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연구

by 방정민

김소월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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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생애 및 전기적 사실

1. 소월의 삶과 인간- 소월의 고향


소월(본명 김정식, 소월은 아명임)이 나고 성장한 평복 정주군 곽산면 남단리(일명 남산동)는 8대 명산의 하나인 능한산을 등에 진 남향마을이었다. 정주는 안창호, 조만식, 이승훈, 이광수, 김억을 배출한 곳이기도 했다. 이 마을 동쪽 끝에는 옥녀봉이 우뚝 솟아 있고 서남쪽으로 기름진 전답이 질펀하게 퍼져있다. 이곳에서 시오리 나가면 황해바다가 출렁거렸는데 옥녀봉에 오르면 임경업 장군의 전설이 얽혀있는 신미도의 삼각산이 바라보였다. 소월이 자주 오르던 능한산에는 옛 산성의 돌담흔적이 남아 있어 고풍스런 분위기를 주었고 이곳에서 발원한 시냇물은 소월의 집 앞을 지나 서해로 흘러들었다. 이렇게 산과 들, 바다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곳이 소월의 고향마을이었다. 사람마다 모두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이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그 영향은 큰 것이다. 특히 소월처럼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환경의 영향이 절대적인 것이다. 소월이 민족시인으로서 주옥같은 민요조 서정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자연환경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일찍 개화하여 민족의 선각자를 배출한 곳, 또한 산자수명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서 태어나 자란 소월이기에 민족시인으로서 또한 서정 민요시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월은 김성도의 맏아들이자 공주 김씨 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소월은 공주 김씨 가문의 기대와 주목을 받고 태어났으며 그 사실 또한 소월의 성장과정과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소월의 가계와 인척관계를 살피는 일은 소월의 인간과 문학을 살피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인맥관계는 한의 시편들은 남기고 32세의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감해야하는 환경적 모티브가 되기 때문이다.


먼저 증조모 일봉댁이 있다. 남편(소월의 증조부) 김기하를 일찍 잃고 몰락해가는 가문을 억척스럽게 일구어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소월의 조부인 김상주가 있다. 일붕댁의 성격을 닮은 조부는 공주 김씨 가문의 대표자로서 권위를 갖고 가문의 대소사를 관장하였다. 그는 일찍 개화하여 신문명에 눈을 떴으나 끝내 유교적 세계관으로 가문을 유지하였다. 조부는 소월의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부친이 일찍 정신질환에 걸려 아버지 역할을 못하자 조부가 그를 대신하여 장손인 소월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였다. 소월이 어렸을 때는 총애를 받았으나 성장하면서 조부와의 의견 차이로 거리가 생기고 불화의 관계가 되어 끝내 소월은 처가에서 말년을 보내게 된다.

다음에 부친 김성도가 있다. 정주와 곽산간 철도를 가설하던 목도꾼들에게 몰매를 당해 정신질환자가 됨으로써 가문의 종손이자 아이들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못함은 물론이고 가문의 짐이 되었고, 소월에게도 우울하고 내향적 성격으로 변모하게 된 원인제공자가 되었다. 어머니 장씨는 남편이 정신이상을 앓자 소월에게 온갖 정성을 쏟고 그에 의지하여 평생을 살아간 불행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문맹이었던 탓으로 소월은 모친과의 대황에서 단절감을 느꼈고, 남편을 대신한 맹목적인 자식 사랑에 오히려 심리적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소월의 고독감은 그의 선천적인 성격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이와 같은 부친과 모친 사이의 심리적 단절에서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소월에게는 두 명의 숙부와 세 명의 고모가 있었는데, 큰 고모부 김시참과 둘째 숙부 김인도, 첫째 숙모 계희영이 소월에게 영향을 주었다. 김시참은 기독교인으로 105인 사건에 연루된 애국지사였고 김인도는 임시정부와 조선 민주당 당원으로 활약을 하였고 소월과 남산학교를 같이 다니며 소월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특히 소월의 성격형성이나 문학적 감수성에 영향을 준 사람은 첫째 숙모 계희영이었다. 그녀는 남편 김학도가 신여성과 동거를 하는 등 그녀와 집안을 멀리해도 이를 감수하고 15년이나 고생하며 기다렸으나 남편은 끝내 요절해 버리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계희영은 마음 붙일 곳 없어 소월에게 애정을 쏟았다. 다행히 그녀는 신학문과 언문에도 밝았다. 소월이 어린 시절 그녀를 붙잡고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는데 그 때 주로 들은 것이 고대 소설과 전설, 설화였다. 이는 소월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충족시켜 주고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시켜 주었다. 소월의 대표작 「접동새」나 「물마름」은 모두 어린 시절 숙모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토대로 해서 쓰여진 작품이다.



2. 소월의 성장기, 그리고 운명적 만남


대가집의 장손으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총애를 받으며 성장한 소월은 어릴 때는 명랑하고 총명했으나 소년으로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사고와 할아버지와의 의견대립으로 소월은 점점 집안을 떠나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병과 할아버지의 매서움에 무서워 한 소월은 뒷산 옥녀봉에 올라가 버들피리를 불며 외로움과 무서움을 달래곤 했다. 소월의 내향적 취미인 ‘산에 올라 바다보기’는 아버지의 정신질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소월은 소학교 남산학교에 입학하여 배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남산학교는 공주 김씨 문중에서 세운 학교인데 이 학교는 은연 중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여 민족지도자인 이승훈이나 독립운동가인 소월의 큰고모부인 김시참 선생 등이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 서춘 선생은 소월을 시인으로 키워 낸 또 한 사람의 공로자라 할 수 있다. 서춘 선생은 시집이나 소설책을 빌려 주며 문학 수업을 지도하기도 했다.

