 것 같은데.

여기 산 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오다가다 선생님을 봤는데 선생님은 전혀 곁눈질로도 저를 보지도 않고, 상담 후에도 저를 못 알아보시더라고요. 굉장히 주위에 대해 무관심하던데요.

죄송합니다. 의도적으로 박연희 씨를 안 본 건 아닌데, 제가 좀 낯가림이 있어서 주위를 경계하는 편이긴 합니다.

의외네요. 선생님은 상담 박사시니까 외향적일 것 같은데. 제가 선생님한테 상담을 두 번밖에 안 받았지만, 상담을 받아보니 대충 알 것 같은데 한번 맞춰볼까요? 선생님 어릴 때 받은 상처 때문에 일부러 환경이나 상대를 경계하는 거 아니에요?

네? 아, 아니 그게…

운명은 자신이 전혀 관여할 수 없는 저 너머의 일이지만 결국 관계의 문제다. 과거의 관계가 미래에 어떤 형태로 나타나 얽고 설키는 일이다. 그렇다고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 안고 살 수만은 없는 일이다. 어떤 위험을 각오하고서라도 끊어야 하는 운명은 과감히 끊어내야 한다. 결국 운명도 팔자도 자기하기 나름 아닌가.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있다. 바로 꿈이다.

쿵쿵!

안에 김 씨 없어요?

무슨 일이세요?

아래층 주인아줌마가 올라와 문을 두드리자 아버지가 문을 열었다.

아니, 김 씨.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달랑 아들 하나 있다고 해놓고 한 달 전부터 보니까 어떤 여자랑 딸도 있더구먼. 가족이야? 아니, 가족이든 아니든 이러면 계약 위반인데. 전기, 수도 계량기 올라가는 봐. 거기다 일주일에 몇 번을 싸우고 난리야. 시끄러워서 살 수가 있나.

죄송합니다. 일부러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닌데, 사정 상 그렇게 되었습니다. 전기료나 수도요금은 제가 더 내겠습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우리 집은 애들이 다 독립했고 남편이랑 나랑 단 둘이서 조용히 살고 싶거든. 이러면 곤란한데. 그러면 전세라도 올려주든지 방을 빼든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겠습니다. 돈은 더 마련되는 대로 올려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꾸벅 절을 하고 거듭 죄송하다고 말한다. 90년대만 해도 전기계량기나 수도계량기가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집이 많았고, 전세를 사는 임차인은 거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자기들이 시끄러울 때는 괜찮고 전세 사는 임차인들이 조금만 시끄러우면 온갖 갑질을 다한다. 갑질은 사실 이전부터 있었지만 그런 단어가 없었을 뿐이다.

중견 건설 회사를 다녔던 아버지는 돈을 그럭저럭 잘 벌었다. 당시 아버지들처럼 아버지도 매일 바빴다. 그리고 당연히 집과 어머니를 돌보지 않았다. 어머니는 담배를 피지도 않았는데 폐암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죽자마자 아버지는 1년 만에 새 장가를 들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돈이 넘쳐흘렀던 90년 초중반을 넘어 97년이 되자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도 흔들거렸다. 겨우겨우 버티던 97년 연말 그 유명한 IMF가 터지자 쫄딱 망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평소에도 좋아하던 술을 매일 달고 살았고 새어머니를 때리기 시작했다. 12살이던 의붓딸을 건들기 시작한 것도 이때 즈음이다. 내 나이 열일곱, 고 1이었다. 사건은 그 무렵이었다.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박연희 씨한테 전화가 왔다. 다행히 나는 집에 있었고 그녀가 다급해 보여 얼른 그녀의 집으로 올라갔다.

무슨 일이세요?

헤어진 남친이 자꾸 쳐들어와요. 전화를 안 받으니까 억지로 여기 와서 얘기하자고 그러네요. 지난번에도 그러다가 칼부림 사건까지 터졌는데. 또 그러네요. 무서워 죽겠어요.

일단 내가 112에 연락할게요. 경찰이 무슨 보호조치 안 해요?

스마트워치 같은 건 있으나 마나에요. 직접 연락해도 와서 별다른 조치를 안 해요.

