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구성원리 중 상징 연구
Ⅰ. 시의 상징에 관한 이론적 접근
1. 개념의 범주
상징(symbol)이란 말의 어원은 희랍어 symballein이다. symballein은 동사로서, throw together, compare <한데 던지다, 비교하다>를 의미한다. 이것의 명사형은 symbolon으로서 <표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약속을 할 때, 동전 따위를 둘로 나누었다가 나중에 다시 맞추어 보는 표라는 뜻이다. 근본적으로 상징은 둘이 결합 혹은 연결됨으로써 비로소 자율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언어의 양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상징은 넓게 기호의 범주에 속한다. 어떤 뜻을 나타내려고 쓰는 부호인 기호와 근본적으로 같다. 그러나 기호가 심리적 활동을 보다 간편하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반면 상징은 개인의 복잡한 관념이 그 안에 담겨있다. 즉 상징은 어떤 사물이나 관념이 그 자체의 의미를 유지하면서 다른 사물이나 관념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과 관념의 결합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거리의 네온사인은 어둠 속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빛으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사물이나 의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서재의 책상은 형상이나 빛깔과 크기를 갖추고 방안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앞에 앉아 일을 하게 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것이 그 성질을 직접 나타내는 기호(sign)와는 달리, 상징은 그것을 매개로 하여 다른 것을 알게 하는 작용을 가진 것으로 인간에게만 부여된 고도의 정신작용의 하나인 것이다.
상징의 고유한 특성의 하나는 多價性이다. 이는 상징이 동시적으로 표현하는 의미가 여러 가지임을 말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상징의 의미를 남김없이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상징은 다양한 맥락을 가지며 그 각각의 차원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 가운데 하나의 의미만을 근본적이고 가장 우선적인 혹은 본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상징이 내포한 참된 메시지를 포착할 수 없게 될 위험이 따른다. 상징이 지닌 다의적 성격을 말하는 것인데, 상징은 어느 대상이 다른 대상을 대신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그 대신하여 표현하는 과정에 연상이 작용하며 그 결과 암시성과 다의성을 띠게 된다. 대개 어느 대상은 사물이 되고 다른 대상은 관념이 된다.
문학의 경우 상징이란 용어는 유추적으로 가시의 세계, 곧 물질세계가 연상의 힘에 의하여 불가시의 세계, 곧 정신세계와 일치하게 되는 표현양식이다. 연상의 힘에 의한다는 점이 여기서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연상은 두 사물이 상상적으로 연결되고 결합되는 정신활동이요, 그런 점에서 상징의 어원이 내포하는 의미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학적 상징이란 한마디로 심상과 관념의 결합이요, 관념은 심상이 암시적으로 환기한다.
즉 상징이란 하나의 심상과 관념을 상상에 의하여 연결시킬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므로 상징은 불가사의 세계, 즉 성신세계를 가시의 시계, 곧 감각 물질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대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 상징의 원리
일찍이 인간성의 실마리를 상징에서 찾은 카시러는 상징의 원리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케 하는 독특한 국면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동물은 그들의 기능원한(funktionskreis)이라 할 수 있는 수용계통과 운동계통, 곧 해부학적 구조로서만 살고 있음에 비하여, 인간은 해부학적 구조 외에 제3의 연결물, 곧 상징적 체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체계 속에 인간이 사는 것을 그는 ‘실제의 새로운 차원 속에 살고 있음’이라고 언명한다. 이 새로운 실재의 차원은 언어, 신화, 예술, 역사, 과학 등 상징체계의 세계를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언어의 세계에 산다는 점 때문에 인간은 동물적 ‘반동의 양식’에서 ‘인간적 반응’의 양식으로 살게 된다.
즉 한 사물을 사물로서의 구체적 존재가 아니라 어떤 다른 수준의 추상적 존재와 결합시키려는 원리는 인간만의 삶의 원리가 된다고 본다. 그것이 상징의 원리이며, 또한 마술의 열쇠가 된다. 상징의 원리는 인간세계의 두 차원, 곧 공간과 시간의 차원에서 보다 세밀하게 천착될 수 있다.
첫째로 인간은 어떻게 공간을 지각하는가, 모든 동물들은 자기들의 환경에 스스로를 적용하면서 산다. 어떤 새로운 전망도 없이 공간과 자신의 삶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사는 것이다. 카씨러는 이러한 공간지각을 행동의 공간, 곧 ‘유기적 공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처럼 유기적 공간에 살면서 어떤 전망을 구축한다. 그것은 감각적 경험을 포함한 새로운 세계에의 갈망을 성취한다. 이런 공간지각을 상징의 공간, 즉 ‘추상적 공간’이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기하학의 점과 선이 구축하는 공간인데, 물리적 심리적 세계도 반영하지 않지만 우리의 인식을 한결 빛나게 하고 있음이 반증된다.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대상의 소박한 모방에서 벗어나 마침내 비대상의 차원을 지향할 때, 그 예술의 공간 역시 근본적으로 추상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시간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러한 상징의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낮은 단계의 삶은 시간을 유기적 생명의 일반적 조건으로 보았다. 환언하면 시간을 계기적 질서의 한 패턴으로 보았다. 그러나 모든 시간 논의가 마침내 귀속되는 의식의 문제를 상기할 때 우리는 시간이 의식의 내용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특히 이 의식의 내용을 우리는 기억이라는 개념으로 반성하게 된다. 카씨러는 기억의 문제를 무네메(mneme)적 생물학의 개념과 인간학적 개념으로 대비시켜 고찰한다. 전자는 쎄몽의 이론으로서 무네메란 ‘유기체에 일어나는 여러 변화 속에서 여러 사건을 보존하는 원리’를 일컫는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기억은 자극-인상-유기체의 반작용, 곧 무네메적 생물학적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모든 기억은 엥그람의 연쇄인 것이다. 그러나 기억에 관한 인간학적 개념은 생물학적 개념과 다르다.
기억의 인간학적 개념은 모든 과거 생활이 상호 침투됨으로써 정신적 자아, 곧 ‘연속적 진보 속의 개인적 역학’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기억은 어떤 인과 관계도 내포하지 않는 ‘창조적 자발성’인 것이다. 창조적 자발성은 자유 개념이기도 한데, 진정한 시간이란 물리적 시간이 아니요, 물리학적 개념을 배제한 심리적 현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심리적 현실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국면이 한 곳에 엉키어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현실이다. 괴테의 경우 진실, 곧 생애의 진리는 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성취된다. 시적 형식은 상징적 형식이요, 상징적 형식은 상징적 기억에 힘입는다. 무엇보다도 모든 삶의 진리는 ‘분산된 여러 사실에 지적인, 곧 상징적인 형식을 줌으로써’ 발견된다는 관념을 깨닫게 된다. 현재의 과거에 대한 관계는 과거 경험의 반복이라기보다는 그 경험의 재구성, 곧 상상력의 개입에 의해 비로소 그 진의가 밝혀짐을 깨닫게 된다.