소월이 남산학교 시절 여선생에게 이성을 느꼈으나 그녀가 서울에서 직업여성이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쫓겨 가게 되어 실망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실제 이성과의 교제를 가져 본 것은 동네 처녀인 오순이었다. 오순은 의붓어미 슬하에 자랐던 소녀로 5명의 동생을 밑에 두어 집안이 매우 곤궁하였다 한다. 또한 그녀는 노래를 잘 불러 그를 소재로 「님의 노래」를 쓰기도 하였다. 「접동새」가 숙모에게서 들은 전설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지만 오순의 처지가 접동새의 주인공과 흡사하여 직접적인 시상을 받았다고 한다.(「소월정전」)

남산학교를 졸업한 소월은 1915년 13세 되던 해 고향을 떠나 오산중학교(이승훈이 교장이고 조만식이 교사로 재직하였던 민족학교의 요람이었다)에 입학하게 된다. 오산중학으로의 입학은 소월로 하여금 고향 마을의 좁은 공간의식에서 민족이나 국가라고 하는 폭넓은 역사의식으로 전환케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오산에서 안서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가름하는 운명의 만남이었다. 안서는 수시로 소월의 시를 반 학생들에게 읽어주거나 심지어 조만식 선생에게도 보여드리고 장차 한국시단의 거목이 될 것임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이 때 소월이 안서를 감동시킨 작품은「가는 길」,「못잊어」,「예전에 미처 몰랐어요」,「진달래꽃」,「접동새」,「엄마야 누나야」 등이었다. 이렇듯 오산시절은 소월로 하여금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굳혀 갔던 시기였고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 안서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1916년 소월이 14세 되던 해 소월 생애에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조부의 강제에 의해 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다. 부인과의 결혼생활은 비교적 원만한 것이었지만 조부의 강제에 의한 결혼이었고 또 소월이 마음속에 둔 여인인 있었기에 그에 못지않은 내적 갈등을 겪어야 했다. 오순에 대한 소월의 애틋한 정은「못잊어」,「그리움」,「꿈자리」같은 시편들을 낳았고 첫 연인이었던 오순과의 이별은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소월은 첫딸을 낳았고 민족적 거사인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일제가 독립운동의 진원지로 지목하여 오산학교를 불 질렀고 조부도 장손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소월을 남산동으로 데려갔다. 이즈음 안서도 귀향하여 소월과 벗하면서 소월에게 술과 담배를 가르치고 시도 직접 지도하였다. 이때 배운 술은 그의 짧은 생애에 빼놓을 수 없는 반려가 되었다.

소월이 문단에 등단한 것은 1920년이었다.『창조』의 동인이었던 안서의 추천으로『창조』 5호에 낭인의 봄 등 5편을 발표하면서 소월이라는 필명이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7월 『학생계』에 「거치른 풀 흐트러진 모래동으로」를 발표하고 1년여 공백기를 두다가 1922년 이후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였다. 소월의 문단활동은 1920년 이후 비롯되지만 실제 그의 시창작은 남산학교에서 오산학교 재학중에 이루어 진 것이었다.



3. 소월의 삶과 죽음

1922년 배재고보에 편입하게 된 소월은 타향살이로 인하여 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1923년 3월 소월은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동경유학길에 오른다(『소월정전』에 따르면 5학년 기말시험을 치르지 않고 유학 가서 사실상 졸업이 못되었다고 함). 가장과 장손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소월은 동경상대로 진학하였다(『소월정전』에 따르면 입학시험에 떨어져 진학을 포기했다고 함). 소월은 내성적 성격으로 일본유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방탕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귀국길에 올랐다. 서울에 체류하면서 나름대로의 방향을 모색하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이때 나도향과의 교류가 있었고 박종화가 『개벽』(1923.1)에서 소월의 시를 ‘소월시의 정조는 우리 민족의 감정이며 낭만이기에 그의 시는 바로 우리의 민족시’라고 규정하며 극찬하여 명성을 얻었다.

안서가 주선해준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여 경영하였다. 그러나 지국 경영은 부진하였고 어려워질수록 소월은 좌절감에 술과 담배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소월의 폭음은 소문이 날 정도로 주정이 심했다고 한다.

1926년 마음속의 여인이었던 오순이 소월에게 버림받고, 남편 사별 후 5살짜리 아들과 살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오순의 죽음으로 소월은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과 자책감을 맛보았고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유일한 문우였던 나도향이 요절하자(25세) 소월은 삶의 의욕을 잃고 술로 지새는 날이 늘어났다. 죽음에 대한 충동을 강하게 느낀 것도 이 두 사람의 죽음이었다. 다음 해 소월은 지국 일을 그만두고 고리대금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업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인 소월이 생계를 위해 고리대금업까지 했다는 사실은 생활인으로서의 소월, 자연인으로서의 소월이 자기 삶의 현실적 경영을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쳤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리대금업자 소월, 바로 이 현실인과 서정시인 사이의 양극의 아이러니에 그의 한의 미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고리대금업을 그만두고 별 일도 없이 술 마시기에 전념하던 중 1929년 시인 이장희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이장희의 죽음은 자살 충동을 좀더 심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소월이 서울을 떠나 귀향하여 산 10년간은 술과 한숨으로 살아온 절망의 끝, 그 벼랑 위에 홀로 서 있었다. 한 가문의 종손과 가장 노릇조차 못하고 생활인으로서의 한계, 지인의 죽음, 피지배 민족의 설움과 분노, 문학에의 포기는 결국 소월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1934년 12월 23일 고향 곽산을 들러 성묘를 하고 장터에서 아편을 사가지고 집에 왔다. 집에 돌아온 소월은 부인과 함께 술을 마신 후 잠들었다. 다음 날 소월은 싸늘한 시채로 변해 있었다. 짧지만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는 이렇게 비극적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Ⅱ. 연구사 개관

