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삼국사표> 연구
1. 저자 김부식
김부식은 문종 29년(1075)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그리고 의종 5년(1151)에 사망하여 인종묘에 배향되었다. 고려 전기 사회의 난숙함이 절정에 달하여 퇴락의 단서가 무르익을 무렵부터 그 응축된 모순이 대파국을 목전에 둔 시기까지를 현장 정치가로 살아온 셈이다. 특히 인종대에 최고의 실력자 가운데 하나였던 그로서는 현실 모순과 예고된 파국의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구나 그가 진압총책으로 잠재운 서경세력의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12세기 고려사회를 지배한 가장 강력한 조류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그의 삶과 활동이 단순한 개인의 영욕에 그칠 수 없는 까닭이 있으며, 『삼국사기』를 이해할 때 그의 삶에 대한 조망이 동반되어야 할 당위가 있다.
김부식의 증조부 김위영은 고려 태조가 신라 경순왕의 귀부를 계기로 경주를 두었을 때 그 주장으로 임명된 인물이다. 그의 집안은 대체로 무열왕계에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이는 신라의 주요 지배가문이었다. 아버지 김근은 과거에 합격하여 출사했고 일찍이 문종대에 박인량과 함께 입송한 경험이 있다. 이때 두 사람의 시문은 송나라 사람들의 칭예를 받아 『소화집』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당시 송의 문장가였던 소철과 소식형제를 모방하여 김부식과 김부철 형제의 이름을 짓게 된 유래는 이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김부식의 두 형인 부필과 부일을 포함하여 네 형제는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다. 특히 김부식과 김부철은 그의 아버지 김근의 여망대로 송나라에까지 문명을 날렸다.
김부식은 숙종 초년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는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입송했는데, 잦은 송 문화에의 경험은 국제적 지식인으로서의 감각을 배양하는데 기여했다. 당말, 오대의 혼란을 거친 송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각 방면에서 개혁이 추진되었다. 중국의 역대 개혁이란 늘상 옛것에서 모범을 구하여 복고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송대의 고문부흥운동 역시 예외가 아니다. 고문부흥운동은 『신당서』를 수찬한 송기와 구양수가 주도하여 보편화하였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특히 사론의 경우 『신당서』를 가장 많이 채용한 『구당서』 인용은 전무했던 것은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금과의 외교 현안을 둘러싼 논의에서 김부식 형제의 노선은 이후 점차 중론을 장악하였다. 금제국의 성공적 위상은 역설적으로 김부식의 정치적 위상을 빠르게 신장시켰다. 무엇보다도 서경세력과 묘청의 등장은 전혀 새로운 격랑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묘청의 서경천도 주장은 단순한 정치적 이해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더욱이 서경천도의 제반 주장은 한때 왕을 비롯한 광범한 지지를 실제로 받고 있었다. 그것은 당대 고려를 풍미했던 개경쇠운론의 연장이었다. 그러므로 이미 숙종 초에 남경천도론이 대두한 바 있다. 도참적 관심은 예종, 인종대에도 여전하였다. 밖으로는 요나라의 멸망을, 그리고 안으로는 이자겸의 왕권도전을 배경으로 묘청과 백수한, 정지상 일파의 역할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김부식은 늘 그들에 대한 반론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서경에 궁궐이 세워지고 칭제건원론 및 攻金論이 대두되었다. 서경세력의 신비적 의미 부여와 주장들은 모두 나라를 이롭게 하고 왕업을 늘린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다. 여기에 재난과 흉조는 인종으로 하여금 천도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도록 한 또 다른 요인이었다. 이렇듯 12세기 고려사회는 안팎으로 재난과 고통의 시간으로 인한 도참적, 신비적 사고가 만연하였다.