상징적 세계는 한마디로 가설적 세계에 지나지 않지만, 이 가설적 세계의 구축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꿈이 개화하는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상징은 인간성의 실마리요, 모든 인간의 상징적 행위에 의하여 인간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의 빛 속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모든 마술의 열쇠가 인간의 꿈과 결합되듯이, 상징의 개념 역시 이러한 인간의 꿈과 결합된다.
3. 상징의 유형
비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어떤 형태로든 대응되어 나타나는데 비해 상징은 원관념은 나타나지 않고 보조관념만 드러내면서 연상을 통해 원관념을 드러낸다. 보조관념만 보고 문맥을 통해 원관념을 연상하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보조관념을 통해 암시된 원관념은 다의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휠라이트(P. Wheelwright)는 상징을 언어의 긴장성의 강도에 따라 협의 상징과 강력 상징으로 나누고 있다. 협의 상징은 과학 분야의 상징으로 그 활용도를 굳이 입증할 필요가 없다하여 그냥 지나치고 있다. 말하자면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조관념의 배후인 원관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정확하게 약속된 기호를 두고 하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시적 상징이라고 할 수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강력 상징이다. 강력상징은 그 의미를 단적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완전무결하게 정확한 의미를 가지는 상징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이 바로 시적 상징이다. 그는 이 강력 상징을 다시 다섯 단계로 나누고 있다. ①특정시의 주도적 이미지, ② 특정시인의 여러 작품에 반복되는 개인 상징, ③ 여러 시인에게 통용되는 조상 전래의 활력 상징, ④ 한 특정 문화권 혹은 특정 종교권적 상징, ⑤ 인류 전체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원형 상징으로 나누는 것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를 단적으로 유형화하면 주도적 상징, 개인 상징, 민족 상징, 종교 상징, 원형 상징으로 분류할 수 있다.
휠러(C. B. Wheeler)는 언어적 상징과 문학적 상징으로 분류한다. 전자는 협의 상징과 후자는 강력 상징과 각각 대응된다. 언어적 상징과 문학적 상징은 다시 카시러(Cassirer)의 기호와 상징에 폭넓게 대응한다. 즉 언어적 상징은 기호와 문학적 상징은 상징과 각각 대응하는 것이다. 언어적 상징이란 모든 언어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대신함을 기본 속성으로 한다. 이 ‘대신함’은 상징이 드러나는 ‘연결’의 의미를 환기한다. 그러나 이 언어적 상징은 다시 언어학적 적용으로서의 상징, 비언어학적 적용으로서의 상징으로 분별된다. 예를 들면 책상이라는 언어가 실제 책상이라는 사물과 대신함은 언어학적 적용으로서의 상징이요, 비언어학적 적용으로서의 상징은 논리적 혹은 문법적 기능만을 나타내는 ‘는’ 혹은 ‘9’같은 상징을 의미한다. 일종의 언어적 기호인 것이다. 문학적 상징은 언어로 구현된다는 점에서 언어적 상징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언어적 상징의 경우 책상이 상징하는 대상은 무의미하지만 문학적 상징의 경우 그 대상은 유의미하다. 물론 언어적 상징의 경우 무의미함이 대상의 모든 가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적 상징의 경우 문학적 상징이 되기 위해서는 추상화의 과정과 정신적 조작의 과정이라는 두 가지 방식들 취한다.
그런데 프롬(E. Fromm)은 상징은 언어적 상징의 <단순한 대신함>이 아니라 내적 경험, 감정, 사상을 대신하는 감각적 표현이라고 말한다. 상징적 언어란 내적 경험을 마치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것처럼 표상하는 언어라는 것이다. 곧 인간의 영혼과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라는 뜻이다. 따라서 문제는 상징과 상징되는 대상 사이의 특수한 연결 관계가 무엇인가에 있다. 프롬은 연결의 문제에 착안해 상징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인습적 상징과 우연적 상징과 보편적 상징이 그것이다.
인습적 상징은 상징과 상징되는 대상사이에 어떤 내재적 연관성도 없다. ‘책상’이란 말과 이 말이 지시하는 ‘대상으로서의 책상’사이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다. 오직 인습적으로 우리는 그 상징을 수용한다. 인습적 상징의 다른 예로 ‘국기’나 ‘깃발’이 있다. 곧 어떤 회화는 오직 인습적으로 상징이 된다. 그러나 이런 회화적 상징이 모두 인습적인 것은 아니다. 곧 ‘십자가’는 기독교의 인습적 상징이지만 십자가의 특수 내용은 예수의 죽음을 의미하고, 또한 정신과 육체의 상호관련성까지를 의미한다. 곧 단순한 인습을 초월하여 대상과 상징 사이에 연결 관계가 놓인다.
우연적 상징은 상징이 상징되는 대상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를 우리의 감정과 연결시켜 수용케 하는 것이다. 가령 한 도시에 관해 한 인간이 꿈을 꾼다. 꿈속의 풍경이 어떤 감정을 표상한다. 그러나 실제로 꿈을 꿀 때 그 도시는 어떤 감정과도 무관했던 것이다. 많은 이야기, 신화 예술작품에 이런 상징이 나타나는데 이는 작가가 스스로 사용하는 상징에 대해 어느 정도 이야기하지 않는 한 교통이 불가능하다.
보편적 상징은 대상과 상징 사이에 내재적 연관관계가 언제나 있음으로써 이러한 상징은 보편적이다. 우연적 상징의 특수성, 개인성에 비하면 보다 분명히 그 개념이 파악된다. ‘불’은 불에 대한 감각적 경험 속에 획득된 여러 요소들에 의해 그 내적 경험을 기술할 때 상징으로 쓰일 수 있다. 그것은 ‘힘’, ‘광명’, ‘움직임’, ‘우아’, ‘쾌활’ 등의 정조를 표상한다. 프롬에 의하면 인간의 신체는 우화가 아니라 내면의 상징이다. 따라서 어떤 물질현상은 바로 그 자체의 본질에 의해 정서적, 정신적 경험을 암시하고 우리는 정서적 경험을 물질적 경험의 언어로, 곧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결국 보편적 상징은 상징과 대상의 관계가 우연적이 아니고 내재적인 상징으로 인식된다.
