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

by 방정민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소설가이다. 자유의 철학자로 불리며 행동적 지식인의 원조가 되었다. 현상학, 실존철학, 마르크스주의를 오가는 등 사상적 편력이 잦았으나 팔방미인 형 사상가였다.

자유: 자유의 비극

민주주의의 핵심은 법을 만드는 기관과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 분리된다는 데 있다.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도 불만을 품을 수 없어야하지만 그건 이상일 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이상적인 차선이요 현실적인 최선이다. 자유의 제도적인 제한이 민주주의의 요체다. 민주주의란 모든 사람이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어한다고 가정하고 나서 그로 인한 욕구의 충돌을 합리적으로, 현실적으로 조정하려는 제도다.

자유의 반대말은 두 가지다. 구속과 필연이다. 철학적인 의미에서 자유의 반대말은 필연이다. 필연은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법이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법칙이 관철되는 것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자연법칙이 무조건적으로 통용되는 것을 필연이라 한다. 이 전통적인 해석을 무너뜨리고 자유를 그 반대말인 필연으로,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으로 본 자유의 철학자가 바로 사르트 르다.

빈 그릇과 같은 인간 존재

자유라는 말을 자기 철학의 핵심어로 삼고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했던 실존철학은 19세기 중반 후설이 현상학으로 그 지평을 열고 니체,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등이 발전시킨 개념이다. 실존철학은 하이데거가 실존적 현상학으로 다듬는데 이 하이데거의 철학을 받아들여 자유의 철학적 개념을 정립한 사람이 사르트르다.

자유는 마음대로 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自由는 자못 철학적인 뜻을 담고 있다. 스스로 자, 말미암을 유. 스스로 말미암다. 즉 자기가 자기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다. 사르트르의 자유는 자신의 존재근거와 관련이 있다. 그 의미는 한자어 자유와는 정반대다. 스스로의 내부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게 自由라면 사르트르의 자유는 근거의 결핍, 즉 무 근거성에서 비롯된다.

자유란 실 끊어진 연의 상태다. 연은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지만 다시는 땅에 안착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도 연처럼 숙명적이며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자유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자유에서 탈출한다는 묘한 역설은 자유가 인간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유는 인간존재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자연은 사물로서 즉자존재다. 반면 인간은 대자존재다. 즉자존재는 자신의 존재근거를 내부에 가지고 있으므로 그 자체로(즉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대자존재는 자신의 빈속을 채우기 위해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며 그 다른 것이 없이는 그 자신도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데카르트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고 의심할 수 있지만 그렇게 의심하는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흄과 같은 극단적 회의론자에 맞서 철학적 기반을 만들기 위한 의도도 한몫 거들었다. 결국 흄은 사물의 동일성이란 대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물을 인식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종합되는 것일 뿐이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는 논의의 기반을 해체하므로 더 이상의 철학적 논의와 사고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주체만은 있어야한다는 데카르트의 지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인간을 하나의 실체처럼 응고시켜 놓았다.

비극을 숙명으로 하는 자유

인간은 끊임없이 존재근거를 채우기 위해 외부대상을 지향한다. 빈 그릇에는 물이나 음식물을 담을 수 있다. 내용물은 모두 같은 등위의 것이지만 그릇의 존재방식은 내용물과 다르다. 빈 그릇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로 속을 채우려하지만 애초부터 결핍되어 있던 것이 외부대상을 지향하면서도 그 대상이 자신의 존재근거가 아니라고 부정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순간마다 욕구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목마를 때 갈증이라는 욕구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물을 마시기 전에는 물이 나의 근거를 채워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마시고 나면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우리는 해바라기처럼 언제나 바깥을 향해 열려있는 존재다. 외부대상으로 비어있는 내부를 채우려할 수밖에 없다는 점, 그러나 항상 그 바깥의 것은 결코 자신의 존재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 이는 곧 인간존재가 끝내 바위언덕 위에까지 바위를 굴려 올라가지 못하는 시지프스와도 같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시지프스처럼 바위를 계속 올려가야만 한다.

자유는 비극을 숙명으로 한다. 자유란 곧 바깥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에게 자유는 선고된 것이라고 말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자유는 존재의 무근거성으로 인한 숙명적인 부담일 뿐이다. 즉자존재는 그 자체로 자기 충족적이므로 자유를 가질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자신의 존재 자신의 자유에 부담을 느끼는 건 오직 대자존재 뿐이다. 의식의 포로가 되기 이전에 의식에 의해 대상화되기 이전에 통증은 순수하고 투명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실존이다. 주관과 객관의 분리가 바로 즉자에서 대자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인간이 즉자적인 상태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존재와 무

자유의 부담이란 역설일 뿐이며 사치스런 핑계다. 사르트르의 자유는 철학적 관념론에만 머물렀다는 비판을 받는다. 일상적인 자유라면 비교와 평가도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존재론적인 자유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철학용어 중 ‘被投性’ 이란 게 있다. 의도에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이야기다. 존재란 즉자존재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며 무란 대자존재인 인간의 존재방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무란 모든 존재의 존재방식을 다룬 총체적 존재론이다.

인간존재의 존재방식은 무다. 인간은 없다. 자유로우면서도 자유의 부담을 숙명처럼 지고 있는 존재가 우리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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