김부식은 인종 13년(1135) 묘청의 주장에 동조했던 정지상, 백수한 등을 먼저 처단하였다. 그러나 출정군 지휘관 윤언이가 김부식의 작전에 제어를 하였고, 김부식의 막료가 개경에서 한유충과 문공인 등에 의해 배척됨으로써 사태는 조기 진압되지 않았다. 마침내 1년을 넘긴 지구전이 김부식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윤언이와 한유충 등 김부식과 대립한 정치세력의 퇴조가 뛰따랐다. 왕은 김부식을 수충정난정국공신으로 책봉하였고, 김부식은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상서리부사라는 최고 권력 수반에 이르렀다. 그는 윤언이와 한유충을 정지상과 교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탄핵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1140년 김부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유충과 윤언이를 사면한다. 이들의 중앙정계복귀는 결정적으로 김부식의 정치적 고립을 재촉하였다.
김부식은 1142년(인종 20)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왕은 자신의 치세동안 무엇보다 왕권을 위해 헌신했던 김부식에게 많은 예우와 위로를 하였다. 그는 3년 뒤 삼국사기 편찬을 마쳤다. 인종 사후 그는 다시 인종실록 수찬을 주재하였다. 요, 금의 교체와 이자겸, 묘청 등과 관련된 고려사회의 가장 격렬한 내외 정치적 위기를 목도하고 직접 현장의 중심에서 왕조질서를 위해 진력한 정치가는 의종 5년(1151)2월 7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말년에서야 정치적 의지를 좌절당하였다. 그가 출사하던 숙종때부터 예비되어온 귀족사회의 모순 폭발은 그의 죽음에 곧이어 발발하였다. 그의 생애는 자못 의종조에서 폭발하게 되는 공전의 격동을 완고하게 제어해온 면이 있다.
2. 『삼국사기』의 편찬배경
1) 『삼국사기』의 시대적 배경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의하여 김부식이 71세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을 직접 겪고 적대세력을 일소한 김부식이 「參考」8명, 「管句」1명, 「同管句」1명 등 10명의 도움을 받아 이미 기전체의 사서로서 본기와 열전의 체제를 갖추고 있던 『구삼국사』를 기저로 하고 종래의 사서를 참고하여 보다 발전된 과거의 역사를 써서 그것을 통한 현실비판을 목적으로 저술한 것이다. 그러므로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는 인종 대의 儒風과 文風을 바탕으로 하여, 고려중기사회가 겪고 있던 왕권의 위협, 전통적 사유의 비합리성이란 현실, 금ㆍ송 대립, 송문화의 연계성이란 국제적 감각이나 문화의식 및 고려중기사회가 지향하던 려초 이래의 유교적 지향이란 시대적 통념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개국 이래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북진정책으로 거란과 여진의 침입을 물리치는 국력을 떨쳤다. 그러나 12세기 고려가 중세사회로 전환하면서 북진정책의 전통적 의식과 문화의 우위에 대한 자신을 타민족에 대한 지배 가능성으로 보는 정신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윤관의 여진정벌은 실패하고 이 실패는 곧 북진정책의 후퇴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태조 이래 중세사회로의 전환을 위하여 유학을 중앙집권의 이념으로서 채택하여 광종, 성종을 거쳐 문화력의 우세를 가질 수 있던 현종, 문종대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문화력의 우위와 군사력의 우위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점은 고려가 거란이나 여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체제는 그대로 유지된 자주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윤관의 여진 정벌이 실패로 끝나자 현실적으로 북진정책보다는 친송문화정책으로 전환한 고려는 송, 거란과 국제적 대립 속에서 역학적인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이 시기의 고려에서의 중국 중심의 세계관의 형성 발전은 고려시대 문화의 진전을 의미하여 중국문화의 흡수 소화의 하나로서 유교문화의 적극적인 수용을 하게 된 것이다.
