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로 전 국민에게 알려졌고 이 영화로 흥행에 대박을 터뜨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이 영화 이후 박감독은 대중적인 영화가 아닌 박찬욱만의 독특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복수 3부작을 시작으로 인간의 본성과 관계성 내지 사회 시스템과 인간의 악마성의 관계에 대해 천착해왔다. 그 절정이 <올드보이>이고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스토커>, <헤어질 결심> 등이다.
이랬던 박찬욱 감독이 3년 만에 신작 <어쩔 수가 없다>를 내놓았다. <어쩔 수가 없다>는 비록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에 실패했지만, 박찬욱 감독 영화 중 가장 진입장벽이 낮은 대중영화다. 박찬욱 감독 영화에 대해 표현할 때 ‘미장센’이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 없다. 대사, 인물, 인물의 의상, 음악, 배경 스타일, 소품의 배치 등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상호 중첩적인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어렵다’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한 번 봐서는 전문가도 쉽사리 해석이 되지 않는 어려운 영화가 바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감독의 말대로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여전히 박찬욱다운 색채는 많이 띠고 있지만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다만 아쉬운 면도 조금은 있는 영화다. 미장센을 조금 포기하고 대중적으로 만들려고 했다면 더 상업성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다고 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영화는 어중간하다. 이전처럼 미장센을 강하게 밀어붙이든지 아니면 아주 상업적으로 갔어야 했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영화가 되어버린 감이 있다.
만수(이병헌)는 ‘올해의 펄프맨’이라는 상까지 타면서 25년간 제지회사에서 일해온 제지전문가다. 그런데 회사가 외국회사에 팔리면서 정리해고 되고 만다. 13개월 이상 재취업을 못하면서 아내 미리(손예진)와 아들, 딸이 살고 있는 전원주택도 팔아야 할 처지다. 아내도 여유를 부리던 생활을 포기하고 치위생사로 취업을 할 수밖에 없었고, 키우던 개도 팔아야 했고, 딸의 첼로 레슨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다급해진 만수는 다른 제지회사에 면접을 보게 된다. 이 면접에서 자신보다 실력이 더 뛰어난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사람들을 제거해야만 자신이 재취업할 수 있다. 꾀를 내는데 위장회사를 차려 경쟁면접자인 구범모(이성민), 고시조(차승원), 최선출 반장(박희순)들에게 면접보러 오라고 연락한다. 그러면서 이들의 구체적인 정보를 캐내고 이들의 정보를 습득한 후 하나씩 제거한다. 그 결과 결국 재취업에 성공한 만수는 이전의 일상을 완전 회복한다. 아내도 아들과 딸도 집도 완전 이전으로 돌아왔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97년에 나왔다고 한다. 90년대는 전 세계에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던 때다. 소설은 아마 이 배경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신자유주의가 시대의 흐름이자 진리가 되어버린 시대라 이 영화를 보는 데도 장벽이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제 이런 주제의 영화는 너무 흔하다는 말이다. 주제를 어떻게 풀지가 남은 숙제인데,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내가 살 수 있는 세상이 바로 현재의 사회다. 이병헌의 대사에서도 해고는 모가지라고 말한다. 죽는다는 말이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세상인 것이다. 이런 암울하고 살벌하고, 암흑인 세상을 안 다룰 수는 없지만 다루기엔 너무 흔한 주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런 주제를 다루려면 차라리 이전의 박찬욱 감독의 취향대로 미장센을 한껏 살렸으면 어땠을까 싶다. 아니면 더욱 <공동경비구역>처럼 철저히 한국적인 배경을 깔고 한국인에게 더 흡인력있게, 그리고 상업적으로 더 크게 만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영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다분히 유럽적인 느낌의 영화다. 전원주택도, 아내인 손예진의 취미생활(테니스와 댄스파티 등), 딸의 첼로 레슨, 이성민과 그의 아내 염혜란의 일탈에서 보이는 미장센은 한국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유럽적인 요소에 가까워 보이는 캐릭터와 배경설정이다. 미장센은 전원주택과 등장인물들의 의상, 그리고 그들의 댄스파티에 집중되어 있으나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 특히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등장인물들의 집들이 암울하고 을씨년스러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고 이는 시대를 비유하는 것이다. 특히 이병헌의 집은 산과 나무들로 완전히 뒤덮여 있다. 숲이라 향기롭다는 느낌보다는 왠지 으스스한 느낌이 든다. 거기다 식물이 과잉으로 있는 온실은 이병헌의 심리를 비유하고 있다. 또는 이 사회를 반영하는 메타포라 할 수 있다. 이 온실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토막내어 그것을 나무의 토양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인 것이다. 이 얼마나 괴기하고 암울한 현실인가.
