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루스의 비행

by 방정민

이카루스의 비행

1.


띠리리릭.
P는 자명종을 얼른 끄고 다시 자리에 눕는다. 그리고 한참 후, 느지막이 일어나 이불을 옆으로 아무렇게 밀치고는 지하 화장실로 나선다. 화장실 안에서는 커튼을 쳐놓고 누가 샤워를 하고 있다.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며 샤워를 하기위해 기다리는 것으로 그의 고시원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아무리 몸을 씻고 샤워를 해도 쾨쾨하다 못해, 썩은 듯한 방안의 냄새는 마치 꿈틀꿈틀 대는 기생충으로 변해 그의 몸을 적시고 뇌를 파고들어 그의 생활을 지시하는 듯하다. 5년이 넘은 법전을 펴 보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옆에 놓인 담배 갑, 그래 담배나 피자. 담배 맛에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고는 벽에 걸린 달력을 본다. 달력 안에선 힘차게 달리는 말들이 보인다. 지지난주 경마장에서 만난 남자에게서 받은 달력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벌써 토요일이구나. 경마장에서 만난 남자와 만나기로 한 날이다. 별 할일도 없이 무료함과 권태로움을 쫓아내기엔 경마만한 게 없었다. 살아있되 숨쉬지 못하는 P에겐 경마는 유일한 숨쉬기 운동이었다. 그는 망설임도 없이 점심을 대충 먹고는 경마장으로 향한다.
옥상에서 빨래를 널고 있던 L, 툭투두툭. 좁은 골목을 구르듯 달려가는 P를 보고 중얼거리며 욕한다. 저 반거들충이, 식충이, 저런 인간이 우리 고시생을 다 욕 먹인다니까.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그때도 L은 널었던 빨래를 개려고 옥상에 올라갔다. 마침, P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담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L의 잠바에 담배 자국으로 보이는 구멍이 뻥하니 뚫려있는 것이 아닌가. 화가 끝까지 치밀었다. P를 쳐다보며, 어떤 개자식이....... 잡히기만 해봐라. L은 옆방에 사는 P가 그의 방에서 뿐만 아니라 옥상에서도 담배 피는 걸 자주 보아왔던 터라 그를 용의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L 옆으로 D가 같이 가고 있다. 약간은 어색한 듯이 보인다. 얼핏 보면 여자가 더 커 보이는데다가 사귄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둘은 같은 처지임을 서로에게 확인이라도 시켜야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탓인지 쉽게 친해졌다. D의 고시원은 L의 고시원 바로 앞이다. L의 고시원은 남자전용 고시원이고, D의 고시원은 남녀공용 고시원이다.
같은 고시원에서 1년이 지나도 알은체를 하지 않는 것이 이곳의 불문율이다. 처음 1년간 L은 고시원 생활에 무척이나 힘들어하고 외로워했다. 마치 영화, ‘케스트 어웨이’에서 홀로 무인도에 갇힌 주인공 톰 행크스와 같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고독했으면 배구공에 이름을 붙여주며 자기의 존재를 위로했을까! L은 그 감정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L은 지방대 철학과 출신이다. 교수가 꿈이었던 그는 학부 때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었다. 전공은 가히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철학적 재능도 재능이지만 지방대 철학과를 입학해서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대학원으로 진학해서 유학을 꿈꾸던 그에게 대학원의 구조, 교수간의 파벌...... 이런 것들은 실력만으로 교수가 되는 게 아니라는 처절한 현실을 깨닫게 했다. 거기다가 학부제를 시행한 이후 철학 과목은 자꾸 폐강되어 가고, 철학과 자체를 없애려는 교육부 당국의 행정적 음모, 이런 사회현실 앞에서 그가 가야 할 길은 고시밖에 없었다.

어렵다면 어렵게 고시를 하게 된 L은 원래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격 탓에 외로움에는 자신 있었지만 이 곳 고시원의 생활은 정말 외로움 그 자체였다. 망망대해에 갈 길을 잃고 표류하는 작은 배 한 척이 세월을 노 삼아, 바람을 희망삼아, 하루하루 나아가지만 보물섬이 어디 있는지 아니, 있지도 않은 보물섬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 이상 되돌아 갈 곳도 없는 처지에 무조건 앞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D는 L에게 묻는다. 조금 전 학원에서 배운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서 변형결정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고. D는 공부한 지가 채 1년이 되지 않았고, L은 3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L이 ㄱ책에 설명이 잘 되어 있다고 말하자 D는 자기 방에 그 책이 있다며 그녀 방으로 그를 안내한다. 그녀가 책을 꺼내자 L은 모기소리로 자세히 설명한다. 고시원에선 어떤 소리도 세어 나가선 안 되기 때문이다.

