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가 작품론

by 방정민

제 2부 속가 작품론

Ⅰ. 서론


<정과정곡>은 다른 고려 속가와는 여러 면에서 차별이 되는 작품이다. 우선 여타의 많은 속가가 남녀상열지사라 하여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의해 배척받았음에 비해, 이 노래는 예악의 가사로 중요시되었다.

<정과정곡>이 다른 속가와는 달리 사대부들의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 폐하여 지지 않고 후대에까지 오랫동안 계승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임금에 대한 신하의 연구지정이 여성화자의 곡진한 어사 속에 넘쳐 있어 폭 넓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고려의 속가 가운데서 작자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국문 정착가요로 작자의 신분이 귀족계층이라는 점에서 민요적인 성격을 지닌 다른 속가와는 그 성격이 여러 면에서 다르다. 따라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조건이 작품 이해의 중요한 관건으로 작용해 왔다.

2. 시대배경


고려는 중기에 들어서면서 계소 문치에만 힘쓴 나머지 17대 인종을 정범으로 하여 문신 귀족들의 타성과 부패가 극심하였다. 이에 따라 무신을 멸시하는 풍조가 더욱 가속화되어 그의 아들 의종 때 이르러 구체적인 사건으로 폭발, 무신의 난이 유발 되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서는 복잡한 궁중과 인척관계를 긴밀하게 맺고 있었다. 정서의 아버지는 인종 때 예부상서 지추밀원사를 지낸 정항으로 그는 숙종 때 급제하고 예종 때는 표장을 지어 문명을 날렸다. 인종 때 이르러 모두가 권신 이자겸에 아부했으나 그는 홀로 이자겸의 전횡을 배척했으며, 묘청 일파의 서경천도 운동도 적극 반대한 사람이었다. 이자겸이 물러난 뒤에 인종은 정황을 극히 신임했고 총애가 깊었다. 이런 인연으로 정서의 누이들은 왕가나 명가와 혼인을 맺었고, 정서는 임원후의 딸, 곧 공예태후의 누이동생과 혼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서는 공예태후 임씨의 매서, 인종과는 동서간으로서 그 사이가 아주 가까웠다. 결국 정서는 의종(장남), 대녕후 경(차남), 명종(3남), 신종(5남)들에겐 이보부가 된다. 그가 태자 책봉 문제 등에 깊이 관여한 것도 이와 같은 궁중과의 인척관계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3. 정서와 관련된 인물

인종과 동서 사이였던 정서는 인종의 총애를 받았음은 물론 공예태후와도 각별히 가까워 궁중에서 막강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는 음사로 환로에 나라가 벼슬이 정 5품 현직인 내시랑중에 이르렀으나 의종 5년에 동래로 유배되고, 동왕 11년에는 거제로 재유배되었다. 공예태후의 매서로 인종의 총애가 있었으며, 성품은 경박하나 재예가 있었다는 설명이 그것이다. ‘성격이 경박하다’ 이 말이 담고 있는 뜻을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性輕薄’이라는 말은 대체로 정서가 총애를 받았던 인종 당시, 그의 행위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인종의 동서이며 총신이었다. 그런 만큼 궁중과 상당히 밀착되어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처지였다. 거기에다가 “재예가 있었다”고 했듯이 시부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암투와 세력 다툼이 심했던 당시에 여간 자중하지 않았을 경우,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며, 특히 그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간신배와 왕의 측근자들로부터 경박하다는 평을 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정서에 대해 “성품이 경박하다”고 한 기록은 실제로 그의 성품이 경박해서라기보다는 그가 처했던 환경적인 요인과 당시의 상황에 매임이 없으려 했던 성품 등에서 기인한 기록의 편파성과 비신중성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존은 그의 장남인 의종이 왕의를 계승할 능력이 부족하다 하여 폐태자까지 논의했던 철두철미한 왕이었던 만큼 사사로이 정에 끌려 정서가 경박한데도 인척관계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그를 총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둘째, 이 ‘성경박’이라는 말은 의종 재위 때에 정서 자신이 처했던 상황과의 관련 아래 생성되어 후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서는 의종을 위요하고 있던 궁중의 권력층에 비굴하게 아첨하지 않았으며 반대파와 잘 융화하지 않았다. 실제로 정서가 어사대에 의하여 탄핵을 받아 동래로 귀양가게 된 뚜렷한 혐의는 ‘야취연음'했다는 것이다.

정서가 의종과 태자위 계승 문제를 두고 논란이 분분했던 대녕후 경의 집에서 무리를 모아 연향을 베풀며 은밀히 경과 친분을 맺었다는 것이 사단의 빌미가 되었다. 정서는 대녕후 경을 가까이 함으로해서 의종으로부터 미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와 교분을 계속하였던 것은 의종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순진성에서가 아니라 그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은데서 나온 행동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관계로 정함. 김존중 등과 같은 반대파의 무리에 의하여 ‘성경박’이라는 평이 나왔고, 그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유포되었던 것이 뒤의 사가들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것이다.

지금까지 <정과정곡>을 연군대산으로 생각되어 온 의종은 병적으로 시문을 좋아하여 아첨하는 간신배들로부터 ‘태평호문지주’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는 이런 말들이 비위를 맞추려는 아첨의 말인지도 모르고 문신들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대하는 등의 무사안일에 빠졌으며, 급기야는 사직을 혼란과 위기로 몰아넣어, 왕 24년 정중부 등 무신 일파에 의하여 폐출된 인물이다.

그러나 의종은 왕의에 오른 뒤에 자신을 “폐태자‘의 위기에서 구해 주었고, 또 그의 부왕인 인종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마땅히 습명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까지 당부했던 그 정습명이 간하는 것을 듣기 싫다하여 꺼렸으며, 정습명이 짐짓 병을 핑계삼아 휴가를 청하니 간신 김존중에게 그의 직책을 대신 맡겼다. 이에 정습명은 왕의 뜻을 헤아려 치료할 약을 먹지 않고 죽음을 자청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의종은 놀이와 잔치를 대단히 좋아하였다. 이러한 의종의 성품 때문에 궁중은 피폐할 대로 피폐하였고, 충신들은 서로 헐뜯고 모략하여 당시의 상황은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뒤의 사신들은 의종에 대하여 “의종이 능히 그 측근의 사람들을 제어하지 못하여 풍교와 헌장을 능멸하게 하여 국법을 어지럽혔으며, 대간의 말을 듣지 않고 법을 굽혀 놓아 주었으니, 군소에게 화를 당한 것도 당연하다.” 라고 평하였다.

그리고 의종은 혈육간에도 화목하지 못했으며, 특히 도참을 믿어 형제들을 매사에 의심하였다. 동왕 5년에 정서을 곤장으로 때려 동래로 귀양보내면서 그와 관련된 사람도 다 죄로써 다스렸다. 특히 그의 아우 경이 거처하는 대녕부를 파하고, 경의 종 김삼 등은 태형을 가하여 유배시켰다. 이러한 의종 행위는 그가 태자로 있을 때 대녕후 경으로부터 태자위를 위협당한 일에 대해 마음 속에 남아 있던 불만과 시기 등이 혼합 축적되어 열등 콤플렉스를 형성하고 있었고, 그것이 곁으로 투사된 탓이라 볼 수 있다. 의종이 왕위를 이어 받은 후에 그의 모후인 공예태후가 전에 대녕후 경을 왕으로 세우려 한 사실을 원망했는데 이로 볼 때 태자위 경쟁자였던 그의 동생 대녕후 경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아주 컸을 것임이 명확하며, 그래서 대녕후 경을 비롯한 형제들을 병적으로 의심하고 미워했던 것이다. 그 결과 모반의 뚜렷한 조짐이 없었는데도 대녕후 경을 귀양 보내고 익양후 호 등 형제를 배척하였던 것이다.

또한 의종이 무신들을 천대하여 그들의 분노를 사다가 결국은 24년 9월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들 여러 무신에 의하여 폐출되고, 다시 9월에 을묘일에 거제로 추방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무신의 난 때 관리부사 최유칭 등 왕을 따르던 많은 문신들은 모조리 주살되었으며, 의종 자신은 그 뒤 명종 3년 동북 면병마사 김보당 일파에 의한 복위운동에 연루되었다 하여 경주에서 이의민에게 피살당하였다.

의종이 폐출된 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차남인 대녕후 경이 즉위하지 못하고, 무신들에 의하여 익양후 호가 오히려 추대되어 즉위했다. 이가 곧 명종이다. 명종이 왕의에 오를 때는 그의 나이가 이미 40세를 넘었다. 그 나이에 정황을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조정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건의 정말을 상세하고도 바르게 알았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서의 서정, 특히 그가 귀양을 가게 된 내막을 명종은 십분 짐작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의종 재위 당시 그의 집을 탈취당하는 등 많은 핍박을 받았던 익양후 호, 죽 명종은 즉위하자 이내 그와 동병상련의 처지였던 정서를 제 1차로 귀양지로부처 소환하고 직전을 회복시켜 주였던 것이다.

4.연군대상과 창작시기


정서와 의종과는 군신의 관계이면서도 정서가 의종의 이모부가 되는 인적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서는 태자위 계승 문제로 논란이 많았던 대녕후 경과 계속 긴밀히 지내면서 경의 집에서 밤늦도록 모여 연음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폐태자의’ 사건 때 대녕후 경의 편에 섰던 정서의 일관된 입장을 말해 주는 사실로, 의종과는 소원한 관계였던 것을 알려 주는 증좌가 된다.

정서와 의종의 관계는 서로 그리워하는 군신관계로 보기는 어렵다. 정서에 대한 의종의 처우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정서를 배척하며 모함했던 간신 정함에 대하여서는 의종이 지극히 관대했던 사실로써도 입증된다. 정서에 대한 의종의 사랑은 적었거나, 의종에게 정서는 처음부터 질시의 대상이었다고 보겠다.

정서가 동래로 귀양가고, 거제현으로 재유배되어 명종에 의하여 소환될 때까지 여러 차례 대벽 이하의 죄인에게 내린 사면이 있었으나 정서는 매번 제외되었다. 정서가 유배되고 난 뒤에 내린 대사령만도 의종 8년에서 동왕 23년까지 10여회나 있었는데도 정서에게는 소환의 기회가 끝까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유배되기 전에도 의종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고, 1차 유배 뒤에 소환되기는커녕 다시 거제로 재유배되었던 정서가 “니미 나 마 니시니잇가”하면서 의종을 임으로 하여 그리움이 충일한 연군의 노래 <정과정곡>을 창작하여 불렀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의종이 왕 25년 8월에 일어난 보현원의 난으로 정중부 등 무신의 무리에 의하여 다음 달 9월 1일에 왕좌에서 폐출되어 곧 거제현으로 축출되었을 때는 정서가 동래 배소에서 거제 배소로 옮겨진 지 무려 13년이 되는 해였다. 그렇찮아도 의종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쌓여 있었을 터인데 전 왕인 의종이 거제로 방축되어 왔을 때는 자신에 대한 비감과 울분, 의종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뒤섞여서 주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 힘도 없는 전왕 의종에게 어떻게 연군의 노래를 부르겠는가? 정중부 일당이 난을 일으키고 명종이 즉위하자 정서가 곧 소환된 것으로 보아 정서는 무신들의 증오를 받을 행위, 곧 의종에 대하여 충성한 일이 없었다고 보아야 하며, 오히려 무신들과는 동정적이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볼 때도 명종이 즉위하자 정서가 이내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명종에게 하소연하기 위해 명종을 임으로 하여 연군가인 <정과정곡>을 지었다는 점은 더욱 타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고려사』권97 열전 권10 정항조에는 “정서가 이미 귀양왔으나 소명이 오래도록 이르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지었다”라 기록한 채 동래란 말은 아예 쓰지 않고 있다.

이 기록만을 문제 삼는다면 <정과정곡>의 창작시기는 동래 유배시기에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거제 유배 시기도 포함시킬 수 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동국통감』의 기록도 이와 같다.

그런데도 『고려사』 악지의 기록에는 동래 배소만 적고 거제 배소는 아예 언급이 없어 동래 유배가 유배의 전부인 것같이 기술되고 있다. 말하자면 2차 유배지인 거제는 염두에 두지 않은 채로 막연히 1차 유배지인 동래로만 기록한 듯하다. 이는 『고려사』 악지 제작자들의 편의에 따른 표현법으로 그것의 특성상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있다고 보인다. 따라서 ‘서재동래일구’의 동래란 동래 유배 기간과 거제 유배 기간의 통합인 귀양 기간 전부를 편의상 통칭해서 나타낸 것이라 봄이 타당할 것 같다. 따라서 그 창작시기를 의종 24년 9월~10월로 내세운 이가원의 견해나 명종 연간의 작품으로 보고 있는 김동욱의 견해는 한 발 앞선 생각이라 하겠다.

정서는 의종이 폐위되고 명종이 왕위에 오른 뒤 명종을 임으로 하여 <정과정곡>을 지었다. 즉 의종에 대한 원망을 근저에 깔고 명종을 향한 그리움의 심정을 노래에 실었던 것이다. 원래 서정시는 개개인이 그 나름으로 적의를 느끼면서 답답하게 체험한 사회적 상황에 대한 자신의 심리적 저항감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들이 시적 구조물에 각인됨은 재론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정과정곡>의 창작시기는 능히 추론할 수 있는 정서의 심리적인 상태와 소환시기 등으로 보아 명종 즉위년(의종 24년) 9월~10월 사이의 어느 시기로 압축된다.

이렇게 볼 때 여지껏 풀리지 않고 있는 <정과정곡>의 어구의 의마나 그 전체적 문맥도 어느 정도 바로잡혀진다.