공동으로 잘 사는 방법을 포기한 사회에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남을, 경쟁자를 죽이는 것이다. 이대남과 삼대남들은 실력주의가 정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도 5지선다의 객관식만이 실력이고 공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정당하고 그 차별이 정의라고 말하고 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슬로건인 90년대 신자유주의가 이제 정말 절대 정의가 된 것이 실감나는 세상이다. 이러니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객관식 시험에서 몇 점 낮았다고 평생 차별적인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왜 정의인지 대답을 하지 못하면서 정규직이 되기 위해 죽으라 사는 신자유주의의 맹신자들이 이 영화를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정규직에서도 점수 차이는 있는데 이들은 왜 평등하게 정규직으로 똑같이 대우받는지, 그것은 왜 공정인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실력주의가 얼마나 왜곡된 정의인지, 공정을 가장한 차별인지는 수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은 그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며 차별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 차별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부메랑이 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넓은 시각이 전혀 없는 무지하고 편협한 자들이다. 마이크 샌델 교수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루소, 토마스 아퀴나스, 롤즈 등 많은 철학자들은 다 같이 잘 사는 공동선과 연대를 주장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가 아닌데 문제는 그놈의 탐욕이다. 남들보다 내가 더 잘 살고 부유하게 살고 싶다는 탐욕을 조금만 버리면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니 남을 짓밟고 죽여야 하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을 보라. 사람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악한 존재인지. 오로지 수백억을 혼자 차지해야만 적성에 차는 존재가 인간 아닌가!
처음에는 차마 경쟁자를 죽이지 못해 머뭇거리던 이병헌의 모습은 소시민 그 자체다. 그러나 이성민을 죽이러 간 곳에서 어찌하다 이성민이 결국 죽게 된다. 이병헌과 이성민, 그의 아내 염혜란이 함께 펼치는 몸싸움 장면은 웃픈 블랙코미디다. 자본주의의 악랄한 한 바탕 소동극이기도 한 이 장면은 여기에 조용필의 노래 ‘고추잠자리’가 더해져 더욱 기괴하게 관객에게 다가온다. 그 후 순진했던 만수는 과감한 살인자가 된다. 그러면서 영화는 제대로 된 스릴러로 변모한다. 어쩔 수 없이 경쟁자들을 차례로 죽이면 재취업에 성공한다는 설정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작은 소재다. 여기에 더 가슴 여미는 것은 아내 미리의 태도다. 미리도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며 결국 남편의 범행에 공모한다. 그러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만수는 다시 콧수염을 기르고, 팔기로 했던 전원주택은 팔지 않아도 되고, 키우던 개를 다시 데려오고, 아내 미리는 이전의 허영심 가득한 취미생활을 하고, 딸은 마침내 첼로를 완벽하게 켤 수 있게 되었다. 이 완벽하고 안전한 상황은 바로 경쟁자를 죽인 덕분인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고 웃픈 현실 아닌가!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버리고 남을 죽여야 내가 잘 사는 이 세상… 언제까지 이런 사회에서 살 것인지, 결국은 인간 본성의 문제이다!!!