1. 참고문헌 중 단행본 검토



현재 소월에 관한 단행본 문헌을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대부분 오래된 서적에서 소월을 다루고 있을 뿐 최근 소월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서적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더욱이 일반서적에서 소월을 학문적으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전문서적이거나 학교 출판부에서 간간히 소월을 다루고 있을 뿐이었다.

김영철 저, 『김소월 비극적 삶과 문학적 형상화』에서는 비교적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소월에 관한 전반적인 연구가 알게 쉽게 꼼꼼히 전개되어있다. 총 제 5장으로 되어있는데 제 1장에서는 소월시의 세계관이 나와 있다. 정작 본인은 그런 타이틀이 싫다고 했지만 소월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근대시인, 민요시인, 민족시인이라는 근거를 소월시의 소재와 운율, 정서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소월시의 특성을 시어와 그 율격면에서 자유률과 정형률을 근간으로 하여 7.5조 3음보를 추구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제 2장에서는 소월의 삶과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소월의 생애와 전기를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제 3장에서는 소월시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고 있다. 1장에서 밝힌 부분을 본격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소월의 시를 직접 보기로 들며 민요적 성격, 한의 정서, 여성 편향성, 민족적 성격을 밝히고 있다. 제 4장에서는 소월의 작품이 나열되어 있다. 시는 물론이고 유일한 소설「함박눈」과 시평「시혼」이 들어있다.

계희영 저, 『약산 진달래는 우련 붉어라』는 소월의 숙모 계영희 여사가 소월의 생애와 예술혼을 밝히겠다는 의도로 소월의 생애와 삶에 대해 수필식으로 쓴 책이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소월의 삶과 문학에 영향을 준 사람 몇 중에 숙모 계희영이 있다고 했다. 그 당사자가 소월 사후 48년 만에 소월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진솔하고 생생한 소월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소월에 관한 학술적 연구는 정한모 해설의 김소월 연구가 있다. 소월시의 총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소월의 시「진달래꽃」,「금잔디」,「접동새」,「초혼」 등 구체적인 시를 텍스트로 삼아 소월시의 구조와 형식, 의식과 정서, 소월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등 아주 구체적으로 소월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김용직 편저의 김소월전집이 있다. 이 책은 김소월의 시 작품 거의 대부분을 싣고 있는 듯하며 발표 시뿐만 아니라 미발표 시까지 발굴해내어 싣고 있다. 또한 유작시와 소월의 번역시 또한 싣고 있다. 그리고 산문인 소설과 수필, 평론, 서간문을 수록하고 있어 가히 소월작품을 총체적으로 발굴하여 싣고 있는 소월전집이라 할 만하다. 시를 수록한 면에는 그 시의 어휘와 문장 풀이가 있고 그 시에 관한 간단한 해설과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2. 소월에 관한 논문 연구사 검토


소월에 관한 연구는 400편에 가까울 정도로 많다. 이 많은 연구논문을 일일이 검토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이지만 논문의 방향을 보면 대략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크게 전기적인 연구, 율격적인 측면을 다룬 형식적인 연구, 의미론적 연구, 자연적. 물질적 이미지에 관한 연구, 상징성에 관한 연구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주미는 소월시의 형식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다. 소월의 문체를 감상. 격정. 상실. 저항의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는데 소월시의 감상적 문체는 이별. 그리움. 향수 등 고독의 요인들에 의하여 표출되고 있다고 한다. 격정적 문체는 주로 남성 화자를 통하여 대낮같은 빛의 시간들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고, 상실적 문체는 여성화된 남성을 화자로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소월의 저항 정신은 그 시적 변용과정에서 시대를 은유한 것, 전통성을 내세운 것, 향토성을 통한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김세정은 소월시의 자연관과 정서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소월의 시는 정서와 관념의 표출양식, 자연현상을 인식하는 태도에서 자연은 주로 정서적 자각의 진리로 사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소월은 언제나 자연을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는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자연물의 음영과 인간이 가진 영혼은 동일성을 이루게 되고 이것이 미적 가치를 지닐 때 결국은 ‘시혼’이 된다고 하여 자연과 자아를 융합의 정서로 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김경창은 형식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다. 소월은 여러 번 자신의 시를 개작하였는데, 그 개작과정을 통하여 김소월 시의 리듬의식을 연구하고 있다. 한국시의 리듬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운율론이 아니라, 음절이 리듬의 기본단위인 한국어에서는 띄어쓰기가 리듬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소월시의 리듬과 의식을 연구하고 있는데 소월시는 개작과정에서 균등한 음수율의 배분과 불규칙한 음수율의 변화를 통해 리듬감을 조절하였다고 한다. 이런 소월의 탁월한 리듬의식을 통해 소월시의 의미와 의식까지 포착하고 있다.


