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리티와 공간

베아트리츠 콜로미나 저

by 방정민

섹슈얼리티와 공간

도착적 공간(빅터 버긴)


15년 전 로라 멀비가 「시각적 쾌락과 서사영화」를 썼을 때, 그것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일이었다. 이 에세이에서 멀비는 “전통적으로 영화를 주는 쾌락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관음적적 시선”을 분석하기 위해 ‘페티시즘’에 관한 프로이트의 글을 활용했다. 멀비의 논거는 이상화되었고 그리하여 처음에 발표된 형태 그대로 보존되어 그것 자체가 페티시가 되어 버렸다. 멀비는 특정한 유형의 이미지를 분석하기 위해 정신분석에 기반을 둔 이론을 개척했다. 이후 멀비를 따르는 사람들은 정신분석적 용어는 그대로 사용하되 분석의 기반을 정신분석에서 사회학으로 옮겼다. 그 결과 섹슈얼리티가 젠더와 동일시되고, 젠더는 계급 속으로 침몰해 들어가는 혼란이 발생했다. 멀비가 쓴 에세이는 추측에 기반하고 있는 ‘남성 응시’와 ‘대상화’가 동일시되는 현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말들을 종종한다. 그러한 언설에서는 멀비가 논거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정신분석 이론은 희화화되면서 ‘시각적 쾌락/관음증’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성 주체와 여성 주체사이에 구성된 주도적-종속적 관계로 정의된다. 그리하여 ‘대상화’라는 말은 단지 비난받기 위해서만 언급될 뿐이다.


뉴턴의 사진



우리는 헬무트 뉴턴의 사진<부인 준과 모델들이 있는 자화상>이 우연적인 만남에 그 직접적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안다. 뉴턴의 사진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기호학의 특정역사를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상당 부분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을 연상시키는 이 기호학의 역사는 1970년대 초반에 재현의 주체가 비판적 이미지 이론에 도입되기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우리는 이 사진에서 실제로 보는 것에서 출발해 보자. 왼쪽에 있는 모델의 등이 보이고, 프레임의 한가운데는 거울에 정면으로 비친 모델의 모습이 보인다. 거울 속의 헬무트 뉴턴 역시 모델과 비슷하게 전신을 드러내고 있다. 거울 속에서 그의 모습은 모델의 팔꿈치 아래에 있다. 그는 레인코트를 입고 있으며, 롤라이플렉스 카메라의 뷰파인더 위로 숙이고 있는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사진작가의 아내인 준은 거울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진작가의 의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 그녀의 왼쪽 팔꿈치는 왼쪽 무릎 위에 얹혀 있고 왼쪽 턱을 왼쪽 손이 바치고 있다. 그녀의 오른쪽 손은 주먹을 쥐고 있다. 이 정도가 거의 즉각적으로 우리의 주의를 끄는 사진의 요소들이다. 덧붙여 우리는, 거울에 비친 굉장히 굽이 높은 하이힐 구두를 신고 있는 한 쌍의 다리를 볼 수 있다. 그 다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앉아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또한 준의 모습 뒤로 열린 문을 볼 수 있는데 그 문을 통해 외부 공간, 즉 도시의 거리와 자동차가 엿보인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몇몇 부차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의 중앙에는 마루에 벗어 놓은 의상으로 보이는 천이 있고, 가장 오른쪽에는 옷걸이에 다른 의상들이 걸려 있다. 열린 문 위에는 출구라는 표시가 보인다. 이런 식으로 세부 묘사는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거울에 반영된 모델의 이미지는 ‘완전 정면 누드’라고 불리는 것의 도상적 요소 그 자체를 보여 준다. 하나의 표현, 즉 막연한 심리적 이미지로서 이것은 1960년대에 영화와 연극이 보여 준 ‘성적 자유’를 둘러싸고 벌어진 언론의 토론을 통해 대중적 기억 속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모델의 자세 역시 마찬가지로 낯익은 그러나 좀 더 오래된 패러다임에서 비롯되고 있으니, 여자들의 사진을 핀으로 벽에 꽂아두곤 했던 ‘핀-업’ 패러다임이 바로 그것이다. 모델의 팔이 취하고 있는 상투적인 자세는 그녀의 가슴을 높이고 고르게 하는 해부학적 기능에 기여하고 있다. 이로써 여성의 가슴은 크면서도 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핀-업’의 모순된 요구를 충족시킨다. 모델 신체의 아래 부분도 전시를 위해 비슷한 방식으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번에는 검은 색의 윤이 나는 하이힐 구두가 도움을 주고 있다. 이 구두는 모델의 근육을 긴장시켜야 한다는 해부학적 기능을 넘어서 ‘에로틱’한 의상 선택에 대한 관습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지시적 맥락은 모델의 이미지 왼쪽에서 몸은 보이지 않은 채 드러나고 있는 다리의 하이힐을 통한 ‘반복’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과도하게 높은 구두 굽(이것은 또 다른 반복이다)은 기능성보다 에로틱한 의미가 우선시되고 있음(이 구두는 걷기 위한 것이 아니다)을 도형으로 보여 준다. 이 구두를 통해 모델은 누드라기보다는 ‘벌거벗은 상태’로 이해된다. 즉 이 구두는 숭고한 여성적 형태에 대한 고매한 예술가의 무심한 심미적 명상의 장면보다는 섹슈얼리티의 장면을 가리키고 있다.

