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서정주 연구
Ⅰ. 생애 및 전기적 사실
1. 성장기(1915- 1932)
미당 서정주는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서광한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미당의 자전적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원래 고창고을의 고전리라는 곳의 출신이지만 처가를 따라 질마재에 정착한 후, 김성수씨의 아버지인 同福令監집에서 農監노릇을 하고 있었다. 반면 미당의 어머니는 어떤 과부의 딸로 미당의 외할아버지는 젊어서 배를 타고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당의 어머니는 한문은 모르지만 외할머니를 통하여 배운 국문은 잘 알고 있어 미당은 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미당은 후에 자신은 어머니의 여향 아래서 신라류의 자연주의적 전통을 배웠다고 술회하고 있다.
1922년 7세 때 미당은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 후 미당 가족은 질마제를 떠나 부안군 줄포로 이사를 한다. 거기서 미당은 1924년 줄포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 5년 동안 학교에 다닌다. 당시 미당의 유일한 낙은 방학 때면 외할머니의 집에 놀러가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이 당시의 추억은 그 후 그의 시집『질마제 신화』에 기록되기도 한다. 1929년 미당은 중앙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온다. 그러나 미당은 1930년 11월 광주학생사건 주모자라는 명목으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이 사건 이후로 돌아갈 곳 없어진 미당은 여기저기 떠도는 방랑생활을 시작한다. 광주학생사건으로 인해 미당은 일찌감치 식민지 땅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이 땅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이 때부터 시작된 미당의 방랑은 후에 사회적, 현실적인 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형이상학적 미지의 세계 도처에 숨어져 있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시의 원동력이 된다. 훗날 금강산, 가야산, 제주도, 만주 등으로의 방랑의 끝없음은 시인의 정신적 고향을 찾아가는 과정이 된다.
미당의 어린 시절은 질마재의 자연주의적 환경에서 대체로 평화로웠다. 그러나 광주학생사건을 겪은 후의 미당은 일제 식민지 하의 어두운 사회적 현실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성장기에 있어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얻은 우여곡절의 체험들은 미당의 초기 시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2. 『시인부락』, 『화사집』의 시기(1933-1941)
1933년, 미당은 친구 裵眉史의 소개로 불교의 종정스님인 石顚 朴漢永 老師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권고로 開運寺 大圓庵에서 불교를 공부하다 1935년 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당시 미당은 불교에 심취한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
미당은 광주학생 사건 후로 톨스토이적 현실 개혁운동에 한계를 느낀 듯 하다. 그리고 떠돌이 생활을 통하여 오히려 톨스토이주의에 반대된다고 할 수 있는 니체와 그리스 신화의 세계에 매력을 느낀다. 그것은 바로 개인의 자유와 육체성을 찬양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기본자격 조차 허용하지 않는 일제의 식민지 상황은 인간의 원초적 생명력을 꿈꾸는 시인의 정신세계를 억압한다.
그리하여 1936년 불교전문학교 시절, 미당은 가장 절친한 친구인 시인 함형수와 함께 당시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에 기거하면서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 몇몇의 문학청년들과 교류를 한다. 자전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서로 정신의 지향성은 달랐지만 ‘인간성’ 즉 사람의 기본자격을 탐구한다는 것에 그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1936년 11월 미당을 중심으로 김달진, 김동리, 金相瑗, 김진세, 여상현, 이성범, 임대변, 오장환, 정복규, 함형수 등이 모여 시전문 동인지를 발간하니 그것이 바로 『시인부락』이다. 당시 시단의 동향은 1924년 이래 박영환, 김지진, 임화 등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경향과, 1931년 순수시의 자각으로 대두된 정지용, 김영랑, 박용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시문학파의 감각적 기교 그리고 1934년 경부터 시작된 김기림의 주지주의적 경향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한국 시단에서 ‘인간에의 관심’, 生 자체에 대한 집념을 보여준 『시인부락』의 발간은 당시 현대시단에 새로운 국면의 구축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인부락』은 비록 2호 밖에 발간되지 못했지만 현대 시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인부락』에서의 미당의 활동은 그에게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미당은 『시인부락』 1호에 「문둥이」, 「獄夜」, 「대낮」을 발표하고, 2호에 「화사」, 「달밤」, 「밤」등을 발표하여 그만의 개성적이고 독특한 시세계를 형성해 나아갔다. 바로 『시인부락』에서의 활동은 미당이 오늘날 위대한 시인으로서 자리잡게 된 그 출발점이자 그의 정신사적 기점이 되는 것이다.
시인부락이 해체된 1937년 미당은 제주도로 떠난다. 친구인 윤용석의 집에 머무르며 그의 초기시 중 가장 건강하고 싱싱한 육체성을 보여주는 일명 ‘地歸島 詩’ 4편을 완성한다. 1937년 6월 방랑에서의 지친 몸을 이끌고 제주도에서 고창의 집으로 돌아온다. 미당은 1939년 3월, 방옥숙 여사와 결혼, 고창에서 가정을 꾸민다. 그리고 미당의 첫 시집인 『화사집』을 간행하는데 『시인부락』에 발표했던 「문둥이」, 「대낮」, 「화사」 등과 지귀도 시 4편을 비롯하여 모두 34편의 시가 실린다. 이 작품들 중「화사」는 그의 시집 제목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점으로 보아 미당의 초기시의 원형을 담고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
3. 『귀촉도』, 『서정주 시선』의 시기(1942-1955)
『귀촉도』시대는 『화사집』의 시대와는 달리 미당의 안정된 시적 여정을 보여준다. 1942년 여름, 미당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서울 흑석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서울에 도착한다. 모든 생활필수품이 부족하던 이 시기에 미당은 굶주림과 학질에 시달리며 삶과 죽음의 세계를 넘나들게 된다. 학질에서 겨우 회복된 미당은 이때부터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니 그 전기를 이룬 작품이 바로 「꽃」이다.
다시 태어났다는 느낌을 가지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한 미당은 이제 현실의 삶에 연연하지 않고 현실 너머에 있는 넋의 세계, 혼의 세계에 맞닿는 시들을 생각한다. 즉 『화사집』 시대의 그 치열하고 강렬했던 육성에서 떠나서 이제는 죽음 저 너머 선인들의 무형화된 넋의 세계, 육체 없는 혼의 세계와 신성의 땅을 지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신적 변화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부터의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1940년대 일제는 한국어의 공적 사용을 금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문단을 대변하고 있었던 양대 순수 문예지인 『문장』과 『인문평론』이 폐간되고 대신 『국민문학』과 『국민시가』 등 다수의 친일 잡지들이 창간되었다. 1944년 미당은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연극을 하던 몇몇의 청년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죄목으로 3개월간 감금된 뒤 풀려나와 친일잡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에서 활동함과 동시에 일본의 종군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친일적 행동에 관하여 미당은 그의 자서전에서 ‘창피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으며,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 친일적 시비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일본이 망해도 한 백년은 갈 줄 알았다.......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공인하면서 후배들의 따가운 비판 대상이 됐다.
미당이 편집장을 맡아보던 친일잡지인 『국민시가』가 재정난으로 폐간된 뒤 그는 일본 경찰의 미행을 피해 전주로 내려가 숨어 있다가 해방을 맞는다. 해방 후 한때 미당은 김동리, 장준하, 이한직, 김익준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의 한국청년회에 가담 활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이었던 미당은 해방된 그 해, 중단했던 시작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그는 1945년에 「골목」, 1946년에 「밀어」, 「푸루는 날」, 「국화옆에서」 등을 쓴다. 미당은 그의 자서전에서 “1956년 여름부터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새로운 沈靜된 느낌이 열리기 비롯하면서 나는 겨우 살 기운을 회복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에 1946년 화사집이 나온 뒤 5년만에 제 2시집 귀촉도가 간행된다. 귀촉도에는 1940년 만주에서 썼던 「무제」, 「멈둘레꽃」,「만주에서」작품들과 그가 1943년 굶주림과 학질로 인한 죽음에서 벗어나 이조백자의 색체에 관심을 갖고 쓴 꽃, 그리고 해방 후 자연과 인생에 대한 고뇌가 담겨 있는 「밀어」, 「푸르른 날」 등 모두 24편의 시가 실려있다. 『귀촉도』에 실린 작품들은 『화사집』의 시편들과는 다른 정신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해방 후 미당은 부산 동아대 교수, 남산 음악대 강사, 동아일보 문화부장을 거쳐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으로 국가기관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상황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좌. 우익의 첨예한 대립은 끝내 식민지 체험 이상의 비극적 상황인 한국전쟁을 초래하였다. 1950년 6월 27일 미당은 문예잡지 『문장』 사에 文人一團과 함께 한강을 건널 것을 결심한다. 이에 미당은 가족을 처이모에게 맡기고 시인 조지훈, 이한직과 함께 대전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박목월, 구상, 김윤성, 박용구, 김송 등을 만나 從軍文人團을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전장을 따라다니며 일선에서 활약한다. 그러나 미당의 전시활동은 피난지인 대구, 부산 등지에서 정신분열증의 하나인 심한 피해망상증을 유발한다. 그것은 그가 낙동강 전선에 종군하면서 전사자들의 시체를 목격한데서 기인한 충격 때문이었다.