한참을 설명하고 있는데, 어느 방에서 야릇한 여자소리가 이어졌다, 끊겼다, 하며 흥분의 살 맞닿는 소리가 조심스레 들린다. L과 D는 마치 자기들의 행위인 양 달아오른 얼굴을 마주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열없고 어색하여 숨소리마저 내지 못하는 L은 침도 살짝 삼키지만 D의 귀에는 모든 것이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린다. L이 더 이상 설명을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D는 따뜻해진 그녀의 입술을 그의 상기된 볼에 전달한다. 그 순간, L은 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꽉 잡고 그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포갠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황홀한 소리와는 너무나 다른 소리, 읍!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런 일에 그가 너무 힘을 가했는지 그녀는 그의 입술을 뿌리친다. 갑자기 방 공기는 냉랭해졌고, 그가 미안한 듯 겸연쩍어 하자 그녀는 그보다 훨씬 능숙한 담담함으로 그의 손을 잡고 고시원 밖을 빠져나온다.
“미안해.”
“뭐가?”
“어, 아까......”
피식 웃는 그녀는 키가 170센티미터나 되고, 누가 봐도 올차고 야무진 구석이 있어 보인다. 둘의 성격이나 외모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불안 속의 혼자라는 그들의 상황은 이 둘을 연인으로 엮어놓았다. 그러나 왠지 위태로워 보인다.
“그런 소리 자주 들리니?”
“아니, 아주 가끔.”
“남자 고시원에선 그랬다간 사람들이 가만 안 있는데.”
그녀는 말이 없다.
“여자전용 고시원으로 옮기지 그래?”
“그긴 더 안 좋아. 여자들끼리라서 그런지 몰라도 여자들 더 지저분해. 주인아줌마도 여자 고시생이라 우습게 아는지 청소도 잘 안하고, 밥도 엉망이야.”
“히히,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그 말이 맞구나.”
“글쎄 말이야.”
그가 말을 이었다.
“부모님께 말해서 너 원룸으로 들어가지 그래?”
“안 그래도 생각중이야.”
L은 한 달에 비용이 120만 원 이상 든다는 원룸에 대해 그냥 한번 슬쩍 꺼내봤을 뿐인데 너무 쉽게 맞장구치는 D의 대답에 그저 멍할 뿐이다.
D는 명문 여자대학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한 목사고, 어머니는 수원에서 가장 큰 약국을 가진 약사다. 대단한 집안이며 부유하다는 사실에 L은 전혀 기죽을 필요 없다는 듯 지나치게 태연하다.


2.


자기 방으로 들어와 책을 편 L은 D의 방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괜스레 점직해서 얼굴을 붉힌다. 배에선 허기진 소리가 들린다. 자정을 넘어서고 있다. 요기하기 위해 10미터쯤 앞에 있는 가게에 간다. 저녁 식사시간에도 나타나지 않은 P가 가게주인 할머니와 고스톱을 치고 있다. 순간, 알 수 없는 뭔가가 속에서 치민다.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30대 후반 정도로 보여 마음과는 달리 P에 대한 행동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명문대학 법대를 나와 S회사를 다니다 적응을 못해 사법고시를 준비한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유부녀와 바람피우다 여기로 도망 왔다고도 하며, 법대를 나오지도 않았다는 소문도 있다. 주식도 하고 카드 돌려 막기로 겨우겨우 생활 한다고는 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10년 가까이나 여기서 어떻게 지낼 수 있는지, L눈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역겨움이 확 밀려오자 먹고 싶은 생각도 달아난다.
이틀 후면 추석 연휴다. 설날 때는 시험이 코앞이라 집으로, 고향으로 가는 사람이 없지만 추석은 다르다. 설날 때 가지 못하는 마음을 미리 달래나 보자는 듯 빨리 가는 사람은 일주일 앞에 가고, 보통 연휴 이틀 전이면 거의 다 빠져 나가고 없어 고시원은 물론이고 신림동 고시촌이 쓸쓸하다 못해 스산하다. 내일 학원수업이 끝나는 대로 고향으로 갈 생각을 하며 예매해둔 고속버스 표를 보는 L의 마음 한 켠이 부풀어 있다. 막상 내려가면 눈치도 보이고, 가족들과 부딪히는 일도 많지만 절대 정이 가지 않는 이 삭막한 고시원보다야 가족의 품이, 집이 L에겐 언제나 따뜻하고 포근한 그리움의 대상이다.