이 사진 속에 있는 반복의 형상들과 또 다른 형상은 전체를 아우르는 대립물의 구조 내에서 부차적인 수사로 표현되고 있다. ‘벌거벗은/옷을 입은’이라는 대립 구조는 사진의 평면이 수직적 축에 따라 나뉘게 한다. 그야말로 벌거벗은 형태로 나타나는 모델과는 대조적으로 뉴턴은 부조리할 정도로 옷을 많이 껴입고 있다. 게다가 모델의 벌거벗음은 정면과 뒷모습을 통해 거창하게 이중으로 재현됨으로써 이미 증폭되어 있다. ‘벌거벗은/옷을 입은’이라는 대립 구조에서 뉴턴이 차지하는 위치는 재킷을 입고 부츠를 신은 준의 모습을 통한 반복으로 다시금 강조된다. 성적 맥락에서 볼 때(이 레인코트 이미지가 성적이라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레인코트는 대중적 이미지 세계에서 섹스 숍의 뒷방을 드나드는 ‘후줄근한 레인코트의 남자들’을 암시한다. 바로 같은 맥락에서 레인코트는 남성 노출증 환자, 즉 ‘노출광’이 즐겨 입는 옷이다.


이 사진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노출을 연출하는 노출광으로서 관음증자인 동시에 노출증자이다. 그의 레인코트는 어두운 삼각형을 이루면서 정면을 향해 열려있고, 거기에서부터 저 팽팽하게 발기된, 그리고 반짝일 정도로 발가벗은 형태가 튀어나오고 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돌출 부위에 플래시를 터뜨렸고, 그리고 그것은 여성으로 판명된다. 이 모든 것의 와중에서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뉴턴이 있는 바로 그 장소에 있다. 엿보는 현장에서 들킨 채, 이 지점에서 나는 나 자신이, 멀비의 에세이가 내게 배치해 준 바로 그 장소, 즉 비난받아 마땅한 위치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분명한 관음증자의 위치이지만 또한 페티시스트의 위치이기도 하다. 여성에게 없는 것을 위해 대리 페니스를 마련하는 것, 이것이 페티시즘의 동기이다. 페티시는 결핍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던 어머니에게 페니스가 없음을 발견한 어린 소년이 갖게 되는 거세 공포를 완화시켜 준다. 멀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남성의 무의식은 이러한 거세 공포를 벗어나는 두 가지 길을 알고 있다. 첫 번째 길은 원초적 트라우마의 재현에 몰두하는 것이고, 두 번째 길은 페티시 대상을 대체하거나 재현된 이미지 자체를 페티시로 만듦으로서 거세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다. 페티시즘적 엿보기 취미인 이 두 번째 길은 대상의 육체적 아름다움을 구축하고 있는데, 그것은 대상을 대상 안에 있는 만족스러운 무엇인가로 변형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지금 우리가 뉴턴의 사진에서 보고 있는 것이 두 번째 길임이 분명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첫 번째 길과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도대체 레인코트를 입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 바로 탐정이다. 그리고 모든 B급 영화에서 그렇듯이 위험할 정도로 신비에 싸인 젊은 여성을 탐색하는 사람은 일종의 탐정이다. 그녀의 뒤를 밝으며, 그녀의 여성성이 의심할 나위 없이 치명적임이 드러날 때까지 그녀를 관찰하는 탐정이다.


1948년 로베르 드와노가 찍은 <비스듬한 시선>은 그림 가게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년 부부를 보여 주고 있다. 남자는 반쯤 벌거벗은 젊은 여자의 그림을 향해 은밀하게 일관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우리가 이 추잡한 늙은 남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무엇이라고 가정하든지 간에 그것은 나의 어린애 같은 상상의 범위 안에 있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입장에서 볼 때 의식의 상태는 문제되지 않는다. 잠복기에 있는 이 어린아이의 ‘죄 없는 순진함’을 드와노의 남자가 처해 있는 것과 동일한 상황에서 들켜 버린 것이라고 보는 정신분석 이론에는 반대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정신분석에서 논의되는 단순한 공식으로, 말하자면 페티시즘의 구조라든가 또는 뭔가 다른 것으로 환원시킨다면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일이다. 우리는 ‘바라보기’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단순히 그것을 바라봄으로써만 말할 수는 없다.

