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설> 연구

by 방정민

<차마설> 연구


1. 說의 개념과 전개


한문의 산문형식은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에 이르러 제각기 상이한 사상과 필법으로 그 당시 어지럽던 시대상을 기록하여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 또는 한문 산문의 내용은 국가나 시국에 대한 견해를 담아 제후들이 정치를 개혁하는 일에 참고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시가와 같은 형식으로는 그들의 사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으므로 사실의 기록이나 사건에 대한 의사표명들을 통해서 여러 산문형식이 흥성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설은 당나라의 한유 때부터 자기 주변에 있는 사물을 통해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른 도리를 설명함과 동시에, 만물에 대한 철학적 사변을 드러내는 중요한 유형으로 대두되었다. 설이라는 문체는 육경과 『논어』, 『맹자』에 으뜸을 두고 여러 왕들에게 올리는 글이기도 하며, 군신들의 모임이나 사우 사이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글 중의 하나였다. 그 내용으로 사물의 나열이나 정경의 묘사가 아니라 議論, 義理, 治道, 人物 포폄 등을 위주로 하는 글이다. 다시 말해 설은 인생과 사회 주변의 어떤 상황과 함께, 道와 文이 연결되어 작가들이 구체적인 시대 산물의 글쓰기로서 나타내었고 당대의 문체 비평과 함께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약하면 첫째, 『역경』설괘에서 悅로서 기원한 것처럼 사람들을 말로써 기쁘게 한다는 뜻을 지니고 발전하였다. 그래서 고대 제왕에게 올리는 글에서부터 전국시대 변론가들의 서설, 제자백가의 학설로 나타났다가 개인에게 전하는 글로 정착되었다. 둘째, 주변 사물이나 개인의 경험을 위주로 하여 현실이나 실제의 사건과 현상을 중시하여 만물을 도에 대한 의리와 연결시켜 자기의 뜻으로 해석하는 글로 당송에 이르러 성행하였다. 셋째, 증서류와 함께 취급되어 감계나 권고의 글로서 시대 상황에 실용적인 글로 쓰임새가 나타났다.

『한문문체론』에서는 한문학 양식의 한 갈래인 說을 논변류의 범주에 넣고 있으면서도 설을 解로서 의를 해석하여 자기의 뜻을 서술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설이라는 양식은 근본 속성상 무엇인가를 풀어내고 분석하여 규명하는 성격을 지니며 설은 자기의 뜻을 대상의 풀이에서 밝히는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즉 설은 사물의 이치를 풀이하고(解)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펴는 것(術)으로, 論보다는 평이하며 상세하게 해설해서 이해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다. 사물 또는 사건(사실, 개별적 체험)의 뜻과 이치를 해석하고 자신의 의견(깨우침, 교훈)을 서술하는 것이므로 다분히 우의적이고 비유적이며 교훈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2. <차마설>의 저자 이곡에 대하여

이곡은 충렬왕대 말기에 지방 戶長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아버지를 여의어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한미한 가문의 아들이었다. 20살이 되어 예부시의 전단계인 국자감시인 擧子科에 합격하고 23살(충숙왕 7년, 1320)에 秀才科에 등재하여 ‘북주사록참군(정7품)’이 되고, 이어 29세에 정동행성에서 시행하는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중앙으로 발탁되지 못한 채 세월을 보냈다. 이후 政堂문학이나 중앙관리에게 글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등의 노력으로 34세에 본국 예문겸열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정동행성의 향시에 합격 후 30세에 元都에서 시행하는 시험을 쳤으나 낙방하였다.

그는 다시 35세에 정동행성의 향시에 합격한 후 36세(충숙 후 2년, 1333)에 원나라에서 제과를 응시하여 한림국사원 검열관(정8품)으로 제수되었고, 이후 원나라에서나 고려에서 여러 관직에 제수되어 자신과 기문의 지위를 상승시켰다. 이런 동안에 원나라에 왕래한 것은 네 차례였고 그 기간은 충숙 후 2~3년(1333~1334.6), 충숙 후 4~6(1335.3~1337), 충혜 후 2~충목 2년(1341~1346), 충목 3~4(1347. 冬~1348)으로 거의 10년 가까이 원에서 생활하였다.