심선옥은 소월시의 포괄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 소월의 전기적 연구에서부터 소월시의 의식, 그리고 소월이 주로 활동한 1920대의 문학적 경향과 함께 소월시의 근대적 성격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또한 소월시의 율격적인 측면의 연구를 통해 소월시의 형식적 원리와 근대적 성격을 논하고 있다. 소월은 투르게네프와 타고르의 문학에 영향을 받았고 예이츠와 랭보 등 상징주의 시에도 영향을 받았다. 또한 전통적 문학 양식인 한시와 민요의 체험은 그의 고유한 시 의식과 개성적인 시 형식을 확립하는 바탕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소월이 주로 활동한 1920년대의 문학적 경향을 ‘심미적 형식화’, ‘부정의 파토스’, ‘사회적 개인의 인식’의 세 경향으로 나누어 이런 경향이 어떻게 소월의 시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피고 있다. 또한 소월시를 초기와 중기, 후기로 나누어 율격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다. 초기시는 정형적 민요시에서 중기에는 형식과 의식면에서 소월 특유의 민요시를 구축하고 있어 자유시로 나아가는 중간단계로 보고 있고, 후기시는 현실을 반영하거나 죽음의식을 형상화한 작품이 많은데, 이는 소월의 자기부정을 통한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확립과 현실 의식과 시 의식의 분열을 반영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남정희는 소월을 이해하는 전단계로 한국근대 민요시를 연구하고 있다. 소월시를 이해하려면 한국근대민요시를 반드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이 연구는 그런 점에서 충분조건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근대민요시의 성격을 살펴보고 민요시의 율동과 기법, 그 속에 나타난 민족적 특성을 연구하였다. 또한 민요시에 잡가나 말놀이 전통, 속담, 설화 등이 어떻게 수용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 이후에 소월뿐만 아니라 김억, 주요한, 김동환의 민요시를 차례로 살펴봄으로써 소월의 민요시와 자연스레 비교. 분석하고 있다. 근대 민요시는 근대 자유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민요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근대시의 민족화를 추구한 실험적이며 실천적인 산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다른 민요시인들에 비해서 소월은 3음보의 율동감과 끝말이어가기와 시어의 반복을 통해 근대 리듬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또한 기교적으로는 구비문학의 말놀이를 이용하고 평북방언을 사용하여 나름의 개성적인 민요시를 훌륭히 창조해 내었다고 평하고 있다.


Ⅲ. 소월의 시작 경향 및 변모 양상

1. 소월시의 특질

1) 한의 미학



문학은 인간의 감정 표현을 그 본질로 한다. 문학이 사상과 철학을 담을 수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표출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표출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소월의 시는 이러한 문학의 본질에 충실한 면모를 보여 준다. 소월시는 인간의 기본 정서인 희로애락의 표출에 충실하나 특히 그 중에서도 슬픔과 외로움, 애달픔과 서러움의 감정 표현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은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한마디로 소월시의 본질은 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이란 서로 모순되는 두 충동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감정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아이러니한 혹은 역설적인 감정이라 말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는 「진달래꽃」과 「초혼」의 화자가 겪었던 복합된 감정이다.

「진달래꽃」과 「초혼」의 시는 뒷장 참조!

화자의 심리를 구성하는 좌절과 미련, 원망과 자책의 감정들이 서로 상반되는 관계에 놓여있다. 한은 결코 통일된 혹은 해결된 감정일 수 없다. 그것은 복합된 갈등의 감정이며 동시에 미해결의 감정이다. 현실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속마음에서는 뒤로 돌아가고자 하는 미련이 강렬하게 남아있는 감정, 그리하여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모순에 맺혀있는 감정이다. 그것이 우리 고전 문학에 반영된 일반적 정서이기도 하다. 소월은 우리 민족의 심층에 전승되고 있는 한의 감정을 시로 나타내었기에 민족적인 공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향은 부친의 정신이상, 내향적 성격으로 인한 외로움과 고독함, 장손으로서의 자부심과 부담감, 마음에 없는 결혼과 사랑하는 여인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 자신을 둘러싼 여인들의 불행한 삶,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시대가 주는 절망감과 허무의식 등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여성편향성


소월시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여성적 정조에 있다. 우리의 서정 민요가 지닌 보편적 성격의 하나이기도 한 이 여성정조는 소월이 민요에 토대를 두고 시작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의 미학과도 밀접히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소월의 시에서는 유별나게 기다림, 외로움, 애달픔의 정조가 많이 나타난다.

대체로 소월시에 나타나는 시적 자아들은 상대방에 의해 사랑의 상처를 받거나 사랑의 고백에서 소극적이다. 또한 실연과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숙명론적 인생관을 보여준다. 자기부정과 모습들은 분명 한국의 전통적 여인상에 해당되는 것이다. 자기부정과 희생을 묵묵히 감수하며 실연과 이별의 아픔을 내면으로 삭여야 했던 우리네 여인들, 그 여인들을 소월시에서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이 여인들이 소월시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소월의 짧은 생애에 스쳐간 비극적 여인들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님의 노래」, 「밤」 뒷장 참조!