시각적 공간, 정신적 공간

1972년 집필된 프로이트의 페티시즘 논의를 멀비가 사용했을 때 그것은 정신분석과 무관한 ‘대상화’논의에 정신분석틀이 적용되게끔 했다고 나는 말하였다. 대상화는 상품화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생각에서 도출된 것이다. 즉 여성이 매매를 위한 상품으로 함께 묶여 팔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나타나는 ‘관음증’의 버전 속에서 억압된 것은 결국 정신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무의식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충동의 능동적/수동적 이분법, 다시 말해 프로이트가 노출증의 무의식적 짝패(관음증)에 대해 언급할 때 가리키는 그 이분법에 대한 모든 인식 또한 억압되었다. 동일시가 없는 그 어떤 대상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화’의 대상



프로이트의 기술에 의하면 ‘대상’은 무엇보다 충동의 대상이다. 이때 충동의 출처는 신체적 자극에 놓여 있다. 즉 충동의 목적은 그러한 자극의 결과로 나타나는 긴장 상태의 제거에 있으며 이때 무엇이 그 대상이 되는가는 어느 정도 우연의 일이다. 이 우연적인 대상에 의해 긴장의 축소가 이루어진다. 원초적인 대상은 성적이지 않다. 그것은 자기 보존적인 본능의 대상일 뿐이다. 신생아는 살아남기 위해 빨아야 한다. 육체적 만족을 위해 음식물을 공급받고 가슴이 사라진 뒤에도 아이는 계속해서 빨려고 할 것이다. 여기서 젖을 빤다는 행위는 기능적으로 음식물 섭취와 연상되지만 ‘관능적인 빨기’, 즉 독립적인 쾌락이 된다. 이와 같은 묘사에서 섹슈얼리티는 심하게 타자 의존적인 관계 또는 버팀목을 만들기로 알려져 있는 과정에서 자기 보존 충동을 벗어 버림으로써 나타난다. 만족을 느낀 육체적 경험이 살아남는 한 그것은 시각적, 운동감각적, 청각적, 후각적 기억 흔적의 배열이 된다. 이러한 복합적인 기억 요소들은 성적 충동과의 관계에서 우유가 자기 보존 충동과의 관계에서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우유에서 가슴으로 환유적 치환과 섭취에서 합체로의 은유적 치환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가슴이라고 이름붙여진 대상은 해부학적 기관과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상 환영적이며 주체에 내재적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그것의 질료적 중요성으로 환유될 수 없다.


양가성은 섹슈얼리티가 섹슈얼리티로서 나타나는 바로 그 순간, 즉 섹슈얼리티가 그 어떤 자연적인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환상의 장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사실에 의해 섹슈얼리티가 되는 순간 섹슈얼리티를 표시한다. 유아의 자기성애에서는 다양한 ‘구성적 본능들’, 즉 구강적, 항문적, 생식기적 본능들이 유아 신체의 ‘성감대들’에서만 만족을 추구한다. 이때 유아의 신체는 그러한 성감대들의 단편적인 배열로서만 이해될 뿐이다. 이후 진전되는 섹슈얼리티의 발달에 대한 프로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유아의 자기성애에서 성인의 대상 선택으로의 이행은 나르시시즘에 의해 인도된다. 나르시시즘 단계는 일관성 있는 에고에 대한 느낌의 등장과 일치한다. 이것은 내면화된 자기-재현의 작용에 의해 가능해지는데, 이제 막 통합된 충동은 전체로서의 아이 자신의 신체를 대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대상은 한편으로는 처음에는 충동과의 관계에서 대단히 우연적인 적으로 설명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중에는 성적 매혹을 행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라플랑쉬가 “대상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 촘촘하게 결정되어 있다. 아니 심지어 우리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성적 성격을 띠는 ‘보고자 하는 충동’은 그 어떤 구성적 본능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러한 구성적 본능들 곁에 자신만의 독립적인 영역을 갖고 있다. 바라보는 행위의 생리학적 측면은 그 기능에서 명백하게 자기 보존적이다. 그러므로 시각의 성애화는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리비도가 기능에 기대어 나타나는 것과 어느 정도 동일한 과정에서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바라보는 것을 만지는 것과 유추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시각이 탐색적인 또는 공격적인 ‘발사’(라캉의 표현)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시각이 대상을 육체적인 공간에서 정신적 공간으로 데려간다는 것 역시 시각이 무의식의 대상들을 실재계로 투사한다는 사실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이다.