심한 신경증세와 그로 인한 실어증에 시달리면서 그는 자살을 생각하여 부산의 시대를 보내다가 9.28 수복이 되자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에서 가족의 도움으로 미당은 몸이 조금씩 회복되자 다시 1.4 후퇴로 전주로 피난을 간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미당은 한번의 자살미수와 더불어 여전히 신경증 발작을 일으킨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때부터 그의 후기시의 완성이 예시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당은 그의 정신질환을 병으로 방치하지 않고 그것 가운데서 그의 시를 만들어 내고 사상을 이루어 내었다. 비록 『귀촉도』의 안정은 전쟁을 통하여 시인의 정신을 파괴시켰지만 이러한 정신적 피해는 그의 문학이 샤머니즘과 접목하는 계기가 된다. 즉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샤머니즘 경향은 전후의 시를 양상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된 것이다. 미당은 이미 그를 파멸시킨 역사나 현실로부터 일탈하여 그것들을 무속적으로 鎭壓한다. 그리하여 무속적 영험 뒤 그에게는 자전적인 귀향이 시작되고 이로써 그는 신라 불교의 세계에 심취하게 된다.
1952년 자살미수와 그로 인한 기억상실증이 회복된 후 미당은 공자의 『논어』와 『중용』 그리고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을 탐독한다. 특히 그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속의 이야기들을 잘 정리, 기록하였는데 이 작업은 후에 『신라초』의 기초가 된다. 전주 시대에 몸도 회복되고 생활도 안정되어 갈 무렵 미당은 조선대학 부교수의 자리를 얻어 광주로 생활터전을 옮긴다. 무등산과 접해있는 그곳에서 그는 자연에 몰입하면서 도연명, 노자, 장자의 자연사상을 접하게 된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당은 서울 공덕동 옛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김동리, 황순원, 조지훈 등과 어울려 다니다가 1954년 서라벌 예술학교에 교수자리를 얻어 생활기반을 잡는다. 그해 미당은 아세아재단이 주는 자유문학상을 수상하고 그 다음 해인 1955년에는 전쟁 속에서 써 온 그의 작품들을 정리한 3번째 시집인『서정주시선』을 출간한다. 여기에 수록된 시들은 전쟁의 참상과 폐허의식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당은 『서정주시선』을 통하여 전쟁 속에서도 깊은 내면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비극적 허무주의에 침체되어 있던 우리문단의 경향을 전환하는데 한 시범을 보여주었다. 특히 『서정주시선』에 나타난 고전정신과 토속적 서정의 추구는 전쟁 후 서구적 모더니즘의 열풍에 직접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한 한국 현대시에 자기반성의 기회를 제고하였으며, 전후시에 커다란 파장을 형성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4. 『신라초』 『동천』의 시기(1955-1968)
전후 문단은 전쟁 후의 시련을 딛고 문단 재편성의 기운과 문학 내적 사정의 변동에 따라 1955년 새로운 변화와 질서를 모색하는 활발한 기운을 맞이하게 된다. 문예지 폐간 이후 공백상태이던 문단에 현대문학을 비롯하여 많은 문예지와 종합지가 발간되었으며 추천제와 더불어 신춘문예 제도로 신예 시인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1955년부터 1959년대 후반에는 백여권이 넘는 개인 시집들이 상재되어 현대시의 르네상스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당은 당대적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반대로 현실을 도피하고 있었다. 미당은 다른 작가들이 자신을 시대성을 무시하는 몽유병자라고 하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신라사의 책들을 정독해 읽어가고 있었다.
이렇듯 당시 신라의 탐색에 나선 미당이 발견한 곳은 바로 인간과 자연이 영혼으로 이어진 동일성의 세계였다. 이처럼 미당은 우리정신의 뿌리를 신라초의 세계관에서 구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인헌화가」, 「선덕여왕의 말씀」, 「꽃밭의 독백」, 「百結歌」 등은 고전 속의 주인공이나 주인공이 행적들을 소재로 삼아 현재로 재현해 보였을 뿐 고전정신을 현대시로 승화시키지 못했다는 평을 듣는다. 즉 작가의 머리로 쓴 시이지 작가의 영혼의 중핵 속에서 산출된 시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신라인의 정신세계를 우리 민족의 정신의 뿌리로 구현하려 했던 『신라초』는 작품의 성패 여하를 떠나서 우리 시사에 남을 만한 업적으로 평가 되면서 1961년 5.16 문예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1965년 미당의 나이 50세로 접어든다. 그러나 미당은 나이에 관계없이 동국대학교에서 많은 제자와 후학들을 길러 내면서 더 완숙한 경지의 시세계로 들어선다. 즉 그가 청년 시절, 박한영문하에서부터 익혔던 불교적 세계는 그 후 해인사 시절을 거쳐 전주, 광주 시절의 노장입문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이러한 정신세계의 완숙한 경지는 바로 『동천』의 시기에 와서 개화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1968년에 발간된 제 5시집 『동천』이야말로 미당의 이제까지의 문학적 성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압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무렵 미당의 많은 작품들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은 바로 영원주의로 그가 시집 『신라초』에서 보여주었던 신라인의 정신세계와 불교적 상상력을 드디어 『동천』에 와서야 미당의 독특한 언어적 秘術과 만남으로써 결실을 맺은 것이다.
동천에서는 미당만의 영속적 개안의 세계나 혹은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어떤 깨달음 혹은 윤회의 사상들이 그의 신비적인 상상력과 함께 화려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렇듯 미당이 신라초에 이러 동천의 세계에서도 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시적으로 해명해 보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질마재신화』 이후(1969-)
1970년대 고향 질마재의 유년 시절로 회귀하여 미당은 또 다른 시 세계를 개척한다. 『질마재 신화』에서 미당은 전통적인 이야기꾼으로 변모하여 촌락사회의 일상에서 우리 고유의 전통을 발굴, 질펀한 토속어로 흥미진지하게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의 이러저러한 삶을 신화적 단계로 끌어올리는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1977년 이후 킬리만자로에서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까지 세계 곳곳을 떠돌며 그곳의 풍물과 사상, 종교, 철학 등을 시로 담는 한편 1980년대 정치적 굴곡에서서도 끊임없이 시를 창작한다. 그러나 미당은 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전두환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사, 대통령 당선 축하 축시헌사, 광주항쟁과 전두환정권 수립 와중에 TV방송에 출연해 행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지 발언 등의 정치 참여로 일제 및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불명예와 ‘아부와 굴종’이라는 지탄 및 반민중 반민주 친독재 야합인물로 불리는 오점을 남긴다. 이 시기에 발간한 시집은 『떠돌이의 시 (1976)』, 『서으로 가는 달처럼(1980)』,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1982)』, 『안 읹히는 일들(1983)』, 『노래(1984)』, 『팔 할이 바람(1988)』 등이 있다.
만년의 삶을 왕성한 시작으로 보내며 노익장을 과시한 미당은 세계 여행의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1990년 ‘산시’창작에 착수하여 세계의 산 이름을 소재로 산의 상징과 의미, 그리고 이미지를 형상화한 시집 『세계의 산시(1990)』, 『늙은 떠돌이의 시(1993)』, 『80 소년 떠돌이의 시(1997)』를 선보이며 청년기부터 간직해온 신화적 상상력을 세계 각국의 지리와 민화 전설로까지 지평을 넓히는 등 세계 여행 중에 바라 본 남의 세계마저도 우리의 신화체계 속에 간단없이 용해시키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추천되고(5차례), 2000년 10월에 부인 방옥숙씨가 별세하자 이후 곡기를 끊고 맥주로 연맹하다 2000년 12월 24일 서울 강남 삼성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이때 나이가 85세였다. 12월 26일 정부는 고인에게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Ⅱ. 연구사 개관
미당에 관하여 선행되어온 연구를 크게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시적 생애에 관한 연구
(2) 시정신에 관한 연구
(3) 텍스트의 내재적 접근방법을 통한 연구
(4) 시사적 위치에 관한 연구
1) 시적 생애에 관한 연구
미당의 시적 생애에 관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는 1949년 조연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원죄의 형벌」이라는 글에서 『화사집』으로부터 『신라초』에 이르기까지의 미당의 시적 변모를 고찰하고 있다. 그는 『화사집』에 나타나 있는 것은 ‘혼돈과 깊은 심연의 세계’이며, 그러한 시세계는 서정주 개인에서라기보다는 인간의 인류적 원죄의식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미당은 『화사집』에서 보였던 원죄적 형벌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살아나려는 재생의 노력을 하였으니 그 새로운 노래가 바로 『귀촉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계기의 몸짓을 통해 미당은 새로운 호흡과 의욕을 하나의 질서 아래 통일하여 자기의 주체를 재형성해 나아가는데 이는 『귀촉도』에 잘 표현되어 있다고 조연현은 말한다. 이런 조연현의 견해는 미당의 시적 변모를 설명해줌으로써 미당의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 컨 공헌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미당의 시적 생애에 관한 연구는 미당의 작품이 뚜렷한 변모를 그리며 발표되자 많은 연구가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논의 되었다.
