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하버마스(1929~ ): 독일 철학자. 비판적 사회철학을 지킴. 이성의 완성을 주장.
-의사소통: 이성은 포기할 수 없다-
인간이 특이한 지위를 지니게 된 이유는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만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으며, 세계의 감독 역할을 할 수 있다.
상호주관성의 세계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명제는 ‘알아야 할 너’와 ‘아는 너’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 즉 주체와 대상이 분열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그 말이 단지 주체와 대상의 분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체 자체의 분열을 가리킨다는 데 있다. 주체는 이성을 수단으로 해서 주체 바깥의 세계를 하나씩 대상으로 삼아 오다가 마침내 자기 자신마저도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이다. 주체는 존재하면서도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인식하면서도 “인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문제를 그렇게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이다. 세계 외적 위치(반성적 주체, 초월적 자아)와 세계 내적 위치(전반성적 주체, 경험적 자아)의 두 군데로 분열시키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열된 주체는 치료할 방법이 없다. 실증주의에서의 주체는 세계 속의 실체를 보는 관점과 똑같이 자기 자신을 볼 때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 즉 주체는 세계의 주인이거나 아니면 세계 속의 사물에 불과하다. 실제로 주체는 분열되어 있지 않다. 다른 사람과 내가 의견을 나누고 뜻이 통한다는 것은 내가 이미 살아 있다는 사실,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사실, 인간이 이미 사회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자명하다. 완벽한 주관도 없고 완벽한 객관도 없다. 주체와 대상은 이미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것을 하버마스는 상호주관성이라 부른다. 하이데거 말, “자아가 언어 행위를 실행하고 타자가 그것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 이 두 사람은 상호 인격적인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처럼 주체는 이미 언어를 통해 상호작용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을 논하기 이전에 상호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상호주관성의 관점에서 보면, 주체가 그런 반성의 입장에 설 때도 타자의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주체의 분열이 아니라 주체의 재구성이며 비판이다. 다시 말해 주체와 주체 간의 의사소통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그 의사소통에 왜곡된 요소는 없는지, 의사소통 과정에 장애물은 없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생활세계가 뒷받침하는 의사소통
의사소통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그 과정이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에서 의사소통은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 상명하복의 수직질서를 기본으로 하는 관료제에서는 애초부터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더 큰 문제는 사적 영역에서도 의사소통이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공적 영역이 사적영역으로 침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하버마스는 이것을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고 부른다.
하버마스에게 생활세계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나 소쉬르의 언어구조와 같은 위상을 지니는 개념이다. 다만 무의식이나 언어구조는 모두 비인격적이고 개별 주체가 참여할 수 있는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데 비해, 생활세계는 참여자들의 의사소통 행위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영역이다. 생활세계란 물론 무의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단지 배후에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대상화될 수 없는 총체적인 것이므로 일반적인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생활세계는 의사소통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에 선험적 요소를 도입하지는 않는다. 이 생활세계가 공적 영역에 의해 식민지화되고 있는 점이 문제인데, 현대 사회에서 공적 영역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바로 비판과 반성의 기능을 상실한 도구적 이성이기 때문이다.
이성의 힘과 해방을 믿으며
하버마스는 이성의 비판적 기능이 회복될 수 있고 극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이성을 하나의 동질적인 것으로 보지만, 그는 이성이 발달하면서 이성에도 분화가 생겨났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이성은 인지적ㆍ도구적 영역, 규범적ㆍ도덕적 영역, 표현적ㆍ미학적 영역의 세 가지로 분화되었다. 인지적ㆍ도구적 이성이 지나치게 비대화된 결과, 세계를 사물과 사태의 총체로, 즉 객관적 세계로만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 객관적 세계에 상응하는 진리 문제의 해결만을 합리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규범적 이성이나 표현적 이성은 도구적 이성과는 달리 여전히 제 기능을 보존하고 있다.
하머마스에 따르면, 지금의 문제는 이성의 과도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부족함에 있다. 이성 자체가 지닌 비판적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도구적 이성 외에 다른 이성의 영역들이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 하버마스에게 철학의 역할은 인간의 역사에서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요소를 발견하고 이를 제거함으로써 자율과 책임을 향한 인류의 발전을 촉진하는 데 있다. 하버마스는 철학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 해방에 있다는 계몽철학의 틀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
프랑스의 철학자. 자기완결성을 기반으로 전개되어 온 서구 형이상학이 드디어 장벽에 부딪혔다고 본 그는 ‘해체’를 통해 새로운 형이상학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 것을 낡은 것의 언어로 기술할 수는 없으므로, 동일성이 아닌 차이(차연)를 기술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차이의 철학’을 주창했다.
-해체: 저자도 독자도 없는 책
데리다에 의하면 창작물은 창작자의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창작물은 창작자가 지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표절의 개념도 사라진다.
