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들뢰즈

by 방정민

질 들뢰즈(1925~1995): 프랑스 철학자. 서구 전통철학에서 이탈. 이단, 소수, 타자의 철학전개.

펠릭스 과타리(1930~): 프랑스 철학자. 정신과 의사. 마르크스 사상을 정신의학으로 연구.


-욕망: 분열증 위에 서 있는 자본주의-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생산이다.

도덕과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 철학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욕망이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말이다. 욕망은 철학 내로 끌어들일 수 없는 개념이다. 철학은 이성에 속하는 학문이므로 욕망과 같은 감정은 다룰 수 없다. 욕망은 주관적인 것이므로 객관적인 진리 탐구를 그르치기 십상이다. 그래서 근대 철학의 이성은 오히려 욕망을 억압해 왔다. 근대철학의 일반적 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압축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정체를 해명하기 위해 욕망은 빼놓을 수 없는, 아니 때에 따라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인간은 욕망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을뿐더러 욕망이야말로 인간의 안과 바깥, 인간과 세계를 잇는 중요한 연결 고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욕망을 수단으로 해서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결국 가장 이성적인 눈으로 보면 인간은 결코 이성만으로 해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근대 철학은 지금까지 그토록 배제하려 애썼던 욕망을 이제 어떻게든 철학 체계 안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욕망에 대한 올바른 정의다. 알다시피 전통 철학에서는 철학의 모든 개념들이 엄정하게 정의되어야 하므로 욕망에 대해서는 그런 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립된 욕망의 개념은 결핍이었다.

욕망은 뭔가 있어야 할 게 빠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내부에서 뭔가 부족한 것을 욕망한다. 일찍이 플라톤도 욕망을 인간 주체의 빈 구멍으로 이해했으며, 그 이후의 모든 서구 철학에서도 언제나 욕망은 결핍을 뜻했다. 심지어 실존철학에서는, 설사 욕망하는 대상이 자신의 텅 빈 근거를 채워줄 수 없다 해도 인간은 항상 그것을 욕망할 수밖에 없으므로, 인간은 욕망의 방식으로 실존한다고 말한다. 라캉의 정신분석에서는 욕망을 인간 의식과 분리시키지만 거기서도 역시 욕망은 결핍 또는 필요를 가리킨다.

이렇게 전통적인 의미에서 욕망은 인간의 빈 부분, 결핍된 상태로 정의된다. 욕망을 인간의 속성으로 보든, 아니면 본질이나 인간 그 자체로 보든 간에 적어도 욕망이 인간과 밀접히 연관된 개념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을 그런 전통과 전혀 다르게 설명한다. 그들은 욕망을 결핍으로 보지 않을뿐더러 아예 그것을 인간으로부터 떼어내서 사고한다. 욕망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며, 부족한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뭔가를 생산하는 힘이다. 그런데 힘이라면 연상되는 게 있다. 바로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이다. 아닌게 아니라 들뢰즈와 과타리는 니체의 권력의지에서 욕망의 개념을 끌어낸다.

니체의 권력의지가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듯이, 들뢰즈와 과타리의 욕망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힘이다. 욕망은 인간이 속성으로 지니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근거이자 전체이며, 행동을 유발하고 사건을 만드는 에너지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욕망을 생산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욕망적 생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 욕망을 이렇게 개념 짓는 것일까?‘