옆방 P-일명 고시건달(여기선 P같은 사람을 그렇게 부른다) -는 지금 방에 없다. 있으면 담배 냄새가 나든지 코고는 소리가 들릴 것인데 조용하다. 또 가게 할머니와 고스톱을 치고 있겠지. 라고 L은 편하게 생각해 버린다.
같이 학원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D의 고시원 앞에서 가볍게 포옹을 하고 헤어진 L이 2층 복도를 들어서려는 순간, 앞방에 사는 H가 후다닥 뛰어 나간다. 사법고시 마지막 2차를 본 후, 식사시간은커녕 잘 마주치지도 않던 H였다. 여기선 2차 마지막 시험 후에는 짐 싸서 집으로 내려가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H는 고시원에는 있는데 잘 보이지도 않고 놀러 다니는지, L에게는 그저 부러운 존재였다.
L이 자기 방으로 들어서려는데 옆방 P의 방이 살짝 열려 있다. 찌들고 꾀죄죄한 냄새가 확 풍긴다. 냄새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소에 쌓였던 감정은 무의식적으로 P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옷은 제 멋대로 춤추고 있고, 개지도 않은 이불은 한쪽으로 쫓겨나 있으며, 누드에 가까운 여자 연예인 사진을 오려냈는지 오려진 신문은 심장을 도난당한 듯 눈물을 머금고 있다. 버리지도 않은 컵라면 속엔 국물이 조금 남아 있어 온방을 물들이고 있고, 책상서랍 문은 각각 마음대로 놀고 있다. 우웩우웩 구역질이 난다. 그때다. 툭툭툭. 복도에서 사람이 올라오고 있다. P다. P의 방으로 반쯤 들어간 눈을 거두고 잽싸게 자기 방으로 들어간 L, 마치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한 3분쯤 지났을까, 겨우 마음을 진정하려는데 똑똑. 누군가 L의 방문을 두드린다. P일 것이다. 전정되어 가던 심장은 다시금 벌렁벌렁 뛰기 시작한다. 방문을 열었다.
“나 206혼데 조금 전에 아저씨 내 방에서 나왔죠?”
얼굴은 상당히 상기되어 있고 목소리는 분에 차 있다.
“아, 아뇨. 방문이 열려 있기에. 냄새도 나고 해서 들여다 본 것뿐인데요.”
“뭐요? 멀쩡한 방문이 왜 열려 있단 말이야! 내 책상서랍 안에 있던 돈 30만 원이 없어졌어.”
“예? 아니, 그럼 제가 아저씨 돈 훔쳐 갔단 말입니까?”
꿀리던 L의 목소리는 당당해졌다.
“지금 상황이 그렇잖아!”
“그런데 왜 반말입니까? 누구는 반말할 줄 몰라서 대접해주는 줄 알아.”
주먹이 한 대 날아 올 것만 같이 분위기는 험악하다.
“지금 고시원엔 사람도 별로 없고, 당신이 내 방에서 나오는 걸 봤는데 당신을 의심 안 하게 됐습니까?”
“방에 들어간 게 아니고 복도에서 쳐다만 봤을 뿐입니다. 냄새가 심하게 나서.”
잠시 정적이 흐른다.
“설령 당신 말대로 내 방이 열려 있었다 하더라도 왜 쳐다봅니까? 당신 방에나 곧바로 들어갈 일이지.”
“자꾸 당신이라 하지 마세요.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뭐야! 이 개새끼!”
“뭐? 개새끼? 이 씨발놈이!”
P가 L의 멱살을 잡자, L은 P의 손을 뿌리치며 그를 노려본다.
“한번 해보겠다 이거야! 나요, 당신 방에서 나는 냄새며, 통화하고 꿍꽝거리는 소리며, 얼마나 많이 참았는지 알아!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한 달 전 옥상에서 당신, 담배 피우고 내 잠바에 불 안 껐어? 내가 빨래 걷으러 갔을 때 내 빨래 근처에서 나왔잖아.”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담배는 당신 올라오기 전에 바닥에 끄고 휴지통에 버렸어. 이 사람아!”
“그럼, 당신은 내가 밖에서 당신 방 좀 봤다고 날 도둑놈으로 취급해?”
다시 정적이 흐른다.
이때쯤이면 주인집 아주머니가 올라와야 하는데 오늘은 이상하다. 아줌마 대신 아직 집에 내려가지 않은 같은 고시원의 고시생 몇몇만 나와서 누구는 재미있는지 보고만 있고, 누구는 싸움을 말리고 있다. P는 그 사이 화가 약간 누그러졌다. 이 틈을 타서 L이 자기 호주머니를 열어 보인다. 그리고 말을 꺼낸다.
“우리 이렇게 합시다. 내 몸 뒤져보세요. 내 방도 뒤지고. 그러고 나서 돈 30만 원 안 나오면 그땐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됐죠?”
그러자 P는 갑자기 꼬리를 내린다. 말리던 남자가 P에게 잘 찾아보라고 하면서 다음부턴 문을 꼭 잠그고 다니라고 말한다. 소란스러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뚝 그치고 고시원은 고요함의 그 절대적 적막 속으로 빠져든다.