먼저 천이두의 글 「지옥과 열반」은 『화사집』에서부터 『동천』까지의 미당의 시적여정을 잘 그려내고 있다. 천이두는 『화사집』세계와 『동천』의 세계를 비교하면서 전자가 저주받은 청춘의 고뇌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칠줄 모르는 구도자가 터득한 자족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화사집』에서부터 『동천』으로 가는 길은 마치 지옥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시적 여정을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김우창의 「한국시와 形而上」이다. 이 글에서 그는 ‘갈등과 구제의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미당의 시를 다른 시인들과 비교, 고찰하고 있다. 김우창은 먼저 미당의 초기시는 당시의 시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시의 진정성을 얻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즉 미당은 1920, 30년대에 활동하던 여타의 시인들과는 달리 서구 퇴폐시인들을 모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의 시적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시를 도덕의 상태에까지 끌어올린 시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당의 시적 생애에 관한 연구 중 특이할만한 논문은 육근웅의 것이다. 그는 미당시의 변모과정을 정신분석학적인 방법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는 미당의 시는 전체적으로 볼 때, ‘대립과 갈등’에서 ‘안정’의 단계를 거쳐 이 두 가지의 상반된 세계를 통합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초기시인 『화사집』과 『귀촉도』는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 선과 악 사이에서의 갈등이 잘 나타나 있으며, 서정주시선 이후 중기시는 안정과 균형의 질서를 구축한다고 본다. 이러한 안정과 질서의 세계는 신라의 신화적 세계를 탐색하는데, 후기시의 특징이 되는 신화의 세계로의 물러남은 화자가 개인적. 역사적 편향을 보상하려는 무의식의 창조적 기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미당의 시적 생애에 관한 연구들은 공통된 견해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미당이 초기시에서는 ‘인간의 근원적인 대립과 갈등’을 그리고 있지만 후기시로 오면서 ‘안정과 조화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2) 시정신에 관한 연구
미당의 시정신에 관한 연구는 신라정신과 영원주의, 그리고 불교와 무속적 세계를 포괄하는 사상적 측면에서의 논의이다.
서정주 시에 나타나는 신라정신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신라정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강희근, 최원규 등의 논문이 있다.
강희근은 미당시에 있어서 신라정신의 도입은 그 한국적 전통정서의 재현에 성공을 이룩하여 자기의 시적 공간을 한국시사에 뚜렷이 해놓고 있다고 평가한다.
최원규도 미당시의 근본적인 정신요소를 신라정신이라고 보았다. 최원규는 미당이 시대적, 사회적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자기만의 시세계를 고집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인 정신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꽃’으로 비유되는 신라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미당이 신라정신이라는 역사의식 속에서 시의 소재를 발견하여 그 영혼의 심연을 헤아리고 있으며, 이러한 경지는 인간성의 아름다움으로 표상될 때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차원높은 정신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다음으로 신라정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보면, 대부분이 영원성과 현실성이라는 맥락에서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미당이 신라정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영원주의를 피력하다보니 시의 중요한 관건인 현실성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견해이다.
문덕수는 신라정신에 있어서의 영원성과 현실성이라는 글에서 미당이 신라정신이라는 우리의 잠재적 정신을 최초로 발견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작품 속에서는 향가에 나타난 것과 같은 ‘본질적인 신라정신’이 결핍되어 있다고 보았다. 즉 미당의 시 속에 나타난 현실은 단지 그의 영원주의 이데아를 표현하기 위한 계기가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김학동 역시 문덕수와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그는 미당의 시가 한국 고유의 전통으로 돌아와 신라의 광명을 찾아가는 그 관념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원숙의 경지에 들어섰을는지는 모르지만 그 세계는 우리에게 공감을 주지 못하고 다만 기진한 압기같은 것을 느끼게 해줄 뿐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박두진 역시 미당이 후기시로 접어들수록 맥이 빠진 것 같은 축 늘어진 시가 되었다고 말한다. 미당이 서구의식으로부터 동양적인 정서의 사상으로 변모한 이해 우리와 동화될 수 없는 관념의 세계를 표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미당의 신라정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는 미당이 초기시에 지니고 있었던 동적인 육체성과 생명성이 그 체험을 바탕으로 잘 조화되어 성공을 거두고 있는 반면, 그가 신라와 영원주의를 내걸고 썼던 후기시에 있어서는 관념의 세계만 있을 뿐 현실성과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으로 일관되어 있다.
3) 텍스트의 내재적 접근방법을 통한 연구
텍스트의 내재적 접근방법을 채택하여 작품을 하나의 체계, 즉 작가의 지향의식의 산물로 간주하여 상상력의 질서를 밝히는 현상학적 구조주의적 측면을 다룬 글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화영, 김재홍, 원형갑, 이진홍, 하재봉, 문정희 등의 논문을 들 수 있다.
김화영의 저서는 서정주 시의 현상학적 연구의 하나의 전범으로 꼽을 수 있다. 전체적으로 서정주 시의 공간구조에 대한 해명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그의 연구는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동양의 無, 윤회사상 등을 적절히 원용하면서 서정주의 상상력의 움직임을 역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서정주 시의 공간은 지상에 대한 집착에서 점차 무와 윤회의 세계로 확산되는 의식 구조의 반영이다. 이는 서정주의 시를 ‘피를 맑히어 나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천이두의 「지옥과 열반」의 기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머지 사람들의 논의도 크게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이진홍의 논문은 서정주 시에서 주로 나타나는 심상을 출현 빈도 수에 따라 해명하고 의미부여를 한 것이라는 점이 특이하며, 원형갑의 연구는 하이데거의 철학과 관련하여 서정주의 시의 의식의 총체적인 유기성을 밝히려고 하였는데, 시의 구조적인 측면을 통한 의식의 규명보다 평자의 철학적 해석에 의존하고 있는 경향을 띠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주로 현상학적인 조명으로 문학작품에 나오는 이미지들을 작가라는 한 주체자의 기획 또는 의도의 산물로 보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4) 시사적 위치에 관한 연구
미당이 우리 시단에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에 대해 연구된 것으로는 조윤제와 고은의 글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조윤제는 한국시의 거대한 산맥을 인간사회에서 한발 초탈하여 세상을 굽어보면서 쓴 낭만주의 시와 세상을 정면으로 대결하여 고난을 뚫고 나아가면서 고통을 읊은 고전주의 시로 양분하고, 미당의 시를 고전주의의 전통을 잇는 커다란 산맥으로 보았다. 즉 그는 미당의 시가 신라의 향가, 고려의 경기체가, 그리고 정극인, 송순의 가사와 윤선도, 김천택의 시조에 흐르는 시정신을 계승. 재창조함으로써 험난한 우리 역사 속에서도 우리민족에게 끝없는 인내와 관용, 높은 자존심과 희망을 준 고전주의의 대표시라고 규정하고 있다.
고은은 「서정주 시대의 보고」라는 글에서 시는 근본적으로 민족시이며 국어 안에서 솟아나는 것이라는 전제 하에 미당을 ‘언어의 政府’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고은은 미당시에 나타난 독특한 상식 초월 능력과 논리 용해의 기술을 밝히면서 앞으로의 우리 시문학 과제는 미당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미당이 한국 시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
Ⅲ. 시작 경향 및 변모 양상
1. 『花蛇集』에 나타난 자의식의 방황
미당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이래, 출발 이래 시문학파의 공허한 기교주의에 대한 반발과 모더니즘의 비생명적 메커니즘에 대한 반발로 고양된 생명의식의 고양이라는 일종의 강한 시정신이 그의 『신라초』에 와서부터 변모를 보이기 시작하여 동천에 오면 극을 이루고 있다.