수수께끼 같은 기표들, 도착적 공간



프로이트는 우리 모두의 섹슈얼리티에 기초가 되는 유아 성욕을 ‘다형적 도착’이라고 기술한다. 충동의 변천 속에서 형성된 모든 인간의 섹슈얼리티는 일탈적이다. 인간 섹슈얼리티의 그 어떤 것도 자연적인 본능적 과정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인간의 섹슈얼리티는 자연적이지 않다. 프로이트는 19세기 성 연구가들이 정상적 섹슈얼리티에서 일탈하는 것으로 판단했던 ‘일탈’이 극적으로 표출된 형태로든 평범한 ‘전희’의 상당히 완화된 형태로든 편재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1905년에 저술한 『섹슈얼리티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에서 그는 “도착성향은 그것 자체로 볼 때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라 정상적인 성욕 구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남성이 여성에게만 관심을 나타내는 배타적 성욕은 그것 자체로 자명한 일이 아니다.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섹슈얼리티는 종의 증식이라는 생물학적 기능으로 축소될 수 없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도착이라는 단어에 어떤 인가받지 못하는 것의 느낌이 묻어 있다면 그것은 정신분석 이론의 잘못이 아니라 기록된 것이건 아니건 간에 사회적 법과 관련하여 도착이 갖는 의미 때문이다. 사회적 법과의 관련 속에서 우리는 페티시즘이, 적어도 멀비에 의해 적확하게 묘사된 비병리학적 형태에서 정말 도착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를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거의 편재하다시피 하는 그러한 형태의 페티시즘은 남성 우월적인 이미지 세계에서 여성을 이상화하는 것, 즉 상징계에서 경멸되고 있는 여성 이미지를 전도시키는 것이다. 상징계는 그러나 완전히 매끈하지는 않다. 만일 상징계가 완전히 매끈하다면 억압은 총체적인 효과를 발생시켜야 할 것이다. 가부장제에서 남근적 은유가 누리는 과도한 의미부여의 표현으로서 뉴턴의 사진이 보여 주는 페티시즘적 요소는 완전히 정상적이다. 그러나 단 우리가 그것을 페티시적으로 만들 때만, 즉 그것을 그것이 있는 공간으로부터 분리시킬 때에만 그러하다.


뉴턴의 사진이 보여주는 공간은 정상이 아니다. 이 사진에 관한 단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모델이 취하고 있는 낯익은 ‘핀-업’포즈일 뿐이다. 장르의 관습을 따를 것 같으면 우리는 이 모델만-즉, 매끈하게 펼쳐져 있는 종이를 배경으로 도드라져 있는, 이미지의 틀에 의해 다른 모든 맥락에서 잘려져 나온 채로 있는 것만-을 봐야 한다. 그처럼 낯익은 공간은 35밀리 장면의 익숙한 2대3비율에 근접한 사각의 거울 속에서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거울 틀의 분리적 기능은 여기서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미지에 대한 페티시적 관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분리적 기능 아닌가. 사진을 찍는 사람 자신을 포함해서 통상 제외되기 마련인 요소들은 이 사진에서 거울에 의해 틀이 잡혀진 공간 안으로 뒤섞여 들어가고 있다. 또한 이 공간은 일반적으로 공간 외부라고 여겨지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보다 큰 맥락 내에 위치해 있다.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혼란은 페티시즘을 방해한다. 페티시즘이 일관성을 요구하는 곳에서 이러한 이미지는 상이한 생산성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섹슈얼리티의 원칙적인 비일관성, 즉 그것의 이질성, 단일성의 결핍, 초점의 결핍을 보여 주는 일종의 무대화로서, 미장센으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사진에서 충동들과 더불어 많은 움직임이 있다. 헬무트 뉴턴은 모델의 공간에 서 있고 준 뉴턴은 헬무트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 육체를 벗어난 한 쌍의 다리처럼 사물은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그 어떤 특정한 결론에는 이루지 않고 있으며 확정되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준은 한 편의 성적 연극에서 관음증자로 위치해 있다. 헬무트는 관음증자이며 동시에 노출증자이다. 이러한 이미지를 고발하는 방식은 모델이 사디즘적 공격의 희생이 되고 있다고, 즉 그 중심에 성 착취가 있는 경제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고 손쉽게 가정해 버리는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그녀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서 노출증의 도착적 요소를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여성 관객과 남성 관객 모두에게 욕망과 질투 그리고 공격성의 뒤섞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노출증 말이다. 얼핏 보면 이 이미지를 보는 관객은 확고하게 모델이라는 이 중심인물, 즉 그 어떤 애매모호함도 없이 사진관의 목표물처럼 분명하게 시각적 상투성으로 축소된 이 인물에 초점을 맞추도록 권유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중심 모티프의 상투성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어떤 곳으로 주의력을 돌리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어디로? 특별히 어디라고 할 만한 곳은 없다. 이 광경이 위치해 있는 공간에서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으며 어떤 특정한 목적도 없다. 이것은 도착적 공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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