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푸코(1926~1984)

by 방정민

미셀푸코(1926~1984): 프랑스 철학자. 니체의 계보학과 프랑스의 과학철학적 전통을 창조적으로 수용. 기존 역사에서 배제되어온 타자(광기, 성)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지식, 권력: 역사의 나머지 반쪽-

진리가 존재하는 사실, 그리고 진리를 인간이 알 수 있고 알아야 한다는 사실, 거짓을 말하면 벌을 받는다는 사실 등은 모두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푸코에게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 푸코에 따르면, 진리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에 의해 규정되는 하나의 지식일 뿐이라고 한다.


지식과 고고학


푸코의 관심은 지식의 내용에 있지 않고 지식을 둘러싼 관계들, 즉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있다. 다시 말해서 지식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혹은 누가 이러저러한 지식을 규정하는가가 문제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그는 우선 지식이 발전한다는 관념을 믿지 않는다. 지식은 각 역사적 시대에 따라 그에 맞게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이 구성되는 것이라면, 구성 요소도 있을 것이다. 지식의 구성 요소는 뭘까? 상식적으로 보면 그것은 실재하는 사실, 푸코의 용어로 바꾸면, ‘사물’이다. 사물만으로 지식을 구성할 수 있을까? 사물은 지식의 내용일 뿐이다. 내용은 표현을 가져야 한다. 지식의 표현, 그것은 바로 말, 즉 담론이다. 지식의 구성요소는 말과 사물, 두 가지인 것이다.

상식에 따르면 그 두 가지 가운데 더 중요한 구성 요소는 단연 사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그와 반대로 말이 훨씬 중요하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지식은 사물보다는 오히려 말에 의해 구성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즉 사물은 변함없는데 사물을 설명하는 지식은 무상하게 변하는 것이다. 푸코가 실제도 들고 있는 예는 광기다. 광기라는 개념에 관한 지식은 정상이 아니고 미쳤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광기를 그런 뜻으로 규정하게 된 것은 오랜 일이 아니다. 광기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는 시대마다 달랐다. 중세에는 광기를 일종의 예지적인 재능으로 여겼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성을 넘어선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광기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었으므로 광인도 특별히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에는 광기를 윤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광인은 사회에서 병원으로 격리 수용되었다.

지식은 담론으로 구성되는데, 이 담론은 시대마다 다르다. 그런데 묘한 일은 각각의 시대를 거치면서 지식의 담론이 발전하는 게 아니라 단지 달라질 뿐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푸코는 지식에 대한 연구를 역사적으로 진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광기의 역사』에서 보듯이 각 시대마다 광기를 규정하는 담론은 연속적인 아니라 불연속적이며 단절이다. 따라서 푸코가 추천하는 지식의 추구 방식은 고고학적인 연구다.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처럼 지식을 탐구하는 데서도 과거의 지식이 남긴 흔적과 자취를 따라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식이 사물로 구성된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담론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침묵’의 문제다. 지식은 구성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그 내용에서 빠져 버리는 것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점은 그렇게 빠져 버리는 것들 역시 담론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이다. 푸코에 따르면 광기는 17세기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대에 역사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그 이유는 17세기에 바로 ‘정상’이라는 기준을 설정한 담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광기는 비정상으로 규정되면서 역사에서 누락된 것이다.


권력과 계보학

지식이 구성되는 것이며 뭔가를 포함시키고 뭔가를 배제하는 것이라면, 지식을 구성하는 것, 그 포함과 배제에는 필연적으로 모종의 힘이 개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힘이 곧 권력이다. 흔히 권력이라고 하면 권력의 소유자를 연상케 된다. 그러나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현대 철학자들 일반이 그러하듯이 실체가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며, 의식적인 게 아니라 무의식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권력에는 국가 권력이나 정치 권력만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 은밀히 작용하는 정체불명의 힘도 포함된다.