그의 『화사집』의 세계는 서구의 세기말적인 보들레르에의 마성이 그의 원생주의, 영원주의 혹은 영생주의와 혼입된 지옥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건전한 정서의 승화가 아닌 굴욕과 방황과 천치와 죄인의 몸부림과 같은 낭만적 거친 숨결이다. 미당은 이 시기 죄의식을 자신의 개인적인 진실이든 시적인 진실이든 간에 놀라울 만큼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솔직성은 자신의 존재를 떳떳하게 보여주려는 미당의 자아의식이었다. 그러나 이 자아의식은 미당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의 해결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인류적 차원의 성질이었다.
「자화상」에서 출발한 죄인의 자의식은 『화사집』 거의 전편을 지배하는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다. 花蛇라는 이미지가 아담과 이브의 신화에서 온 것처럼 『화사집』의 시편들은 카인의 후예로서 겪어야 하는 수인의 절규였으며 화사라는 이름조차도 그에게는 시적 숙명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시적 숙명은 개인적 민족적 차원이 아니라, 인류적인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원죄에서 인류의 모든 운명이 결정되었듯이 『화사집』에 지배되는 현실과 화합할 수 없는 갈등과 절망, 방황 등은 인류적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민족적인 운명을 떠나 카인의 후예로서 겪어야 할 원죄에 대한 형벌이며, 이러한 원초적인 인간의 업고 때문에 수형받는 죄인의 모습으로 미당은 나타내고 있다. 그러기에 감상주의자로 위대한 죄인으로 자신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이 곧 『화사집』으로 대표되는 미당의 자의식이었다.
『화사집』은 야성적 육감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야성적인 육감이 보들레르적인 악마주의의 영향이어서 서구적이라고 보아도 좋겠으나 이러한 일련의 성적 표현을 심리주의에서의 리비도-아무 조직이나 통일된 의지를 지니지 않고 쾌락원리에 따라서 본능적 필요를 위한 만족을 획득하려는 충동만을 지닌 흥분된 상태, 즉 끊고 있는 큰 가마솔과도 같은 것-의 표출상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2. 『歸蜀途』에 나타난 동양적 정서
『귀촉도』는『화사집』이후 미당의 시세계의 모색을 보인 시집이다. 그는 초기의 악마주의적 생리에서 벗어나 동양적 사상으로 접근하여 영겁의 생명을 추구하는 인생파 시인으로서 명맥을 잇기 시작하여 면목을 일신하게 된다. 고유한 한국의 서정, 한국인의 심정세계로 고개를 뻗는다는 견해는 미당이 신화와 원형의 세계로 회귀하고 귀착하려한 것에 대한 지적이고, 시인의 내면을 흐르는 시간은 곧 무의식의 시간을 의미하고 있다.
한국적인 신화와 원형의 토대 위해 미당은 그 세계를 더욱 광역화하여 시간을 뛰어 넘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화사집』 시대가 가혹한 원죄의 형벌 속에서 육감의 몸부림을 초래했다면 『귀촉도』는 본래의 한국인으로 돌아와서 한국인의 정신을 찾는 새로운 개척이라 할 수 있다. 귀촉도는 원죄의 형벌에서 만신창이가 된 육신이 간신히 임종을 면한 재기의 몸짓이요, 자기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몸짓이었다.
시집 『귀촉도』는 비교적 안정된 정서의 소산물이다. 그리고 화사 무렵의 서구적 관심과 방황으로부터 이제 그의 시는 동양에로의 회귀를 보이고 있다. 결국 그의 정서적 안정은 동양과 우리 고유의 전통에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 전통적 서정시의 주류를 이루는 정서, 곧 한의 한 극치를 이루고 있는 시집이 바로『귀촉도』인 것이다. 예를 들어 7.5조의 가락이 이 시집에 두드러지고 있다.
『귀촉도』의 시대는 30대의 안정과 질서를 다소 찾은, 이제는 사회와 가정과 좀더 나아가서 시대현실에도 눈을 줄 만큼 미당의 의식이 성숙되어가고 있는 조짐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이 시기의 작품들은 동양적 사유와 관련을 맺고 있다.
3. 『서정주 시선』에 나타난 인생달관
미당이 40세 때 나온 시집으로 『귀촉도』 이후 9년 만에 펴낸 것으로 그의 인생역전 가운데 가장 짭짤하고 수난을 겪었던 시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시집이다. 이 시대의 화자는 이미 삶 그것을 바라보는 자로서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즉 한 시대의 비극, 혹은 자신의 비극의 강물 속에 빠져서 버둥대는 위치에 그가 서 있는 게 아니라, 그 비극의 강물을 이미 극복하고 헤쳐 나와서 이제는 그것을 담담히 관조하는 자리에 서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런 비극적 상황이야말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는 점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서정주 시선』은 철저하게 『귀촉도』의 세계를 답습하고 있으며 현실외면의 시야를 자연으로 확산해 갔다. 『화사집』에 등장한 많은 동물들은 미당의 내면적 갈등의 세계를 표상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빠르고 공격적인 동사태와 연결되어 그의 내면의 갈등의 몸부림이 얼마나 격정적이었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제 『귀촉도』와 『서정주 시선』의 중기시에 보면 그 양상은 확연히 달라진다.
우선 그 변화된 모습의 하나는 중기시에 나타나는 시 중에 동물이 등장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등장하는 동물의 성격이다.
『서정주 시선』에 나오는 동물은 모두 꾀꼬리, 소쩍새, 나비, 노고지리 등등 하늘을 나는 동물이다. 이는 『화사집』에 나오는 동물이 거의 지상의 동물임에 비할 때 『서정주 시선』에 나오는 동물은 『귀촉도』의 세계를 거치면서 모두 천상의 동물로 변모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변모된 양상은 바로 미당의 내면적 갈등의 문제가 점차로 극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례인 것이다. 즉 미당은 『귀촉도』의 한의 세계를 『서정주 시선』의 대표적인 동물인 ‘학’을 통하여 드러나는 체념과 달관의 미학으로 극복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지상적인 현세적인 것에 사랑을 보내는가 하면, 천상적이고 미래적인 세계로 나래를 펼치기도 한다. 그것은 그가 이 무렵을 전후하여 대가적 시의 세계를 획득하고 있는 징후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화사집』무렵의 문학청년적 방황이나 『귀촉도』 무렵의 정서적 안정상태를 초극해서, 이제는 그의 시적 상상력이 다양하게 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의 시적 상상력은 이 무렵을 전후해서부터 때로는 지상에서 때로는 천상으로 현실에서 미래로 혹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그 시적 공간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4. 『新羅抄』에 나타난 전통정신
『신라초』는 전통지향성을 보인 것으로 지금까지의 한국 현대시가 눈뜨지 못한 신라인의 불교적 인과관계를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전에도 신라에 관심을 보이긴 했으나, 시인의 본격적인 신라탐구는 『신라초』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시인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윤회와 인연설에 많이 기대고 있다.
미당의 시의 발전단계에 있어서 『신라초』는 대단한 의의를 갖는다.
「선덕여왕의 말씀」을 선두로 하여 「꽃밭의 독백」, 「신라의 상품」, 「백결선생」 등 일련의 신라를 소재로 한 작품들과 『한국성사략』 등 고대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지금까지의 서정주의 정신을 뛰어넘어 멀리 상고시대에까지 영감의 영역을 확대시켜 간 것이다. 그 자신은 삼국시대 특히 신라시대에 있어 아무래도 정신의 주도적 입장에 있었던 도교와 불교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데, 말하자면 이러한 자연주의 영원주의가 우리 시정신의 한 동맥으로서 상대로부터 전래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문자로 표현된 세력을 본다면 여말 이후 많이 침체해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정신전통에서 완전히 거세되었거나 없어진 것은 아니다. 정신의 전통이란 문헌 속이 아닌 실생활의 언어행위를 통해서도 면면히 전승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을 우리는 흔히 하는 말로 풍류적. 풍월도라고 하며 일종의 신선적 정신이 뒤에 유, 불교의 이입과 아울러 그것과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시정신의 전통을 다시 잇고 있으며 새롭게 세우고 있는 것이다.
『신라초』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불교적 윤회사상을 시정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시. 공간적 차이를 극복하려는 시인의 끈질긴 노력의 소산이었다. 이런 노력은 뒤 이은 『동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동천』 역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연유되는 시적 비젼의 소산이었으며, 그럼 점에서 『신라초』의 한 연장선 위에서 파악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라초』 무렵의 시인이 자기 구도의 반려를 주로 [삼국유사] 속의 신라 하늘에서 구했는데 반해 『동천』에서는 일상의 생활주변이 시적 대상이 된다. 『동천』에 이르러 비로소 『신라초』에서 터득한 불교세계는 육체를 얻으면서 지적 이성적 논리의 상징어에 의하여 형상화 되고 있다.