전시과를 경제적인 토대로 하여 성립한 고려는 11대 문종에 이루러 전시과를 완성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완비하면서 전기의 호족적인 체질을 극복하고 전통문화와의 융합위에서 발전하였다. 이런 국운의 융성과 문화의 발전은 문을 숭상하는 문화적 황금기를 이루었으나 곧 외민족의 침입에서 오는 위기감과 중앙귀족들의 정권싸움으로 내부적 갈등이 표출되어 드디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김부식은 이런 외부적인 침략과 내부의 갈등을 직접 목도함으로써 「진삼국사표」에서도 밝힌 바, 당시 지식인의 역사의식 결여를 반성하고 유교적 선왕주의와 덕치주의에 근거하여 유가적 도통의 단절상을 말하였으며 송대이후의 사문의식을 내세우고, 『삼국사기』의 논찬에서 『자치통감』과 『춘추론』을 인용하면서 춘추의 실리와 왕도적 덕의 지향을 부르짖었다. 이러한 점이 후세에 김부식이 전통적이 아닌 사대적인 바탕위에서 사서를 썼으며 『삼국사기』가 사대적이고 신라중심적인 왜곡을 하였다는 논거로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사대라는 것은 유학의 수용에 따른 중국문화의 섭취로서 고려문화 능력의 확산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시 고려의 문화능력은 이미 유교의 발달과 대장경의 간행, 실록의 편찬, 개인문집의 출판 등 문자와 기록의 수단에 의하여 크게 확대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문화는 전통문화의 체질을 중세적인 것으로 발전 심화시킨 것이었고, 그것은 고려의 대외관계상의 위치를 크게 높이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유교의 보편화에 따른 역사지식의 중국에 대한 편향성과 역사서술의 흠결을 반성하여 『삼국사기』를 지음으로써 유교적 역사관과 역사서술의 체제로서 12세기 사회를 확립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2) 『삼국사기』의 문학적 배경
고려조 문학에 있어서 특징적인 사실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전통적인 신라향가를 수용하지 못하고 귀족문신들에 의해서 한문학 지상주의로 흘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문학이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신라를 계승함으로써 전통적인 맥락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고려 전기의 한문학은 신라 말기의 한문학을 별다른 수정 없이 계승, 답습하여 만당시풍과 사육변려문이 문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풍은 지나친 修飾과 이에 따르는 내용의 빈곤으로 인하여 부화하고 無實한 경향으로 흐르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문풍이 계속되는 가운데 고려 전기 한문학은 과거제도의 실시와 함께 번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광종 9년(953)년에 詩, 賦, 頌, 策 등 한문학 위주의 과거제가 실시되면서 입신양명의 불가피한 요소인 사장학이 크게 일어났으며, 역대왕의 숭문정책, 교육제도의 완비 등 여러 가지 여건이 조성되자 한문학이 더욱 성하였고 과거제의 실시는 문단의 범위를 크게 확대시켰으며 이와 더불어 한문학의 수준도 이 시대에 와서야 본 궤도에 올랐다.
그러나 과거제의 실시가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역기능이나 폐단을 낳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제의 실시는 한문학 지상의 파행적인 경향을 낳게하여, 고유문학의 바람직한 발전을 저해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科문체의 발달을 자극하였다. 특히 십운시, 육운시 등의 科詩는 근체시나 고시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과거시험을 제외하고는 전혀 쓸모가 없는 시였으며, 典故修辭의 다용, 聲律의 조화, 교묘한 대구 등을 특성으로 하는 음풍농월식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바람직한 문학이 내용과 형식, 효용성과 예술성, 교훈과 오락 등의 원만한 조화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형식에만 치우친 과문체의 발달은 문학의 올바른 진전을 위하여 유해무익한 것이었으며 과문체의 이러한 폐단은 과문이 입신을 위한 불가피한 요소로 널리 익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시문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어 당시의 문풍이 내용부재의 부화한 경향으로 흘렀다. 그러므로 문학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지나친 수식과 조탁이 능사로 인정되는 풍토에서는 작가의 자유로운 창의력이 발휘된 온당한 문학을 기대하기가 어려웠으며 필연적으로 새로운 문풍의 출현이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晩唐시풍과 사육변려문, 그리고 과문체 시문이 고려 전기 문풍의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 문단의 일각에서는 부화, 부실한 문단의 풍조를 비판하는 경향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최승로나 최충에게서는 이미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경학 강론이 절정에 달하고 유학의 수준이 크게 심화되었던 예종, 인종대의 일이었다.