4. 상징의 기능
1) 암시적 기능
상징은 원관념이 숨고 보조 관념만 제시되어 있다. 또한 상징은 원관념과 보조 관념이 서로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 원관념이 숨어 있고 보조 관념이 작품에 나타나는 상징의 존재 양식도 그것이 양자의 완전한 결합을 의미하고 둘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가 되어 존재한다. 바꾸어 말하면 상징은 보조 관념을 통해 무언가를 감추려 한다. 보조 관념 속에 그 무언가가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쫓아오는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워하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윤동주는 철저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였으므로 그의 시에는 그러한 기독교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십자가’는 기독교이 징표나 형벌의 도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 또는 도덕적 생활의 목표’를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햇빛과 꼭대기라는 문맥적 관련 속에서 나의 희망이나 목표가 교회당 십자가에 걸려 있다고 진술하는 것을 통해 암시받을 수 있다.
상징은 감춤의 성질만도 아니고 드러냄의 성질만도 아니다. 상징이 반투명성으로 정의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상징의 드러냄은 백 프로 드러냄이 아니다. 그것은 동양적 의미의 여백을 가진 드러냄이다. 우리가 아무리 지적으로 노력해도 상징은 감춤과 드러냄의 이중적 성격 때문에 여운이 항상 남아 있게 마련이다.
2) 예언적 기능
상징은 자신의 내부에서 혹은 외부에서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조작된다. 상징 자체가 일정한 방향을 설정하고 그곳으로 이끌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집단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상징의 기능을 연역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고 계시적 기능이라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상징이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시에 있어 예언적 기능은 사회 문제에 대한 집단적 문제의식의 공유와 이를 통한 변화의 모색을 위해 나타날 수도 있고, 개인이 자기 삶의 설정을 위해 자기 암시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꺼구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이육사 「교목」-
교목은 높게 우뚝 서 있는 나무이다. 그것은 홀로 우뚝 남아서 수직으로 서있기 때문에 장엄하고 엄숙하며 당당하다. 이 시는 이육사가 일제 하의 비극적 상황에서 자신을 불태워 죽음으로 대처하겠다는 준엄한 정신이 나타나 있다. 이 시는 밖을 향한 목소리가 아니라 시인의 내면을 향한 다짐이다. 즉 나는 나라를 빼앗긴 이 극한적인 상황에서 저 우뚝 선 교목처럼 앞으로 살아가겠다는 자기암시이며 자기체면이다.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 이미 그는 교목이 되어 있는 것이며 실제 그는 교목과 같은 삶을 살다 갔다. 이 시가 그의 삶을 구속한 것이다.
3) 입체적 기능
상징은 우리의 상상과 추리를 확대. 심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다양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이를 입체적 기능이라 하는데 평면적인 것과 대비되는 말이다. 평면은 단순하다. 상하나 좌우가 없기 때문이다. 상징은 단어와 단어의 일대일의 결합이 아니라 사물과 관념의 一對多의 결합이다. 은유처럼 일대일의 관계를 넘어서 다양성과 역동성을 획득한다. 그만큼 문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특수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 이것은 동시에 상상력을 촉발하여 가둬두지 않고 해방한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청포도」-
위 시를 평면적이 아닌 역동적으로 해석해보면 하늘과 전설이 청포도 속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처럼 청포 입은 손님은 내게로 오는 것이다. 그것을 우선 음운적 층위에서 보면 ‘청포’는 ‘청포도’와 음이 같다. 글자 하나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색체 이미지 역시 같은 청색 계열이다. 이 시의 전체 기조색이 청색인 것이다. 하늘도 바다도 전설도 모두가 청포도와 같은 푸른 색조이므로 그 손님의 옷이 청포라는 것은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그리고 그 청색은 흰 돛이나 마지막의 은쟁반, 그리고 모시수건 같은 백색 계열과 대응하는 중요한 색채적 이미지를 자아낸다. 대상물의 꼭짓점이 청포도 하나에서 그것을 먹는 나와 손님까지 셋이다. 최후 만찬의 식탁에서 빵과 포도주를 먹으며 예수는 그것이 ‘나의 피와 살’이라고 했다. 빵과 포도주를 먹는 것은 곧 예수와 그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관념적인 메시지가 신체성을 갖고 살과 피로 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식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포도를 함께 먹는다는 것은 나와 손님이 하나의 신체성을 획득한 ‘우리’로서 일체화한다.
이 같은 해석은 상징시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이러한 해석을 통해 우리의 상상과 추리는 확대 심화되고 우리의 삶은 다양해진다.
Ⅱ. 상징의 경계
1. 상징과 은유
상징과 더불어 은유는 시의 구성 원리에서 핵심적인 방법론의 하나이다. 둘 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둘이 구별되는 것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 양상에 달려 있다. 상징은 은유에 비해 보조관념만으로 원관념을 표상하기 때문에 다의성과 포괄성을 지닌다. 즉 은유가 보조관념 사이에서 의미의 상승이 이루어진다면 상징은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서 의미의 비약이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상징은 보다 고차적인 해석 능력과 유추능력을 필요로 한다. 이 ‘말해진 것’, 즉 보조관념과 ‘의미하는 것’, 즉 원관념 사이의 유추관계로 볼 때에도 은유가 원칙적으로 이 둘 사이의 유사성에 기초를 두는 데 비해, 상징은 연상 작용에 기초를 둔다. 즉 은유가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유사성과 상호관련성을 근거로 하여 일대일로 맺어지는 유추적 관계라면 상징은 단순한 유추적 관계를 넘어서서 연상을 통해 일대다의 관계로 맺어진다는 것이다. 은유와 상징은 문학 작품에서 비슷한 양식으로 드러난다. 은유는 끝끝내 언어의 기교임에 비하여 상징은 단순한 언어의 연결은 아니다. 둘 다 일종의 이중성을 핵으로 한다. 요약하면 은유는 오직 언어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상징은 물론 언어에 의하지만 오직 언어에 의해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물과 더불어 사고하는 방법이요, 은유보다 더욱 분별적이고 근본적이다. 상징의 이중성은 인간 사유가 물질세계의 대상들과 같은 상호반응을 그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상징과 그 인접 개념과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상징과 기호
기호 상징
현상을 나타냄 본질을 나타냄
난해성 모호성
독자와 작자의 커뮤니케이션 독자와 상징과의 커뮤니케이션
물질적 존재를 구체적으로 이해 가능적 가치의 추상적 이해
관습적 상상력 상징적 상상력
(2) 상징과 알레고리
상징 알레고리
특수에서 보편관념을 추출 보편에 특수 事象을 맞추는 것
個的→특수→ 일반→ 보편, 일시적→ 영원적 실체 추상관념을 구체언어로 번역
喩義와 本義가 1:多 1:1
본의를 몰라도 文面으로는 사실적으로 문맥이 연결됨 문면의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아도 本義를 독자가 알면 됨
비산문성 산문성. 연속성. 說話性
인간의 초월적 종교욕구와 관련됨 현세적 종교욕구와 관련됨
(3) 상징과 비유(공통점: A로 B를 나타냄)
상징 비유
본의가 생략되어 있다. 유의와 본의를 문면에 나타나 분리되어있다.