5. 『冬天』에 나타난 불교적 형상화
『동천』에 이르러서는 『신라초』의 시정신의 세계가 더욱 심화되고, 濃縮되어 가면서 인연과 윤회의 불교적 시선으로 인간을 관조하려는 색채가 농후해지고 있다.
『신라초』부터 시작되는 그의 복고취향은 현실도피나 외면이 아니라 시공을 뛰어넘는 하나의 새로운 고대의 현실과의 만남인 것이다. 가까이 있는 역사존재의 현실을 뛰어넘어 고대와 만나고 신라와 만나게 되는 것은 무의식 속에 잠겨 있는 정신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의식 속에서의 시간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화가 시간을 초월해서 과거(전통적 신념)와 맺어지고 현재와 더불어 존재하고 미래정신적, 문화적 열망에 도달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의 현실은 그가 삶을 이끌어 가기 위한 하나의 갑옷인 것이다.
『신라초』에서 미당이 획득한 것이 신라정신이고 한국정신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동천』은 이의 궁극적 실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과 자연과의 교감으로부터 새로이 획득한 『신라초』, 『동천』의 영적 순례가 미당이 걸어온 편력의 전모다. 그러나 미당의 순례는 끝난 것이 아닐 뿐더러 무의식의 시간대 속에서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 상상력이란 것이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단순한 재생적 상상력이 아니라 현재의 사상과 과거의 사상, 가까운 것의 사상과 먼 것의 사상을 결합하여 창조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무의식 속의 능력이며 또 개인을 초월한 한 민족의 집단무의식의 심리작용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의 무의식은 영감의 근원을 이루고 그것은 자아에 의하여 질서있게 종합되며 초자아는 거기에다 도덕적, 사회적 방향을 결정해 준다는 허버터 리이드의 말처럼 영겁의 토대를 고대에서 확정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정신의 방향을 결정했고 그것이 우리 민족의 정신의 방향임을 자각하게 된다.
『신라초』시대부터의 미당의 사상의 기초가 되고 있는 소의 그의 영원주의. 영생주의가 완전히 체질화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정신으로 고착되고 있다. 이러한 일은 그가 우리 정신의 원형을 확실하게 제시해 주었을 뿐 아니라 과거의 것을 현재의 것으로 만드는 심리적 시간의 확대라는 지평을 세워 준 것이다. 아울러 그는 불교에서 배운 원숙한 상상력과 은유법으로 참선처럼 정숙한 비술적, 신비적, 영통주의적 색채를 농후하게 버무린다. 이러한 것은 미당이 불교의 인연설에 더욱 심취된 결과이기도 하다.
『신라초』에서부터 관심을 보였던 전통정신(불교적 윤회)은 『동천』에 이르면서 정서화 되고 있는데 그 예로, ‘라일락 빛과 향기’, ‘프리즘의 무지개’, ‘선녀치마 훔친 버꾸기’, ‘다홍치마 빛으로 피는 꽃’과 같은 미학적인 은유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곧 윤회의 관념 표상에 가까웠던 신라초의 시적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6. 『질마재 신화』에 나타난 원형적 고향의 설화시
『질마재 신화』는 고향으로 회귀하고 싶은 정신적 토대 위에서 쓰여진 작품이라는 점과 고향에 대한 원형적 심상을 제기하고 있는 점은 미당의 나이 회갑의 나이에 이른 인간의 보편적 감정에서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질마재 신화』의 의의는 민족의식의 뿌리와 한국인의 원형을 발견하려는 노력 속에서 찾아야 한다. 또 한편으로 미당의 이런 노력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받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질마재 신화』는 유신통치가 심화되고 산업화가 가속화되던 70년대, 우리 고유의 전통이 자꾸만 매몰되가던 시점에서 이루어진 노력이라는 점에서 미당의 시인인식이나 시대현실에 대한 시적 대응의 자세도 파악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시골 사람이 쓰는 말 그대로의 어법으로 독특한 방언을 구사함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넋의 시골을 재음미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든가, 혹은 우리 민족 고유의 주체적 정서를 되새겨보는 거울로 삼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 그리고 그것도 ‘신화’라는 말에 애당초부터 전제되고 있는 것과 같이, 이야기시를 통하여 우리들의 기억의 저편에 쭈그리고 있는 동화와 전설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면에서 그러한 것이다.
『질마재 신화』 무렵, 미당의 설화시에 나타나는 특징은 한결같이 한국적인 고향의 설화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 타향에 살면서 강한 고향 회귀의 정서를 보이고 있다는 점, 강한 회화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원형적 고향의 면면들을 가시화해 주는 것들이라는 점, 시골 사람이 쓰는 말 그대로의 어법으로 토속어, 비어들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 한결같이 그 형태가 산문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등이 그 특징적인 면모들이라 할 수 있다.
토속어는 우리 민족 전래의 넋의 시골을 뿌리째 뽑아서 잘 보여주고 있으며, 바로 그 점은 민족의 공동체의식을 심어 주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가족으로부터 이웃, 이웃으로부터 민족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친화력과 공동체 의식으로 끈끈하게 이어줄 수도 있고 조금 다른 표현으로는 동족의식이나 민족의식으로 이어줄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질마재 신화』에서 보이는 미당시의 ‘설화’의 세계는 우리네 한국인이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원형적 고향의 심상들을 토속어로 재구해놓음으로써, 그것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의 삶을 성찰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그런 설화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7. 『떠돌이의 시』에 나타난 떠돌이 의식과 그 이후의 시정신
미당의 제 7시집 『떠돌이의 시』가 출간된 것은 1976년이고, 제 8시집 『서으로 가는 달처럼』은 1980년, 제 9시집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가 출간된 해는 1982년, 제 10시집 『노래』는 1984년에 출간되었다. 모두 미당의 나이 고희 때의 일이다.
미당 70대의 ‘떠돌이 의식’은 20대 문학 청년적 지향의 의식이 아니라 이제 그것은 노년의 ‘나그네’의식으로 돌아와 있다. 젊은 날의 ‘바’람이 서구적이고도 정열적인 거센 방황이었다면, 이제 70대의 ‘떠돌이’는 사뭇 그 ‘바람’을 잠재우고 ‘한눈팔이’정신으로도 설 만큼의 가라않은 세계이며, 동양적이고도 한국적인 정신주의, 혹은 형이상적 세계에 대한 천착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세계에 대한 산책이라 할 수 있다.
70대 미당의 시는 철저하게 동양의 정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미당의 정신주의는 선현들의 정신세계의 편력을 통하여 획득될 수 있었던 것이었기에 다소 삶의 현실성, 즉 노동성의 현실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선현들의 ‘자연과의 융화를 통한 得力’의 지혜를 통하여 ‘殊勝한 힘’을 얻으려 한 것이었으며, ‘자연을 바짝 가까이’하는 것이 다난한 현실에 대응하는 길임을 그는 인식한 것이다. 따라서 미당은 ‘蘭’을 가까이 하게 되고 바로 그 난을 통하여 ‘曲卽全’의 대응논리를 익히게 된다. 즉 ‘적당히 굽을 줄 아는 풍류의 선비정신, 바로 그곳에서 한국적인 생명의 사는 절개와 끈기를 배우고, 그러한 ’곡즉전‘의 대응자세야말로 이 다난한 현실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대응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당의 이런 정신이 그의 정권에 야합하는 행동을 합리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Ⅳ. 대표작 분석
1.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got 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눈에서 天癡을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詩의 이슬에는
몇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此一篇昭和十二年丁丑歲仲秋作. 作者時年二十三也.
-「자화상」 전문
이 시의 ‘애비는 종이었다’는 발상을 낳게 한 동기는 그의 부친이 조부가 망친 가산을 일으키려 당시 10만석 부자인 김기중(김성수 선생의 선군자되는 분) 댁에서 서생 겸 농감을 지낸 일이 있는데 그것이 이 시인에겐 항시 마음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애비가 종인 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숙명적 현실이다. 숙명이란 피동적인 업보로 인식될 수 있고, 애비=종이란 인식을 자신의 업보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해서 독자적으로 떳떳하게 자신의 삶의 영토를 주장하고 확보할 자유로운 공간은 없어진다. 즉 자신의 삶의 영역은 스스로가 인정한 ‘종의 의식’이라는 테두리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종의 의식’은 보다 근본적으로 생각할 때 서정주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식민지적 사회 현실의 반영만을 나타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보다 더 근본적인 인간조건, 달리 말해서 심층적인 실존의 문제로 심화, 해석되어야 하는데, 이를 조연현은 “그것은 씨의 모든 운명적인 업고가 인류의 원죄의식에서 나왔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류의 원조인 아담이 범한 죄 때문에 그의 후손인 인간은 생득적으로 죄를 타고 난다는 기독교의 원죄의식을 미당은 받아들인다. 그의 자전적인 글에 종종 나타나는 니체나 보들레르에 대한 경도와 그리스 신화의 세계나 히브리적 사고의 영향은 그가 유교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자라고 후에 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은 『화사집』 속에 등장하는 서구적인 고유명사 등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데, 숙명적인 원죄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2. 「화사」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둥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 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ㅅ길
저놈의 뒤를 다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듯...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트라의 피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은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은 입술...스며라! 배암.