내님믈 그리자와 우니다니

산졉동새 난 이슷요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 아으

殘月曉星이 아시리이(이)다

넉시라도 님은 대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잇)가

過도 허믈도 千萬업소이(이)다

힛마러(리)신뎌

읏브(븐)뎌 아으

니미 나 마 니시니잇(잇)가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 )안은 봉좌문고본(蓬左文庫本)의 기사임(『악학궤범』 권5)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시며 거츠르신 ’이다. 양주동은 일찍이 이 구절을 ‘비(非)며 망위(妄僞)인 줄’로 풀었다. 그리고 김형규는 ‘참소자들의 말이 비요, 허망한 줄’로, 권영철은 ‘(서울에)안 있으면, (여기)동래에(와서) 있다 하더라도’로, 김상억은 ‘(님께서)(저를) 외다 하시고 황(荒)되다 하신들’로 보았다.

그러나 양주동의 견해와 같이 이 어구를 풀이하면 그 당시의 사회 상황과 배치되는 모순에 빠진다. 참소자들의 무고 내용이 참이냐 거짓이냐에 대하여서는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실정이었고, 또 정서의 인물됨과 의종과의 관계로 볼 때 정서가 의종에게 굳이 시비를 하소연할 처지가 아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니시며’의 주체가 ‘의종의 말’로 보아야 되며 이렇게 하면 주체존대 보조어간 ‘시’가 가지고 있는 문법적인 기능을 실리게 됨과 동시에 다음 구절과의 연결도 무리가 없게 된다.

이 구절의 뜻은 “오늘 가게 됨은 조정의 물의에 의한 것이니 오래지 않아 소환하겠다라는 왕의 말씀이 참이 아니시며, 거짓인 줄 잔월효성은 알 것입니다.”로 해석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달이 부조리하고 유한한 인간의 속세계를 초월하는 성세계의 종교적 현현을 나타내는 다양한 상징이 됨은 주지의 사실이다. 향가 <원왕생가>에서도 속세계의 광덕과 성세계의 서방 정토를 잇는 매개체로 달이 대상화되고 있음은 잘 알려진 보기이다. 그러므로 <정과정곡>에서의 달은 구체적인 삶의 무수한 현상이나 운명을 하나로 묶어 삶의 전체를 현현하는, 보다 현실적인 초월자로서의 문맥적 의미를 지닌다. 이 점은 별 또한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정과정곡>의 ‘잔월효성’은 앞의 ‘山졉동새’와 관련되어 천지신명과 같이 정서 자신의 임을 향한 마음과 그 처지를 빠짐없이 잘 알고 있는 존재로 설정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임을 향한 그리움이 다하도록 울어예는 접동새가 그 외로움과 슬픔의 극한에서 만나게 되는 삶의 시간대에 공간화된 대상이 ‘잔월효성’이다. 결국 이 부분은 “의종께서 소환하시겠다는 말씀이 참이 아니었으며 거짓말인 줄을 잔월효성은 물론, 천지신명도 잘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사리에 밝은 명종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라는 문맥을 지녀야 정서 자신의 사정을 잘 아는 익양후 호, 즉 명종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소환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은연중 담데 되어 작품 전체의 뜻과 잘 부합된다. 그러므로 ‘山졉동새’는 정서 자신을 말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말힛 마러신뎌’에 대한 해석도 서재극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곧, “말짱 거짓말이었구나”라는 풀이는 “의종께서 소환하시겠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 되어 명종에게 하소연하는 정서의 일관된 자세가 잘 살아나게 된다. 따라서 마지막의 “괴오쇼셔”는 명종이 정서 자신의 사정을 잘 알고서 지지해 주길 바라는 의미가 이면에 깔려 있는 것으로, 남광우의 풀이대로 “뒷받침(밑받침) 하소서”가 온당하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정과정곡>의 전체적인 문맥을 세워 본다면 다음과 같다.

내 님(명종)을 그리워 해서 울고 다니니

산에서 우는 접동새와 신은 같은 신세입니다(그만큼 불쌍한 존재입니다)

(의종께서 하신) 멀지 않아 불러주시겠다는 말씀이(그저 헛말인 위로에 그

치는) 허황한 말인 줄

천지신명이 (아시듯이 님(명종)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아 넋이라도 님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신을 죄주라고) 우기시던 분이 누구였겠습니까(님께도 갖은 고초를 겪으

시게 했던 의종이 아니었습니까?)

과도 허물도 정말 없습니다.

(의종께서 소환하겠다 하신 말은) 말짱 거짓말이었습니다.

아아 슬프기 그지 없습니다.

님(명종)은 신을 이미 잊으셨습니까(그렇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아 님이시여 다시 돌이켜 (신을) 뒷받침하소서


정서는 오랜 유배 생활에서 생긴 한과 괴로움을 달과 별, 그리고 접동새라는 전형적인 시문의 소재를 차용하여 임인 명종을 향하여 ‘처완’하게 노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신하의 도리를 지극하게 한다는 규범적 뜻에서 더욱 확대되어, 언제 자기에게도 이와 같은 운명이 닥쳐올지 모르는 불안한 환로에 있었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오래도록 불려지게 된 것이라 하겠다.


5. 결 론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하는 의지형이며 의리형이었던 정서가 유배를 당하게 된 일의 표면적인 이유는 대녕후 경과 무리를 지어 ‘야취연음’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태자로 있을 때부터 불편했던 의종과 정서, 대녕후 경과의 관계가 더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정서와 의종의 뒤를 이은 명종과의 관계는 정서가 대녕후 경과 친밀했던 것처럼 동병상련의 친밀한 관계였음을 몇가지 논거를 통해 뒷받침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정서는 명종이 즉위하자 이내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잘 알고 있는 명종을 연군대상으로 하여, 연군 시가인 <정과정곡>을 불렀던 것이다. 이렇게 <정과정곡>의 연군대상을 명종으로 추정했을 때 노래의 창작시기는 명종이 즉위하고 정서가 소환된 명종 즉위년(의종 24년) 9월에서 10월의 어느 시기로 자연스레 압축된다.

Ⅱ. <정과정곡>의 문학사적 의의

1. 서 론


<정과정곡>을 창작한 고려 의종대는 시기적으로 보아 이러한 고려중기에 해당되며, 이때는 개국을 한 왕건의 상무정신과, 이를 기반으로 하여 싹 튼 북방개척의 의지가 많이 쇠미해져 문약에 빠져 있었다. 그런 관계로 결국 태평호문지주로 일컬어지던 의종은 동왕 24년 9월에 무신 정중부 일당에 의하여 폐위되고 말았다. 정서는 17대 인종의 총신이며, 그와는 동서간이다. 그러므로 의종에게는 이모부인 셈이다. 이런 관계인데도 정서는 의종이 즉위하자 동왕 5년에 그의 향리인 동래로 유배되었다. 이 점에서 보면 <정과정곡>은 하나의 유배문학에 속한 것으로, 여러 유배문학 중의 한 작품일 수 있다.


2. <정과정곡>의 창작과 그 의의

1) 한문학 융성기의 <정과정곡>과 그 의의

속가는 고려후기의 특수 상황을 기반으로 하여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형성되어 악장으로 사용되긴 했으나, 이를 모든 속가마다 일률적으로 적용시키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고려의 궁중에는 일찍부터 중국의 음악과 함께 삼국시대에 생성된 삼국 음악과 고려초기에 생성된 고려의 음악 등이 다수 존속해 왔기 때문이다.

충신연주지사로 조선의 유학자들에 의해 악공취재의 필수과목으로까지 진중시되었던 <정과정곡>은 고려가 원의 지배 하에 들어간 시기, 즉 고려후기에 창작된 것이 아니라 중기에 해당되는 의종 때에 지어졌으므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개의 속가보다는 창작연대가 앞서는 편이다. 또 작가도 중신으로 관료귀족계층이다. 이런 점이 고려될 때 이 <정과정곡>은 상당한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 또한 <정과정곡>은 속가의 중요한 특성으로 지적되는 것 중의 하나인 작자 불명의 민요에서 취택된 것이 아니라 개인 창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연장체로 되어 있는 여타의 속가들과는 달리 단연체로서, 오히려 앞 시대의 노래인 소위 다섯줄 형식의 10구체 향가와 유사한 점 등으로 인하여 우리 국문학사에서 주목을 크게 끌 만큼 가치와 의의를 지녔다고 하겠다.

고려시대 국문학이 부진한 이유에 대하여 알아보자. 고려시대는 어떤 면에서 바라보든 현상적인 면에서 국문학 작품 수가 적은 편이다. 그 중에서도 귀족관료계층이 지은 우리말 작품은 더욱 적어 희귀한 편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한문학은 황금기로서, 신라나 조선시대보다 오히려 한문학이 발달되었던 시기다. 이 한문학의 주체는 고려시대의 상층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관료귀족들이지 민중은 아니었다. 신라시대부터 사용되어 오던 고유의 표기 방식인 향찰도 고려로 넘어오면서 서서히 없어졌으므로 민중계층은 더 이상 자신들의 정서를 표출할 수 있는 문자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그들의 표기수단으로 삼아 자신들의 정서를 드러낼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는 신라와 조선과는 달리 민중문학의 쇠퇴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상층계층의 한학자들에 의한 한문학은 번성 일로를 걸어 그 꽃을 만개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대중들에 대한 우월주의적 입장에서 한문학에 심취하여 소요자적했으며, 중국의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져 있으면서 스스로 즐거워했던 사람들이었다.

정서는 인조대 일세에 문학적 위광을 누렸던 한문학자 김부식, 정지상 등과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모든 상층계층이 모화사상이나 한문문학에 대한 심취로 인하여 한자를 빌려 우리의 정서를 한문식으로만 표현하던 것이 일반화되었던 당시에도 정서는 순 우리말 가요를 창작했던 것이다. 이는 탈문화적 사대주의 입장을 견지했던 균여대사가 우리 노래인 향가의 우수성과 특성을 인식하여 11수의 우리말 노래인 향가를 지은 것과 같은 궤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더구나 재능이 있어 얼마든지 한시를 구사할 수 있던 정서가 그것도 다른 노래가 아닌 임금을 대상으로 하여 부른 연군지사를 우리말로 창작하여 불렀다는 것은 한문학이 지극히 번창하던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대단히 값지고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

대문장가로서 명성을 떨치지는 않았지만 귀족관료 계층인 정서가 자신의 독특한 정서를 한문식 표현법을 취하지 않고 순수한 우리말로 우리 노래를 창작했다는 것은 모화사상을 멀리하는 주체적 사상의 발로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의식이나 정신면에서 대단히 돋보이는 일이라 하겠다. 특히 그는 거문고에 얹어 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이 노래는 별달리 표기되지 않은 채 구전되어 왔다. 물론 이 노래가 궁중 악장으로 사용되었지만 그 전승이 용이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그 당시 고려인들에겐 크게 감발되었음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이런 사실 등으로 조선에 와서도 중히 여겨지게 되었고, 그래서 몇 안되는 고려의 속가와 함께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고 본다.

그리고 그의 울분과 회한을 우리말 노래로 표현했다는 사실에서 그가 우리말 노래에 아주 익숙해 있었다는 것과 그가 우리말 노래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2) <정과정곡>의 한역과 그 의의


익제 이제현이 그의 문집 『익재난고』소악부에 우리말로 된 <정과정곡>을 한역한 사실을 고려하면서 이 작품의 국문학적 의의와 가치를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億君無日不霑衣 임금을 생각하여 옷을 적시지 않는 날이 없으니

政似春山獨子規 봄날 산의 자규와 같다

爲是爲非人莫問 옳고 그른 것은 사람들이여 묻지 말라

只應殘月曉星知 다만 잔월효성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노래에 나름대로 큰 의미를 붙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과정곡>을 비롯한 소악부의 한역가가 오랫도안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가치롭게 생각되면서 널리 애창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대개 한역가들이 악장으로 사용했지만, 악장으로 사용되어 사랑을 받기 전부터는 물론이고, 그 이후 민중계층에 의하여서도 애창되면서 오랫동안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이 그 자체로 사람들의 심금을 충분히 울릴 수 있는 뛰어난 감동력과 미적 구조, 그리고 암시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역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정과정곡은 작자를 알 수 있는 개인 창작이며, 더구나 그 작자가 의대개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익재에게는 우국으로 그 내용이 이해되었을 것이다.

둘째, <정과정곡>을 비롯한 한역가들은 이들 가요가 생성되어 불려질 당시의 사회상황, 예컨대 고려후기의 부패하거나 잘못된 사회. 역사적 현상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걸거나 경종을 울릴 수 있는 의미와 내용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라는 점이다.

익제가 <정과정곡>을 한역한 것은 왕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심과 연군의 마음을 제고시켜 보려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어쨌든 <정과정곡>은 창작 당시와 그 이후에 왕에 대한 신하들의 연구지심을 환기시킬 수 있는 좋은 노래로 생각되었다는 점을 익재는 이 노래를 한역해 놓음으로써 어느 정도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3) 다룬 속가에 미친 영향과 그 의의

<정과정곡>을 국문학적으로 높이 살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로는 이 가요가 다른 속가의 형식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이는 앞의 향가 형식을 <정과정곡>이 종적으로 계승한 것과는 다른 횡적. 수평적 영향관계이다.