청연각이나 기타 경연에서 경전을 강론했던 유신들은 부화하고 무실한 사장을 신랄하게 비판 부정하였다. 그러나 유신들이 사장을 비판하고 사장과 유학이 대립되었다는 사실을 곧 바로 문학을 전면 부정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儒者들에게 있어 문학은 餘技에 불과했고 하찮은 사장은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儒道를 구현하기 위한 載道之器로서의 문학은 유자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때 유학의 수준이 크게 심화되었던 예종, 인종 때의 문단에 만당풍이나 변려문과는 다소 이질적인 성격을 지닌 송시풍이나 고문운동이 전개된 것도 유학자 문학의 이와 같은 성격을 대변한 것으로 본다.
김부식은 바로 이러한 시대에 활동한 대표적 유학자, 문인으로 고려의 고문 정착과 문풍 변화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김부식이 지은 고문으로 오늘날 전해진 것은 거의 없는 상황이지만 『삼국사기』의 <열전>을 통해서 보면 그의 고문이 도달한 수준은 매우 높은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이러한 배경으로 살펴 보건대 고려 전기의 문학은 시와 산문에 걸쳐 나타냈던 신라의 문풍을 수용하면서도 점진적으로 발전된 양상을 보여 신라의 미분화된 문학양식을 극복하여 고려 나름대로의 문학세계를 이룩하였으며, 이것이 고려전기 이후의 문학 발전에 바탕이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3. 산문문학 表에 대하여- 「진삼국사표」 분석
표의 성격에 대해서 류협은 ‘漢代에 예의가 정해져서 사품이 있게 되었으니, 첫째를 章이라 하고 둘째를 奏라 하고, 셋째를 表라 하고 넷째를 議라 하였다... 표는 要請를 진정하고... 表는 標다. 대개 장이나 표의 기능을 왕궁에서 진술하여 지기의 마음에 있는 곡절을 분명하게 피력한 데 있다. 이것은 필자의 일신을 장식할 뿐만 아니라, 국가를 장식하는 명황인 것이다...표는 조정에 내놓은 것이므로 표현 구조가 광채로 빛나야 할 것이다. 표라는 양식은 여러 가지 것을 내포하나 인정은 끊임없이 변이하므로 정통한 주장으로 그 풍속을 강조하고 청징한 문장에 의해서 美麗性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라고 하여 표가 자기의 마음에 있는 곡절을 분명하게 피력하는데 그 목적이 있으며, 표는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나라를 위할 수 있는 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표를 많이 남긴 것은 그 만큼 문장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며, 그것으로 문명을 떨쳤다는 것은 미루어 알 수 있다.
표는 변려문으로 쓰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최자가 그의 『보한집』에서 ‘무릇 牋文과 表文은 사륙문이면서 簾對한 것으로 제한하였다. 그것은 겸손하고 단속하여 법도를 넘지 않기 위함인데 말이 간략하면서 뜻이 곡진한 것을 우수하게 여겼다. 수, 당 이전에는 말을 방자히 하여 렴률이 없었으나 당나라 이후로는 대려도 있었고 렴율도 있었다. 대려를 황장하게 하는 것도 오히려 예가 아닌데, 하물며 그 말이 산만하고 렴율이 없는 것은 불공이다.’ 라고 한 바와 같이 사육으로 쓰도록 엄격히 제한되고 있었는데 김부식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표 41편 중 ‘진삼국사기표’하나만 제외하고는 모두 변려문이다. 그러나 김부식이 공용문서의 성격상 많은 변려문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변려문은 극도의 수식과 대구를 중시하던 당시 문단의 일반적인 풍조와는 달리 간결한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말이 간략하면서도 뜻이 다하는 것으로 변려문의 모범으로 삼았던 최자가 그의 『보한집』에서 ‘예로부터 사육문은 한유나 유종원이 아니면 송나라 삼현으로 귀감을 삼았다.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문열공(김부식)으로 모범을 삼아고 좋을 것이다.’ 라고 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김부식은 시대적인 여건상 4, 6으로 쓰도록 엄격히 제한되어 있던 표문에서도 간결한 표현을 위주로 했으며 특히 ‘짐삼국사기표’는 변려문의 성격을 벗어나 고문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 준다.