유의와 본의는 엉뚱한 이질관계 유의와 본의는 유사관계
암시적이다 비교. 유추적이다.
원관념이 생략된 은유 원관념이 竝置된 은유
확장된 은유 축소된 은유
(4) 기호, 알레고리, 상징
기호 알레고리 상징
恣意的 喩義 非 자의적 유의 비 자의적 유의, 비 慣習的 유의
적합한 유의 부분적으로만 적합 비적합하면서도 충분
본의를 지시 본의를 번역 본의를 顯現
다른 방법으로도 본의파악이 가능 본의를 추상적 개념으로 표현 상징적 상상력으로만 본의 파악이 가능
2. 상징과 심상
심상이란 말 속에는 이미지가 하나의 심리적 현상이란 의미가 들어있다. 즉 심상은 신체적 자각에 의해 생성된 하나의 느낌이 마음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이런 심상 즉 이미지에 대해 그 개념을 정리해 놓은 것으로 아브람스(M.H.Abrams)의 언급은 간명하면서 포괄적이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첫째 이미지는 축자적 묘사에 의하건, 인유에 의하건, 또는 비유에 사용된 유추에 의하건 간에 한 편의 시나 기타 문학 작품 속에서 언급되는 감각 지각의 모든 대상을 가리킨다.
둘째, 더욱 좁은 의미로 이미지란 시각적 대상과 장면의 요소만을 가리킨다.
셋째, 가장 일반적인 비유적 언어, 특히 은유나 직유의 보조관념을 가리킨다.
이상의 언급에서 심상이란 시적 인식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모든 심리적. 감각적 체험의 구상화이며 동시에 시적 인식의 한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의 이미지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프레이드만(Norman Freidman)의 분류법이다. 그는 이미저리를 정신적 심상, 비유적 심상, 상징적 심상으로 분류하고 있다.
정신적 이미지는 언어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른 감각적 이미지이다. 이것은 작품을 대할 때 독자의 정신에 야기되는 감각적 경험만을 강조한다. 그래서 감각적 체험과 인상이 바탕을 이룬다. 감각적 이미지. 심리적 이미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유적 이미지는 비유적 양식으로서의 이미지를 말한다. 비유어로서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곧 제유법, 환유법, 직유법, 은유법, 의인법과 같은 수사적 방법들에 의해 비유적 심상을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비유적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모든 비유법이 그러하듯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이라는 양식을 지닌다. ‘그 여자는 장미이다’라는 표현에서 비유적 이미지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비유적 이미지의 핵심은 은유이다.
상징적 이미지는 비유적 혹은 은유적 단계에서 더 나아가 상징의 단계로 넘어섰을 때 탐색되는 이미지이다. 상징적 이미지는 시의 전체성 속에서 핵심적인 상징성을 지니며 사용된 경우이다. 즉 한 시인 또는 작품에서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획득되는 이미지이다. 다시 말해 시인의 이미지 선택이 감각적 능력을 초월하여 자신의 기질, 가치관, 세계관을 나타낼 때, 혹은 시 속에 반복되는 이미지의 기능 내지는 시의 전체적 이미지 유형과, 신화나 의식과의 관계에서 파악될 때 상징적 이미지가 논의된다. 이런 점에서 상징적 이미지는 상징과 가까운 경계선을 두고 인접해 그 구별의 혼란을 생기게 한다.
3. 상징과 상징주의
시에 있어서 상징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상징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상징주의는 물론 문자 그대로 문학에서 상징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상징주의가 상징을 사용한 문학을 뜻하지는 않는다. 상징이 시나 문학의 창작에 있어 단편적으로 혹은 일시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시대적 흐름이나 정신이 되어 일정한 물결을 형성했을 때 비로소 상징주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상징주의가 하나의 사조로서 한 시대의 문학적 주재가 된 것은 자연주의 문학에 대한 반발과 염증이 상징주의 사조 형성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상징이 문학적으로, 특히 시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자연주의의 객관 세계 중시에 대한 반발로서 일어난 상징주의 시운동에서 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세계의 모든 사상, 특히 인간의 정서와 사상은 자연과학에서처럼 명징하게 표현될 수는 없다. 시인의 오묘한 상상력이 언어로 명백하고 완전하게 표현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인간의 내적 우주, 즉 정신의 깊이를 추구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상징주의는 보들레르에 의해 시작된다. 그는 천재적인 직관과 명석한 비평안을 가지고 인간의 정신과 그 내면 세계를 파고들었다. 특히 내면의 모든 신비를 향기와 색깔과 소리들이 서로 응답하는 상징과 환기의 방법을 통해 표현하였다. 보들레르는 그러한 암시를 ‘시는 미의 완전한 창조이다’라고 말한 포우를 통해 받았다. 그의 유명한 악의 꽃도 그러한 영향 아래서 쓰였다.
보들레르의 상징주의적 영향을 받은 상징주의 시인은 베를레느, 랭보, 말라르메이다. 베를레느는 보들레르에게서 영혼의 상태라 일컬을 수 있는 ‘음악적인 암시’에 눈을 떴으며, 랭보는 ‘초월적 사명’과 ‘초현실성의 계시’를 고취한 보들레르의 이론을 ‘체계적인 환각’으로까지 확산시켰으며, 말라르메는 ‘사상의 집중화’와 ‘언어의 정화’를 통해 이러한 것들을 관념으로 추상화했다. 이것은 보들레르의 ‘만물조응’, 베를레느의 ‘선율’, 랭보의 ‘見者’, 말라르메의 ‘무한’으로 함축 정리된다. 즉 상징주의는 포우의 영향을 받은 보들레르로부터 베를레느, 말라르메, 랭보로 그 계보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상징주의 시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가시세계의 정확한 재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세계의 심층을 파고들어 형, 색, 음, 향 등의 상호교감에서 우러나는 물질과 영혼의 조응을 추구한다. ‘시란 본질적 리듬으로 돌아온 인간의 언어에 의한 생존의 신비적 표현이다’라는 말라르메의 말에는 이런 상징주의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둘째, 고답과 시인들의 명확한 윤곽과 조형미를 중시한 데 비해 이들은 ‘교향곡을 책에 옮겨 놓아 이것을 완성하는 기술’과 같은 음악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모호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탐닉하여 애매모호함 속에 감춰져 있는 정서와 사상을 중시하였다.
셋째, 시형 자체에도 과감한 개혁이 이루어져서 정형시 자체의 변화는 물론 새로이 자유시와 산문시 등의 자유로운 형식이 성립되었다.