이렇듯 이곡은 원나라의 간섭이 심하던 충숙왕대부터 충정왕대까지 살았다. 원나라 과거에 등제하기 까지는 가난하고 문벌 없는 궁벽한 시골 선비로서 생활했고, 그의 가정 형편은 원 과거 등제 후 관리로서 출세한 이후에 나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본국과 원나라에서의 여러 관직을 두로 역임하면서 관록을 이중으로 받았지만 원나라와 본국을 왕래하여 생활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부유하게 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곡의 나리 쉰(충목 3년, 1347)이 되었어도 ‘집은 가난’하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원나라에서는 두 끼의 식사를 한 번에 해결하거나 책을 사 보려고 돈을 빌리는가 하며, 京師 복덕방에서 집을 빌려 채소밭을 가꾸어 소금과 양념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등의 생활을 그의 『가정집』에서 표현하는 등 어려운 생계가 그의 글 곳곳에 나타난다.

3. <차마설> 분석


<차마설>의 내용은 크게 제 1문단과 그 이하의 문단으로 구분되어질 수 있다. 이런 2단 구성방식은 한문학의 양식 중의 한 갈래인 說의 양식에 주로 사용되어 왔다. 즉 서두에 필자의 경험을 제시되고 그 이하에서 경험에서 비롯된 필자의 견해나 생각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개인적 체험이 먼저 제시된 후 그 체험에 따른 보편화가 일어나는 방식은 설이라는 양식이 가지는 일반적인 짜임이다. ‘先사실제시+後의미부여’라는 2단 구성방식은 직관적 통찰에 의해 바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깨우침’을 전달하는데 적절하다. 이 점은 문학적 인식이 개념을 통한 논리적 사고에 의하기보다 대상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직관적 인식에 의거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차마설>의 전반부에서 필자는 말을 빌려 탄 경험을 술회하고 있다. 여위고 둔한 말을 빌렸을 때와 준마를 빌렸을 때의 마음가짐이 제각각 달라서 여위고 둔한 말일 때는 스스로 조심하여 후회하는 일이 적은 데 비해 준마일 때는 의기양양하여 마침내 위태로워 떨어지는 근심을 면치 못하였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필자는 두 번째 문단에서 첫 문단의 경험에서 비롯한 인간 심리의 변화상을 포착하면서 그 경험을 확대하고 있다. 즉 하루아침의 소용에 대비하기 위해 빌린 것에도 인간의 마음이 쉽게 변화하는데 대해 자기 소유의 물건일 경우에는 이보다 더할 것이라는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세 번째 문단에서 필자는 소유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하고 있다. 즉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빌리지 아니한 것이 없다는 생각, 진정 자신의 소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넷째 문단에서는 빌린 것이 깊고 많아 자기 소유로 알고 끝내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다섯째 문단에서는 그릇된 소유관념에 근거한 인간 심리의 허망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섯째 문단에서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견해에 신뢰감을 부여하고 있고 마지막 일곱째 문단에서는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와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차마설>의 주제는 ‘소유에 따른 인간 심리의 변화에 대한 경계와 비판’, 나아가 ‘무소유에 대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일상체험을 통해 ‘사람의 가진 것 어느 것이나 남에게서 빌린 것’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고찰했다. 그리고 사회의 힘에 대한 원천과 그 역할에 대한 태도를 제시하여 인간행위의 원리를 찾았다. 충선, 충숙, 충혜왕대의 잘못된 정치인식에 대하여 반성을 촉구하며 운영주체들의 올바른 사회관계 정립을 요구하는 것이다.