이 ‘진삼국사기표’를 통해서 보면 변려문의 특성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4자구가 많다는 것 뿐인데, 이들 4자구들은 의도적인 조직이라기보다는 작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놓여진 것으로 보여지며 6자구와의 조응관계고 무시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변려문의 가장 중요한 특성의 하나라고 여겨지는 대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몇 개의 대구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지극히 적은 수이며 구구마다 정교한 대구로 수식되는 변려문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이러한 글에서 흔히 인용되는 典故 수사도 거의 없고 과장이나 허세도 찾아볼 수 없다. 이 글은 표문이면서도 별다른 수식 없이 『삼국사기』의 편찬 의도를 극히 간결하고 사실적으로 서술했는데, 그러한 점에서 고문체의 특성에 접근했다할 것이다. 최자가 「東人之文四六」에 이글을 싣고 있으면서도 4.6이 아니라고 주석을 단 것이나 김택영이 麗.韓의 고문, 9대가의 글 속에 이 글을 포함시켰던 것도 이러한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짐삼국사기표’의 내용을 살펴볼 때 『삼국사기』는 당시의 지식층들이 자국의 역사에 疏略하였던 비주체성을 극복하고 유교적 역사 의식과 유교적 역사 관계를 빌어서, 자국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지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그것은 다분히 치난의 역사를 통해 교훈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후대에 그가 사대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전통적 자료를 泯沒시키고 제거했다는 비난을 한 몸에 책임지게 되었지만, 문화의 유교화야말로 민족 문화의 바람직한 진전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이고 교훈적인 유교사관을 철저히 정립했던 김부식에 있어 다분히 미신적이고 설화적 성격의 농후하였던 전통 문화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한 것이었다.
김부식이 살았던 시대의 특수한 상황을 전혀 무시하고 현대의 민족의식이나 주체성을 가지고 김부식을 평가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며, 삼국사기의 편판 의도로 ‘진삼국사기표’에서 김부식이 강조했던 우리 역사에서 왕의 치적, 신하의 충성, 백성의 도리를 모두 밝혀 후세에 교훈으로 삼겠다고 한 문맥을 바로 파악한다면 그의 목적과 주장을 바르게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한글 번역*
신 김부식은 아뢰나이다. 옛날 여러 나라들은 제각기 사관을 두어 기록했으니, 맹자께서도 “진의 『사승』과 초의 『도올』과 노의 『춘추』가 모두 한가지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하옵건대 우리 해동의 삼국은 나라를 세워 지나온 자취가 장구하와, 마땅히 그 사실들이 서책에 드러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폐하께서는 늙은 저에게 편집을 하명하셨사옵니다. 그러나 신이 스스로를 헤아려보매 모자랄 뿐인지라, 어찌 할 바를 모르겠더이다. 엎드려 헤아려 보건대, 성상폐하께서는 당요의 문사를 타고나시고 하우의 근검을 체득하여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정사를 돌보시는 사이에도 널리 옛일을 섭렵하여 신에게 이르셨나이다.