3.


추석을 고향에서 보내고 다시금 고시원 일상으로 돌아온 L, 나이 30에 고향도 부모님도 형제도 그렇게 편안하지마는 않지만 이 곳 고시원 생활도 아늑하진 않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한 구석이 텅 비어져 가고, 그 속에 쓸쓸함과 불안과 허전함이 가부좌를 틀고 그 덩치를 부풀리고 있다. 커져가는 이 아련한 공허함을 친구로 삼아 이유 없이 떨어지는 눈물로 책장을 꾹꾹 넘긴다.
디디디딕.
막 공부를 시작한 L의 책상위에 놓여있는 휴대폰 진동 소리다. 그녀다.
“여보세요? 너 어디야? 고시원엔 없던데?”
“응, 오빠, 언제 왔어? 나, 여기 ㄷ커피숍.”
“거긴 왜?”
“조금 전에 오빠 방에 가봤는데 없어서 그냥 여기 혼자 왔어.”
“알았어. 지금 갈게.”
D는 고향이 서울이라 명절 때는 텔레비전에서 떠드는 만큼 재미있지도 않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없다. 어쨌든 그녀의 마음은 자기와는 조금 다른, 살가운 그를 애인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L은 고시원 숲 속을 헤쳐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 보면 여기는 마치 미로 찾기 그림처럼 보인다. 즐비하게 늘어선 수많은 고시원,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 찬 음식점과 각종 유흥점 들. 무슨 고시촌에 PC방과 술집과 만화방과 비디오방과 이름도 다 나열 할 수 없는 유흥점이 이렇게도 많은지, L이 처음 이 곳에 입성했을 때 절간처럼 한산할 것이라고 생각한 기대는 완전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숨이라도 헉 막힐 것 같던 이 곳도 어느새 L에게 포근한 보금자리가 되어 있었다. 완연한 가을 냄새를 맡으며 그녀가 있는 커피숍으로 L은 들어선다.
“어, 오빠 여기.”
“추석 잘 보냈니?”
“그럭저럭. 오빠는 어땠어?”
“여기보다야 훨씬 낫지. 그런데 너, 얼굴이 좀 안 좋아 보인다. 무슨 일 있니?”
“아냐. ......사실은 집에서 선보래.”
“공부하는 사람이 무슨 선을 봐?”
“뭐, 심각한 건 아니고. 그냥 가볍게 보래.”
“그래서?”
“응?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난 안 본다고 그랬지. 시험이 5개월밖에 안 남았잖아.”
“남자는 뭐 하는 사람인데?”
“......변호사래.”
“뭐?”
L은 허탈하게 웃어버린다.
“오빠. 우리 술 한 잔 하자.”
“너 술 안 하잖아. 왜, 술 마시고 싶어?”
“응, 쬐끔.”
연휴 끝난 다음 날이지만 문을 연 술집은 생각보다 많았다. 둘은 한 생맥주집에 들어선다. 2천cc를 시키고 안주는 노가리를 시킨다. 이 집은 노가리를 시키면 땅콩이랑 김도 주는 걸 L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맥주가 나오자 D는 작정이라도 한 듯 쉬지 않고 홀짝홀짝 마셔댄다.
“어, 너 왜이래? 술도 못 하는 애가.”
“오빠, 나 술 못 하는 줄 알았지?”
“너희 집 크리스천이잖아.”
“아빠 몰래 조금씩은 해. 그리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라고 하잖아. 다 좋게 생각하면 되는 거지, 뭐.”
“그럼, 이 맥주는 예수님의 뭐니? 쉬?”
“에이, 오빤.”
2천cc 하나를 더 마시고 나자 D의 얼굴에는 불그름히 꽂이 피었고 눈에는 초점이 없어졌다. L은 술집을 나와 D의 한 팔을 자기 어깨에 걸쳐 그녀를 부축한다.
“오빠, 나 좀 업어줄래?”
생각보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L은 D를 업고 그녀의 고시원으로 향한다. 얼마가지 않아, 그녀가 망설인 듯 말을 꺼낸다.
“오빠, 고시원으로 말구. ......우리......여관 가.”
겨울도 아닌데 L은 온몸이 눈을 맞아 추워지고, 굳어지는 듯 한 한기를 느낀다. 그녀의 대담함과 뜻밖의 황홀함에서 나오는 한기만은 아니었다.