쿵쿵쿵, 박연희 씨의 남자친구는 원룸의 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박연희 씨의 문 비번까지 눌렀으나 비밀번호가 맞지 않았는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무서워 벌벌 떨며 나에게 안겼고 나는 자연스레 그녀를 안아주었다. 곧이어 경찰이 출동해 남자를 체포해갔다. 그러자 나는 그녀의 등을 살짝 두드려주며 안심시켜주었다. 떨리던 그녀의 몸이 진정되자 그녀는 나의 허리를 와락 세게 껴안았다. 그러곤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그녀를 쳐다보았다. 두 눈이 서로의 눈망울에 꽂혔다. 꽂힌 눈망울에선 불안 대신 연민의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감정대로 둘은 이끌려갔다. 둘의 입술이 끈적끈적 오고갔고 운명의 몸 둘이 하나가 되었다. 연민은 사랑이 아니라지만 어쩌면 연민만큼 오래 가는 사랑도 없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20년이 훌쩍 넘은 둘의 사랑은 이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헉, 이렇게 생생한 꿈이 있다니. 보통 꿈은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이해 불가한 비논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어찌 이렇게 현실적이고 생생한 것인가! 얼마 전부터 꾸는 꿈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면서 전혀 다르다. 같은 것이 또 있다. 팬티가 젖었다.

오서 오세요, 박연희 씨. 여기서 보니 새삼스럽네요.

… 아무튼 오늘은 과거 제 이야기를 해 볼까 해요.

네. 천천히 해 보세요.

과거 아빠와 이혼한 엄마가 재혼했는데, 아빠가 자주 새아빠 집에 찾아와 엄마와 저를 끌고 가려고 하면서 막 때렸어요. 하루는 새아빠가 마침 집에 도착해서 도와줬어요. 경찰이 오고 난리였죠. 그 이후 새아빠는 엄마와 자주 다퉜지만 저는 이뻐했어요. 아빠한테 맞아 시퍼렇게 멍든 등과 얼굴에 안티푸라민을 발라주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의붓오빠가 그 장면을 보고는 새아빠를 오해해서 엄청 둘이 싸웠어요. 그러다 새아빠의 직장이 망하면서 엄마와 싸움이 심해졌고, 특히 새아빠와 의붓오빠도 엄청 싸웠어요. 오빠와 저 사이까지 서먹해졌죠, 처음에는 오빠와 사이가 좋았는데. 결국 엄마는 두 번째 이혼을 했고 그 이후 엄청 고생하다 제가 25살 되던 때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얼마 전 새아빠한테 전화가 온 거에요. 어떻게 알고 전화했는지 모르겠지만 만나보니 새아빠도 돌아가시기 직전이었어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 전부라고 하면서 허름한 집을 처분한 돈 8천만 원을 주셨어요. 그 돈으로 나는 이 원룸 전세를 얻은 겁니다. 엄마 돌아가시고 나도 정말 힘들게 살았는데, 내 평생 처음 집 같은 집에 사는 거예요. 아무리 동굴 같은 원룸이라도 나한텐 소중한 안식처에요. 그리고 이 쪽지를 주셨어요.

아들 정식아. 너무 미안하다. 많이 힘들고 외로웠을 텐데 아버지 다 용서하고 연희랑 잘 살아라. 네가 옛날에 연희를 좋아했던 거 안다. 아버지 꿈은 너희들의 행복이다. 부디 둘이 잘 살기 바란다. 어른들이 못 이룬 행복 잘 가꾸기 바란다. 사랑한다.

알고 계셨죠? 정말 몰랐어요? 오빠! … 따르르릉!

아아악! 으윽, 머리가 깨질 듯 너무 아프다. 이러니 내가 제정신을 갖고 살 수가 없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이란 말인가. 이 모든 불행이 나의 오해였다니. 이럴 순 없다. 내가 어떻게 꿈을 접고 다시 꿈꾸며 살아왔는데 결국 자살해야 하나, 죽어야 끝나나… 언제까지 이 황망한 도시의 유령으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다시 꿈을 꾸어야 한다, 꿈을! 불쌍한 유령의 꿈을…

어때요? 교수님! 제 오빠 조금 차도가 있나요?

환자는 회상성 기억 조작과 해리성 선택적 기억상실이 겹쳐 일어나고 있어요. 현실인식이 조금씩 높아져 가고는 있는데, 새로 개발된 약을 투여하고 있으니 기다려보죠. 새 약을 투여하면 꿈을 꾸는 것 같아요. 그 꿈이 김정식 씨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는 내가 꿈을 꾸며 살아가는 정신병원이다. 나는 여기에서 꿈을 꾸는 실험대상자 모르모트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꿈을 꿔야 한다. 내가 정신병자인지 세상이 정상이상자인지 구분하기 힘든 경계에서 나는 꿈을 꾸는 정신병자이다.

따르르릉!

아버지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받을까 말까 고민이 된다. 받아도 받지 않아도 내가 유령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도시엔 유령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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