행의 수, 같은 시구의 반복 기법, 감탄사의 처리 방식과 유무, 그리고 자수 등의 부분들이 정확하게 합치되는 것은 아니나 이 시어들이 같은 차원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전춘별사>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민요에는 같은 구절이 흔하게 혼용된다. 한 민요의 각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혀 다른 민요끼리도 같거나 비슷한 구절이 서로 넘나든다. 그런데 <정과정곡>은 개인 창작시가이나, <만전춘별사>는 작자를 모르는 민요라 볼 수 있다. 개인 창작가요나 민요 사이에 가사가 서로 넘나드는 것은 민요에서처럼 흔하지 않다. 이런데도 <정과정곡>은 연군문학의 본격적 출발을 가져오게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반적인 ‘사랑 노래’에도 상당히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정과정곡>의 일부 가사가 유행요였던 <만전춘별사>의 일부로 차용되었다고 봄이 아무래도 합리적이라 본다. 이처럼 개인의 공감을 얻을 만큼 우리 민중의 정서에 부합되었다는 것으로, 이러한 점이 이 가요의 가치와 의의를 드러내 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정과정곡>은 문학적 기법이 독창적이어서 예부터 전해 오는 노래를 고쳐서 불렀다고 여겨지는 <동백목>의 문학적인 기법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며 그 우수성을 대중으로부터 획득하고 있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요컨대, 창작 과정과 내용 등에서 유사점이 많은 채홍철의 <동백목>은 다른 가요의 가사 형성에 영향을 준 흔적이 없지만 <정과정곡>은 다른 속악의 가사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내용과 정서 처리. 어휘의 구사면세서 탁월했던 것이다. 여기서 <정과정곡>의 가치와 의의를 다시 확인할 수 있겠다.

3. 전통정서의 계승과 표현 양태


우리 문학에 나타나는 주된 정서는 한이다. 우리 민족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심층에는 한의 정서가 주류를 이루면서 그것이 원형심상으로 존재하고, 문학예술을 통하여 언제나 표출된다. 그러므로 우리문학의 본질을 밝히려면 어차피 한의 문제와 부딪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이 생성되는 원은은 첫째, 우리 민족 고유의 체질적인 요인 둘째, 삶의 기대를 이루고 있는 토양. 기후 셋째, 우리 민족이 향유해 왔던 사회. 역사적인 상황 넷째, 한을 맺히게 하는 사회구조와 의식 등이다.

그리고 한은 우리민족에게는 시공을 초월하여 계승하는 것이며 이는 긍정적. 창조적. 융합적인 힘과 승화나 조절의 힘까지도 갖고 있다. 개인으로 하여금 한의 정서를 갖게 하는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상실이며 소외일 것이다. 상실은 글자 그대로 빼앗기는 것이며, 소외는 집단이나 개인으로부터 ,배격당하는 것이다. 결국 두 어휘 모두가 큰 테두리에서보면 같은 의미 차원에 속하게 된다. <정과정곡>을 창작한 정서가 소유하였던 한은 자신이 지향하고자 했던 집단에서 소외됨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소외는 소외당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향상심이나 규범 또는 야심을 살릴 희망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의식을 낳게 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간이 자연의 상태를 벗어나 역사의 주체가 된 이후로 계속되어 온 한 지배적 현상이다. 정서도 자신이 몸담아 생활해 왔던 정치현실에서 밀려나 동래로 우배됨으로써 자신의 향상심이나 야심을 살릴 희망이 상실되었다고 믿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상황과 생각이 한의 정서를 싹트게 한 것이다. 이 한의 정서가 <정과정곡>의 전편을 관류하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민족의 원형심상에 부합되어 생명을 넘어 생명으로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정과정곡>에서의 기다림의 내용은 정서 자신의 결벽이 증명됨과 동시에 다시 왕의 은총이 자기 자신에게 내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바람이 무위로 끝난 것같이 여겨졌다. 여기서 정서에게 한이 생겨난 것이고, 이 한의 정서가 민중의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정서와 부합이 잘 되어 전폭적인 공감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과정곡>은 상층 계급이 지은 개인 창작시가이지만 사회의 하층계층인 민중과도 교감이 잘 이루어지는 작품이 될 수 있었다.

또한 꾸밈이 없는 정서의 성격이 그대로 녹아 든 시행의 의미들이 그대로 민중의전통적 정서에 부합되고 융합되면서 <정과정곡>은 계층에 관계없이 크게 인기를 얻었으리라 여겨진다. 그 예를 들자면 첫째 행과 둘째 행 모두에 일인칭 ‘내’가 나온다. 이는 감정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장치일 수 있다. 임도 ‘내’임이요, 우는 주체도 ‘내’다. 자신의 괴롭고 슬픈 처지와 정황을 숨김없이 이 ‘내’를 연속 사용함으로써 나타내고 있다. 가식과 꾸밈이 없는 민중 정서 그대로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민요들에 나타나는 기법이다. 또한 이처럼 소박하고 솔직한 감정표현은 <서경별곡>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모곡>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정서의 표출방식은 다음 행인 2연에서는 더욱 잘 나타난다. 2연에서의 자신의 처지를 산에서 우는 접동새에 비유했다. 접동새는 우리 민족의 정한을 나타내는 데에 자주 원용이 되는 비극적인 새이다. 특히 <정과정곡>의 작자는 접종 앞에 ‘산’을 붙였다. 산이 갖는 고독과 외로움 등을 비극적인 새가 갖은 한의 정서에 융접시켜 그 효과를 한층 더 상승시키고 있다. 이처럼 극대화된 한은 우리 서민대중이 감내해 왔던 정서와 너무나도 같다. 그러므로 고려의 서민대중은 이 노래에 빨려 들어가서 작자와 합일이 되고, 계층간에 생길 수도 있는 위화감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정과정곡>은 상층관료계층이 지은 창자가요이지만 서민 대중 자신들의 노래로 생각되어 쉽게 받아들여졌다고 여겨진다.

고려 민중의 정서는 속가들에서 보듯이 진솔하고 담백하여 에둘러 표현함이 별로 없다. 변명과 애소의 내용이 질박한 어휘로써 그 다음의 5행과 10행에서도 그대로 읊어지고 있다. 헤어지자고 우기던 사람을 임으로 본 태도, 자신에게는 잘못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 항변, 자신을 벌써 잊었냐는 힐난투의 어조, 그 어느 것 하나에도 다소곳함이란 별로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이 가식을 모르는 민중 정서요, 일반 서민들의 감정 표출방식이다. <정과정곡>의 작자 정서는 임금을 그리워하면서도 신하의 자세로써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한 남자에게 한 여자가 투정을 부리면서 사랑을 갈구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자신을 찾아 온 임에게 딴청을 부리면서 힐난하는 <만전춘별사>4연과 감정 표출 방식이 너무나 흡사하다.

<정과정곡>의 마지막 행은 이런 감정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이 노래의 대단원이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읊고 있다. 임이여 간절한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다시 사랑해 달라는(아소 님하 도람드르샤 괴오쇼셔)내용이다. 유배를 간 충직한 신하가 임금을 향해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내용이 아닌데도 그렇게 읊은 것이다.

다음에는 형식적인 표현기법으로 이 노래에 사용된 감탄사 ‘아으’의 의미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노래 전편을 통해서 ‘아으’는 세 번 나온다. 감탄사의 위치는 대체로 행의 처음에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정과정곡>은 그렇지 않다. <정과정곡>에서처럼 가요의 마지막에 감탄사를 배치시켜 놓은 것은 그 감정의 양을 끝까지 조절할 의사가 없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외침을 내부에서 폭발시키거나 외부로 증폭시켜 보려는 심산이라 보겠다.

결과적으로 감탄사 ‘아으’의 연속적 말미 사용은 억압적 정황과 암울한 정서 속에서 삶을 꾸려 온 고려 민중들의 한을 증폭시켜 표현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바로 <정과정곡>이 민중적 표현기법을 잘 구사한 작품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4. 향가 형식의 계승과 그 의미


<정과정곡>이 대엽, 만중삭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은 이 노래가 음악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다른 여러 노래의 전형이었음을 알 수 잇게 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정과정곡>이 고려중기 작품으로서 후기의 문학 작품 생성과 형식 결정에 영향을 줌과 동시에 같은 시대에도 다른 작품에 크게 작용했음을 함께 알려 준다.

<정과정곡>은 향가의 주류를 이루는 10구체 향가 형식을 어느 정도 계승하고 있다. <정과정곡>이 우리 민족의 전통 정서 계승과 마찬가지로 가장 뚜렷했던 전통 시가 형식인 10구체 향가 형식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보여져 그 의의가 더욱 크다 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정과정곡>의 형식은 향가 형식을 이어 받은 것일 뿐 10구체 향가와 적확하게 그 형식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향가 형식의 전통을 계승하여 창작된 작품임은 분명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정과정곡>의 문학사적 가치는 크다고 볼 수 있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된 이후, 설혹 고려가 신라의 옛 제도나 전통을 답습하려 했다 하더라도 그대로의 계승은 어려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상황과 관련지어져 생성되고 발달된 국문학의 경우에도 왕조 변혁 후 앞 시대의 문학 전통을 온전히 이어 받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신라 말부터 고려 의종. 명종대까지는 시간 거리상으로도 멀 뿐 아니라 정치 주체도 다르다. 시간적으로 거리가 있고, 역사나 정치 주체가 다를 때 앞 시대의 문물제도나 문학적 관습이나 주체의 취택성향과 전달방식이 고스란히 계승되는 것은 어렵다.

고려 4대 광종대보다 훨씬 후대인 18대 고려 중기 의종대의 인물인 정서에 의하여 변형된 향가 형식이긴 하지만 그것이 다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이와 같은 여러 각도에서 살펴 볼 때 그것은 실로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큰 것이다. 특히 향가 형식을 계승한 <정과정곡>이 결국 시조문학의 발흥 등 후대의 문학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므로 이 가요의 국문학적 가치는 더욱 지대하다고 하겠다.

5. 결론


첫째, 고려시대는 과거 제도의 도입 등 여려 요인으로 인하여 한문학이 어느 시대보다 크게 융성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국문학은 귀족관료계층인 한학자들의 무관심과 고유의 표기 문자가 없었던 탓에 위축퇴영을 면치 못했다. 당시 지식 계층들은 한시문으로 연군시가를 창작함이 일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군의 심정을 읊은 <정과정곡>을 우리말로 지어 노래 불렀다. 이는 그 작품을 창작한 정신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며, 탈문화적 사대주의의 저오하라 볼 수 있어서 그 의의는 더욱 크다.

둘째, <정과정곡>은 국문학이 위축된 고려시대에 진실되고도 소박한 우리의 언어로 자신의 한을 토로하여 일반 서민 대중은 물론, 귀족계층들의 호응도 받았다. 이 가요가 고려시대에는 주로 궁중에서 속악으로 예능인들에 의하여 구전되다가 조선시대에는 국문으로 정착되어 악공취재의 필수 과목으로 중시되기도 했으며, 사대부둘이 충신연주지사라 하여 일ㄹ 모두가 익혔다. 또 <정과정곡>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가 유발될 수 있는 소재와 표현방식으로 노래하여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그 내용이 우수함을 말해 주는 것이 된다.

셋째, <정과정곡>은 향가 <원가>이후로 연군의 가요에서 주종적인 작품으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만전춘별사>등 다른 속가들의 형식과 내용 결정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노래라 볼 수 있으므로 그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하겠다.

넷째, <정과정곡>은 앞 신리시대의 대표적인 국문 가요인 10구체 향가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어서 큰 의미를 갖는다. 고려 중기 의종대에 귀족관료계층인 정서가 10구체 향가의 형식을 계승하여 우리말 노래를 지은 것은 국문학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의의가 크다.

Ⅲ. <청산별곡>의 상징성과 현실인식

1. 서론


<청산별곡>은 속가 가운데서 고려시대의 사회상과 더불어 고려인의 생활관이 가장 많이 투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구성에 있어서도 논리성이 두드러지며, 내용 또한 고도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음악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한 여러 시각적 장치가 잘 배치되어 있음이 이 노래의 특징이다.

<청산별곡>에서의 ‘청산’은 이 노래 전체의 본질적인 구성 용소로 작용하면서 이 노래의 주제를 암시하고 있다. 이 점은 이 노래의 제목이 <서경별곡>이나 <가시리>처럼 첫 행의 첫 어휘로써 제목을 삼는 속가의 일반적인 관행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문학은 사회의 반영이며, 나아가 사회의 지배적인 관념을 표현한다. 마찬가지로 시는 사회와 역사의 참다운 실체의 한 면이기도 한 상황을 제구성한 구조물임과 동시에 개개인이 그 나름으로 적의를 느끼는 사회적 정황에 대한 반응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 작품의 내용은 그 작품이 생성된 사회. 역사적인 상황과 연관지어져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청산별곡>은 민요적 색체가 짙은 노래이므로 당시의 민중들이 겪은 사회. 역사적인 체험을 통하여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청산별곡>에 대한 사회 역사적 측면에서의 접근은 이 노래의 내용과 상징성을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방법이 되리라 본다.

2. ‘靑山’과 현실 집착


산은 우리의 시가문학에만 국한해 보더라도 일찍부터 작품의 제재나 배경으로 널리 차용되어 온 대상이다. <구지가>나 <정읍사>에서도 산이 작품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후대의 시조 문학에서는 산이 자연 그 자체를 대표한다고 할 만큼 제재로 또는 배경으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산이 지니는 의미는 시대의 변천과 작품에 따라 자못 다양하다. 신화 속의 산은 단군신화나 <구지가>가 보여 주듯이 거룩한 역사가 비롯한 신성한 공간. 곧 우주나 세계 중심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청산별곡>은 구체적인 지명을 취하고 있지는 않으나, ‘청산’이 작품 전체의 주제의식과 결부된 상징성을 띠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뜻은 이 노래의 민요적 속성으로 보아 고려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과 관계를 맺고 있음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사회. 역사적 상황과 연계시켜 ‘청산’의 상징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작품의 형성시기 규정이다.