“오늘날 학사들과 대부들이 오경이나 제자의 서책과 진, 한시대 이래의 역대 중국 사서에는 간혹 넓게 통달해 자세히 말하는 이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일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망연해져서 그 시말을 알지 못하니 매우 한탄할 일이다.”하셨습니다. 하물며 저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는 나라를 열고 솥의 세 발처럼 서서 예로서 중국과 교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범엽의 『한서』와 송기의 『당서』에는 모두 삼국의 열전을 두었는데, 중국의 일은 자세히 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히 하여 삼국의 사실이 다 갖추어 실지 않았고, 또『고기』는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이 빠지고 없어져서, 임금의 선악과 신하의 충사와 나라의 안위와 인민의 치란을 다 드러내어 권계로 남기지 못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삼장(재주, 학문, 식견)의 뛰어난 재사를 얻어 일가의 역사를 이루어 만세에 전해 해와 별처럼 밝게 할 일입니다.
신과 같은 이는 본래 뛰어난 재사가 아니옵고 더구나 깊은 식견도 없사오며, 나이를 먹어감에 정신은 날로 더욱 혼몽해져서 글읽기는 비록 부지런히 하나 덮으면 곧 잊어버리고, 붓을 잡은 손에 힘이 없어 원고를 대해 써 내려가기가 힘드옵니다. 신의 학술이 굼뜨고 얕기가 이와 같은데 지난 성현들의 말씀과 옛일들을 깊고 어두운 것이 저와 같사오니, 이 때문에 정력을 다해 겨우 책을 이루게 되었으나 마침내 볼 만한 것이 없어 다만 스스로 부끄러워할 따름입니다. 엎드려 바라옵나니 성상폐하께서는 멋대로 추려 재단한 점을 용서해 주시고, 함부로 지은 죄를 용서하시어, 비록 명산에 비장할 만한 것은 아니오나 깨진 항아리에 바르는 일은 없기를 바라나이다. 제 구구한 망언을 하늘의 해가 비추고 있나이다. 삼가 본기 28권,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을 찬술하여, 표와 함께 아뢰어, 위로 천람을 더럽히나이다.
+한자 풀이+
檮:어리석을 ‘도’, 杌:등걸 ‘올’, 俾:~하여금 ~하게 함 ‘비’, 陛:섬돌 ‘폐’, 宵:밤 ‘소’, 盰:해질 ‘간’(소의간식:날이 세기 전에 일어나 옷을 입고 해가 진후 늦게 저녁을 먹는다는 뜻으로 천자가 정사에 부지런함을 이름), 淹:넓을 ‘엄’, 却:도리어 ‘각’, 茫:아득할 ‘망’, 鼎:솥 ‘정’, 峙:우뚝 솟을 ‘치’, 蕪:거칠 ‘무’, 拙:졸렬 ‘졸’, 闕:빠트릴 ‘궐’, 貽:전할 ‘이’, 炳:빛나게 할 ‘병’, 奧:깊을 ‘오’, 遲:늦을 ‘지’, 暮:저녁 ‘모’, 掩:가릴 ‘엄’, 操: 잡을 ‘조’, 蹇:꿈틀 ‘건’, 疲:고달프게 할 ‘피’, 竭:다할 ‘갈’, 僅:겨우 ‘근’, ( ):마침내 ‘글’, 祗:다만 ‘지’, 愧:부끄러워 할 ‘괴’, 諒:살펴 알다 ‘량’, 狂簡(광간):뜻은 크나 행위가 여기 다르지 못해 소홀하고 거칠다. 赦:용서할 ‘사’, 藏:간직할 ‘장’, 庶:바랄 ‘서’, 覆:엎어질 ‘복’, 醬:간장 ‘장’, 瓿:작은 항아리 ‘부’
* 참고문헌*
1. 윤종일, 「김부식의 역사인식의 일연구」, 경희대대학교 대학원 석사, 1982.
2. 이영주, 「김부식의 문학 연구」,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1992.
3. 김부식/이강래 옮김, 『삼국사기』, 한길사, 1998.
4. 이규호, 『한국 한문학의 이해』, 새문사, 2004.
5. 왕성순 편저, 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 여한십가문초』, 솔출판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