소월시에 나타나는 여성편향성은 단지 소월 개인의 시적 특징은 아니다. 한국 근대시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다. 소월을 비롯하여 안서, 만해, 영랑으로 이어지는 여성편향성은 근대시의 하나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소월시가 바로 이런 시맥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다. 또한 그의 시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님 지향성도 여성편향성과 밀접하게 관련되는데, 그것이 고전시가의 기본 모티브였다는 점에서 소월시의 전통문학의 현대적 계승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정읍사」,「가시리」,「사미인곡」 등에 나타나는 님 지향성의 모티브가 소월시에서 다시 생생히 살아나 전통의 맥박과 호흡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또한 여성편향성은 일제 강점기에서 일제라는 남성폭력에 맞서는 하나의 전략적 도구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유교적인 질서에서 억압받던 여인들의 인생관과 마음을 소월이 자신의 특유한 심성으로 담아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3) 민요적 율조


1920년대 초기 시는 서구사조를 모방한 상징주의나 퇴폐적 낭만주의 계열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소월시가 이 시기 다른 시들과 차별성을 갖고 우리의 정서를 우리의 가락에 실어 향토색 짙게 노래했다는 점에서 실로 소월시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민요시는 전통시가인 민요와 현대시가 접목된 일종의 파생 장르이다. 민요시도 현대시인 만큼 창작주체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점에서 민요와 구별되지만 민요조 가락이나 표현기법이 차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민요에 가깝다. 즉 민요시는 개인의 창작이로되 시정신이나 기법이 민요에 접맥되어 있는 장르이다.

먼저 소월시에 나타난 민요적 징후로는 먼저 율격을 들 수 있다. 소월시의 율격은 7.5조 3음보가 기본을 이룬다. 이것은 민요의 율격과 상통한다.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보편적으로 잘 담아낼 수 있는 리듬감인 것이다.

「님에게」, 「자주 구름」, 「길」, 「하늘 끝」, 「왕십리」 뒷장 참조!


시 정서면에서 소월은 한과 여성 정조를 노래함으로써 민요에 접근하고 있다. 한은 민요에서 쉽게 발견되는 보편적 정서이고 여성정조 역시 민요의 주조음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향토적 소재와 민담의 차용도 민요시의 한 특질로 드러난다. 지명을 시화해서 향토성을 살려 내는 데도 성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달맞이, 초혼, 한식, 초파일 널뛰기 같은 민속놀이와 저고리, 돗자리, 단청의 홍문 같은 민속물이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이런 민속놀이나 민속물의 시화, 그리고 방언의 활용은 향토성을 살려 낼 뿐만 아니라 전통의식을 환기시켜 민족적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는 민족의식의 한 분비물로서 하나의 시적 전략으로 구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시어의 운용과 기법면에서 소월시는 민요의 그것과 흡사하다. 여음이나 동일음 반복이 현저히 나타나고 있는데, 시어의 반복적 운용이나 병치 그리고 관습적 수사는 바로 민요의 특질이기도 하다.

4) 민족의식의 형상화


소월이 살다 간 시대는 일제 강점하의 식민지 시대였다. 그리고 소월 자신도 식민지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 소월은 한 개인으로서 사랑에 실패하고 삶에 좌절하며 비극적인 생애를 살다 갔지만 또한 한 민족의 일원으로서 피지배 민족의 수모와 멍애를 안고 살다 간 사람이기도 했다. 부친은 일인의 폭행으로 정신병자가 되었고, 민족주의 학교인 오산학교가 일제에 의해 불태워지고,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학살되는 것을 본 소월은 그것이 소월 자신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이 상처를 치유하는 길, 그리고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시대적 책무를 치유하는 길, 그 길은 소월에게 있어서 시의 길이었다. 소월의 문학이 자기 위안의 문학이고 자기 구원의 문학이긴 했으나 자연인이 아닌 한 시대인으로서, 민족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의식의 지평이 확대되면서 민족 위안의 문학이자, 민족 구원의 문학으로 변천돼 갔던 것이다. 소월 문학의 특징은 여기에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학이면서 민중적인 문학, 자기 구원의 문학이면서 민족 구원의 문학으로 변증법적 승화를 이룬 곳에 소월문학이 위치한다. 역사의 주체성을 상실한 상황에서 우리 역사와 문화의 동질성을 회복코자 하는 노력만큼 더 긴요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월의 민요시 창작은 일종의 문화적 저항행위로 볼 수 있다. 민요조 가락에 우리의 정서와 혼을 불어놓음으로써 민족공동체 의식을 환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월은 민요시 창작에만 만족할 수가 없었다. 민요시 창작이 민족의식의 고취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방법이었다. 좀더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민족의식의 표출이 필요했다. 이런 요구에서 그의 민족주의 저항시들이 쓰여졌다. 물론 소월이 직접적으로 현실과 대결하여 싸우거나 민족적 투쟁을 고취하는 내용을 시로 쓰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적극적 저항시인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애를 고백하는 방법은 적극적 저항시를 쓰는 길만이 최선의 길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경우는 자신의 패배와 한과 허무를 노래함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에게 투쟁을 유발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소월이 비록 적극적 저항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민족주의 저항시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무제」 뒷장 참조!