고려 속가는 대체로 고려 후기, 즉 고려의 정치권력이 문벌귀족에서 권문세족으로 재편성된 시기에 형성되었다. <청산별곡>고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려는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격동과 격변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특히 고려후기는 더욱 그러했다. 거란의 계속적인 외침, 여러 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략과 지배, 이자겸. 묘청의 난, 정중부 등의 무신란, 그리고 이에 따른 민란 등 그야말로 암흑과 수난의 역사였다. 따라서 얼핏 생각하면 고려시대는 내외의 어지러웠던 상황으로 보아 민중의 의기가 꺾이고, 좌절되어 도피와 은일만이 풍미했을 것 같이 보이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고려 민중의 의식은 오히려 내면적으로 더욱 강화되어, 잦은 외침과 내부 관리들의 수탈에 대하여 강한 저항을 보였던 것이다.

고려의 민중은 보수적인 농촌 사회의 생산. 경제구조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세계에 대해 절연을 선언할 수 없게 하는 특성을 지니게 했는지는 몰라도, 은둔적 형태의 행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산 속에 숨어서 소극적인 삶을 사는 태도보다는 오히려 반란과 저항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드러내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차라리 유민으로 떠돌아 다녔던 것이다.

이러한 고려 민중의 현실지향적 태도는 그들이 ‘청산’에 대해 가졌던 의식의 일단을 해명하는 데에 중요한 전제가 된다.

본시 산은 보호의 상징일 뿐 아니라 동시에 유폐의 상징이다. 프로이트가 산 속의 숲이 ‘모성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한 점은 산이 지니고 있는 보호의 상징성과 연결되는 지적이다. 그러나 산은 동시에 유폐의 상징으로 절대고독과 고립의 정서를 수반하는 장소이거나, 일상적 현실세계와 유리된 장소가 된다.

<청산별곡>의 ‘청산’은 낙원적 성격 띨 수 없는 곳이다. 곧 동양에서 말하는 낙원이라 하면 무릉도원이나 도가의 낙원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청산별곡>의 ‘청산’은 노장이 말하는 낙원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청산별곡>의 ‘청산’은 다래나 따먹으면서 밤낮으로 단절의 아픔을 지닌 채 괴로워해야 하는 곳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청산별곡>의 ‘청산’은 낙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낙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청산별곡>의 ‘청산’은 낙원으로서의 요건을 전혀 갖추지 못한 곳이며, 동시에 고려인들의 암울한 삶을 구원받을 수 있는 도피처로도 인식되지 않는 곳이다. 이러한 청산의 비낙원적 성격은 작품 내용과 구체적으로 연계시켜 볼 때 더욱 확연해진다. 청산의 비낙원적 속성은 3연에서 볼 수 있는 속세에로의 회귀감정과 청산에 그대로 체류하고 싶어하는 심리와의 상층에서 생긴 ‘접근회피갈등’ 양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청산’을 낙원으로 인식했다면 ‘떠나고 싶음과’과 ‘있고 싶음’의 두 가지 사이의 갈등심리가 아예 야기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산’은 낙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삶의 터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고통스러운 현실 상황을 감내하지 못한 화자가 그의 암울한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청산’을 단순한 보조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청산별곡>의 ‘청산’은 현실을 초월한 이상향이 아니라, 고난스러운 현실 그 자체에 대한 화자의 적극적인 지향의지가 함축된 내면상징이다. 따라서 <청산별곡>은 현실집착의 성격을 지닌 노래라 할 수 있다. 작품의 문면에는 그러한 현실집착의 의지로 인해 야기된 고통스러움과 슬픔의 양상이 단계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3. ‘새’와 시대상황


<청산별곡>의 제 1연은 피지배계층인 일반 백성들이 지배층의 수탈이나 기타 폭압을 피해 밖으로 나아가 안주하고픈 강렬하고도 절실한 욕망을 영탄적 정조로 노래하고 있다고 봄이 좋을 것이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고려시대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심했는데 <사리화> 등의 속가에 그 실상이 잘 반영되고 있다. 특히 고종 때에는 관리들의 학정과 가렴주구가 얼마나 가혹했던지 일반 백성들은 이민족인 몽고병이 침략해 오는 것은 도리어 좋아했을 정도였다.

<청산별곡>도 이렇게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극한 상황 속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이런 사정은 1연에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향리에 안주하여 농사를 짓고 살 수 없는 딱한 사정이 원인이 되어 나쁜 삶의 조건을 제공해 주는 ‘청산’이지만 일시적으로 도피의 장소가 되고, 이래서 ‘청산’이 삶의 장으로 가상적으로 설정된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반동형성이다. 화자는 고통스러운 현실 상황 속에서 바람직한 현실에로의 강한 지향의지를 드러내면서 청산을 일시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둘째 연을 살펴보자. 이 연은 앞 뒤 행의 의미가 상치되고 있어 문제가 될 수 있는 연이다.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한 나도 자고니러 우니로라


이 부분을 “울어라 울어라 새여/자고 일어나 울어라 새여/너보다도 시름이 많은 나도/자고 일어나 우니노라”와 같이 일반적 해석을 하면 전체 맥락상 모순이 된다. “근심 걱정이 너보다도 많은 내가 우니까 근심 걱정이 나보다도 적은 너도 울어라”고 하는 식의 표현은 있을 수가 없다. 문장의 형식구조로는 모순이 없지만 내용으로 볼 때 이 문장은 성립이 안 된다.

겉으로 보이는 이 연의 내용을 어떤 의미로 해석할 것인가? 필자는 이 연에 나오는 ‘새’의 상징적 의미를 옳게 파악할 수 있다면 쉽게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으리라 본다.

<청산별곡>의 새는 <만전춘별사>의 오리처럼 탕아적. 변질적 행동을 자행하는 사람으로서, 부정적 관념을 표상하기 위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청산별곡>에서의 새도 참새와 같은 행동을 하는 무리인데, 구체적으로는 고려후기의 어려웠던 상황에 처해서도 교묘히 행동하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함과 동시에 국가에 해악을 끼친 무리들, 그러면서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살아가는 간신배들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렇게 볼 때 2연의 화자가 ‘새’로 비유된 간신배와 변절자 무리들에게 양심에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촉구함과 동시에 끝없이 울면서 반성하라는 내용이 된다. 따라서 도치된 내용을 문맥에 부합하도록 바로 잡아 보면 “너보다도(국가나 민족을 위하여)근심 걱정을 많이 한(지금은 후회 없이 울지 않아도 될 떳떳한)나는 (그래도) 늘상 괴로워 울고 있는데, (나보다 근심 걱정을 적게 했던 너는 지금 나보다 더 많이 뉘우치고 많이 울어야 될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너도 자고 일어나 울어야 새야! 그래서 너의 떳떳치 못한 죄과를 조금이라도 씻어라”라는 문의를 깔고 있다고 보겠다.

3연에서도 새가 계속 등장하고 있는데, 새와 관련지어 이 연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던새 가던새 본다 믈아래 가던새 본다

임무든 장글랑 가지고 믈아래 가던새 본다.


이 연에서 ‘새’는 작중화자와는 달리, ‘믈아래’로 갔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산이 머루나 다래와 같은 것으로 연명해야 하는, 화자와 유사한 처지의 사람들이 찾을 수밖에 없는 그런 황량한 곳이라면 청산과 대립되는 ‘믈아래’곧 세속은 시련이 중첩되며 삶을 왜곡시키는 절대비극의 장소이다. 그러나 ‘새’에 비유된 무리들에게는 도리어 부가 약속되는, 욕망실현의 장소이기도 하다.

‘새’로 비유된 무리들은 일신의 영예를 위하여 그와 같은 세력권에 빌붙었고, 3연은 그런 사실을 읊은 것이다. 이 3연은 현실의 부당한 이익에 눈이 먼 무리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노래하고 있으며, ‘믈아래’는 청산과 대립되는 의미를 지니는 곳으로 그런 무리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사회 현실을 나타낸 것으로 봄이 마땅하다.


4. 절대고독과 비극적 상황

화자에게 실제로 더욱 심각한 문제는 청산을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외적 여건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청산을 심리적으로도 고독한 공간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링공 뎌링공하야 나즈란 디내와손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또 엇디 호리라

화자가 은둔에 익숙한 은자이거나, 고독이 몸에 밴 현자여서 그 곳의 생활을 자족스럽게 받아 들였다면 위의 4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절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화자는 물질적으로 곤핍한 현실 생활뿐 아니라 정신적 고독에 더욱 못 견디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밤이 지니고 있는 창조. 생산의 의미와 연관시켜 보면 밤이 부정적이고 폐쇄적인 시간으로만 인식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밤은 낮보다 성스러운 시간이다. 인간이 절대자로부터 정신의 계시를 받는 것은 낮보다는 무의식이 활발하게 되고 내향적이 되는 밤이 쉽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 화자는 밤의 시간에 은거하여 느끼는 심정을 고독한 것으로만 노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4연의 밤은 낮에 대응되는 그런 시간만이 아니고 고려 민중들의 삶을 억압하는, 고난스러운 현실을 상징한 표현일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이와 함께 낮 또한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계속된 어려운 시간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노래의 화자는 낮과 밤을 모두 고독하고 지겨운 시간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연에 와서 ‘청산’이 생활하기에 부적절함을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5연은 더욱 비극적으로 극대화되고 구체화된다.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사실 고려 후기는 원으로 강징당하는 공녀와 엄인 문제로 민심이 극도로 혼란스러웠으며, 이에 따른 불가항력적인 이별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당시에 부모 자식간의 이별, 남녀 연인들의 이별이 본인들의 위사와는 관계없이 강제로 이루어졌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고려 시가의 주제로 이별이 곧잘 채택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강요된 이별에서 오는 비탄과 무관하지 않다. 이 외에도 잠시 살펴 본바와 같이 고려후기에는 환자공출문제.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 등 많은 부정적 요소가 사회전반에 걸쳐 있었다.

이로 미루어 이 연에 등장하는 ‘돌’은 우리가 일상 보는 자연물오서의 돌이 아니라 화자에게 유형. 무형으로 가해진 억압과 이로 인하여 발생한 싱실감, 즉 가족의 이산.재산의 탈취. 연인의 빼앗김 등과 같이 바람직한 삶을 저해하는 장애요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해진 피해는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데까지 미쳐서 ‘돌’은 이들이 받은 억압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포괄하는 상징물이 되며, 밤의 의미와 짝을 이룬다.


5. ‘술’의 현실인식


<청산별곡>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6.7.8연은 화자가 현실에 대하여 갖는 애착심과 현실이 화자를 끄는 유인요소, 곧 ‘술’을 노래하고 있다. 먼저 6연을 보자.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 살어리랏다

나마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

작중의 화자가 의도하는 진정한 뜻은 현실을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으나, 고난스러운 환경이 화자로 하여금 짐짓 그렇게 말하도록 한 것일 뿐이다.

그 다음 7연을 보자.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애정지 가다가 드로라

사사미 짐대예 올아셔 奚琴을 혀거를 드로라


‘에졍지’는 특수한 지명이거나 당시에 관용되었던 어떤 생활공간으로서 ‘청산’과 ‘바다’, ‘믈아래’와 같은 차원의 공간으로 화자에게 인식된 장소다. ‘믈아래’가 새들이 찾는 삶의 현장이듯이 이 ‘에졍지’도 화자가 느끼는 현실의 고통을 잠시라도 망각할 수 있게 하거나 불식시켜 불 수 있는 생활공간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화자는 현실의 아픔을 간직한 채 그러한 ‘에졍지’로 가고다 하는 것이다.

다음에 해석상 문제가 되는 것은 “사사미 짐대예 올아셔 해금을 혀거를 드로라”이다. 이 부분은 부조리한 세상의 어수선한 세태를 노래한 앞부분의 내용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화자는 ‘에졍지’로 가다가 현실의 참담함이나 역겨움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는 일을 직접 보고 들었거나,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고 역겨운 현실을 재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보기 실고 듣기 싫다고 해서 현실을 버리고 떠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현실에 대한 애착은 강해지기 마련이었다.

가다니 뵈브른 도귀 설진 강수를 비조라

조롱곳 누로기 미와 잡사와니 내 엇디 하리잇고

‘청산’에나마 들어가 초근목피를 연명하는 삶을 책하고 싶을 정도로 화자에게 이 세상의 현실은 고난의 연속이다. 그리고 모든 ‘새’(탕아. 변절자)들은 자시의 이익을 찾아서 ‘믈아래’로 날아간다. 가실 자신의 삶도 단절의 아픔과 예측할 수 없는 불행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어떻게 현실을 버릴 수 있겠는가? 화자는 ‘술’이라는 음식을 가져다 놓고 이것에다 생의 아픔을 풀고자 하는 것이다. 삶을 잊기 위해 ‘청산’이나 ‘바다’로 가고자 하는 화자의 괴로운 마음이 자신을 사로잡는 ‘술’에 의하여 완전히 무산된 것처럼 읊고 있다.

민중에게 술이란 멋으로 마시는 것이라기보다 현실 생활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음식의 일종일 뿐이다. 노동의 의욕을 고취시키고 노동의 능률을 배가시키기 위하여 술을 마시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피로와 괴로움을 잊고 삶의 의욕을 새롭게 할 수 있다.


6. 결론


<청산별곡>의 ‘청산’은 낙원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으며, 이로써 볼 때 <청산별곡>은 비애와 절망으로 일관한 좌절과 체념을 주조로 한 은둔의 노래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집착의 의지가 강하게 배어 있는 속가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당대의 부조리하고고 강포한 사회현실과 그로 인하여 발생한 비극적 정서가 기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 작품의 내용은 크게 세 개의 의미단락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1.2.3연으로 묶어질 수 있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작중 화자의 강한 현실집착과 모리배. 변절자 등의 무리로 상징되고 있는 ‘새’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질책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4.5연에 해당되는 두 번째 단락은 열악한 시대 상황에서 연유된 화자의 절대고독과 비극적 정황이 핵심 내용이며, 아울러 미래의 바람직한 삶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노래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락인 6.7.8연에서는 현실애착과 유인요소인 ‘술’을 노래하면서 현실에 집착하고자 하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새’는 모리배. 변절자 등을 상징하며, ‘돌’은 억압과 관리들의 가렴주구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또 ‘믈아래’는 현실적인 삶의 장을 가리키고 ‘에졍지’는 특수한 지명이거나 어떤 생활공간의 명칭으로서 ‘청산’과 ‘바다’, ‘믈아래’에 비견될 수 있는 의미차원의 말이라 보아진다.