넷째, 따라서 상징주의 시는 표현 불가능한 주관의 세계, 정신의 우주를 표현하려 하기 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시적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주관적 관념적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이 바로 상징인 것이다. 따라서 상징은 애매모호한 비유와 유추 등 암시와 함축의 미학에 근거하게 되는 것이다. 비가시적 세계의 비가시적 표현, 이것이 상징주의의 본질적 속성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징주의는 언어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뜻에 신념을 맡기지 않고 암시나 주문을 통해 대상을 직접적으로 형상화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극단적인 개인주의 경향에 빠졌고 주관적 형이상학적 경향의 애매하고 난삽한 표현을 수반하였다. 이것은 결국 상징주의의 쇠퇴나 해체의 과정을 가져왔다.
Ⅲ. 시어의 상징체계
1. 대립적 상징체계
자연의 모든 커다란 힘과 인간의 감정은 부분적으로 그들을 규정해 주는 대립물을 갖고 있다. 빛이 없다면 어둠의 개념은 없고 슬픔이 없다면 기쁨도 없듯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것 자체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엇인가와 상호 의존함으로써 존재한다. 즉자적인 것이 아니라 대자적이다. 그럴 때 그것은 운동하며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대립하면서 합일하며, 합일하며 대립할 때 생동하며 진보한다.
대립적인 사물 사이의 상호의존성과 합일성은 수 없이 많은 물체와 형태 속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보들레르 시의 대립 상징은 상응 즉 교감을 전제로 한다. 그의 시 <교감>의 일부를 인용하면
자연은 하나의 사원이며 거기서 산 기둥들이
때로 혼돈한 말들을 새어 보내네
사람은 친근한 시선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리로 들어간다.
지상계(물질, 감각, 가시의 세계)와 천상계(정신, 이데, 불가시의 세계)와의 <상응>이 있고, 지상의 만상을 보고 그 숨긴 뜻(혼돈한 말)을 해독하는(알아듣는)자가 곧 시인이며, 그럴 때에 그 사물(숲, 꽃, 구름... 등)들은 곧 상징이며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한갓 감각적인 자연물일 뿐이다. 시인이 그 말을 알아듣기에 자연물들이 그를 <친근한 시선으로 지켜보는>것이다. 여기에 3가지 상응 교감이 있다. 천상계와 지상계, 사람(시인)과 지상계(자연), 자연의 상징을 통하여 사람(시인)과 천상계(이데의 시계)가 그것이다. 즉 상징으로서의 사물은 시인을 천상계로 상승하게 하는 매개 구실을 한다. 여기서 사원(또는 천상계)은 일반인의 종교적인 그것이 아니고, 이미 <시의 종교>의 그것이다. 시인 아닌 속세의 신앙자는 들어갈 수 없는 사원이다. 따라서 시인이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들어간다>는 것은 미의 절대경으로 들어감을 뜻한다. 그럴 때 시인에게는 자연. 천상계와의 교감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이 지닌 오각의 구분, 경계까지 무너져 이른바 감각교류 현상까지 경험할 수 있다. 이처럼 상징은 실재와 관념, 외부세계와 내부세계, 정신과 물질, 자연과 인간 등을 서로 맺어 주는 촉매작용을 하는 것이다.
2. 원형적 상징체계
원형은 어떤 나라의, 어떤 문화권의, 어떤 종족의 인간도 어떤 시대의 사람도 한결같이 생각하였고, 느꼈고, 행동하였고, 말한 것의 유형들이다. 태곳적부터 현대에 이르는 긴 시간에 수없이 반복되었으며, 또한 반복되어 갈 인류의 근원적인 행동유형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인 원형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공통성과 동일성, 보편성, 그리고 반복성을 갖고 있다.
문학에 있어 원형 연구는 프레이저(N. Frazer)의 비교인류학의 이론이 있다. 프레이저는 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갖고 있는 전설이나 의식 속에 되풀이되고 있는 신화와 제의의 근본적 패턴을 추적했다. 그는 원형을 여러 가지 의식을 통해서 한 세대로 물려주는 사회적 현상으로 기술했다. 또 하나는 융(C.G. Jung)을 중심으로 한 심층심리학이다. 융은 인류학자가 신화는 자연과 같은 외부적 요인에 유래한다고 한 것과는 달리, 신화를 정신현상의 투사로 보고 원형을 인간의 정신구조에서 찾는다. 그에 의하면 옛 조상들의 생활 속에서 되풀이되는 체험의 원초적 심상, 정신적 잔재가 원형인데, 이것은 집단무의식 속에서 유전되어 개인적 체험의 선험적 결정자가 되며, 문학. 신화. 종교. 꿈. 개인의 환상 속에 표현된다. 이 둘은 모두 신화를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신화는 본래 집단적이고 공공적인 것이다. 신화는 인간 공통의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에 있어서 종족과 민족을 결합시킨다.
3. 자연적 상징체계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 하늘, 구름, 바람, 풀, 꽃, 나무, 새, 벌레, 짐승 같은 모든 자연물은 사람이 이 지구상에 살기 시작한 원시로부터 현재에 이루기까지 사람들의 변함없는 이웃이고 친구였다. 따라서 이들 자연물은 문학의 끊임없는 소재가 되어 왔고 오랜 동안 함께 생활해오면서 반복된 경험으로 인해 혹은 그 자연물이 가진 고유한 속성으로 인해 하나의 상징체계로 굳어졌다.
직접적인 자연 체험은 고대인들의 인식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들의 개념, 우주 안에서 그들 자신의 위치에 대한 개념은 자연계와 관련해서만 이해될 수 있었고, 자연계의 모든 측면이 신적 에너지의 특정한 모습으로 믿어졌다. 가장 옛날의 신들은 자연의 구현물이었다. 거의 모든 문화들이 처음에는 지상과 자연 자체를 어머니 여신으로 내세웠다. 원시의 자연신들은 보다 다방면에 걸친, 그리고 보다 세련된 신들에게 지위를 빼앗겼지만, 자연계에 기반을 둔 신화와 상징들은 모든 문화에서 계속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그 중 어떤 것들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새와 뱀 사이의 관계는 많은 신화들의 주제이다. 거북은 북아메리카와 남아시아에서 우주의 상징이다. 생명의 나무를 묘사한 것은 모든 시대, 모든 문화에서 나타나는데, 이 오래된 상징은 근대 기독교에서는 세상에 자신의 열매, 예수 그리스도를 주었던 동정녀 마리아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자연은 인간에게 정복의 내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었다. 인간의 모든 생활은 자연과 함께 이루어졌다. 자연에서 먹을 것을 취하고 자연의 품에서 휴식을 취했다. 자연은 인간에게 고난을 주기도 하고 행복을 주기도 했다. 그저 인간은 자연의 일부였다. 자연과의 이러한 의존적이고 친화적인 삶은 지속되고 반복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물에 대한 공통되고 보편적인 생각이 굳어지면서 자연물에 대한 관념이 형성되었는데 그것이 상징의 뿌리이다.