2. 소월시의 변모 양상

1) 초기시(61편)


창조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한 1920년부터 학창시절이었던 1922년까지 쓴 것이다.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스승 김억과의 만남으로 그의 시작생활이 움트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둘의 교류는 서구화되어 가는 한국 근대시를 전통적인 기반 위에 자리잡게 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의 정신질환으로 인한 가정의 불행, 사랑하는 여인과의 이별, 주위 사람들의 불행한 삶 등으로 인해 이 시기의 시는 주로 슬픔이 나타나 있다. 시대와 세상에 대한 관심보다 개인적 아픔을 드러낸 서정시 위주의 창작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시로 「진달래꽃」,「먼 후일」,「예전에 미처 몰랐어요」,「못잊어」,「산유화」,「접동새」 등을 들 수 있다.


2) 중기시(112편)


배재고를 졸업한 1923년부터 시집 진달래꽃이 발간된 1925년까지의 작품으로 이 시기는 그의 작품활동의 전성기였다. 소월은 이 시기부터 식민지 현실을 인식하고 겨레 얼을 깨닫게 되었다. 이 시기는 일본 침략자들이 식민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동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교묘히 민족분열 지배정책을 펴던 시기였다. 민족경제 수탈정책의 일환으로 산미증식계획, 토지조사사업을 실시, 이로 인해 농토를 빼앗긴 우리 농민들이 굶어 죽거나 만주 등으로 이주하던 때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시는 일본 침략자에 대한 미움이 나타나 있으며 대부분 이러한 시는 빼앗긴 땅에 대한 애착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드러나 있다.


3) 말기시(30편)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방황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생활하던 즈음인 1926년부터 자살한 1934년까지 쓰여진 시들이다. 그는 이 시기에 좌절과 실의에 빠져 궁핍하고 고통스런 생활을 하였으며, 따라서 이 시기의 시들은 현실에 대한 비관적인 인식으로 비참한 삶을 절망적으로 노래하였다. 중기시에서 현실 참여적 시각을 간간히 보여왔던 시인은 시집 진달래꽃 이후 시에서 식민지하 민족의 빈궁이나 한계상황으로 관심의 폭을 더욱 넓히게 되는데 이 시기의 시에는 시인의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 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대표적인 시로는 「들도리」, 「건강한 잠」, 「상쾌한 아침」등을, 삶의 고뇌를 노래한 대표적인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 「팔베개 노래」, 「돈타령」, 「삼수갑산」 등이 있으며, 그리고 1939년 『여성』에 발표한 9편의 시와 발표 연대가 분명하지 않은 유고시(18편)이 있다.


Ⅳ. 대표작 분석(앞 장, 소월시의 특질에 따라 서술)

1. 한의 미학


나보기가 역겨워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오리다.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밝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진달래꽃」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면서 서로 상반된 행동을 표출한다. 떠나는 님의 축복을 빌며 떠나는 길에 진달래꽃을 뿌려주는 행동과, 떠날 때는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결의가 함께 나타난다. 이와 같은 시적 자아의 상반된 행위표출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시에 내포된 헤어짐의 원인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나보기가 역겨워’라는 시구가 그 단서를 제공한다. 헤어짐의 원인 제공은 바로 시적 자아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냉정하게 뿌리치고 떠나는 님이 결코 고울 수는 없다. 비록 내가 밉더라도 나를 이해하고 끝까지 내 곁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러한 서러움과 원망이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결의로 표현된 것이다. 시적 자아의 상반된 심리적 갈등과 태도로 일관되어 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중에 헤여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 사슴의 무리도 슬피운다.

떨어져 나가 않은 산위에서 /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켜가지만 / 하늘과 땅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초혼」

이 시의 모티브는 죽은 자의 혼령을 다시 불러내는 초혼제의 의식이다. 시적 자아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서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체념이고 또 하나는 그에 대한 미련이다. 망자일망정 그에 대한 사랑은 지속되고 이고 헤어짐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초혼제라는 의식 자체가 바로 이러한 재생 모티브를 내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죽은 자에 대한 체념과 그에 대한 미련 외에 좀더 복잡한 감정의 갈등을 겪고 있다. 설움을 넘어서 죽음에 으를 지경의 슬픔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이별의 정한은 아니다. 원한이 맺힌 이별인 것이다. 나를 두고 먼저 가버린 연인에 대한 원한이 맺힌 이별인 것이다. 나를 두고 먼저 가버린 연인에 대한 원망이기도 하고 심중에 남아있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못한 스스로의 자책이기도 한다.


2) 여성 편향성


그립은 우리님의 맑은 노래는 / 언제나 제가슴에 젖어 있어요.

간날을 문밖에서 서서 들어도 / 그립은 우리님의 고흔 노래는

해지고 저무도록 귀에 들려요. / 밤들고 잠드도록 귀에 들려요.

고히고 흔들리는 노래가락에 / 내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孤寂한 잠자리에 홀로 누워도 / 내잠은 포스근히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깨면 님의 노래는 / 하나도 남김없이 잃어 버려요.

들으면 듣는대로 님의 노래는 / 하나도 남김없이 잊고 말아요.

「님의 노래」

이 시의 전편에 흐르는 정조는 그리움과 기다림과 고적함이다. 이 그리움과 외로움에 사무쳐 못내 슬픔의 눈물을 묻어내는 시적 자아는 분명 여성의 모습이다. 이런 여인들이 소월시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실제 소월 주위에 있었던 여인들의 영향이 큰 듯하다. 소월과 사랑을 나누었으나 끝내 헤어져 병사하고 만 오순이, 일찍 남편이 정신질환자가 되어 평생을 그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던 소월의 어머니, 긴 세월 외지로만 떠돌아다닌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독신생활을 감수해야했던 숙모 계희영, 남편의 좌절과 절망 앞에서 속수무책인 채로 애만 태우던 소월의 부인, 이 모두가 소월 주위를 맴돌던 여인들이다. 그리고 모두가 불행한 여인들이다. 이런 여인들 속에서 한많은 생을 보낸 소월이었던 만큼 그들에 대한 연민과 그들의 형상화는 어쩌면 자연스런 것이었는지 모른다.