Ⅳ. <정읍사>의 성격과 상징성의 辨正

1. 서론

<정읍사>는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까지 속악의 가사로 사용되었는데 그 가사는 『악학궤범』권5 시용학악정재도의 舞鼓조에 전한다. 『고려사』악지 삼국속악조에 부대설화와 함께 전하는 <정읍>은 그 발생이 적어도 삼국시대이며 고려 속가인 <정읍사>의 원가라는 점과 <정읍사>가 조선조의 유학자드에 의해 음설의 가요로 규정되어 배척당하여 중종 때 <五冠山>으로 대체되었던 사실 등을 미루어 볼 때, <정읍사>는 원가 <정읍>에서부터 많은 변화를 거쳐 지금의 내용과 형태로 정착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2. 민요적 성격


<정읍사>는 궁중무악의 창사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정읍사>는 백제. ‘정읍’ 지방의 민요인 <정읍>이 궁중무악의 창사로 수용 개편되었으나 그 민요적 잔재는 그래도 남아 있다. <정읍사>의 원래 작자가 행상인의 처인 한 부녀자임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학계에서는 이러한 민요적 잔재를 들어 이 노래를 민요라고 단전하기도 하였으며, 후속되는 연구에서도 첫째 민요적 후렴구가 반복되는 점, 둘째 기창오악에 불리어진 점, 셋째 가창자가 민중 부녀자였다는 점 등을 들어 <정읍사>를 민요로 파악하였다.

<정읍사>의 민요적 성격은 우선 정서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민요는 절실하면서도 절박한 동기를 계속 민중에게 부여할 수 있는 매력을 지녔거나, 대중적인 삶의 상황과 존재론적 지향성에 민요의 속성이 부합되면서 그 생명은 길어진다. <정읍사>는 가사부전의 백제 가요와는 다리 원가 <정읍>의 특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백제를 거쳐 고려로, 조선으로 전승되어 왔다. 그 이유는 <정읍사>가 철저한 민요적 속성인 보편적 정서와 대중성을 지녔기 때문이라 하겠다.

본사케트는 미적 정서의 3대 특질로 상관성. 공통성. 영속성을 들었는데 <정읍사>에 담긴 정서는 이런 세 가지 특성을 속성으로 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보편적 정서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정읍사>의 민요적 성격을 보다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작자 문제다. <정읍>의 작자는 어느 행상인의 처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이러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정읍사>의 민요적인 성격을 드러내 주는 데 하등의 장애요소가 되지 않는다. <정읍사>의 작자로 되어 있는 행상인의 처는 신분계층상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그 작자로 인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노래의 작가는 사회계층으로 볼 때 하층의 속하는 행상인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하층 천미의 부녀자가 창작가요의 작자가 될 수 없음이 일반적이며, 행상인의 처를 이 가요의 작자로 설정한 것은 아마도 가요와 설화가 습합되는 과정에서 설화의 일반적 구조에 맞추기 위하여 이 가요의 작자가 어느 시기에 조작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 까 한다.

백제 시대의 <정읍>도 어느 한 개인의 작으로 간주하기 어렵고, 또 작자가 행상인의 처로 되어 있는 기록 자체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민요가 현재까지 전승되어 오는 도중에 더러는 국문으로 문자화됐고, 그보다 더 많은 양의 민요가 한문으로 번역되어 전적에 남았으며 이러한 노래는 그 작자에 관해서도 단지 설화적 의미밖에 갖지 않는다.

많은 수의 고려 속가와 마찬가지로 <정읍사>도 원래는 민요였고, 그 형식도 세련되지 못하였으나 악장으로 승화되는 과정에서 정제미와 세련미를 갖추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다음으로 일상적 소재와 표현형식을 통하여 민요적 성격을 살펴보겠다.

<정읍사>는 일상적 소재를 통하여 감정이 진솔하게 토로된 점과 산문구조의 표현 형식을 취하였다는 점이다.

소재로는 여러 민요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소박하면서도 정감어린 달이 여기에 해당된다. 어휘 중 “어느이다 노코시라”는 극히 일상적인 생활언어이며 “즌되를 드되욜셰라”의 직선적. 단도직입적 표현도 비시적이며, 거기서 표출되는 효과도 투박하여 민중적이다. 이런 제 현상은 민요적 특징을 드러내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이렇게 민요에서 많이 사용되는 투박한 비문명어는 대체로 민중들의 지적 수준과 민요의 향토성에서 연유된다.

<정읍사>에 쓰인 어구의 특성에서도 민요적 성격을 찾아낼 수도 있다. <정읍사>에서 관습적 상투어구로 볼 수 있는 것은 이 노래의 첫 연에 나오는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귀야 머리곰 비취오시라”라는 어구다.

일반적으로 민요에서는 소박하면서 일상적. 관습적인 제재라 할 수 있는 달을 상징성을 부여하지 않은 채 원의대로 차용하여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3. <정읍>과 <정읍사>의 관계


<정읍>은 『고려사』 권71 악2 삼국속악조에 부대설화와 함께 그 가명이 전하는 반면, <정읍사>는 별개의 조항도 단독으로 나오지 않고 『고려사』 권71 악2 고려속악조 무고정재 속에 그 가명이 보인다.

<정읍>이하 삼국속악조 소재의 노래들은 단순히 궁중악의 창사로서 채택된 것이 아니라 이 노래들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지역적 특수성을 살림으로써 지방문화를 중앙문화에 통합하고, 지방세력을 중앙집권에 집결시키려는 정치. 문화적 요구에 의해 의도적으로 궁중무악에 채택된 것이었다.

반면 <정읍사>는 무고정재나 ‘학연화대처용무합설’같은 정재무악의 공연에서 불리어진 노래다. 따라서 <정읍사>는 삼국속악조의 <정읍>이 통합 정재무악인 무고에 수용된 결과 이루어진 노래다. 이러므로 민요 <정읍>이 고도로 발달한 궁중의 정재무악으로 수용될 때 많은 변화와 변개를 거쳐 <정읍사>가 이루어졌다. 그러한 변개의 요인과 양상을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읍>은 백제의 민요로 오랫동안 민중에 의하여 구전되다가 고려 때에 악장으로 상승,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정읍>이 궁중의 정재무악으로 수용되어 <정읍사>로 되었다는 점이다. 민요적인 <정읍>이 궁중의 정재무악에 수용됨에 따라, 궁중무악이라는 특수한 기능에 어울리도록 그 노래의 곡과 가사에 개작 내지 변개가 일어나게 된다. 셋째, 속가의 일반적 특징에서도 <정읍사>의 변개성을 찾을 수 있다. 경기체가는 형태적 특성이나 작가계층을 보아 민요로 간주할 수 없으나 속가는 자체의 형태적 특성이나 내용으로 볼 때 민요성을 많이 간직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끝으로 속가에는 전체 가요를 관류하는 어떤 법칙이 결여되어 혼잡스럽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만전춘별사>는 첫 연은 순 한글식으로, 둘째 연은 시조 형식을 방불케 하는 국한문 혼용의 방식, 셋째 연은 <정과정곡>의 일부 가사와 유사한 가사의 차용, 넷째 연은 순 한글식, 다섯째 연은 국한문 혼용의 전개 방식과 부조리한 내용의 반복, 여섯째 연은 단독행으로 한 연을 이루면서 앞의 연들과는 다른 엉뚱한 내용으로 끝맺는 점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4. 상징성의 변정


지금까지 파악된 <정읍사>의 내용은 크게 두 부류로 대별된다. 『고려사』 권71 악2 삼국속악조의 기록을 소중하게 생각하여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는 순순한 애정이 담긴 순수 서정가요로 보는 경우와, 『중종실록』 권32 13년 무인 4월조에 의거하여 음설지사로 파악하려는 견해가 서로 대립되어 있다.

<정읍사>를 ‘남녀간 음사’라고 한 그 조선시대는 사대부들이 주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도덕적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던 시기였다. 당시의 조선 사회는 ‘남녀칠세부동석’이나 ‘남녀칠세 부대의’, ‘남녀칠세부동식’이란 말에서 남녀간의 윤리적 기준이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남녀간의 내외법이 엄격하게 지켜졌으며, 애정의 표시도 극도로 절제되고 제하되던 사회였다. 그래서 『경국대전』에도 여자는 10살 이후에는 밖에 나가지 말도록 했다. 이러한 엄정한 유교주의적 윤리기준에다 당시 『고려사』를 편찬한 정인지 등 학자들이나 관료귀족계층의 경직된 사고와 고려 것에 대한 배척심리가 상승작용하여 단순한 남녀상열의 노래인 정읍사를 음란한 것으로 규정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정읍사>가 지헌영이 지적했던 것처럼 ‘정읍’이 ‘여성비처’이며, ‘즌되’와 ‘내 가논되’가 육체 안에 있는 무엇을 상징하는 은어. 비밀어. 유행어 정도의 ‘음설지가’라면 조선초기, 특히 세종. 성종대에 있었던 궁중악의 개편에서 이 가요가 왜 개편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을까 하는 것이 의문스럽다. 그런데도 이 시기에 <정읍사>가 거론되지 않았다는 것은 <정읍사>가 이른바 남녀상열의 음란한 노래는 아니라는 방증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읍사>는 단순한 남녀의 보편적 애정을 솔직하고 가림 없이 읊은 노래일 뿐 음설스러운 내용이 아닌데도, <처용가>와 함께 가창되는 마당에서 오히려 음설스럽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처용가>외에 <봉황음>. <정과정>. <미타찬> 등이 같이 노래되었는데, <정읍사>의 내용이 이런 종류의 노래들과 비교됨으로써 상대적으로 음설스럽게 보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다음으로 <정읍>이라는 노래의 이름에 대한 ‘여성비처’ 상징성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한다. 이 ‘정읍’을 여성의 신체 중 어떤 일부를 상징한 것으로 보느냐, 고유의 지명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작품 전체의 해석 방향과 성격 규정에 큰 영향이 있으므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고대 가요나 민요가 고도의 세밀한 문학적 창작의식을 갖고 작품을 형상화한 현대의 개인 시 작품처럼 개인적 상징이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읍사>의 ‘정읍’을 지명으로 간주하지 않고, ‘여성의 비처’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이들의 견해는 위에서와 같은 시각에서는 불합리하다. 모든 상징은 이중의 적절성과 지시를 갖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유지되어야 함이 기본원리라 할 것 같으면 또 상징이 일반 대중에 의한 반복적이며 고집이라 할 것 같으며 ‘정읍’이 ‘여성의 비처’를 상징한다 함에는 근본부터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정읍사>는 철저하게 우리민족에게 원형으로 내재해 있는 기다림의 정서가 짙게 밴 시가라 할만하다. 사상이나 정서뿐만 아니라 이 노래를 해설하고 있는 설화의 배경과 구성도 역시 그렇다. 행상을 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산의 고개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 이런 것들은 전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심성과 처지, 상황에서 펼쳐지는 일들이다.


5. ‘져재’의 의미


모든 논고에서 ‘져재’를 시장으로 보는 이유는 첫째, 이 단어 해석이 『고려사』 악지나 『동국여지승람』 등 관련 옛 문헌 등에서 추량할 때 시장으로 풀이할 수 있으므로 별다른 이의 없이 이를 시장으로 해석할 개연성이 가장 짙어 다른 방향으로의 뜻 모색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행상을 간 남편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그의 아내가 산석에 올라가 바라보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는 부대설화 속에 나오는 ‘행상’과 ‘져재’가 쉽게 결부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져재’를 이렇게 ‘시장’으로 파악한다면 첫째, 이 가요의 부대설화와 가요의 내용 사이에 불합리한 모순점이 생기게 된다. 설화 속의 행상인의 처는 남편이 시장에 있다는 것을 예견하면서도, 낮도 아닌 밤에 산의 고개로 남편의 마중을 갔다는 아주 불합리한 기록이 되어버린다. 둘째, ‘져재 녀러신고요’에서 ‘져재’ 다음에는 처소격 조사 ‘외(애)’가 생략된 것인데, ‘져재’를 ‘시장’으로 해석할 때 이 ‘져재’, 즉 시장은 그 속성으로 보아 행상이 낮에 모이는 장소이며 또 거기서 좌판을 벌이고 앉아서 물건을 파는 장소이지 낮도 아닌 밤에 장사꾼들이 주로 ‘녀는’(다디는) 장소는 아닌 것이다. 특히 일반적으로 장이 파하는 것은 저녁 무렵이므로 달이 뜬 밤 시간에 행상이 시장을 왕래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져제’를 ‘시장’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그 뜻을 모색해봄이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져재’를 ‘어느 산의 고유한 고개 명칭’으로 본다면 앞서 언급했던 ‘後涳全져재’의 문제도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생각된다. 즉 이 경우 ‘후공 전져재’라 처리하면 ‘전져재’의 의미가 통하지 않게 되므로 ‘후공전져재’는 ‘후공전 져재’로 파악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져재’를 ‘어느 산의 고유한 고개 명칭’으로 해석하게 되면 설화 속의 구절과 가요의 내용 중 ‘즌되를 드되 욜세라’가 보다 잘 연결되어 이 노래를 무리하게 ‘음사’로 해석하기보다는 기다림의 정서가 바탕이 된 서정적 노래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즌되’는 부대설화의 내용대로 기에 나 있는 ‘질퍽질퍽한 곳’, 즉 泥水之處로 봄이 좋을 듯하다. 또 ‘즌되’는 시장보다는 길이 패여 다니기가 불편한 들길이나 산길에 훨씬 많이 나 있음이 사실이다. 이래서 여인은 남편이 산 고개를 넘다가 해를 입지 않을까 근심하여 이 노래를 불렀다, 라는 『고려사』 악지 삼국속악조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은 방향에서 ‘져재’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우리 민족은 실제의 생활에서는 물론이고 설화에서도 기다림의 장소가 주로 산의 고개였다는 점에서다. 우리의 신화에서는 산이 신성한 중심 공간이며, 이 장소에서 모든 신화적 현상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마중을 간 아내의 기다린 장소가 산의 고개였으므로 ‘져재’도 ‘특정 산의 명칭’인 고유명사일 것으로 생각되며, 뒤에 전승되면서 본래의 의미가 미약하게 인식되어진 것이라 하겠다.