푸코는 공적인 권력보다 오히려 사적인 권력을 더 중시한다. “국가는 권력 관계의 그물 위에 존재하는 상부구조일 뿐이며, 실제로 인간의 육체를 규정하고 성이나 가족 관계, 인척 관계, 자식, 그리고 기술 등을 규제하는 것은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섬세한 권력의 그물이다”(규율적 메카니즘). 앞서 광기의 정의를 내린 것은 국가 권력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특정한 개인이나 인간 집단이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권력은 행사하는 주체가 없이 작용한다. 그래서 권력은 전략이며 관계이며 기능이다.

지식의 배후에는 늘 모종의 힘, 즉 권력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 권력이 지식의 진정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식은 권력에 의해 좌우되고 권력의 힘으로 굴절된다. 또한 거꾸로 권력의 행사에는 반드시 지식이 동원된다. 지식과 권력이 가장 세속적으로 결합하는 곳이 바로 사법 체계다. 사법 체계는 법 지식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한다. 흔히 법은 현실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은 법 지식이 현실, 즉 사물에 의해 구성되지 않고 거의 전적으로 담론에 의해서만 구성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예를 들어 법령집에 나와 있는 수많은 조들의 마지막 항은 대부분 똑같은 말로 끝난다. “기타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라는 내용이다. 실제로 판사나 검사들은 바로 그 마지막 항을 법 적용의 관련 근거로 자주 사용한다. 예컨대 정치범이나 사상범의 경우처럼, 법 조문에서 사건에 딱 어울리는 항을 찾아낼 수 없어도 어떻게든 법으로 처벌하기는 해야 할 경우, 그 마지막 항을 근거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법 집행이라는 권력의 행사는 바로 법 지식 자체가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와 같이 권력은 권력 자체의 추진력으로 행사된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은 그 소유자나 속성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관계, 효과가 중요하다. 그래서 푸코는 이것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해야 한다고 말한다.


타자의 역사

광기는 사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에 의해서, 즉 지식과 권력을 통해 정의된다고 말했다. 사실 푸코가 굳이 광기를 예로 들어 지식과 권력을 설명하는 데는 그 나름의 의도가 있다. 이성의 시대에 광기를 정의하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이유는 뭘까? 정의란 이성을 가진 인간이 담론을 통해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광기란 잘 알다시피 인간의 이성과 언어를 부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성의 관점에서 보면 광인은 이성을 상실한 사람이며 그의 언어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광기를 정의한다는 걸까? 이성의 입장에서 이성이 아닌 것을, 정상의 눈으로 비정상을 규정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미 그것은 형용 모순이 된다. 따라서 광기는 결코 그 자체로서 정의될 수 없다. 다만 이성의 반대 개념으로서 정의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연장하면, 동일성은 비동일성을 상정하지 않으면 규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푸코는 이것을 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라고 부른다. 동일자의 역사 속에서는 타자의 역사를 서술할 수 없다. 그러나 타자의 역사는 엄연히 존재해 왔으며 지금도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해야 하는 것, 이것이 동일자의 모순이다. 타자는 언제나 동일자의 경계 바깥에 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역사에서 이성적인 주체는 사라진다. 동일자의 역사에서는 이성이 전제 조건이며 출발점이 되었지만, 타자의 역사에서는 오히려 설명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푸코는 주체의 문제를 최후의 연구 대상으로 삼기에 이른다.

푸코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지식을 지식이도록 하는 것, 진리를 진리이도록 하는 것, 권력을 권력이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데 있었다. 푸코가 말하는 ‘지식’이란 바로 savoir(knowledge)이고, ‘권력’은 pouvoir(power)라는 점이다. 이 개념들이 우리말로 번역될 때는 지식과 권력이라는 의미심장한 용어로 둔갑해 버린다. 그런 점에서 지식과 권력은 오히려 앎과 힘이라는 평범한 단어로 번역하는 게 옳을 것이다. 전문 용어는 전문적이기 때문에 ‘힘’을 가진다. 지식에서 비롯되는 그 권력의 단맛을 잊지 못해 지식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굳이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전통을 배양하고 강화해 왔다. 푸코 철학의 번역에도 이런 관행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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