홀로 잠들기가 참말 외롭아요. / 맘에는 사무치도록 그립아와요.

이리도 무던히 / 아주 얼굴조차 잊힐듯해요.

벌써 해가 지고 어둡는대요. / 이곳은 仁川에 祭物浦, 이름난 곳,

부슬부슬 오는 비에 밤이 더디고 / 바다바람이 춥기만 합니다.

다만 고요히 누어 들으면 / 다만 고요히 누어 들으면

하이얗게 밀어드는 봄밀물이 / 눈앞을 가로막고 흐느낄 뿐이야요.

「밤」


이 시는 ‘외롭아요’, ‘그립어와요’, ‘흐느낄 뿐이야요’ 등이 아어체 시어로 이루어져 있다. 아어체의 활용은 여성 정조를 고조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밤’이 주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더욱 내밀하고 곡진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아어체 시어를 구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 어조를 애잔하게 자주 사용함으로써 소월시의 여성편향성을 두드러지게 만들고 있다.

3) 민요적 율조


한때는 많은날을 당신생각에 / 밤까지 새운일도 없지않지만

아직도 때마다는 당신생각에 / 때묻은 베개가의 꿈은있지만

낯모를 딴세상의 네길거리에 / 애달피 날저무는 갓스물이요.

캄캄한 어둡은밤 들에헤메도 / 당신은 잊어버린 서름이외다.

당신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 비오는 모래밭에 오는눈물의

때묻은 베개가의 꿈은있지만 / 당신은 잊어버린 서름이외다.

「님에게」


이 시는 전편이 7.5조 3음보로 이루어져 있다. 이 7.5조 3음보가 소월시의 기본율격이다. 정형률을 토대로 의도적으로 단어와 띄어쓰기를 7.5조 3음보 율격에 맞춘 것이다. 내용이나 의식보다는 민요적 율격에 맞추기 위해 쓴 시임을 한번에 알 수 있다.


물고흔 紫朱구름 / 하늘은 개여오네.

밤중에 몰래온눈 / 솔숲에 꽃피었네.

아침별 빛나는데 / 알알이 뛰노는눈

밤새에 지난일은 / 다잊고 바라보네.

움직거리는 자주구름

「紫朱구름」

그런데 소월시의 주조를 이루는 2음보 및 3음보는 바로 민요의 기본 율격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아주 단순한 이런 민요적 율격은 민요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는데, 민요는 민중이 자신의 지난한 삶을 슬퍼하며 한편으로는 위로하며 부르는 노래다. 따라서 굉장히 복잡하거나 어려운 어조나 율격을 취할 능력도 안 되거니와 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힘든 삶을 노래로 표현하기에는 맞지 않다. 따라서 민요는 간단하면서도 따라 부르기 쉬운 2. 3음보를 많이 취하고 있다. 이 시는 2음보이지만 소월의 시는 2음보보다 3음보가 많은데, 특히 민요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래라고 한다면 왜 하필 3음보가 주류를 이루는가에 대해서는 연구가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즉 3이라는 숫자가 주는 어떤 한민족만의 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는 좀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어제도 하루밤 / 나그네집에 /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오.

오늘은 / 또 몇 십리 /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 들로 갈까 /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집도 / 정주 곽산 / 차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 저 기러기 /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 갈래 갈린 길 / 길이라도 /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길」

불연 듯 / 집을나서 山을 치달아

바다를 내다보는 나의 신세여!

배는 떠나 하늘로 끝을 가누나!

「하늘끝」

길은 정처 없이 떠도는 떠돌이의 의지할 곳 없는 서글픈 심정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암담한 심정을 나타내기 위해 ‘까마귀’를, 향수의 정감을 나타내기 위해 ‘기러기’를, 방황하는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열십자’를 시어로 구사했고 나그네의 끝없는 유랑의 비애를 표현하기 위해 ‘길’을 제시했다. 이 시는 소월 개인의 정한과 流路의 표백이라 할 수도 있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일제의 식민지 수탕 정책으로 농토를 빼앗기고 북간도로, 도회지로 떠나간 실향민들의 애조 띤 넋두리와 비애를 대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독백체 ‘하오’체가 이런 의미를 잘 뒷받침하고 있다.

민요적 율격으로 보면 두 시는 모두 7.5조 3음보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3음보의 행 배치 방법은 각기 다양하다. 한 음보를 1로 표시할 때 「길」은 ‘2+1, 3, 1+1+1’의 형태로 행구분하고 있고, 「하늘끝」은 ‘1+2, 3, 3’의 형태로 구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길」과 「하늘끝」은 3음보를 배열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행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소월은 3음보를 기본으로 하되 그를 단순히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구조나 시의 형식미를 위하여 전략적으로 다양하게 배열하고 있는 것이다.


비가 온다. / 오누나. / 오는 비는 / 올지라도 한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 온다고 하고

초하루 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 가도가도 往十里 비가오네.

웬걸 저 새야 / 울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 비마저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와도 한닷새 왔으면 좋지. / 구름도 山마루에 걸려서 운다.