「화사」 -전문
‘배암’은 성서에서 말해주고 있는 바와 같이 원죄의식을 느끼게 해주는 동물이다. 원죄의식을 느끼게 해주는 동물이기에 그 몸뚱아리는 징그러운 것이 되며, 저주스러운 ‘저놈의 대가리’가 된다. 그러나 그렇듯 저주스럽고 징그러운 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하게도 유혹적인 아름다움, 즉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과 ‘크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을 지닌 아름다움의 대상이다. 말하자면 ‘배암’은 ‘저주’와 ‘유혹’이 교차되는 감정을 가지게 하는 동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저주의 마음이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길 저놈의 뒤를’ 따르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유혹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먹은 듯...가쁜 숨결’의 시의 화자의 마음을 엿보게도 해준다.
그런데 문제는 그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대상인 ‘배암’의 고운 입술과 시의 화자의 젊은 날 기억의 어느 강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순네’의 고양이 같은 입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유혹적인 아름다움의 뱀의 고운 입술을 통하여 젊은 날 관능의 대상이었던 ‘우리 순네’의 입술을 연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의 ‘배암’은 관능적 상징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며, 그러한 중심 상징으로서의 ‘배암’이 암시하도 있는 바에 따라 이 시인의 정감을 받아들여야 된다.
그리고 이 시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점은 성희를 할 때에 느끼는 묘한 죄의식이다. 그것이 젊은 날의 가슴 두근거리는 성희에서는 더욱 그러한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이점이다. 관능과 죄의식이 엇가리고 있는 자리에 이 시는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3. 「문둥이」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문둥이」 -전문
현대인은 누구나 정신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시인은 문둥병에 걸린 상태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극한상황을 통하여서만 오히려 건강한 삶을 희구하는 몸부림을 보여줄 수 있다고 시인은 생각한 것이다.
이 작품은 문둥이가 영아의 살을 먹는다는 속설에 그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문둥이는 인육을 먹고라도 싱싱한 삶을 살고 싶은 존재이고, ‘해와 하늘 빛’을 서러워하는 존재이며, ‘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우는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왜 이처럼 작가는 ‘문둥이’를 통하여 인간존재의 문제를 강하게 보여주려 한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원죄의 형벌을 받고 있는 ‘문둥이’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 인간의 모습을 환치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4. 「壁」
덧없이 바라보던 壁에 지치어
불과 時計를 나란히 죽이고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
여기도 저기도 거기도 아닌
꺼져드는 어둠 속 반딧불처럼 까물거려
靜止한 <나>의
<나>의 서름은 벙어리처럼....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볓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
壁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
오- 벽아.
「벽」 -전문
벽이란 한 세계를 다른 세계로부터 분리하여 차단하는 차폐물로서 닫힘과 막힘을 나타낸다. 따라서 벽의 이미지는 두 세계의 단절을 나타내고, 우리를 다른 세계로부터 차단하여 가둔다. 그러므로 ‘벽의식’이란 갇힘의 의식이고, 갇힌 자는 역설적으로 해방의 자유를 갈구하게 된다. 이 벽의 의미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일제하 식민지적 상황이 강요하는 ‘종의 의식’이고, 기독교적 ‘원죄의식’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적 정서면에서나 표현기법 면에서 「화사」, 「문둥이」, 「대낮」 등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즉 ‘육정적 호흡’이나 ‘원색적 육성’ 혹은 ‘직정적 언어’를 이 시에선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가 사뭇 내면화되어 있다거나 시인의 진한 시대의식을 맛보게 해준다는 면에서는 『화사집』무렵의 시들과 동떨어져 있다. 이 점은 시인의 시적 편력에 있어 중요한 일인데, ‘벽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과 같은 시행에 이르면 암울한 시대의 의식체계가 엄숙하게 다가온다. 정말 막힌 벽에 지치어 있었던 시대, 어디 의탁하거나 뚫고 나갈 빛이 보이지 않던 식민지의 지식인의 의식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5. 「귀촉도」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밝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구비 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귀촉도」 -전문
이 시는 왕위를 잃고 유찬의 길에 올랐다가 죽어서 귀촉도(접동새, 소쩍새, 자규, 두견새)가 된 망제의 전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망제의 전설에서 제재를 취해 왔을 뿐 이 시의 화자는 망제가 아니라 ‘청상과부’이다. 그러므로 망제의 혼이 화해서 ‘귀촉도’가 된 것이 아니라 이 시에서는 청상과부의 망부한의 혼이 화해서 ‘귀촉도’가 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귀촉도=청상과부의 혼’이라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에 이 시의 첫째 연과 둘째 연은 망부한을 안고 죽은 청상과부의 혼의 독백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피리 불고 가신 임’은 이 시의 화자의 ‘임’이 아니라 바로 청상과부의 ‘임’이라 할 수 있다. 그 임은 귀환 불능점인 ‘巴蜀’으로 가버린 것이다.
한용운의 ‘님’이 불교적 윤회 사상에 뿌리박은 다시 만날 것을 믿는 ‘님’인데 비하여, 이 시의 과부인 ‘임’은 다시 오진 못하는 영원한 연모의 ‘임’이어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보이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며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하는 ‘임’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임’이 없는 과부에게 윤기나는 치렁치렁한 머리털도 이내 ‘부질없는 것’이 되며 ‘이냥 베어서 엮어나 드릴 걸’의 아쉬움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셋째 연에 오면 독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 당혹은 1,2 연의 과부의 독백이 3연으로 이어지지 않는 데서 온다. 좀더 자세히 보면 이 시가 화자의 진술임을 알게 된다. 이 시가 최금동의 시나리오에 넣은 작품임을 고려할 때 그러한 관점은 더욱 확실해진다.
6. 「꽃」
가신이들의 헐떡이던 숨결로
곱게 곱게 씻기운 꽃이 피었다.
흐트러진 머리털 그냥 그대로
그 몸짓 그 음성 그냥 그대로
옛사람의 노래는 여기 있어라.
오- 그 기름 묻은 머리빡 낱낱이 더워
땀 흘리고 간 옛 사람들의
노랫소리는 하늘 위에 있어라.
쉬어 가자 벗이여 쉬어서 가지
여기 새로 핀 크낙한 꽃 그늘에
벗이여 우리도 쉬어서 가자.
만나는 샘물마다 목을 추기며
이끼 낀 바윗돌에 턱을 고이고
자칫하면 다시 못 볼 하늘을 보자.
「꽃」 -전문
이 시에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시적 은유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메타포는 혼과 교섭하는데서 비롯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의 ‘꽃’은 직서적 의미로서의 꽃이 아니라 시인의 표현대로하면 ‘無形化된 넋의 세계’에서만이 피워낼 수 있는 그러한 꽃이다. 그것은 어쩌면 현존하는 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현존하지 않는 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꽃은 ‘가신이들의’ ‘흐트러진 머리털 그냥/ 그대로/ 그 몸짓 그 음성 그냥 그대로’ 어디엔가는 그 흔적이 남아 있을 수도 있지만 시인의 영혼의 공간에서만 피어있는 그런 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해방의 공간 그 자체가 인고의 세월 뒤에 현란하게 개화한 한송이의 ‘크낙한 꽃’일지도 모른다. 이 무렵 미당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짐작해보면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밀어」의 일부분으로 해방 직후 쓴 시임) 나온 꽃봉오리라는 시행과도 연계시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꽃임을 이해할 수 있다.
7. 「菊花옆에서」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국화옆에서」 -전문
‘국화’는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더디고 아픈 생명의 고통을 참고 견디며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으로 상징되고 있다. 즉 이 시는 한 인간의 성숙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국화는 상징으로서의 국화다. 40대 중년 여인의 완숙한 아름다움을 이 국화꽃을 통하여 상징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젊은 날의 고뇌로운 방황을 통하여서는 발견되지 못하던 국화꽃(중년여인)의 아름다움을 탕아의 귀향을 통하여 드디어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국화의 아름다움은 숱한 인고의 세월을 겪은 뒤에 얻어진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한 아름다움의 탄생의 어려움과 한가지 일의 성숙의 어려움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의미를 이 시에서 찾아본다면, 국화가 탄생하기까지 이 우주의 섭리와 자연의 순환, 그리고 그 많은 기상의 변화들이 이룬 하나의 총체로서의 ‘국화’를 노래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즉 중년 여인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이루기까지의 과정, 한 탄생의 어려움, 한 가지 성숙의 어려움, 그리하여 그만큼 어렵게 탄생하고 성숙한 것에 대한 신비로움과 생명의 존엄성을 노래하고 있는 데에 이 시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하겠다.