집안이 답답하다고 느꼈을까? 아님, 본능에 충실하고 싶었을까? D의 마음은 이전부터 예수님에 대한 동일시를 포기하고, 인간임을 강하게 느끼고 싶어 했고, 조금씩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P는 집에도 내려가지 못하고 연휴 내내 고시원에 죽치고 있다. 어떻게 마련한 돈인데, 하며 미련가지고 궁상떨어봐야 이 곳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속으로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거금 30만 원을 잃어버린 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게 할머니께 겨우 돈 5만 원을 빌려서 주린 배를 채우고, 한 프로에 천 원 하는 비디오방에 가서 비디오 3,4편을 연달아 보며 시간을 보낸다. 하는 일 없이 지내도 평소에는 그렇지 않은데 이런 연휴에는 정말 시간이 지루하고, 자신이 곰팡스럽다.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도 이제 하지 않는다. 다만 고시원이 냄새 지독한 닭장 같기도 하고, 깔끔한 화장장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다음 주부터 있을 학원 모의고사 수업에 대비하느라 책을 보고 있는 L, 책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지난밤에 묻었던 D의 살 냄새가 아직도 자기 몸에서 풀풀 풍기는 것 같다. 여관방에 들어가자 욕조에 물 좀 받아달라는 그녀의 말에 그는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았다. 물이 가득 찰 때쯤, 그녀는 옷을 모두 벗은 채 수건으로 중요 부분만을 가리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를 쳐다볼 수 없어 뻣뻣하게 석고상처럼 서 있는 그에게 그녀는 옷을 벗고 들어오라고 말하곤 먼저 탕에 들어갔다. 물에 젖어 더욱 함초롬해 보이는 그녀의 긴 생머리,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숨바꼭질하며 풍기는 그녀의 젖가슴 내음, 촉촉하게 젖어 한층 쫄깃쫄깃한 그녀의 입술 감촉, 이 모든 게 구름 속의 마음 같았다. 책 내용이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다.「팔 선녀를 얻고 좋아하는 성진이의 하룻밤의 꿈......」
쿵쿵, 쿵쿵.
뒤꿈치를 들고 살짝 걸어야 되는 이 곳의 불문율을 어기는 무법자가 간혹 있다. 짜증나는 인간이다. 치직, 킥큭, 똑똑, 똑똑똑. H 방이다. 자기 방 열쇠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주인아줌마한테 가서 보조키를 가지고 와서 열든지, 아무도 없는 자기 방에 노크는 왜 하는 거야. L의 달콤한 환상은 순식간에 깨어져 버렸다.
“야! 문 열어. 문 열어 보라니까!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건데? 내가 널 강간했냐? 겁탈했냐? 그날 가야 된다고 하던 날 붙잡은 건 너야. 그리고 나 너한테 옷 사달라고, 용돈 달라고 한 적 없어. 니가 좋아서 그런 거고. ......내가 30만 원 줬으면 됐잖아. 그걸로 애 지워, 응?”
갑자기 L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다. 돈 30만 원! 술을 마시고 여기가 자기애인 방 인걸로 착각하고, 주절주절 대는 H의 말 속에서 바로 그가 돈 30만 원의 범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난 것이다. 여태 왜 그를 의심하지 못했을까? 허둥지둥 달아나듯 나가던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못했던 자신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유야 어쨌든, 가만있을 수 없다. 괜히 자기가 의심받으며 P와 껄끄럽게 지낼 이유도 없으며, 그때 있었던 다른 고시생에게도 기분 나쁜 눈초리를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니, 이 모든 것을 떠나서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괜한 정의감까지 발동된다. 어떻게 수습하지? 혼자서 골머리를 앓는 동안, H의 옆방에 사는 남자가 주인아줌마를 데리고 왔다.
"어휴! 이 냄새, 술 많이 마셨네. 얼른 들어가 조용히 자.”
“아이구! 헤헤, 아줌마시네요. 죄송합니다.”
날이 밝았다. L의 몸은 찌뿌듯하고 머리는 아슴아슴한 안개가 낀 듯 둔탁하다. 잠을 제대로 잤을 리 없다. 이 일을 어떻게 하나? 어떻게 처리해야......? 정말 H가 범인일까? L의 머릿속은 꼬인 실타래마냥 복잡하기만 하다.
어느새 따사로운 햇살은 땅거미에 먹히고 어둠이 꿈틀거린다.
때르르릉!
저녁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다. 멀쩡한 배가 이때부터 막 고파온다. 인간이 아무리 환경의 동물이라지만, 소화도 되지 않아 더부룩한 배가 식사시간 종소리에 고파지며, 조건 반응된 파블로프의 개처럼 헤헤거리며 입에 침이 고이다니, 정말 놀랍다.