「往十里」


소월은 향토적 소재와 민담의 차용, 지명을 시화해서 향토성을 잘 살려 내고 있다. 왕십리, 천안삼거리 등의 소재가 향토적 색체를 물씬 풍겨주고 있으며 그 지방의 전설이나 민담을 소재로 함으로써 향토성을 살려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지명이나 지방의 전설을 시화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읽히고 감동을 주어 민중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동일음의 반복이나 끝말잇기는 공동체적 성격을 갖는 민요적 요소로서 서술이 선명하게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소월의 관습적 수사나 언어 표현은 이러한 민요의 표현의 직접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4) 민족의식의 형상화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즈런히 /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 오는 것을 /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점을 손에 / 새라새롭은 歎息을 얻으면서

東이랴, 西北이랴 / 내몸은 떠나가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 불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공한 이 심정을 /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른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걸음 또 한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저 혼자...... 山耕을 김매이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나라 잃은 망국민의 슬픔을 처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벌판에서 친구들과 함께 일하며 행복한 삶을 꾸리고 싶지만 우리에게 그 벌판이 없다. 일제에게 보습(농기구)대일 땅을 빼앗긴 것이다. 그러기에 그 삶은 꿈일 수밖에 없다. 보습대일 땅을 빼앗기고 집잃은 몸이 되어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우리민족의 비참한 삶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기존 소월시의 여성적 어조가 아닌 당당한 남성적 어조로 건강한 노동의 체취와 결연한 민족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그만 두자 자네, 이제 더 / 자네를 걸어 너저분한 말을 늘어놓지 않겠네.

나는 조선인, 자네는 바람 / 나와 자네는 조선 산천을 집삼아 떠도는 바람이므로

경성, 평양, 철원, 개성, 신의주, 부산

조선의 아무데나 풀이나 나무, 도시와 촌락 / 아무런 곳이나 조선이거든 가는 곳마다

마음을 바람아 물어보라, 조선이라는 조선의 넋에다가, 그대 말로.

「無題」


이 시는 나라를 잃었어도 바람처럼 살아 숨쉬는 우리의 민족혼을 형상화한 것이다. 경성이든 평양이든, 도시이든 촌락이든 심지어 산에 자라는 풀과 나무에조차도 조선혼은 생생히 살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소월의 민족의식은 뚜렷한 것이었다. 민요시에서 느꼈던 민족의식과는 다른 차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적극적 저항은 아니지만 이전의 여성편향적인 소극성에서는 완전 탈피한 저항이며 잡초 같은 생명력과 강인함을 주문하고 있는 민족의식의 형상화를 잘 나타내고 있다.


Ⅴ. 소월의 시사적 위치


소월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서정시였다. 소월은 1920년대를 전후하여 물밀 듯이 들어오는 서구사조에 의연한 채 서정적 낭만의 시적 본질에 충실코자 하였다. 개화기 창가나 육당의 시가에 나타난 계몽주의를 거부하고 이 땅에 진정한 리리시즘을 정착시키는 데 누구보다 공헌한 사람은 소월이었다. 서정시인으로서의 소월의 위상은 그만큼 큰 것이었다. 또한 소월은 전통적 율조와 민족정서 그리고 향토성을 바탕으로 하여 민요시 장르를 확립한 시인이었다. 민요와 현대시의 접목으로 전통문학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한국 근대시의 지평이 새롭게 열릴 수 있었다.

전통가락과 평이한 일상어를 시어로 선택하여 겨레의 보편적인 정감을 노래했으며, 민요의 특징인 7.5조 3음보의 율격을 반영하여 연 구성과 행 배치의 변화를 시도하여 정형시의 고정된 틀이 아닌 자유시의 현대적 감각을 갖추게 하였다.

한편 그는 이러한 민요시 창작을 토대로 해서 민족 저항시를 남긴 시인이었다. 소월은 억눌린 민족감정을 민요시로 카타르시스하여 민족혼을 되살리는 한편 민족적 저항시를 직접 창작함으로써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시대적 소임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또 소월은 시의 율격과 시어의 운용에도 힘써 한국 근대시의 방법적 영역을 확대시킨 사람이었다. 소월은 기교시인으로서 시의 형태와 언어, 기법면을 중시하여 그것이 시의식을 충실히 담아낼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기울였다.


그러나 소월의 초기시는 당대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너무나 무력한 슬픔의 시로 일관하였다는 한계점도 가진다. 가문의 장손으로서의 책임감과 현실에서의 좌절,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현실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슬픔과 절망이 더욱 깊은 한으로 남았다. 불행의 원인을 운명으로 체념함으로써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삶의 태도를 가진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초기시는 한민족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는 있으나 그 방법이 운명, 체념, 인고 등과 같은 정서로 일관하고 있어 자칫 건강하지 못하다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다.

요약하면 소월은 자신의 서정시를 통해 민족적 심정을 넓히는데 기여했으며 개인의 고독을 집단적 삶과 의식으로, 절망에서 모순적 희망을, 가냘픈 감성에서 이지와 개척을 통해 확인될 공동체적 연대의식 등을 부각하고자 했다. 소월은 정서의 보편성, 즉 민족정서의 기초인 정한과 탄식에 숨어있는 한국의 정서를 잘 노래하여 누구에게나 통할 수 있는 국민 시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소월은 한국 근대시의 내면공간을 확충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 근대시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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