Ⅳ. 김수영 「풀」의 상징체계 및 구조분석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전문(1968. 5. 29)
1. ‘풀’을 ‘민중’의 상징으로 보는 시각
제 1연의 풀은 소극적이면서도 적극적이고, 유약하면서도 생명력이 강한 존재다. 이 존재와 같은 성격을 가진 인간은 바로 국민 내지 민중이다. 1연의 내용을 60년대의 상황과 연결지으면, 동풍은 4.19를, 이 동풍이 몰아온 비는 5.16을 각각 의미한다. 4.19는 우리에게 춘풍과 같이 일단의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4.19는 진정한 봄바람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야기된 혼란은 5.16의 빌미가 되었다. 말을 바꾸면 4.19는 5.16을 몰아왔다. 5.16의 주체들은 정치. 사회를 안정시킨 후(봄비가 봄 가뭄을 일시적으로 해결하듯) 군인의 임무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깨고 군사 독재를 감행하면서 흡족한 비가 되지 못하고 가뭄을 더 심하게 하는 봄비가 되었다. 이렇게 4.19와 5.16은 진정한 봄바람과 봄비가 되지 못하고 일시적인 봄바람과 가뭄을 더 심하게 하는 봄비가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민중은 눕고 드디어 울었던 것이다. 이렇게 민중을 눕고 울게 한 5.16 세력은 독재를 더 심하게 하였고 끝날 가능성은 없었다. 이런 정치 상황의 날씨로 인해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고 노래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1연의 풀은 소극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제 2연에서 풀을 민중으로 보고 바람을 자연의 바람이나 외압 세력으로 보면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람을 ‘바람’[所望]과 바람[風]의 비유적 의미인 ‘불안하게 하거나 무섭게 하는 소란’으로 읽어보자. 이 때 바람은 제 1연의 ‘동풍’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 바람의 주체도 문제가 되는데, 그 주체는 억압 세력, 민중운동가. 나(시적 자아)로 생각할 수 있다.
풀(민중)이 눕는다
(억압세력의/민중운동가의/나의) 바람(소망/불안하게 하거나 무섭게 하는 소란)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억압세력의/민중운동가의/나의) 바람(소망/불안하게 하거나 무섭게 하는 소란)보다도 더 빨리 울고
(억압세력의/민중운동가의/나의) 바람(소망/불안하게 하거나 무섭게 하는 소란)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괄호 안의 의미를 계산하고 나면, 이 행들은 더 이상 비문법적이지 않다. 즉 ‘더 빨리 눕는다/더 빨리 울고/먼저 일어난다’가 그 앞의 어구들과의 결합에서 문법적으로 잘 어울린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그 의미가 무엇이냐가 문제된다. 이는 민중들이 가지고 있는 다면성이다.
바람을 억압세력의 소망으로 보면, 억압세력이 바라는 바, 즉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민중이 눕고 울었으면 할 때에, 그리고 민중이 일어나 주었으면 할 때에, 민중은 이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울며, 먼저 일어난다. 이는 억압세력이 바라는 것을 민중이 알고 하든 모르고 하든, 먼저 도모해주는 것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억압세력을 도와주는 것으로, 이 연에서의 민중은 시대 상황의 의식과 행동에서 억압세력의 조력자가 되는 일면을 보인다.
반면에 바람을 민중운동가나 시적 자아의 소망으로 보면, 이들이 바라는 바, 즉 상황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서 민중이 누웠으면 할 때에, 그리고 민중이 억압세력에 대항하여 울거나, 일어나 주었으며 할 때에, 민중은 이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울며, 먼저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민중이 시대 상황의 의식과 행동에서 민중운동가나 시적자아의 그것들보다도 앞선 것임을 말해준다. 이로 인해 이 연에서의 민중은 시대 상황의 의식에서 민중운동가나 시적자아보다도 선각자이며, 그 행동에서도 먼저 행동하는 자가 되는 일면도 보인다.
게다가 바람을 억압세력이나 시적자아나 민중운동가 중에서 어느 누구의 것으로 보든, 이 바람은 그 비유적 의미인 ‘불안하게 하거나 무섭게 하는 소란’도 가진다. 이 때는 이들의 어느 누구인가가 불안하게 하거나 무섭게 하는 소란을 피우기 전에, 이들의 조그만 거동만 보아도 민중은 더 빨리 눕고 울고 먼저 일어나는 존재가 된다. 이는 지레 겁먹고 눕고 울고 일어나는 것이다. 이 존재는 형편없이 나약하고, 억압세력이나 민중운동에 길들여진 민중의 일면이기도 하다.
이렇게 풀은 한편으로는 억압세력의 흐름을 먼저 파악하고 돕는 존재로, 또 한편으로는 민중 운동가나 시적 자아보다도 시대 상황의 의식에서 산각자이고 먼저 행동하는 존재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 세력이나 민중운동에 겁먹은 나약한 존재로 다면성을 보인다.
제 3연의 풀은 날이 흐리기 때문에 눕는 것이 아니라, ‘흐리고’의 ‘고’가 대등을 나타내는 접속형 어미인 점을 감안하면 날이 흐리는 것과 동시에 눕는 것을 의미한다. 발목의 주체는 억압세력. 민중. 시적자아인 나 등이 될 수 있다. 마지막 행을 제외하고 풀어보면,
날이 흐리고 풀(민중)이 눕는다
(억압세력의/민중의/나의) 발목까지
(억압세력의/민중의/나의) 발밑까지 눕는다
(억압세력의/민중운동가의/나의) 바람(소망/불안하게 한거나 무섭게 하는 소란)보다 늦게 누워도
(억압세력의/민중운동가의/나의) 바람(소망/불안하게 한거나 무섭게 하는 소란)보다 먼저 일어나고
(억압세력의/민중운동가의/나의) 바람(소망/불안하게 한거나 무섭게 하는 소란)보다 늦게 울어도
억압세력의/민중운동가의/나의) 바람(소망/불안하게 한거나 무섭게 하는 소란)보다 먼저 웃 는다
괄호 안의 의미들을 고려하여 ‘바람’을 ‘억압세력의 소망’으로 보면 억압세력이 바라는 것보다 풀은 늦게 눕고 울며, 먼저 일어나고 웃는다. 이는 억압에 버틸 만큼 버티고 참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에 눕고 울다가, 억압세력이 바라는 것보다 먼저 일어나 웃거나 그들을 비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람’을 민중운동가나 시적자아의 소망으로 보면, 이들이 바라는 것보다도 풀은 늦게 눕고 울며, 먼저 일어나고 웃는다. 이 경우에 이들이 바라는 것은 이들에게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뉜다. 우선 전자의 경우에, 이는 이들이 민중에게 이 정도만 버텨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보다 민중이 먼저 일어나고 웃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보면, 민중은 이들이 바라는 것보다도 더 끈질기고 강인한 존재이다. 이에 비해 후자의 경우에 이는 민중운동가나 시적자아 자신들이 판단한 호기보다 민중이 늦게 눕고 울고, 먼저 일어나고 웃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의 웃음은 비웃음이기도 하다. 이는 민중이 저들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민중운동가나 시적자아가 민중과 하께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들의 바람이 민중과 함께 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바람을 비유적 의미인 ‘불안하게 하거나 무섭게 하는 소란’으로 보면 억압세력, 시적 자아, 민중운동가 중에서 어느 누구의 것이든 이 소란보다 민중은 늦게 눕고 울며, 이 소란보다 민중은 먼저 일어나고 웃는다. 이는 이들의 소란에도 쉽게 겁먹지 않고 버틸 만큼 버티고 참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 눕고 울다가 이 소란보다 먼저 일어나 웃는 것이다. 이 웃음은 이들이 주어온 ‘불안하게 하거나 무섭게 하여온 소란’을 비웃는 것이다. 이렇게 제 3연의 민중은 이들의 소망보다 더 끈질기고 강인하며, 끝내는 이들 모두를 비웃는 존재다.