6. 결론


사실 『고려사』 악지 무고정재조의 <정읍사>는 백제의 다른 가사부전의 가요에 비하여 민중의 주된 정서인 애한, 즉 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사』악지 삼국속악조에 ‘행상인의 처’로 기술되어 있는 <정읍>의 작자는 시가와 설화가 습합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것에만 근거하여 <정읍사>를 개인 창작가요로 규정할 수 는 없다.

이렇게 볼 때 『고려사』 악지 삼국속악조에 나오는 <정읍>은 백제 민요의 명칭으로, 같은 책 무고정재에 보이는 <정읍사>는 백제 가요 정읍을 기반으로 재편된 고려 속가의 명칭으로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그리고 이 노래를 ‘남녀 사이의 보편적 애정을 가림없이 노래한 가요’로, 또는 ‘남녀 사이에 정도가 좀 지나친 내용의 노래’로 파악해야 한다. 또한 가명인 ‘정읍’도 ‘여성의 비치’를 가리키는 상징어가 아니라 지방의 명칭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져재’도 고유의 고개 명칭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 하겠다. 결국 <정읍사>는 음사가 아니라 애절한 기다림의 정서가 바탕이 된 순수한 서정가요인 것이다.

Ⅴ. <쌍화점>의 형성배경과 내용특성

1. 서론


『악장가사』소재 속가 <쌍화점>은 산개되지 않은 원래의 모습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반면 『시용향악보』의 <雙花曲>은 속칭 <쌍화점>이라 부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악장가사의 <쌍화점>과는 전혀 다르다.

2. <삼장>과 <쌍화점>의 관계


<삼장>과 <쌍화점>의 동일성 여부 등, 이 두 가요의 관계를 확인하는 데에는 두 작품의 창작시기, 창작주체 혹은 작자, <삼장>의 독립원가 여부 확인 등이 원용될 수 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삼장>의 창작연대는 충렬왕대나 그 이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예로 든 『고려사절요』의 기록에도 충렬왕 25년 5월조에 인요의 무리라 칭할 수 있는 남장별대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고 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동왕 25년 이전부터 이 노래가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2연의 내용이 <삼장>과 같다는 이유만으로 <삼장>과 <쌍화점>의 창작시기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만약 창작시기가 동일하면 <삼장>은 당연히 <쌍화점>의 발췌한역가요가 될 것이므로 이는 간단히 단정할 일이 아니다.

다음, 이 두 작품의 관계를 작자의 확인을 통해서 알아보자. 부대기록을 토대로 한다면 오기와 김원상 등의 무리가 이 가요와 깊게 관련되어 있음은 사실이나 그들이 <삼장>의 작자라는 단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창작자에 대한 불확실성은 고려사의 다른 기록과는 대조적이다. 왜냐하면 『고려사절요』 등의 기록을 보면 작품의 창작 여부를 대체로 잘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자 유무에 관하여 어느 정도 추정케 하는 <삼장>과는 달리, <쌍화점>에는 작자를 추정케 할 자료가 <삼장>관련 문헌 이외는 전혀 없다. 다만 <삼장>과 <쌍화점>의 창작시기가 동일하고, 또 <삼장>이 <쌍화점>의 발췌한역이라면 <삼장>의 작자가 바로 <쌍화점>의 작자와 같은 차원에서 동일하게 취급되겠지만 사정이 그렇지 않으니 작자 유무의 추정도 어렵다.

그러면 <삼장>과 <쌍화점>의 관계 확인의 일환으로 <삼장>이 독립원가인지의 여부를 파악해 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삼장>은 <쌍화점>에서 발췌한역한 가요가 아니고 독립된 원가로 보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만일 <삼장>이 독립된 원가라는 견해가 받아들여진다면 <삼장>은 <쌍화점>에서 발췌한역된 동일시가리기보다는 이미 존재해 오던 <삼장>이 후대로 내려오면서 확대 발전하여 <쌍화점>으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둘의 관계는 확연해진다.

이러한 논지는 <삼장>과 <쌍화점>이 지닌 구조적 특성에서 보면 그 타당성을 일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만약 현전 <쌍화점>이 처음부터 악장으로 전부 사용되었는데도 <삼장> 내용 부분만 편의상 발췌한역하여 『고려사』 악지 등에 수록됐다면 그것을 발췌한역한 타당한 동기를 찾거나,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을 밝히기는 어렵다.

이렇게 <삼장>이 독립원가라면 지금까지 논의된 바와 같이 구 작품의 창작시기와 창작자는 불확실하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삼장>이 원래는 민요이었음을 주장할 수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민요는 그 창작 시기의 확실한 추정과 창작자의 확인이 어려운 것이 그 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 역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생성된 <삼장>은 민간에 전승하던 민요였지만, 뒤에 상승문화재의 한 형태로 궁중악이 된 것이라 본다. 그래서 『고려사』 악지에 기록으로 남겨졌으나 그 근원이 민요였기 때문에 확실한 창작시기와 창작자가 남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즉 <쌍화점>은 독립원가였던 <삼장>이 모태가 되어 형성된 민요로서 다른 3개의 연은 <삼장>의 형식구조에 맞게 맞추어 읊어진 나열식 가요이며, 그 창작시기는 <삼장>의 형성 이후 생성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가요생성 과정상으로 추량할 때 민요적 성격이 짙은 <쌍화점>첫째 연의 생성시기는 충혜왕 이후로 잡는 것이 온당하다고 본다. 따라서 <쌍화점>은 민요 <삼장>이 유행되던 당시의 시대상이 배경이 되어 4연의 형식의 연장체 가요로 일반 민중에 의해서 확대 발전하면서 형성된 가요라 할 수 있다.

3. 작품형성의 사회적 배경

1) 외국인에 의한 고려 여성의 성적 수난

충렬왕 이후 공민왕 초까지 80여 년 간 고려는 원의 속국이 되어 거의 자주성을 상실했으며 온전한 국가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원에 복속된 이후에는 심하게 내정의 간섭을 받았으며, 왕위 계승도 원이 좌지우지했다. 또 원으로 인한 사회문제도 많이 대두되었는데, 그 중 인삼, 매의 공출과 공녀 징발문제가 고려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이 외에도 몽고가 고려에 처음 침략해 왔을 때 고려 여성의 성적 수난은 엄청 컸다. 외침 시 몽고군에 의한 고려 부녀자의 약탈, 능욕은 비일비재했으며, 특히 충렬왕 때 합단의 군사 수만 명이 두 고을을 함락시키고는 부녀자를 윤간하고 포를 떴다는 사실은 외부세력에 의한 고려 여성의 수난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쌍화점> 제1연에 나오는 회회아비는 이런 외부 세력의 극히 일부에 해당된다. 그 구체적 사례로 고려후기인 원 복속 때 원 제국 공부의 사속인인 겁령구로 고려에 들어 온 사람 중에 장순룡으로 이름을 고친 삼가는 회회인으로서, 궁중에서 세력이 아주 컸다. 그는 부지밀직사사와 대장군의 관직을 받기까지 했다.

여러 사정으로 짐작해 보건대 왕과 내료들이 막강한 원의 힘을 얻고 있는 회회아비의 비행을 궁중놀이에서 가무의 내용으로 연회하여 그들의 질시를 샀을 까닭이 없다. 다만 이런 회회아비로 대표되는 외부세력의 막중한 억압을 직접 받은 백성들 사이에서는 민요가 자연스레 생겨나서 바람처럼 번져나갈 수 있었음이 가능하다 할 수 있다.

<쌍화점> 제1연의 내용은 위와 같은 여러 상황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서 당시 고려 민중들의 애환이 응결, 가락으로 변조된 슬픈 고백의 문학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외부세력에 의한 고려 여성의 성적 피폐현상을 회회인이라는 일부의 외세로 대표시켜 노래한 것으로,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노래는 대유법이 적용된 민요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2) 승려들의 부패상


고려 태조는 훈요 10조 첫 번째에서 불교를 호국 종교로 강조했다. 그 이후 불교는 국교로 국가에 공헌을 많이 했으나, 반면 폐해도 심했다. 국가 초기에는 체제상 권력과 결탁하여 비호를 받았던 고려의 불교가 중기. 후기로 내려갈수록 타락하여 급기야 불교를 비판하며 배척하는 세력이 차츰 생겨나기 시작했다.

성리학의 전래와 발달은 양립이 거의 불가능한 불교의 배척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여기다가 불교 자체가 타락했으니 배척의 기운이 일어남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고 하겠다. 결국 상층 계층의 불교배척의 기운, 불교 자체의 타락, 정신세계를 지배할 새로운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유학의 등장, 백성들의 불교에 대한 환멸, 이런 것들이 제 요인이 되어 승려의 음란행위를 담은 민중의 노래가 자연스레 형성, 유포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보아진다.

어떤 사회적 현상이 민중의 심성에 감발되어 하나의 노래로 형성되어 불려지기에는 겹치는 많은 사건들과 시간이 혼효된 뒤에야 가능하리라 본다. 하나의 사건에 따라 바로 하나의 노래가 민중이나 한 개인에 의하여 당장 창작된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렇게 볼 때 이 노래가 생겨날 즈음에는 벌써 불교의 타락이 극심했으며, 이 삼장사는 당시 부패한 모든 절을 대표한 하나의 절에 불과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3) 지배계층의 퇴폐적 행위


지배계층이 어느 정도 타락해 있었는가 하는 점은 당시의 권려구조상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왕들의 생활상을 통해 그 전모를 개략적으로 추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왕들의 절도 없는 행위와 음란은 어느 정도는 정당화되거나 묵인할 수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려 후기나 고려말에 들어와서 왕들의 음행은 그 도가 지나쳤다. 황음연락에만 탐닉에만 탐닉, 여염집 여자를 자주 음행했고, 성도착행위까지도 보였으며 후처를 간음했는가 하면 서모인 수비 권씨를 강제로 욕보이기도 했다. 남의 아내가 첩으로서 얼굴이 잘 생겼다는 말만 들으면 친척이거나 누구거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총애하는 측근자나 불량배를 시켜 빼앗아 오거나 그 집에 가서 음란한 짓을 하였으니 절도가 없었다.

이로 보면 ‘우물의 용’에 가장 근접되는 왕이 고려 후기의 어떤 왕보다는 우왕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동쪽 교외에서 놀다가 귀법사의 남쪽 개천에 이르러 궁녀와 함께 음란하기 그지 없는 짓을 했으며, 물 속에서 옷을 벗고 여러 기생들과 마교를 행하기도 했다.

끝간 데를 모르는 왕의 변태적 행위, 일반 백성들의 실망과 원성, 왕권의 실추 등 복합적인 요인이 기저가 되어 <쌍화점> 3연과 같은 노래가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용이지만 용 같지 않은, 우물에 있는 용, 바꾸어 말하면 왕이지만 왕으로서의 품위와 금도가 없는 그런 왕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물의 용’으로 표현한 것이라 보인다.

<쌍화점> 3연은 왕들의 문란했던 당시의 사실들이 작품 형성배경의 요인으로 작용했고, 자연발생적으로 이런 유의 노래가 백성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본다. 충렬왕 이후 사회적 상황과 관련된 참요가 많이 등장하여 유행하였다는 점도 <쌍화점>형성근거를 뒷받침해 주는 한 요소가 된다.


4) 무뢰배들의 횡포


충렬왕 이후 시대는 지배계층의 도덕적 타락과 함께 일반 사회의 기장도 상당히 문란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시대일수록 완력있는 자들이 날뛰며 상당한 세력으로 일반 백성들을 괴롭히기 마련이다.

<쌍화점>4연의 “술팔지븨...... 그짓아비 내손모글 주여이다”에 나오는 ‘그짓아비’는 술을 파는 집의 관리자나, 술집과 관련돼 있는 무뢰한으로 완력을 행사하면서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시정의 잡배무리로 봄이 좋을 것 같다. 노래에서도 여자가 술을 사러 간 것으로 보아 상층계층의 부녀자라기보다는 이름없는 일반 서민이나 천민계층의 부녀자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피해를 입은 서민계층에서 이 노래가 집중적으로 발생하여 불려졌다고 하겠으며, 그런 집단의 횡포에 의하여 성적으로 고통을 받던 당시 고려의 사회. 역사적 상황이 4연에 역력히 나타나 있다고 생각된다.