분열증이 정상인 사회

아무리 욕망을 무의식적인 힘으로 규정했다 해도 욕망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뭔가 욕망의 주체는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일까? 그렇지는 않다. 물론 욕망을 품는 것은 인간이지만, 욕망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이므로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을 욕망의 주체로 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들뢰즈와 과타리는 욕망을 생산적인 힘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자칫하면 종교에서 흔히 주장하는 것처럼 생명을 모든 것이 원동력으로 보는 생기론(vitalism)으로 오해받을 우려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인간의 이미지를 떼어 버리기 위해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다. 그것은 바로 ‘기계’다. 즉 욕망의 주체는 기계다. 이 욕망적 기계들을 들뢰즈와 과타리는 ‘신체’라고 부르는데, 이것 역시 개별인간의 신체와는 무관한 개념이다. 그들이 말하는 욕망은 인간 의지나 개별성의 의미 같은 것을 완전히 배제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은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무의식이다. 따라서 욕망을 마음껏 풀어놓는다면 뭔가를 창조하고 생산하겠지만, 그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 사회는 존립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역사상 존재했던 인류 사회는 모두 나름대로 욕망을 조절하는 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다양한 욕망의 흐름들을 조절하고 통제해야만 사회가 성립할 수 있고 질서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욕망의 조절 방식을 들뢰즈는 코드화라고 부른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 집단은 욕망이 전혀 통제되지 않고 무제한적으로 발산되므로 코드 자체가 없다. 동물 상태를 막 벗어난 원시 사회에서부터 욕망은 통제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다양한 욕망의 흐름을 각각에 어울리는 다양한 코드로 통제하는 식이다. 여기까지는 통제의 중심이라 할 만한 게 없다. 어떤 중심이 들어서서 욕망을 본격적으로 통제하게 되는 시기는 고대 사회다. 여기서는 왕이라는 전제 군주가 있어 이를 중심으로 욕망이 통제된다. 원시 사회의 코드화에 대비되어 이것은 하나의 강력한 코드의 중심을 갖추고 있으므로 초코드화라고 부를 수 있다. 또한 원시 사회에서는 모든 욕망이 대지와의 연관에서 떨어질 수 없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국가라는 사회체가 욕망을 주관하는 주체로 나서게 된다. 즉 욕망은 대지에서 벗어나 탈영토화한다. 이렇게 욕망을 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하는 것이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욕망을 다스리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 와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자본주의는 군주 시대와 같이 하나의 강력한 중심으로 초코드화할 수 없을뿐더러 그래서도 안 되는 ‘신체’다. 자본주의는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운-토지가 없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자유로운-임금 노동자를 토대로 해서 성립했다. 전제 군주의 탈영토화, 초코드화를 부정하면서 탄생했으므로 자본주의는 이미 출생신고부터 하나의 강력한 중심이라는 호적에는 올리지 못한 운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양한 욕망의 흐름들을 마냥 놔두어서는 자칫 원시 사회로 되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초코드화와 더불어 다원적인 코드화도 사용한다. 마침 자본주의에는 전제 군주의 초코드화에서 풀려난 다양한 욕망의 흐름들도 있는 반면, 전제 군주와 같은 강력한 중심도 있다. 그 중심이 바로 자본이다. 자본주의에서 초코드화의 역할을 하는 것은 자본이며, 코드화의 역할을 하는 것은 국가, 학교, 병원, 교회, 정치 조직, 병원 등의 다양한 기관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이중성을 가리켜 들뢰즈와 과타리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탈영토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재영토화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초코드화와 코드화, 영토화와 탈영토화의 분열증을 전제로 하고 있는 사회다. 자본주의는 분열증을 토대로 해서 성립했고 더 이상의 성장, 발전을 위해서는 분열증을 필요로 하는 신체다. 탈영토화와 재영토화 사이에서 끊임없이 왔다갔다하는 분열자의 모습, 그것이 자본주의의 정체다.


공상과학소설을 쓰는 이유

우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분열증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위기라고 하겠다. 병 자체를 알지 못하는데 그 병을 치료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원시 사회에서는 다양한 욕망을 다양한 코드로 코드화하기 위해 도착증이 발생했고, 고대 사회에서는 하나의 중심으로 다양한 욕망을 토코드화하기 위해 편집증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뭘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수행하기 위해 분열증이 발생한다. 결국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정상은 환상일 뿐 실재할 수 없는 셈이다.

물론 아직까지 자본주의는 훌륭한 분열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새로운 위기가 닥칠 때마다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 노련하게 재영토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장면도 있지만, 그런 대로 잘 버텨 나가고 있다. 그러나 장차 지금까지보다 훨씬 파괴적인 위기가 닥쳐온다면 자본주의의 무기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들뢰즈와 과타리가 울리는 경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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