8. 「鶴」
천년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학이 나른다.
천년을 보던 눈이
천년 파다거리던 날개가
또한번 천애에 맞부딪노나.
산덩어리 같아야 할 분노가
초목도 울려야할 서름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
보라, 옥빛, 꼭두서니
보라, 옥빛, 꼭두서니
누이의 수틀을 보듯
세상은 보자.
누이의 어깨 너머
누이의 수틀 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을 보자.
울음은 해일
아니면 크나큰 제사와 같이
춤이야 어느땐들 골라 못추랴.
멍멍히 잦은 목을 제 쪽지에 묻을 바에야
춤이야 어느 술참땐들 골라 못추랴.
긴 머리 자진머리 일렁이는 구름속을
저, 울음으로도 춤으로도 참음으로도 다하지 못한 것이
어루만지듯 어루만지듯
저승결을 나른다.
「학」 -전문
이 시에서도 인생의 파도를 겪을 만큼 겪은 자로서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학은 흔히 우리 민족의 상징적인 새로 비유되어 왔다. 흰 옷을 입고 목을 길게 늘이던 먼 그리움으로 서 있는, ‘울음으로도 춤으로도’ 다 풀지 못하여, ‘어루만지듯 어루만지듯’ 날아보는 모습에서 우리민족의 恨의 세월을 잘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에서도 민족적 한의 상징적 모습으로 ‘학’을 끌어 들이고 있는데 그것이 마침 시인 자신의 비극적 편력에서 온 한과 결부되어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민족적 한의 상징적 모습인 ‘학’의 분노와 슬픔, 즉 ‘산덩어리 같아야 할 분노’와 ‘초목도 울려야 할 설음’은 바로 시인 자신의 분노와 슬픔도 되는 것이어서 그 분노와 슬픔을 오랜 세월 동안 짭짤하게 겪은 인생의 경륜으로 잘 삭히우고, 정신적으로 수습하여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 초연과 달관과 체념을 시의 화자는 보이고 있는 것이다.
9 「추천사」
-春香의 말 壹
운명들이 모두다 안기어 드는 소리. ......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뎀이로 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밀듯이, 향단아.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
「추천사」 -전문
이 시는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통찰하고 있는 작품이다. 즉 미당은 ‘그네’를 통하여 더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꿈과 욕망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춘향은 우선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채색한 구름같이’ 올라가 보고 싶다. 무한한 동경과 모험심의 작용으로 ‘울렁이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며 꿈의 나래를 펼쳐 보이고 있다. 지상의 현실적인 고뇌로부터 후련하게 아주 떠나서 또 다른 어떤 세계로 지향하고 싶은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지는 바로 운명적 한계를 자각하게 됨으로서 내적인 갈등을 빚게 된다. 그러한 갈등은 지상의 현실적인 질서 속에 있는 춘향이 또 다른 동경의 세계 곧 천상의 질서 속으로 뛰어들 수 없는 한계를 자각한 데서 오는 갈등이다. 그리하여 ‘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달같이’ 갈 수만 있다면 가겠지만 ‘아무래도’ 갈 수 없는 운명적 한계와 만나기 때문에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지상적 현실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이 반복 운동이야말로 시인이 통찰한 인간의 비극적 운명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네’라는 물리적인 것은 동원되었지만 바로 그 ‘그네’는 인간의 현세적 운명을 상징하는 그네이며 현세적 운명 속에서 이상적 운명 속으로 미는 장중한 밀음, ‘머언 바라도 배를 내어 밀듯이’ 밀어보지만 그것은 곧 도달할 수 없는 지향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10. 「광화문」
북악과 삼각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
조선 사람은 흔히 그 머리로부터 왼 몸에 사무쳐 오는 빛을
마침내 버선코에서까지도 떠받들어야할 마련이지만,
왼 하늘에 넘쳐흐르는 푸른 광명을
광화문-저같이 으젓이 그 날개쪽지 위에 싣고 있는 자도 드물라.
상하양층의 지붕 위에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윗층에 것은 드디어 치-ㄹ 치-ㄹ 넘쳐라도 흐르지만,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신방같은 다락이 있어
아래층엣 것은 그리로 왼통 넘나들 마련이다.
옥같이 고으신 이
그 다락에 하늘 모라
사시라 함이렸다.
고개 숙여 성 옆을 더듬어가면
시정의 노랫소리도 오히려 태고 같고
문득 치켜든 머리위에선
파르르 쭉지 치는 내 마음의 메아리. ......
「광화문」 -전문
만고풍상을 겪어온 시인에게 있어서는 이제 살아 있는 자연이나, 혹은 ‘소슬한 종교’처럼 ‘왼 하늘에 넘쳐 흐르는’ 푸른빛들은 새로운 미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며, 오누이처럼 친화력으로 사무쳐오기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주자연이나 삼라만상이 모두다 단란을 이루는 가족처럼 화자에게는 비쳐지는 것이며, 특히 우리의 선인들이 만들어 놓은 ‘광화문’의 기와지붕, 그 ‘버선코’의 선의 아름다움까지도 친화력으로 발견할 줄 아는 정신의 경지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하양층의 지붕위에/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이와 같은 아름다움의 발견은 그가 바로 조선 사람이며, 한국인이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며, 특히 한국의 하늘을 그 버선코와도 같은 기와지붕의 선의 아름다움과 함께 배치시켜 놓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심미안을 또한 느끼게 된다. 그리고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광명한 빛’을 지향하던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발견하고 있다는 점과,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서의 그 푸른빛과 지붕의 곡선미를 아울러 발견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11. 「동천」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썹을
즈믄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 -전문
이 시는 7.5조의 음수율을 지닌 다섯 개의 시행으로 이루어져 고도의 압축과 상징이 중심이 되는 작품이다. 이 시의 이해를 위해서는 중심이 되는 시어의 상징성을 이해해야 하는데, 먼저 ‘고운 눈썹’의 정체이다. 여기서의 눈썹은 시적 자아의 마음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소중하고 아름다운 임의 모습이 시각화되어 표현된 것으로, 수많은 날의 정성으로 잘 씻어서 하늘에 옮겨 놓은 초승달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삶의 어떤 고귀한 가치를 나타낸다.
‘매서운 새’는 ‘동지 섣달’이라는 사물이 모두 죽음에 빠져 있는 시.공간, 즉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시.공간을 뛰어넘으려는 열정을 지닌 존재, 즉 절대적 가치를 지향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는 다음과 같이 풀어볼 수 있다.
“한겨울의 춥고 어두운 밤하늘을 눈썹 모양의 초승달이 떠 있고, 이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매서운 느낌을 주는 한 마리 새가 날고 잇다. 그런데 그 새는 초승달에 직접 도달하지 못하고 그 옆을 비끼어 날아가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의 초승달은 시인의 소중한 가치인 고운 눈썹을 수많은 날의 정성으로 잘 씻어서 하늘에다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초승달은 소중하고 절대적인 존재(가치)일 수밖에 없다. 싸늘한 계절의 밤하늘에 걸린 달, 그 옆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그런데 이 새는 보통의 새가 아니라 시인의 마음속의 정성으로 태어난 달이 지닌 절대성을 인식하고 있는 새다. 그래서 도도한 모습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감히 달에 접근하지 못한다. ‘시늉하며 비끼어 가는’ 새의 모습 속에서 절대적 가치를 동경하나 그 절대적 가치의 지고함을 아는 까닭에 감히 그것을 범접하지 못하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12. 「추석」
대추 물 드리는 햇볕에
눈 맞추어
두었던 눈썹.
도향 떠나올 때
가슴에 끄리고 왔던 눈썹.
열두 자루 비수 밑에
숨기어져
살던 눈썹.
비수들 다 녹 슬어
시궁창에
버리던 날,
삼시 세끼 굶는 날에
역력하던
너의 눈썹.
안심찮아
먼 산 바위
박아 넣어 두었더니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추석이라
밝은 달아
너 어느 골방에서
한잠도 안 자고 앉았다가
그 눈썹 꺼내들고
기왓장 넘어 오는고.
「추석」 -전문
미당은 그의 자서전 『천지유정』에서 상밥집의 딸 ‘하얗게 소복한 계집애’나 혹은 고향 마을 ‘모시밭 사잇길로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던 계집애의 ‘그 길던 눈썹’을 못 잊어 회고하고 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아직도 달관하지 못한 것은 남녀의 연정’이라며 ‘지금도 설레기 일쑤이고 아흔이 넘어도 아마 그럴 것’이라는 노년의 수줍은 고백처럼 시인의 가슴속에 ‘아직도 신비한 것’으로 남아있는 ‘그 계집애의 영상’ 이 이 ‘추석’이라는 작품의 모티브가 되고 있는 듯하다.