책읽기의 해체
독자가 책을 읽을 때, 책의 논리(저자의 논리) 속에 뛰어들어가 그에 따라 읽을 것인가 아니면 독자 자신의 논리에 따라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즉 학습적 독서를 할 것인가 비평적 독서를 할 것인가의 문제인데,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만이 상식적인 책읽기가 아니라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책은 저자와 독자가 대화하는 의사소통의 통로가 아니며 저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담아내는 매체도 될 수 없으며 독자가 수동적으로 저자의 의도를 읽어내는 매체도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가 책을 통해 독자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전통적인 독서의 관념을 해체할 뿐 아니라, 나아가 저자도 독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즉 저자도 독자도 확정된 실체가 아닌데 어떻게 저자로부터 독자에게로 의미가 순조롭게 흐를 수 있겠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전통적인 책읽기에서는 독자가 책을 통해 저자의 의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저자와 독자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책의 내용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한 권의 책을 관통해 흐르는 일관된 내용, 진리, 전체 같은 것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독자는 단지 그 책을 읽음으로써 직접 뭔가를 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즉, 진리는 겉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끝없는 해석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문법, 개념, 어휘 등을 이용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그로 인해 제약을 받기도 하는데 이러한 통일된 문법을 통해 한 권의 책에 대한 독자 나름이 해석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음성과 문자와 형이상학
책읽기의 해체는 데리다의 해체적인 개념의 일부일 뿐이다. 데리다는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서구 철학 전체에 대한 대규모의 해체를 시도한다. 서구철학은 자기 완결성을 지닌 거대한 형이상학 체계다. 이 체계는 자체 내에 기원을 두고 있고, 자체 내에 중심을 가지고 있다. 형이상학은 닫힌 체계이므로 모든 진리도 그 범주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성의 힘으로 꾸준히 정진하다 보면 결국 절대적인 앎,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이 형이상학적 진리관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형이상학은 장벽에 부딪힌다. 전성기의 형이상학은 진리의 기원과 근거 및 추구하는 힘까지 자체 내에 지닐 수 있었으나 현대로 진행되면서 더 이상은 형이상학의 범주 안에서만 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 첫 번째 예로 언어를 들 수 있다. 즉, 무의식을 의식의 언어로, 구조를 경험의 언어로, 존재를 존재자의 언어로, 분산을 일관성의 언어로 말해내야 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그 장벽을 차연(差延)이라는 말을 차용해 극복한다.
차연은 소쉬르의 언어분석에서 나온 차이의 체계에 상응하는 개념이지만 단지 차이만은 아니다. 차연은 닫힌 체계가 아니며, 실체적인 것도 아니고, 경험을 있게는 하되 경험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개별 인식으로 포착해낼 수도 없다. 차연이 나타나는 방식 또한 그 자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흔적으로만 드러난다. 차연은 모든 개별적 인식과 경험 속에 개입하면서 흔적을 남긴다. 흔적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시간성이 내포되어 있다. 데리다의 차연의 개념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간성 때문이다.
데리다는 서구철학의 전통을 음성 중심주의로 규정짓는다. 음성은 그것을 내는 자가 동시에 듣고 의미해석도 한다. 음성은 동시적이므로 자명하고 명징했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의 자기동일성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음성은 일회적이며 반복되지 않는다. 문자는 음성의 보완적인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그러한 음성중심주의가 유지될 수 없었다. 소쉬르의 말처럼 기표는 기의를 담는 그릇에 불과한 게 아니라 기표는 기의와 무관하게 기표들끼리의 관계에서 생산되며, 심지어 현대사회에서는 애초부터 기의와 무관한 기표들도 얼마든지 있다. 기의로부터 일탈한 기표들의 체계, 그 차이가 차연이며 절대적 진리관의 형이상학으로는 이를 설명하지도, 표상하지도, 사유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음성중심주의가 해체되면서 그와 더불어 근대철학의 주체도 해체된다. 음성이 무너지면서 음성에 종속되었던 문자는 독립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음성과는 달리 반복이 가능한 문자는 흔적을 남기게 되고 이 차연의 흔적을 읽어내는 것이 해석적 글읽기인 것이다.
형이상학의 극복
책에 있어서 저자도 독자도 없다면 그 책의 주체는 차연이 된다. 책은 차연의 흔적이며 차연이 지니는 차이의 그물이다.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그 책이 지시하는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문자가 음성을 그대로 담는 것이 아니듯이, 기표가 기의를 그대로 나타내지 않듯이 책은 특별한 기의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렇게 해서 데리다는 책과 음성과 기의와 형이상학을 모두 해체하는 데 성공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는 파괴가 아니다. 여기서의 해체는 재건을 전제로 한다. 즉 데리다는 형이상학을 해체함으로써 현대사회에 맞지 않는 맹점을 극복하고 재건하려는 것이다. 현대의 형이상학이 처한 위기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완결적인 형이상학의 바깥에서 부산물로 얻어진 새로운 개념들이 많아서인데 기존의 형이상학으로 새로운 것을 설명할 수 없다면 새로운 형이상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주장이다. 데리다는 그래서 음성과 기의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문자를 가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에크리튀르(Écriture)로 명명한다. 에크리튀르는 음성과는 달리 따로 주인이 있지 않고 익명으로 흔적을 남길 수 있다.
그러나 차연의 개념이 그러하듯 데리다의 에크리튀르는 또 다른 선험적 가정 또는 신비주의로 흐를 수 있다. 그리고 데리다가 해체하려 했던 기존의 형이상학의 또 다른 메커니즘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