제 3연의 마지막 행은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이다. 풀뿌리라는 근본까지도 눕는 극한 상황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과 이 처한 상황은 그 존재의 터전인 흙을 상실한 극한 상황이라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거기에 대한 대응이 없다. 게다가 제 3연의 마지막 행의 ‘눕는다’는 다른 세 연들의 첫 번째 종결어미와 일치하는데, 이런 것을 감안하여 이 행을 독립 연으로 처리하라는 묵시로 보고 재구성하면,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뿌리 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고/
(바람보다 늦게 시들어도) 바람보다 먼저 살아난다(/깨어난다)
이 완성은 제 1연에서 제 2연으로 가면서 ‘눕는다’와 ‘운다’에 ‘일어난다’를 더하고, 제2연에서 제3연으로 가면서 ‘눕는다’, ‘운다’, ‘일어난다’에 ‘웃는다’를 더하듯이, 제3연의 ‘눕는다’, ‘운다’, ‘일어난다’, ‘웃는다’에 ‘살아난다(/깨어난다)’를 더한 것이다.
작가가 묵시한 내용과 형식을 어떻게 완성하든, 억압이 심해지면 질수록 이에 반응하는 풀의 대응은 점점 더 유연하고 능동적이고 강해져서, 끝내는 풀뿌리까지 누웠다가 살아난다는 것을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자연에서 아무리 혹독한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것은 잠시일 뿐, 곧 하늘이 밝게 개이고 바람이 걷힌다는 자연의 섭리와, 유연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역설 또는 역사의 필연성을 노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 ‘풀’을 ‘생태적 존재’ 또는 ‘존재론적 숙명을 극복하는 원리’로 보는 시각
1) 생태적 존재로 보는 시각
「풀」의 분위기는 ‘비를 몰고 오는 동풍’으로 ‘날이 흐려서’라는 묘사로 보아, 밝은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는 아니다. 동풍은 비를 부르는 바람으로 샛바람 혹은 동부새라 하여 봄에 부는 봄바람이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는 것으로 보아 늦은 봄인 것이 확실하다. 늦은 봄, 오월의 비구름을 몰고 오는 날의 분위기는 결코 음울할 수 없다. 그날의 바람은 오히려 청량했을 것이며 풀밭은 더워지기 시작한 계절 탓으로 비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화자는 지금 풀밭에 와 있다. 그는 오월의 늦은 봄바람이 몰고 올 비를 기다리는 풀잎들의 일렁임을 보고 있는 것이다. 풀잎들은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눕고, ‘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는 것이다.
첫 연의 비의는 ‘나부껴’와 ‘드디어’에 있다. ‘나부껴’는 풀잎들이 바람에 날리듯이 움직이는 모습이다. 여기에는 저항도 거부도 없다. 비를 몰고 오는 봄바람에 호응하여 기분 좋게 팔랑이는 것이다. 이는 거부의 몸짓이라기보다는 화해의 몸짓이다. 화해의 몸짓일 때 ‘드디어 울었다’라고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드디어’는 동풍에 나부낀 끝에 마침내 울 수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던 동풍과의 화해 끝에 풀의 울음이 터진 것이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운 풀은 둘째 연으로의 이행을 예비하면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운동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풀은 날이 흐려서 더 울었던, 능동태인 것이다.
둘째 연은 바람과 풀의 완전한 합일을 이루면서 눕고 일어서고 우는 행위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으로 바뀐다. 풀이 눕되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풀이 울되 바람보다 더 빨리 우는 것이다. 첫 연에서 바람에 호응하면서 눕고 울던, 풀의 능동적 운동성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눕는 행위는 바람과 풀이 같이 하지만 풀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우는 것이다. 바람과 풀의 눕고 우는 호응과 합일이 엑스타시에 접어들고 있는 순간, 풀은 더 깊이 눕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어서 셋째 연에 이르러 ‘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다 고 쓰고 있는 것이다. 비를 실은 봄바람은 점점 더 세게 불어오고 풀은 점점 더 깊이 눕는 상황이 셋째 연의 상황이며 엑스타시의 절정은 ‘웃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셋째 연의 비의는 ‘웃는다’이다. 풀과 바람이 왜 웃는가하는 것은 이 시를 올바르게 읽어내는 열쇠이다. 호응과 합일의 절정에서 터지는 울음은 웃음과 다르지 않다. 셋째 연의 웃음은 이미 둘째 연에서 깊이 내장되었던 것이며 그 에너지가 마침내 폭발하면서 웃음으로 터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 풀의 완전한 운동성은 마지막 행인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것으로 화해와 조화의 극치를 이룬다. 땅 속에 풀뿌리가 눕는 것은 풀이 땅위에서 바람과의 화해와 호응으로 눕는 것과는 달리 물과의 호응을 준비하는 행위이다. 물은 생명을 의미한다. 그것도 불멸의 생명을 의미한다. 이제 풀은 더 완강한 힘으로 이 땅에 뿌리 내릴 것이며 그 영원한 생명력을 스스로 예찬할 것이다. 김수영의 순환론적 우주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2) 존재론적 숙명을 극복하는 원리로 보는 시각
초본식물의 대부분은, 특히 시 「풀」의 풍경에 걸맞은 포아풀과의 풀은 바람을 매개로 하여 수정이 되고, 그로 하여 번식이 증대된다. 또한 풀은 바람을 통해 그 운동성을 획득하고 탄력적 긴장을 유지해 가며, 바람은 풀을 만남으로서 가장 바람다운 모습을 얻어낸다. 그렇다면 근원적으로 풀과 바람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기보다는 호혜적 관계에 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진화론의 관점으로 보자면 발생 단계의 풀은 바람으로 말미암아 싹이 트고 자라나긴 했겠지만 그와 동시에 바람으로부터 많은 단련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주어진 기후 풍토에 튼튼히 뿌리내리고 살아남기 위한 재생적 노력은 필연적인 요구였을 것이다.