4. 악장일 때 제기되는 <쌍화점> 내용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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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멸다로러거디러죠고맛간싀구비가네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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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점> 전문, 『악장가사』 소재


여기서는 위에 보인 <쌍화점>의 내용과 관련지어 이 노래가 악장일 때 제기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쌍화점>의 노래 가사가 민요이었을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것이 향유자와 가창자가 민요와는 전혀 다른 궁중의 악장으로 사용될 때는 이들 계층에 도저히 용납되기 어려운 내용이라는 점이다. 위에 예시된 <쌍화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노래의 첫째 연에서는 회회아비로 대표되는 외국인들의 고려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가 거침없이 노래되고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서 고려왕이나 고려의 관리들이 회회인들을 멀리하거나 물리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고려 여설들에 대한 회회인들의 성적 착취 사실을 숨김없이 읊고 있는 <쌍화점>의 첫째 연이 이런 부위기의 고려후기 조정에서 악장으로 사용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상황이나 시기로 보아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음으로 <쌍화점>의 둘째 연을 보면, 이 연에는 삼장사의 사주가 절에 복을 빌기 위하여 불켜러 온 부녀자의 손을 잡는 행위가 노래되고 있다.

고려는 불교가 국교였다. 고려가 부처의 힘으로 건립되었다고 태조 왕건의 훈요 10조에도 나와 있다. 그래서 왕과 고려인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대단하고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그들의 문화와 사상 전반의 상부구조는 물론 민중계층의 하부의식 구조도 불교와 때어서는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불교가 세속화하여 타락하자 불교배척의 기운이 많이 확산되었다.

고려의 많은 승려들이 불교의 깊은 이념이나 사상을 도외시하고 세속의 길을 걸으면서 일반인이나 국가에 폐해를 끼쳤음은 앞에서 살핀 바와 같다. 그래서 민간계층에서는 이를 비난하거나 한탄해 마지않는 비난의 말과 풍자한 가요가 생성될 수도 있었겠으나, 사실 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불승과 밀착되고, 불사와 결탁하여 고리대를 하기도 한 궁정의 입장에서 볼 때 <쌍화점>과 같은 내용의 노래가 악장으로 사용될 수 없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쌍화점>에 나오는 삼장사는 중앙지역인 개성에 있던 규모가 큰 절이어서 다른 사원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영향력이 지대하였을 것이므로 그 사찰의 문제가 일반인들에게는 중대한 과실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던 개성의 큰 절 지주의 비행을 민중계층에서는 그래도 별 주저없이 노래로써 원말하거나 폭로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것도 민요일 때 가능한 일이지, 악장의 경우는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다음에는 <쌍화점> 셋째 연이 악장으로 사용되기에는 불가능한 점에 대하여 논급해 보고자 한다.

셋째 연에서 문제되는 것은 가해자격인 우물의 용이 화자의 손목을 잡는 행위이다. 여기서 ‘우물의 용’은 왕이다. 그러니 왕이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의 손목을 잡는다는 식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 연의 내용도 악장으로 사용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노래의 주된 향유자인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인데 왕 자신들이 그들의 음란한 행위를 다룬 노래를 그냥 들으면서 즐겼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군주시대는 왕의 권력과 권한은 절대적이며, 그 권위는 신성불가침의 대상이다. 이는 왕의 자질과 행동과는 전혀 관계없이 지켜지는 일이다. 그렇게 때문에 <쌍화점>의 용이 왕의 상징이 아니면 몰라도 왕일 것 같으면 이러 내용의 노래를 속악의 가사로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5. 결론


지금까지 <삼장>의 성격, <삼장>과 <쌍화점>의 관계, <쌍화점>형성의 시대배경과 이 노래의 내용이 악장으로 사용되기 어려운 점에 내하여 관략하게 논하여 보았다.

첫째, 고려사 악지의 한역가요 <삼장>은 원래 유행 민요로서 오잠 들 폐행에 의하여 충렬왕 때에 악장으로 취택된 가요다.

둘째, <삼장>은 <쌍화점>의 모태가 된 기본연이고, <쌍화점>은 독립원가였던 <삼장>이 고려의 역사적 사실과 사회상을 배경으로 확대 발전된 4연 형식의 연장체 가요다.

셋째, <쌍화점> 각 연은 회회아비로 대표되는 외세에 의해 고려 여성들이 당한 성적 수난산, 사주로 나타난 승려들의 성적 타락과 부패상, 우물 안 용으로 상징되는 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층의 도덕적 타락과 퇴폐상, 술집아비로 대표되는 무뢰배들의 횡포 등 사회 각층의 비행으로 피해를 입은 민중의 삶이 형성배경이 된 민요다.

넷째, <삼장>의 확대발전인 이 <쌍화점>은 충렬왕 이후 원 지배하늬 어느 시기에 악장으로 채택되면서, 원가 <삼장>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볼 수 있겠으나 다섯 번째의 지적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다섯째, <쌍화점>에는 고려시대 악자응로 사용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즉 1연 회회아비의 음행, 2연 삼장사주의 음행, 3연 우물용의 음행, 4연 무뢰배들의 행위는 민요로서는 가사의 내용이 될 수 있지만, 고려 속악의 가사로는 불가능하리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들 각 연에 나오는 ‘손목을 쥐는 행위자들’인 이들이 고려 시대 이 노래의 주된 향유자들이며 이 노래들이 불려지는 연향의 주된 참여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하므로 <쌍화점>의 내용은 물론, 이 노래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도 전반적인 고찰이 이루어져야 될 것이라 생각된다.

Ⅵ. <만전춘별사>의 민요적 성격과 시작 화자

1. 민요적 성격


<만전춘별사>는 별개의 가요들에서 일 부분씩을 때어 와서 짜 맞춘 가요일 가능성이 크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속가들과는 달리 특이한 형태적 특징을 갖고 있다. 또 마지막 6연은 한 행으로 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연구성 방식은 다른 속가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서 이것도 이 노래의 특성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1) 작자 문제로 본 민요적 성격


<만전춘별사> 등 다른 속가의 작자는 문헌 어느 곳에도 분명하게 기록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기 때문에 가요에 따르는 부수적인 조건만 가지고는 개인 창작시가로 보기 어렵다. 남녀의 진한 애정을 솔직 대담하게 노래하고 있는 속가 <만전춘별사>도 처음에는 백성들 사이에서 불려졌던 민요였는데 뒤에 여러 경로를 통하여 궁중으로 들어와 악장으로 승화되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만전춘별사>는 별개의 여러 가요 중에서 각기 다른 일부분씩을 가져와서 짜 맞춘 것과 같은 특성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이것도 이 노래의 작자가 특정 개인이 아님을 말해 주는 한 요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노래는 의미가 유사한 별개의 여러 노래가 악장으로 재편된 것으로 이 과정에서 누군가가 필요에 의하여 여러 노래의 가사 일부를 취사선택하여 새로운 다른 노래로 짜 맞추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노래가 서로 다른 가요에서 일부를 가져 와서 조합한 것 같고, 또 여러 연이 서로 불균제한 형태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제는 하나의 지향점으로 잘 통일되어 있는데, 이는 이 노래의 각 연들이 새로운 가요의 한 부분으로 전이될 때에 전체 가요의 주제에 부합되는 역할을 하도록 맞춰졌기 때문이다.

2) 내용으로 본 민요적 성격


우리나라의 민요에서 애정요가 주종을 이룸은 주지의 사실이다. <만전춘별사>도 남녀의 뜨거운 육욕적 사랑 행위를 대담하게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 노래의 이러한 내용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논급하려 한다.


南山에 자리보와 玉山을 벼여누여

錦繡山 니블안해 麝香각시를 아나누어

藥든 가슴을 맛초압사이다 맛초압사이다


위내용은 시적화자가 임과 어울려 정사를 벌이는 장면을 읊고 있다. 이 노래가 민요일 경우, 그 내용이 대중의 입을 통하여 전파되고 전승되기 때문에 어느 특정인이 책임을 질 필요가 없으며, 여러 사람 가운데 묻혀서 노래할 수 있기 때문에 한 개인이 내용 때문에 낯을 붉히지 않아도 된다. 다중 속에 묻혀 개인이 익명화되면 지금까지 갖고 있던 자신의 가치기준이 끝없이 완화되거나 상실되며, 행동은 윤리 의식에서 멀어지든지 과감하게 자신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애정면에서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민요 중에 그 당시 유교적 관념이나 도덕적 기준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음도 이로써 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만전춘별사> 5연도 대중 속에 묻힌 개인이 아니고서는 나서서 부르기가 어려웠던 내용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것이 고려후기 궁중의 음란한 분위기에 부합되고 향유계층의 취향에 딱 들어맞아 속악의 가사로 취택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요컨대, <만전춘별사>에서 노래된 남녀 관계의 내용면에는 현대의 민요와 비교하여 볼 때 유사성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시대적인 격차가 있어서 현대의 민요와 비교하여 그것의 민요성을 추단함에는 난점이 따르긴 하지만, 위와 같은 점에서 <만전춘별사>는 애초에는 고려 사회에서 당시 민중들이 불렀던 민요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3) 애정처리 방식으로 본 민요적 성격

<만전춘별사>의 첫 연을 보자.


어름우희 냇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주글만뎡

어름우희 댓님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주글만뎡

정둔 오날밤 더뒤새오시라 더듸새오시라


위의 연에 사용된 표현기법과 같은 방식이나 내용으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노래로 나타낼 수 있는 계층은 대체로 일반 서민이다. 이는 서민들의 의식이 집중적으로 스며 있는 조선시대의 사설시조나 판소리와 같은 문학 양식에는 양반계층이 향유했던 평시조와는 다른 정서와 사상, 그리고 표현방식이 사용됐다는 점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서민계층의 문학은 제재는 말할 것도 없고 진술해 나가는 표현방식도 양반계층이 담당했던 문학과는 아주 동떨어졌다.

<만전춘별사>의 1연과 예시한 민요에 사용된 표현기법과 내용은 우리 서민들이 즐겨 사용한 전형적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위의 모든 노래들은 하나의 틀에서 변이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로써 미루어 볼 때, 역시 <만전춘별사>는 고려의 민중들이 민요의 한 틀을 빌려서 자신들의 마음을 노래로 불렀던 민요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만전춘별사>가 민요임을 말해 주는 또 다른 요인으로는 이 노래에 일상어가 주로 사용된 점과 애정표현이 소극적이면서도 우회적으로 표출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애정의 소극적. 우회적 표현은 저항의 서술 내용과는 대조적인 면이긴 하나 애정의 적극적인 표출방식과 더불어 우리 민요의 한 특성이기도 하다.


올하 올하 아련 비올하

여흘란 어뒤구고 소해 자라 온다

소콧얼면 여흘도 됴하니 여흘도 됴하니

위의 가요는 <만전춘별사>의 네 번째 연이다. 앞에서 이 노래는 일반 민줄들에 의하여 불려진 순수 민요 원가가 악장으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내용과 형식에 일대 수정이 가해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형된 것일 볼 수 있겠다 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중의 분위기나 상층계층의 취향에 맞도록 변개되었다 하더라도 본래의 태를 완전히 벗어버리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에는 특별한 시어나, 생활과 관련이 먼 이미지보다는 일상적인 어휘와 서민들의 애정에 관한 직선적 생각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적인 단어로써 그들의 애정을 소극적인 자세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소극적 자세 내지 소박성 또한 민요의 한 특성이다.

그런데 위의 연에서 겉으로 드러난 표현으로 볼 때는 이 연의 표층적인 의미구조는 여성화자가 오리에 비유된 남자에게 묻고, 또 남자가 그것에 답하는 형식으로 전개된 듯하지만 기실은 여성이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독백형식이다.

이 연에 나오는 ‘오리’. ‘여울’. ‘소’ 등은 전통적이며 세련된 시어와는 거리가 먼 아주 일상적인 시어이며, 우리의 생활 터전에서 쉽게 볼 수 있고 접할 수도 있는 낱말이다. 이처럼 <만전춘별사>에 전통적인 소극적 애정표현 방식이 답습되었으므로 이런 속성을 지닌 일반 민중의 공감과 호응을 얻어 이 노래는 민요로 정착되어 전승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기층민인 민중의 취향에 맞는 민요이었음과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일반 서민과 심성면에서는 같을 수밖에 없었던 상층 계층에게도 감응을 줄 수 있어 결국 악장으로도 승화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2. 시적 화자

1) ‘4연’의 내용과 시적 화자


(가) 올하 올하

아련 비올하

여흘란 어듸두고

소해 자라온다


(나) 소콧얼면 여흘도 됴하니 여흘도 됴하니


‘여울’로 표현된 여성은 ‘소’로 나타내어진 여성과는 현격하게 다른 성향을 지녔으며, 애정관도 아주 대조적이라 하겠다. 또 임에 대한 심리적 반응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와 ‘여울’은 ‘오리’, 즉 님에 대한 지속적 관계와 일시적 관계를 상징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와 같은 속성이 <만전춘별사> 1연에 나오는 ‘나’로 표현된 시적 화자의 진술에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남성에 비유된 ‘오리’의 특성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오리’는 <만전춘별사>의 4연에서 처음에는 ‘소’(여자)를 떠났다가 제멋대로 다시 ‘소’로 돌아오는 남자에 비유되었다. <만전춘별사>에서 ‘오리’에 비유된 남자는 애정면에서 ‘소’에 비유된 여성에게 피해와 고통을 안겨 주면서도 정작 본인은 이에 대하여는 별로 가책을 느끼지 않고 당연시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오리’는 위의 설명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노래에 나오는 유형의 남자를 비유하기에는 어느 정도 적절하다 하겠다. 그러나 철새가 어느 시점이 되면 또 다른 곳으로 가듯이 이 연의 ‘오리’고 시적 화자인 ‘나’, 즉 ‘소’에 왔다가 또 다시 다른 여자에게로 갈 사람으로 생각되어진 것이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생각해볼 때, 여자인 ‘소’는 임인 ‘오리’가 찾아올 대의 기쁨도 잠시 뿐, 다음의 불안을 예견하고 4연의 마지막 행에서 자신의 생각을 독백처럼 읊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만전춘별사>는 애정의 피해자이면서 남성으로부터 또 다른 고통을 받고 살아 온 옛 우리 여성들의 삶을 대변하는 노래임을 알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민중들로부터 공감을 얻어 오랫동안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노래 4연의 내용이 일상의 담화 체계로 볼 때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어 평상적인 해석으로써는 바르게 설명이 안된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대개는 4연의 마지막 행인 “소콧 얼면 여흘도 됴하니 여흘도 됴하니”를 ‘소’의 물음에 대한 ‘오리’의 대답으로 확실하게 못박고 있으면서, 문면대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면 4연의 마지막 행을 ‘오리’에 해당되는 남자의 대답으로 일단 전제하여 4연 전체를 해석해보고, 그리고 난 후 어떤 점이 모순인지 알아보자.