당시 고려 사회의 왕들은 원나라의 간섭에 따라 즉위하고 물러나고, 복위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더구나 국왕에 ‘忠’자를 덧붙여서 원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는 시기였다. 이런 과정에서 이곡은 원나라를 부인할 수 없는 세력으로 파악했다고 생각된다. 충렬왕의 경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시키기 위해 원나라 宿衛 때의 시종신료를 중심으로 정치운영을 꾀하여 자신의 사적 유대를 통한 인적 기반을 구축한다. 이후 정치세력들의 정권다툼이 부자간의 정권다툼으로 번지게 된다. 이런 정치 운영방식은 충숙, 충혜왕대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충렬왕 이후 원 출신 공주들이 고려에 출가하여 왕비가 되는데, 예기치 않은 정쟁을 유발하기도 하였고 정쟁에서 반드시 공주의 嬖幸(폐행)이 개입되어 모략, 중상, 음모를 자행하여 사태를 악화시켰으며, 더욱 원에까지 비화하여 부원 세력이 활개를 치고, 원은 그들의 간섭이나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폐행들 중 천예와 같은 환관이 크게 대두되어 충렬왕대의 관기를 크게 문란하게 만든다. 환관은 참관(6품이상)에 이를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지만 궁중 측근에서 시종하고 있었던 관계로 총애를 얻어 심지어는 군작을 받는 자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심양고와 조적의 무리들이 충혜왕과 홍빈을 가둔 사건까지 나타나게 되고, 충혜왕은 옷 보따리 하나 들고 떠나가다 이역의 땅에서 알 수 없는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가 나타난다. 특히 이곡이 이런 사회현상을 염두해 두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만방의 임금이 홀몸이 되고, 백승의 집이 외로운 신하가 될 것(萬邦之君爲獨夫 百乘之家爲孤臣)”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獨夫’와 ‘孤臣’은 왕의 지위나 귀한 지위를 가지고 있으나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하나의 외로운 필부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군주에 대한 경각심의 비판이 들어 있다. 즉 ‘天命이란 失德하면 失民하고 失民하면 失天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곡은 한 나라 임금이 지닌 권력은 다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힘에 의지하여 ‘높고 귀한’존재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고려가 원나라의 복속국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간접적인 저항감을 드러내고, 백성의 힘에 의지하는 나라로서 주체에 대한 인식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원에 의지한 정권 창출을 기대하기보다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의 올바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곡은 <차마설>에서 말을 빌려 탈 때 느끼는 개인의 경험을 통하여 국내외 정치현실에 입각한 군신, 부자, 부부, 노복과 주인과의 관계에 대한 은근한 비판을 하고, 당시 정치 현황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어야 할 사회관계의 상하에 대한 정체성을 제시했다. 이곡이 제시한 이런 사회관계는 어느 시대에나 사회에 유용한 이치가 됨을 알 수 있다.

[차마설 한글 번역]


내가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으므로 혹 빌려서 타는데, 여위고 둔하여 걸음이 느린 말이면 비록 급한 일이 있어도 감히 채찍질을 가하지 못하고 조심조심하여 곧 넘어질 것 같이 여기다가, 개울이나 구렁을 만나면 곧 내려 걸어가므로 후회하는 일이 적었다. 발이 높고 귀가 날카로운 준마로서 잘 달리는 말에 올라타면 의기양양하게 마음대로 채찍질하여 고삐를 놓으면 언덕과 골짜기가 평지처럼 보이니 심히 장쾌하였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위태로워서 떨어지는 근심을 면치 못하였다.

아, 사람의 마음이 옮겨지고 바뀌는 것이 이와 같을까? 남의 물건을 빌려서 하루아침 소용에 대비하는 것도 이와 같거든, 하물며 참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랴.

그러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어느 것이나 빌리지 아니한 것이 없다.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높고 부귀한 자리를 가졌고,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 은총과 귀함을 누리며, 아들은 아비로부터, 지어미는 지아비로부터, 비복은 상전으로부터 힘과 권세를 빌려서 가지고 있다.

그 빌린 바가 또한 깊고 많아서 대개는 자기 소유로 하고 끝내 반성할 줄 모르고 있으니, 어찌 미혹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도 혹 잠깐 사이에 그 빌린 것이 도로 돌아가게 되면, 만방의 임금도 외톨이가 되고, 백승을 가졌던 집도 외로운 신하가 되니, 하물며 그보다 더 미약한 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맹자가 말하기를, “남의 것을 오랫동안 빌려 쓰고 있으면서 돌려주지 아니하면, 어찌 그것이 자기의 소유가 아닌 줄 알겠는가?” 하였다.

내가 여기에 느낀 바가 있어서 <차마설>을 지어 그 뜻을 넓히노라.

*참고논문 및 저서*

1. 유미경, 「이곡의 설 작품 연구:설 장르 성격 규명을 위한 예비적 고찰」, 이화여대대학원 석사, 2003.

2. 신수경, 「고전수필을 활용한 글쓰기 방안 연구」, 영남대교육대학원 석사, 2005.

3. 김현식, 『언어특강 오감도 고전문학편』, 좋은책,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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