바람은 부정적인 이미지로도 쓰이지만 주로 실존적 각성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많이 쓰인다. 표면상 자연(바람)과 인간의 마음이 합치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고 노래할 때에도 바람과 인간-「풀」의 경우 바람과 풀-은, 그 대립적 관계의 역사가 숨쉬고 있긴 해도 따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더 큰 아이러니 속에 은연중에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풀」은 還狀的 순환구조로 짜여져 있는데, 제 1연의 ‘풀이 눕는다’라는 행은 작품에서는 도입 첫 행이 되고 있지만, 우리의 경험 체계에서는 수없이 되풀이 각인되어온 경험의 한 일단인 것이다. 따라서 제 1연은 역동적인 풀밭 풍경의 한 순간적 포착과 동시에 보편적 경험 세계에 기반한 순환적 질서의 한 계기적 장면을 보여 준 것이다. 순환적 질서의 보편적 경험 체계를 현재화하고 있는 제 1연의 ‘울었다’, ‘누웠다’라는 서술체를 두고 과거의 시제 운운하는 것은 문맥상의 동작태를 바로보지 못한 해석이다.
제 2연에 오면 풀이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원인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모순이다. 제 3연에 가면 제 2연에서 노래했던 풀과 바람의 순차적 역동관계를 다시 뒤집는다. 즉 풀은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언뜻 보기에는 시인의 교묘한 조사와 주술적 장치에 이해 수용자는 ‘모순이 모순으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 이른다.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풀이 그 움직임의 동력이 되는 바람보다 빨리 눕고 빨리 일어나거나,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그 모순은 풀과 바람의 역학 관계에 있어서 현실적 상황에 대한 시인의 비과학적 비상식적 인식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시인의 교묘한 언어사용, 말하자면 언어조작에 의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스스로 만든 이 모순을 시인은 연속적인 반복의 특수한 효과로 극복하면서 논리를 초월하고 있다.
풀이 바람보다 빨리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이 언어 조작적 장치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비교의 행위 내지는 비교의 틀을 통해 내보인 ‘먼저’, ‘나중’이 전혀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교묘한 언어적 조합과 그것의 특수한 장치를 통해 풀이 바람보다 빨리 눕던 늦게 눕던 그것을 눕게 하는 바람보다 항상 먼저 일어난다는 사실-풀의 주체적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먼저’와 ‘나중’을 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바람은 인간의 지각권에서는 오직 다른 사물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얻을 수 있을 뿐이어서 풀과의 대립을 넘어선 일체감의 상태를 환기시켜 준다. 이 먼저와 나중의 무의미화는 대립적 판도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융합의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마지막 행이야말로 반복과 점층에 의한 주술적 효과로 말미암아 어느새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현실 경험에서는 있을 수 없는 풀뿌리를 시인은 거듭 언어 작용의 조작적 기법으로 자연스럽게 눕히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시의 생명은 ‘풀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나 ‘풀이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같은 것에 있지 않고 바로 이 끝 행 ‘풀뿌리가 눕는다’에 있다. 이것은 눕고 일어나고 울고 웃는 풀의 그 모든 피상적 대립 행위를 일거에 무너뜨려 장엄한 사고 속에 용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도서류*
1. 한명희, 『김수영 정신분석으로 읽기』, 월인出, 2002.8.26.
2. 이은정, 『현대시학의 두 구도 김춘추와 김수영』, 소명출판, 1999.9.5.
3. 박혜숙, 『한국 현대시 흐름의 양면탐구』, 국학자료원, 2001.2.25.
4. 김동규,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한국 모더니즘 시』, 새미, 2004.2.2.
5. 황정산, 『김수영』, 새미, 2002.12.27.
6. 김윤배, 『온 몸의 시학, 김수영』, 국학자료원, 2003.7.25.
7. 김준오, 『시론』, 삼지원, 2007.3.20.
8. 김효준, 『현대시 이론과 비평』, 새문, 2003.8.24.
9. 유성호,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하늘 연못, 1999.11.1.
10. 이형권, 『한국 현대시의 이념과 서정』, 보고사, 1998.3.10.
11. 이숭원, 『초록의 시학을 위하여』, 청동거울, 2000.11.25.
12. 김병권, 『한국 현대시의 감상과 이해』, 도농문학사, 2001.6.20.
13. 조청호, 『한국 현대시 해설』, 동인出, 2001.3.10.
14. 문덕수.김용직.박명용. 정순진, 『한국 현대시인연구 下』, 푸른사상, 2000.1.20.
15. 장영우.이재무.유성우, 『대표시 대표 평론』, 실천문학사, 2000.2.10.
16 .박계숙, 『한국현대시의 구조연구』, 국학자료원, 198.5.30.
17. 김병택, 『현대 시론의 새로운 이해』, 새미, 2004.8.20.
18. 권혁웅, 『시적 언어의 기하학』, 새미, 2001.10.15.
* 논문류*
1. 강우식, 「한국현대시의 상징성 연구」, 성균관대대학원 석사, 1987.
2. 이방원, 「김수영 시 연구」, 숙명여대대학원 석사, 1989.
3. 정정은, 「자연의 상징적 의미 표현」, 덕성여대대학원 석사, 2002.
4. 배민수, 「김수영 풀의 효과적 교수방법 연구」, 성신여대 교육대학원석사, 2004.
5. 이형구, 「시교육에 있어서 상징의 지도방법 연구」, 공주대 교육대학원석사, 2002.
6. 이은정, 「김수영 시의 수용양상 연구(상반된 수용의 문제)」, 연구논총 vol.18, 1990.
7. 양희철, 「김수영 시 풀의 해석과 평가」, 국제문화연구 vol.19, 2001.
8. 조명제, 「김수영 시 풀의 구조와 시적 논리」, 중앙대 국문학과 어문논총 24, 1995.
9. 한명희, 「김수영 시 풀의 수용양상」, 서울시립대 인문과학연구소 8, 2001.2.
10. 권희돈, 「시의 빈자리; 김수영 풀을 예로 하여」, 인문과학논총 9, 199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