4.4조의 동요적 정형률을 기반으로 하는 이 작품을 이루는 주조는 눈썹이다. 눈썹은 「동천」과 마찬가지로 초승달에 비유될 수 있지만, 이 이미지는 마지막 두 연에서 추석의 밝은 달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이런 초승달에서 보름달까지의 눈썹의 이미지 변동을 윤회의 질서 속에서 파악한다면 『신라초』의 그것과 등식관계가 성립되겠지만「추석」에서 보여준 눈썹의 변모과정은 단순한 순환 반복의 양상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제 보름달은 윤회정신을 형상화하는 시어가 된다. 그리하여 윤회정신은 차원 높은 사랑으로 승화되고 있다.
13. 「禪雲寺 洞口」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읍니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읍니다.
「선운사 동구」 - 전문
이 시는 <선운사 동구>에 있는 시비에 새겨진 작품이다. 이 시의 모티브가 된 일화가 있다. 미당 자신이 어느 해 선운사에 갔을 때, 어떤 주막에서 酒狂이 난 상태에서 발견한 ‘이쁜’ 주모가 한 사람 있었다 한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6.25의 참화가 휩쓸고 간 뒤에 그 주막에 가보니, 그 주막은 불에 타서 잿더미만 남아있고, 주모도 간 곳 없고, 마침 그 잿더미 위에 나비 한 마리만 날아다니며 반기더라는 것이다.
선운사의 동백꽃은 유명하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동백꽃’은 또 다른 ‘꽃’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그 ‘꽃’은 ‘목이 쉬어’ 아직도 恨어린 모습으로 남아 있다. ‘작년 것만’ ‘육자백이 가락’ 속에 남아서 아직도 시인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꽃’과의 만남은 실제의 만남이 아니라 영적 만남이며, 상상의 공간에 환영으로 피어오른 ‘꽃’과의 극적 해후인 것이다. 불교의 인연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라고 볼 수 있다.
14. 「新婦」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인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신부」 -전문
이 시는 우리나라 전통적 여인의 기다림의 恨을 원형적 심상으로 제기하고 있는 시이다. 이 시에서 보이고 있는 기다림의 한 속에 있었던 여인상은 옛날 우리나라 유교적 도덕관에 얽매어 살던 사회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이 시는 그런 우리나라 여인의 ‘기다림의 한이 어린 여인의 일생’, 말하자면 ‘초록 재와 다홍 재로’ ‘폭삭 내려앉아’ 버릴 때까지의 유교적 도덕관에 얽매인 한 여성의 인고의 세월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의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는 한국의 전래적인 신부의 의상이다. 그러한 의상을 입은 갓 시집 온 신부가 ‘사십년인가 오십년’의 기다림의 세월을 보냈다는 것인데, 여기서 ‘사십년이나 오십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한 여자의 일생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할 것이다. 암튼 이 시는 설화시로서 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풍속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좋은 사료가 될 시라고 할 수 있다.
15. 「雨中有題」
신라의 어느 사내 진땀 흘리며
계집과 수풀에서 그 짓 하고 있다가
떨어지는 홍시에 마음이 쏠려
또그르르 그만 그리로 굴러가버리듯
나도 이젠 고로초롬한 살았으면 싶어라.
쏘내기속 청솔 방울
약으로 보고 있다가
어쩌면 고로초롬은 될법도 해라.
「우중유제」 -전문
신라시대 원효의 정신세계에서 얻은 듯이 보이는 이 시는 바로 그 불교적 슬기를 얻어서 ‘고롬초롬만’살고 싶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고로초롬만’ 살았으면 싶은 정신의 경지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 짓’하는 일에 대한 의미부여와 ‘홍시’에 마음이 쏠리는 일에 대한 의미부여를 동일선상에 놓고 있다는 점에서 시정신의 요체를 찾아야 한다. 성욕(‘그 짓’)과 식욕(‘홍시’)이 이 시에서는 대등하게 파악되고 있으며, 이러한 정신의 근거는 불가에서 말하는 布施의 관념과 어떤 관련성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정신의 요체는 어느 한 가지 일(‘그 짓’)에만 집착하지 않고 또 다른 일(‘홍시’)에도 마음을 쉽게 옮길 수 있다는 데에 있을 것 같다. <집착을 버리자>는 석가의 가르침이나 혹은 <空思想> 등의 정신적 산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분명한 것은 이 시가 불교적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만은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의 화자는 그러한 불교적 깨달음을 얻고 ‘고로초롬만’ 살고 싶기도 한 것이며, ‘쏘내기 속 청솔방울/약으로 보고 있다가’ 마음공부 수월하게 잘 되면 ‘어쩌면 고로초롬은’ 될 법하다고 자위하기도 한다. 다른 의미로는 性의 열중, 또는 삶의 몰입으로부터 깨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거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삶의 과정을 완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하나의 미몽이며 이 미몽에서 깨어남으로써 사람은 진실에 이르며, 또 그렇게 하여 삶이 완성된다는 생각이 이 ‘우중유제’의 정신 속에 들어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Ⅴ. 시사적 위치
순수학파와 모더니즘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30년대 한국 문단 풍토 속에서 아무런 기치도 내걸지 않고 출발한 『시인부락』의 후기에서 서정주는 개성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것이 비록 휴머니즘의 연장선에 서서 행한 발언은 아닐지라도 당시의 문단의 지배세력이고자 했던 프로문학의 이데올로기로의 편향성이 배제되는 것은 틀림없다.
이런 서정주의 등장은 시문학파의 시인들보다 한층 현실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는 점에서 시사적 중요성을 갖는다. 그가 비록 당시의 사회 역사적 질곡과 억압받던 삶의 고통을 투철한 자세로 직시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현실의 고통이 배제된 시문학파의 고답적이고 언어중심적인 태도에서 한발 더 현실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정주 시가 저항시로 분류되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시가 보여주는 상징의 내포적 의미가 너무 넓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그러한 현실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가 치열하여 대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기부정과 고통의 외면으로 드러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서정주 시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숨겨진 자아로서의 어두운 측면을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점이 하나의 강점으로 부각된다. 그리하여 서정주 시는 스스럼없이 ‘천치’요, ‘죄인’이요, ‘종’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을 벌거숭이로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죄악까지도 포용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태도는 자신을 포함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의 편향된 삶을 보상하려는 무의식적 요구이기도 하다. 이는 서정주 시의 언어가 무의식의 언어임을 말하는 것이다.
미당의 시는 시적 대상을 현실로 확대 심화하는데 기여했다. 이 현실이 외적 태도로서의 대타적 관련양상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는 주로 내적 심리적 현실에 치중하고 있음은 당시 사회나 윤리가 금기시했던 에로스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서 드러난다. 미당의 중기시에 나타나는 다른 특징은 영혼의 탐색이다. 신비주의적 색체를 띠면서 윤회전생하는 영혼의 세계를 엿보려는 미당의 시세계는 ‘접신술사’라는 불명예를 걸머지도록 한다. 주체와 객체가 동일화되는 세계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또 다른 한 장을 열어 놓았다.
미당 후기 시에 나타나는 속어들은 지방어를 통한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려는 시인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시적 긴장감을 다소 잃고 있는 산문적 진술의 차원에 떨어지는 경우도 보인다. 그러나 그런 긴장의 이완은 시인의 정신적 궤적을 그대로 드러내며, 한편으로는 인물들의 성격을 생생하게 보여주려는 시인의 의도적인 배려가 있다.
서정주 시는 자신의 문체를 통해서 강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사에 독자적인 한 장을 차지한다. 그의 시는 자신의 삶의 궤적을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부단히 이전의 세계를 부정하면서 우리 문학의 전통을 심화 확대하려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언어의 정부’가 될 수 있었으며, 우리 문학사의 지평을 확대시킨 ‘서정주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시인이 된다. 그의 시가 한 시대를 완결시킬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정서적 태도를 통합시키고 있다는 말은 그만큼 우리 시문학의 빈곤을 반증하는 것이다. 서정주의 실패가 한국시의 실패와 맞먹는다는 지적은 한편으로는 그의 시사적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지만 그의 시가 갖는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서정주시의 개성이 그 원형적 속성에 의하여 지워질 수 없는 가치를 갖는 반면에 그 개성의 독자성은 또한 극복되어져야 할 것으로 남는다. 따라서 언어의 개성은 언어가 덜 발달된 사회에서 뚜렷해진다는 지적은 우리 시문학사의 극복되어야 할 커다란 봉우리가 무엇인지를 잘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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