H는 보이지 않고, P는 L과 다른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다. L과 P는 되도록 서로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하고 있다. 식사를 마치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L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실마리를 찾을 수 없자, 콜롬보가 아닌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공부에만 몰두한다. 한참을 공부하고 있는데, 누군가 똑똑 L의 방을 노크한다. P다. 또 얼굴 붉히지 않을까 해서 L은 움츠러든다. 그런데 의외다.
“저, 괜찮다면 화해도 할 겸 술 한잔 하시겠습니까?”
“네? 아, 네.”
엉겁결에 대답한 L은 P를 따라나선다. 허름한 소주집에 들어선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깔끔하다. 소주에 돼지찌개를 시키고 나자, P가 먼저 말을 꺼낸다.
“그때 일은 제가 사과드릴게요. 어렵게 마련한 돈 30만 원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그쪽을 오해하게 됐고, 홧김에 그만......”
“아닙니다. 저도 잘 한건 없습니다. 좋게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나이도 많으신 분에게. 하필 돈 잃어버릴 때 제가 그쪽 방문에 있어서......”
“그러게요. 일이 꼬이려고 하니까.”
소주가 나오자 L이 P에게 먼저 따른다. 둘은 단숨에 쭉 들이킨다. 그렇게 몇 잔을 마시자 그 동안 쌓였던 감정은 술에 용해되어 버리고, 서름서름한 사이는 가까워졌다. L은 P에게 형이라 부른다. 순식간에 소주 한 병을 비우고 한 병 더 시킨다.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다.
“형! 그런데요, H에 대해 아는 거 있으세요?”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술로 아무리 가까워지고, L이 나이가 어려도 처음으로 대하는 자리라 P는 L에게 말을 높였다, 낮췄다, 어중간하게 한다.
“아니, 형이 돈 잃어버렸던 그 시간 바로 직전에 H가 허겁지겁 복도를 뛰쳐나가는 걸 봤거든요. 그런데 어제 밤에 H가 술을 잔뜩 먹고 들어와서 복도에서 횡설수설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들어 보니까, 자기 여자친구가 임신한 모양인데 유산시키라고 그녀에게 돈 30만 원을 준 모양이에요. 우연치고 너무 이상하잖아요. 형은 어제 밤에 못 들었어요?”
“나는 어제 아니, 오늘 새벽 늦게 들어왔거든.”
P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꺼낸다.
“난 그 돈 잊어버렸어요. 설령 H가 내 돈을 훔쳐 갔다고 치더라도 이제 와서 그걸 어떻게 증명할 것이며, 그러다가 괜히 또 싸움만 일어나지. 내가 이 곳 생활을 한 10년쯤 하면서 터득한 노하우가 있는데,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사생결단하고 끝낼 생각이 아니면 그냥 미친 척 웃고 넘기는 게 상책이더라구. 빨리 잊어 버려야지. 그래야 공부가 되니까.”
P와 L은 소주집을 나와 2차로 생맥주집을 향한다. 싸움이 있었던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사이가 좋다.
“죄송하지만, 형 몇 살이에요?”
P는 30대 후반이라고만 말한다.
“어떻게 해서 고시하게 되었는지 대개 궁금해요. 형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거든요.”
P는 도통한 사람처럼, 혹은 체념한 사람처럼 피식 웃기만 한다. L이 한 번 더 묻자 그제야 P는 조심스레 입을 연다.
“우리 집안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판검사 집안이에요. 난 그런 집안에서 어렸을 때부터 판검사가 되도록 강요 아닌 강요되어 자랐고. 동생이 하나 있는데, 나와 내 동생은 서로 비교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었어. 결국 난 이렇게 패인이 되었지만 내 동생은 지금 지방판사로 있어. 우습지 않아요? 무슨 텔레비전 드라마 같죠?”
“왜 공부는 계속 안하시고......”
L은 계속 물어본 게 미안한 듯 말끝을 흐린다.
“뭐, 재능이 없었던 모양이지.”
P는 안주는 먹지도 않고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킨다. 이왕 말한 것 한풀이라도 하듯 말을 잇는다.
“사실, 나 대학 다닐 때 사시 1차 합격했었어요. 근데 갑자기 판검사 되는 게 죽기보다 싫더라고. 그래서 대학원에 갔지. 법 공부가 나한테 안 맞았던지 결국, 그 대학원에서도 적응 못하고 방황하다 그만둬 버렸어. 어떤 사람은 배부른 소릴 한다고 욕할 진 몰라도. 옛날부터 내 맘 속에 응어리 져 있던 뭔가가 폭발해 버린 거지. 판검사 안 하겠다고 아버지께 말했다가 집에서도 쫓겨나고. ......난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었어. 날고 싶었거든. 어릴 때 모형 비행기 조립을 잘 했었는데.”
P의 눈가엔 눈물이 고일 듯 말 듯하다. 깊은 아픔을 삼키듯 맥주를 연거푸 마셔댄다. L은 한편으로는 그가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도 없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한다. 푸르다 만 슬픔이 퍼져가는 새벽 1시, 녹슨 별을 따다 안주로 삼아 둘은 놀이터에서 캔 맥주 하나씩을 더하고 고시원으로 향한다.