부분적으로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인 해석은 대체로 다음처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 (오리에 대한 소의 물음)

오리야 오리야

연약한 비오리

여울은 어디에 두고

소에 자러 오느냐


(나) (소의 물음에 대한 오리의 대답)

소 곧 얼면 여울도 좋으니 여울도 좋으니


그런데 위에서 보면, “오리야 너는 여울인 여자가 좋아서 소인 나를 버리고 여울로 갔는데, 왜 이제는 여울을 버리고 소인 나에게 자러 오느냐”면서 ‘소’가 ‘오리’를 힐난하는 투로 쏘아붙이는데, ‘오리’의 한다는 말이 “소가 얼면 여울도 좋으니”였다. 이는 요구하는 물음에 부합이 전혀 안되는 동문서답식 대답인 것이다.

‘소’의 물음인 “여울은 어디에 두고 소에 자러 오느냐”에 대한 ‘오리’의 대답은 당연히 “여울이 얼면 소도 좋으니......”로 되어야 순리며, 또 그 물음에 대한 바른 대답이 된다. 그런데 ‘오리’는 ‘소’의 물음에도 배치되는 내용인 “소가 얼면 여울도 좋으니”로 대답했다. 이 대답은 ‘오리’가 ‘소’를 버리고 ‘여울’로 찾아 간 이유에 해당된다. 그런데 4연을 보면 ‘소’는 ‘오리’에게 왜 ‘소’에 자러 왔느냐고 물었지, 왜 ‘여울’을 좋아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로 볼 때, 결국 ‘오리’는 ‘소’에 대답해야 할 내용은 대답하지 않고 묻지도 않은 것을 말한 것이 된 셈이다. 그러므로 이 4연의 내용을 위에 예시한 것처럼 해석할 때는 논리상 모순이 된다. 따라서 이 연은 여성 자신이 ‘오리’인 남자에게 물은 물음에 대하여 스스로 대답한 것이다.

우리의 고대 사회에는 여성 자탄조의 민요가 대량 생성된 것이 많다. 이 <만전춘별사>의 생성도 동궤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노래이며, 특히 4연은 여성이 자신을 떨쳐 버리고 간 남자가 다시 온 것을 좋아하면서도 진심과는 달리 힐난조로 물은 부분과 자신에게 ‘자러 온 남자’가 ‘여울’과 같은 다른 여자에게로 갈 것을 예견하여 그 불안한 마음을 읊은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 이렇게 보면 4연의 화자는 ‘소’에 해당되는 시적화자인 ‘나’뿐이며, ‘오리’는 시적 화자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1연과 같은 한 사람의 시적 화자가 계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풀이도 다음과 같이 자연스레 된다.


(가) (‘소’로 비유된 여성의 ‘오리’로 비유된 남자에 대한 물음)

‘오리’야 ‘오리’야 연약한(애정에 굳지 못한) ‘비오리’(빛이 찬란한 ‘오리’처럼 잘생기기 는 했으나 다른 여자를 찾아 나서는, 그러면서도 권위를 세우려 하는 사람)야, (당신이 좋아서 찾아 간) ‘여울’(시적 화자인 ‘나’와 적대관계에 있는 여성)은 어디에 두고 (이 제 와서) ‘소’(시적화자)로 자러 오느냐?

(나) (‘소’인 여성 스스로의 대답)

(그래 지금 나에게 자러 오긴 해도) ‘소’가 얼면(애정이 식으면 혹은 싫증이 나면) ‘여 울’도 좋으니(라고 말하겠지, 그러면서 철새인 ‘오리’가 다시 날아가듯 다시 또 ‘여울’ 도 좋다며 자러 가겠지).


2) ‘5연’의 시적 화자와 어휘


<만전춘별사>의 5연은 남녀간의 ‘육욕적 사랑’에의 희원과 그것에서 발원되는 열정적 쾌감과 긴장 및 한이 주된 정서다. 이러한 사랑과 성을 통하여 획득되는 긴장과 쾌락 등은 우주적인 생명력을 나타내는 긍정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므로 문학의 일반적 주제가 됨과 동시에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바람직하게 풀고 넘어야 할 문학적 과제이기도 하다. 또한 이런 종류의 쾌락적 심리는 인간 공통의 보편적 관심과 흥밋거리이며, 누구에게나 별 저항감 없이 쉽게 수용될 수 있는 요소 중의 하나로 어떤 정서보다 민중에로의 흡인력이 강하다.

(1) 내용과 시적 화자

먼저 <만전춘별사>의 5연을 보자.

南山에 자리보와 玉山을 벼여누어

錦繡山 니블안해 麝香각시를 아나누어

南山에 자리보와 玉山을 벼어누어

錦繡山 니블안해 麝香각시를 아나누어

藥든 가슴을 맛초압사이다 맛초압사이다

‘사향각시를 안아 눕는 행위’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남성의 행위다. 그리고 사향각시를 안나 누워서 가슴을 맞추자고 하는 언술은 남성 쪽의 발화 내용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상대를 ‘품에 껴안는 행위’의 주체는 사회 통념상 여성이라기보다는 남성이 됨이 보통이며, 또 시공을 초월하여 그렇게 이해되는 것이 순리이며 인간사회의 자연스런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슴을 맞추자”고 말하는 쪽도 그 어감이나 분의기로 볼 때 화자는 남성일 가능성이 크므로 이 5연의 화자를 남성으로 봄도 어느 정도 일 리는 있다 하겠다.

그런데 실제로 이 5연이 시적화자를 남성으로 보면 이 가요의 전체 내용과 맥이 닿지 않는 문제점이 발생되며 따라서 해석에도 무리가 생긴다. 그래서 5연의 시적화자는 남성화자가 아닌 여성 단독화자로 보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만전춘별사>는 앞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체가 6연 구성이며 4연까지는 적어도 일관되게 여성화자이다. 이 노래의 4연까지 일관되어 오던 여성화자의 진술이 5연에서 갑자기 남성화자의 진술로 바뀐 타당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

<만전춘별사> 1연은 1인칭 시적화자의 이별에 대한 거부의 태고가 아주 결연하다. 2연은 임에 대한 알뜰한 기다림이다. 2연이 이별의 상황과 임에 대한 기다림을 주로 노래했다면, 3연은 그리움과 기다림의 끝에서 생기는 원망의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3연의 임에 대한 원망은 단순히 일반적인 원망 그 자체는 아니며, 극대화된 그리움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4연은 임이 돌아 온 사실을 두고, 시적화자는 자신의 기쁜 심정과 불안한 심리를 융합시켜 노래하고 있다. 위와 같은 내용을 기본적으로 깔고서 이 5연은 시작된다. 이런 사정과 연관시켜 본다면 이 5연의 시적화자는 남녀 중 누가 되어야 할 것인가?

5연의 시적화자를 남자로 보면 이 연을 “남산에 자리보아 옥산을 베고 누워 금수산 이불 안에 사향각시를 안아 누워 약든 가슴을 맞춥시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문면 그대로의 해석이다. 남성 자신이 스스로 떠났던 옛날의 여자 소에게로 돌아와서 한다는 말이 위의 풀이와 같은 내용으로 말했다면 이는 너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현실적인 남녀사이에서 이는 가능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남자 자신이 스스로 찾아 온 여성을 두고 이와 같은 내용의 진술을 뱉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이 연에서 시적화자를 남성으로 보면 ‘사향각시’로 지칭되는 대상은 자신이 찾아 온 ‘소’인 여성이 아니라 또 다른 여인이라 봄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다른 여인인 ‘사향각시’를 찾을 것 같으면 애초에 ‘소’인 시적 화자에게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이 연의 “금슈산 니블 안해 사향각시를 아나 누어 약든 가슴을 맛초압사이다”에 나로는 ‘맛초압사이다’의 어말어미는 발화자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자고 권유하거나 청하는 어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대목을 놓고 보면 남성화자는 다른 남성에게 ‘사향각시’를 같이 안아 눕자는 의미로 해석되므로 아무래도 문맥상 무리가 있다. 이렇게 볼 때, 5연의 시적화자도 1연에서부터 4연까지 일관되어 온 여성화자로 봄이 타당하다.

(2) ‘사향각시’와 ‘약든 가삼’의 문맥적 의미


<만전춘별사> 5연에서 시적화자를 가리키는 말인 ‘사향각시’와 ‘약든 가삼’의 뜻은 이 말에 대한 사전적 의미로는 풀이만으로는 미흡하며 부적절하다. 5연의 내용은 시적 화자의 소망을 진술한 것이며, 이의 극적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상징적이고도 과장된 표현법을 구사하고 있다.

‘남산’은 고유명사일 수도 있고,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일반적인 보통의 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노래의 내용과 같이 남산을 잠자리 그 자체로 볼 수는 없다. 이는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보다 훨씬 과장된 표현으로 뭔가 다른 것을 상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옥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옥산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옥산’이 여성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옥근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남성적 의미 관련 어휘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옥산의 상징이 무엇이든, 5연의 내용대로 보면 베고 눕는 대상임은 분명하다. 베고 누울 수 있는 대상은 사랑하는 상대방의 팔이나 무릎도 되겠고 실제 베개도 된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옥산’은 산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다만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 뿐이며, 우회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렇다면, 옥산은 상징되는 대상과는 형태면에서나 규모면에서 유사성이 없는 동떨어진 어휘다.

‘사향각시’도 남산, 옥산과 같은 의미 차원에서 사용된 단어이며, 이런 측면에서 이 말의 내포적 의미를 이해해야 되리라 본다. 즉 ‘사향각시’는 임으로부터 관심과 흥미를 전폭적으로 갖게 하는 여성의 비유일 뿐이며, 시적화자는 자기 자신도 임을 끌 수 있는 그런 여성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임도 그렇게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또 여성화자는 스스로가 어떤 다른 여성보다도 임에게는 자신이 ‘사향각시’일 수 있다는 내심의 확신도 갖고 있다. 그래서 5연에서 ‘사향각시’가 되고 싶은 자신을 안아 누워 가슴을 맞추자고 임에게 요구를 한 것이다.

다음에는 ‘사향각시’의 의미를 주로 시적 화자의 심리와 관련시켜 살펴보겠다.

시적 화자는 임과의 열정적 행동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걸러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로 볼 때, 이 시적화자의 마음은 대담한 일면과 소극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보아야 된다. 이러한 시적화자의 소극적 태도와 심리는 4연을 비롯한 다른 연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태도와 정서는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심리적 특성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결국 우리 문학의 한 전통으로 운위되기도 한다.

<만전춘별사>의 여성은 전통적인 한국 여성의 심성을 지닌 소극적인 여성이다. 이런 여성이 임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남성을 사로잡는 미약인 사향을 구해 가슴에 차고 그 사정을 임에게 알리면서까지 사랑을 구하려 했겠는가? 사향은 여자들이 남자와 사랑을 모르게 얻으려고 할 때 사용하던 미약이다. 비밀스러움이 일차적으로 요구된다. 만약 남성이 이 사실을 뒤에라도 알게 된다면 여성에게 등을 돌릴 것이 확실하며 이렇게 되면 여성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만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자신이 사향 주머니를 찬 각시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임에게 사랑을 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향각시’는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므로 5연에서의 이 말을 사전적인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만전춘별사> 5연의 ‘사향각시’가 일반 민중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서를 풍기는 단어이거나 그러한 상황에서 사용된 말이라면, 이 노래는 민요에서 악장으로 승화되기도 전에 소멸되든지 또 악장으로 취택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그 결과 상실된 많은 가요 중의 하나가 되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사향각시’와 의미상 관련된 ‘약든 가삼’의 뜻을 한번 생각해 보자.

필자가 생각해 보건대, 이 ‘약든 가삼’도 지금의 약손과 같은 암묵적인 의미 구조를 갖고 작용을 하는 어휘라 여겨진다. 마치 약손으로 앓는 아이의 배를 만져 주면 그 배가 낫듯이 ‘약든 가슴’은 임의 아픈 가슴과 외로운 마음을 한 번 맞춤으로써 낫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임은 소(沼)에서 여울로, 그리고 다시 여울에서 소로 가고 오는 방황을 계속했으며 앞으로도 계속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임의 가슴이 병든 탓이며 임의 마음이 외로운 까닭일 것이다. 이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임의 가슴과 외로운 마음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가슴은 어떤 다른 여성의 가슴이 아닌 시적화자 자신의 다정한 가슴이며, 또 사향 주머니를 차고 있는 그런 가슴이 아닌 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자신의 뜨거운 가슴이라는 것이다. 이런 가슴이 임에게는 약이 되는 좋은 가슴인 ‘약든가삼’인 셈이다.

이처럼 ‘약든 가삼’의 의미를 지금 사용하고 있는 ‘약손’으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위와 같은 해석이 가능하리라 본다. 그리고 이렇게 의미를 풀이하면 ‘사향각시’의 문맥적 의미와도 잘 맞아떨어진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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