이병헌과 이성민은 우리 시대 뒤틀리고 무너진 가장의 모습들이다. 방귀나 뀌며 술에 절어있는 무기력한 가장 앞에 놓인 것은 아내의 외도와 죽음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려면, 즉 이 냉혹한 사회에서 가정을 지키고 살아남으려면 경쟁자들을 죽여야 하는 이병헌의 암울하고 뒤틀린 모습이 또 다른 가장의 현실이다. 이런 가장의 모습은, 이런 사회는 결국 우리의 본성이 만들 결과물이다.
염혜란이 뱀에 물린 이병헌의 다리를 빠는 행위, 그녀의 외도, 손예진이 참가하는 댄스파티 등은 인간의 성적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자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비유하는 것이다. 불화, 오해, 성적 판타지, 불만 등 온갖 감정들과 사회의 부조리 구조가 한데 어울려 웃픈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이런 미장센에 노래가 더해져 한층 기이한 분위기를 선사하고 있다. 이미 신뢰가 깨진 부부사이, 가족, 사회라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저 서글픈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특히 손예진의 외도를 의심한 후 심하게 손예진에게 타박을 받고 나서 이병헌이 개처럼 워워, 짖은 후 다시 부부관계가 회복되는 것처럼 나오는 장면은 그 자체로 부조리하고 우리 사회, 우리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남편은 살인자, 아내는 공범, 의붓아들은 도둑, 이런 가족 구성원이 이전 이상으로 화합되고 화목하게 되자 첼로 소리도 못 내던 딸이 천재의 첼로 실력을 뽐낸다. 참으로 박찬욱 다운 역설적 장면 아닌가!
외롭고 무서운 범죄 가족을 누가 만들었는가! ‘그래 걷자 발길 닫는 대로. 빗물에 쓸어버리자 이 마음’ 김창완의 노래 ‘그래 걷자’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가운데 이 기묘한 가족 구성원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자 우리 사회의 얼굴이다. 똥오줌 퇴비에서 꽃이 자라는 것이라고 애써 합리화하며 죽인 시체 위에 사과나무를 심는다. 벌레 파먹은 이빨을 직접 벤치로 뽑고 나서야 희열을 느끼는 이병헌은 마지막 시체를 파묻는다. 남편은 마지막 시체를 파묻으려고 땅을 파고 아내는 남편이 묻은 시체를 확인하려고 땅을 파고, 아들은 이 모든 것을 보고 놀라지만 난쟁이보다 작은 미니어처가 되어버린다. 울창한 나무는 사람의 시체를 먹고 자라는 법인 양. 마지막으로 이 가족들은 서로 안는다. 이때 손예진은 눈물 한 방울을 흘리는데, 이 손예진의 눈물 한 방울은 죄책감일까, 안도감일까? 알 수 없는 손예진의 표정 너머 그녀의 마지막 독백, ‘그렇게 열심히 살지 말지…’ 잔혹한 가족동화는 이렇게 끝이 난다. 감독은 여기에 음악의 기능을 추가한다. 기묘한 악보를 보며 딸이 켜는 놀라운 첼로 연주! 사회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부조리하게 딸의 첼로 멜로디 위에서 잘도 흘러갈 것이다. 곧 늦가을이 된다. 을씨년스러운 풍경과 정서에 맞는 영화다. 어쩔 수 없는 악마 같은 우리 사회와 어쩔 수 없는 우리 인간의 본성을 비틀고 풍자한 영화는 정말 을씨년스럽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허영심 가득하거나 남을 은근히 깔보는 이중적인 캐릭터들이다. 인간의 본성을 뒤트는 박찬욱다운 설정이다. 이런 설정에 맞게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하고 그 조화도 좋다. 극 전체를 끌고 가는 이병헌의 연기는 물론이고 기존과 다른 연기를 펼친 손예진(허영적이고 음흉하지만 안 그런 척하는 이중성)의 연기도 뛰어나다. 특히 한 바탕 소동극을 펼치는 이성민과 염혜란의 연기는 가히 독보적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한다. 이번 영화는 약간 아쉽기는 하지만 나름 의미가 있는 영화다. 다음 영화가 벌써 기대된다. 다시 3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니 이것이 더 아쉬울 뿐이다.
개인 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