4.


날씨가 추워졌다. 겨울의 한복판에 들어섰다. 이 고시촌에서는 12월이면 희비가 엇갈린다. 사법. 행정고시 최종 합격발표가 있기도 하고, 1차를 준비하는 사람은 이제 긴장의 끈을 조금씩 단단히 묶어야 한다. 합격한 자와 떨어진 자의 처지는 흡사 천당과 지옥과도 같다. L은 이번에는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는 절박감과 긴장감 때문에 밤마다 노루잠이다.
어디서 음악소리가 들린다. 그렇지 않아도 숙면을 못하던 L은 그 소리에 깨어 짜증을 낸다. 자세히 들어보니 H 방이다. L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H 방을 노크한다. 그러잖아도 지난주에 사시에 최종 합격한 이후로 너무 시끄럽기도 하고, 가끔 자기 방에 찾아오는 D에게 관심을 보이며 인사를 하는 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일로 D와 다툰 일도 있었다. 임신시킨 자기 여자는 어쩌고, 같은 층 고시생에게도 인사도 안 하는 놈이 내 여자에게 눈길은. 하며 L은 H를 속으로 증오하고 있었다. H가 들어오라고 한다. L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방안은 마치 비밀스런 여자 자궁처럼 생긴 원룸 같았고, 그 안에 D가 있는 게 아닌가! 아, 아니! 너무 놀라 말을 더듬거리고 있는데 H는 아주 관대한 표정으로 말한다. ‘놀라지 말고, 공부 더욱 열심히 하세요. 언젠간 좋은 날이 있겠죠. 그러나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중동무이가 되어선 안 되죠. 고시도 실력으로 말하는 게 아니고 합격으로 말하듯, 세상도 결국 결과가 과정과 주위 모든 것을 지배하고 합리화하죠. 패배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L은 너무 당황스러워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주위는 알른알른한데 옆에선 P가 모형 비행기를 조립하고 있다가 L을 보고 웃으며 말한다. ‘나, 비행기 다 만들면 이것 타고 훨훨 날아서 태양으로 갈 거다. 따뜻한 태양으로. 여긴 너무 추워. L도 같이 갈래?’
켜 놓은 라디오에서 자정 뉴스가 들린다. L은 식은땀을 닦고 멍하니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본다. ‘다음 뉴스입니다. 서울 신림 9동 O고시원에서 이 고시원에 사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P씨가 자기 방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어 경찰이 조사에 나섰습니다. 시체의 부패정도로 봐서 3,4일은 지난 것으로 보이는데, P씨 주위에 술병이 여러 병 놓여 있고, 특별한 외상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일단 과도한 음주사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자살에 대해서도 그 가능성을 열어놓고 조사 중입니다.’

L은 별 신경 쓰지 않는다.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여기선 매년 한 두 명은 꼭 죽어 나가기 때문이다. L은 다시 정신 차리고 공부를 할까, 부족한 잠이나 잘까, 잠시 고민하다가 샤워실로 향한다. 뜨거운 물이 솨아 흐른다. 살과 뼈를 모두 녹여 이 몸뚱이가 활활 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모의고사 성적도 공부한 만큼 나오지도 않고, D와의 관계도 추워진 날씨만큼이나 싸늘하다. 벌써 3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이러다 정말 10년 되고, 패인 되는 건 아닐까. 누구 말대로 할 줄 아는 것이란 책 넘기는 기술밖에 없는데 세상에 누가 이걸 인정한단 말인가. 두려움이 밀려든다. 비누질을 하고 물로 씻어내도 머리 속은 복잡하고,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샤워를 끝낸 L은 P의 방을 스쳐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문득 조금 전에 흘러 나왔던 뉴스가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닷새 째 P가 보이지 않는다. 순간, 소름이 확 밀려온다. 에이, 설마. L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P에겐 이런 일이 삭삭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가 중천에 떴다.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햇살은 습하고 칙칙하게 자리 잡은 아둑시니를 몰아낸다. 그제야 고시원 방이 숨을 쉰다. 몸 전체가 뻐근하다. L은 또 잠을 설친 모양이다. 그래도 맑은 햇살 덕분에 기분은 한결 낫다. 밖에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가 이사 가는지 짐이 나와 있고, 한편에서는 주인아줌마가 인부에게 소리치고 있다. 플래카드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 『 HOO 사법고시 41회 합격 』이것을 보는 L은 억지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무관심한척 할 뿐이다. 씻고 나서 책상에 앉았는데, H 방에서 쿵당쿵당 소리가 시끄럽게 난다. 지난밤 꿈에서도 나타나더니, 이 인간이 정말. 순간, 화가 치민다. 참을 수 없어 짜장 주의를 주기위해 자기 방문을 여는데 H도 동시에 그의 방문을 연다. 마주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시끄럽죠? 이거 하나 드시죠? 그 동안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했습니다.”
“아, 아뇨. 뭐 그 정도야.”
L은 웃으며 음료수까지 건네는 H에게 엉겁결에 말하고 말았다.
“지금, 나가시는 모양이죠?”
“네.”
“늦었지만 합격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쪽도 꼭 이번 시험에 합격하시길 바랄게요. 열심히 하세요.”
“아, 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네.”
H의 얼굴은 환하다 못해 인자하고 풍요로워 보인다. 바로 승리자의 얼굴이다. 참네, 이때까지 인사 한 번 안 하고, 시끄럽다고 눈치주면 인상까지 쓰던 놈이. L은 H가 부럽기도 하지만 아니꼬워서 속이 뒤틀린다. 내가 왜 이러지. 속 좁은 자신에 더욱 화가 난다.
드드드득.
진동되는 휴대폰 화면에 D의 번호가 찍힌다.
“어, 나야. ......말해. 아니, 할 말 있으면 전화로 하지 말고 직접 찾아와.”
“나, 오빠한테 마지막으로 전화하는 거야. 그 간의 정을 봐서. 앞으로 만날 일은 없을 거야. 나, 원룸으로 이사가. 잘 있어.”
D의 말은 단호했다. 전혀 망설임 같은 아쉬움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시험의 중압감 때문에 서로에게 조금 소홀하고 짜증을 낸 것이 헤어질 일이라니, 같은 외로운 처지라 더욱 자신의 존재를 위로하고 확인받고 싶었던 시간들은 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거기다가 시험이 두 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사라니, L은 허탈하여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L은 다시 밖을 내다본다. H와 D가 같이 이사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다정한 연인인 양. 이럴 수가! 우연일까? 현기증이 나고, 몸은 힘이 없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한다. 넋 나간 사람처럼 둘이 이사 가는 걸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고 있다. 그들이 눈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밖을 응시하고 있던 L, 갑자기 두려움이 전신을 휘감는다. 재빨리 P의 방으로 달려간다.
똑똑, 똑똑똑, 똑똑.
안에선 아무 기척이 없다. 허겁지겁 주인아줌마에게 뛰어간다. 설마! 설마! 그의 머리 속에선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뉴스인지 뒤범벅이 되어 알 수가 없다. 비행기를 타고 훨훨 날아 태양으로 갔다면 언젠간 날 데리러 오겠지. L은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평온하다.

작가의 이전글자살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