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을 통해 인생 성찰하기!

by 방정민

◆ 세상 모든 것은 순환한다

- 도덕경 40장 -

反者道之動, 弱子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반자도지동, 약자도지용.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

근본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도의 작용이다. 세상의 만물은 천지음양의 기운인 유에서 나오고, 유는 형체가 없는 도인 무에서 나온다.



우주는 존재의 근원자에 의해 생성되었습니다. 우주만물은 최초의 근원자에 의해 출발하여 최후에는 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순환하고 복귀하는 근원자를 노자는 도 또는 무(無)라 한 것이죠. “반(反)은 도의 동(動)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만물은 상반되는 방향으로 운동했다가 결국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며 이를 되풀이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반(反)은 되돌아온다는 반(返), 즉 복귀한다는 뜻과 상반되는 운동을 한다는 뜻, 그리고 정반대되는 것으로 변화한다는 세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원래 도는 만물의 시원으로 절대입니다. 그러나 도는 만물에 퍼져 나타나고 영원하게 활동합니다. 그러므로 절대이며 눈에 보이지 않던 도가 눈에 보이는 만물에 나타났고, 또 절대가 모든 만물에 쪼개졌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했던 도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만물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물은 결국 다시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 의해 무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크기 때문에 뻗어나가고 나가면 멀게 되고 멀어지면 결국 되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즉 도는 반드시 활동하여 현상계에 뻗어 나타나게 마련이고 현상계에 나타나면 실재에서 멀어지며, 만물이 결국은 무로 되돌아옴으로써 도가 다시 절대적 위치가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무한히 반복하며 순환하는 것이 노자의 무, 또는 도가 가지는 시간인 것입니다.


조금은 설명이 어려운데, 쉽게 말해서 세상 모든 것은 순환한다는 말입니다. 동양의 시간관은 순환성이 그 특징인데 노자의 시간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원적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죠. 시작과 끝이 모호한 원을 상상해 보세요. 세상 모든 것은 연계되어 하나가 아닐까요? 노자는 이것이 도이고 곧 무라고 말합니다. 그 표현이 무엇이든, 세상은 참 일직선으로 가는 듯하다가 결국 되돌아온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많이 느낍니다. 순환하며 되풀이 되는 세상, 그것이 인생이라면 지나치게 악다구니처럼 살 것이 아니라 조금은 여유롭게 음미하며, 성찰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낙타


사막 한가운데를 낙타 한 마리 뚜벅뚜벅 걷고 있다

30의 등과 50의 등과 70의 등이 굽어있는 낙타

사막에선 아무 의미없는 그 숫자가 가엾다

악다구니치고 아등바등 살았는가

고승처럼 해탈한 듯 살았는가

그대!

하루하루가 이렇게 소중한 것인 줄을

사막 한가운데 낙타 등에서야

깨닫는 인생.

나는 정체되어 있고

시간은 엄청 빠른데

남은 것은 죽음 뿐,

인생 끊임없이 잃어가며 완성되는 것

그 인생이 서글프다.

무엇을 준비하랴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며

아쉽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사막 어디를 걷고 있는가

사막은 모든 곳이 한가운데인 것을,

호스피스 병동을 나오는 내 발걸음이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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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고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 도덕경 41장 -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善貸且成.

(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음희성, 대상무형, 도은무명, 부유도선대차성.)

큰 네모난 것은 그 구석을 가지지 않고 참으로 큰 인물은 그 성취가 늦고 다시 없이 큰 소리는 잘 들리지 않으며 더없이 큰 형체는 그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다. 도는 숨어서 그 모양이 보이지 않고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참으로 도는 만물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면서 그 존재를 온전하게 해준다.



‘대기만성’이라는 말은 다 아시죠? 바로 <도덕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무지하게 큰 방이 있다면 우리는 그 방의 모서리를 볼 수 없습니다. 가령, 우주가 네모난 것이라면 인간이 그 모서리를 느끼거나 볼 수 없죠. 또 지구는 령,에 것번 자전을 합니다. 엄청 큰 지구가 돌면서 내는 소리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람이 들을 수만 있다면 귀고막이 아마 터지고 말테지요. 그런 큰우리는 다행히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실제 촠근의 과학은 지구가 자전하면서 엄청난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워낙 소리가 크니까 아주 작은 우리 인간은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지구라는 형체도 워낙 커서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이고요.

이렇게 아주 큰 것들은 작은 존재인 우리 인간이 잘 모르는 법입니다. 그 큰 존재들이 스스로 뽐내지 않고 조용하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기에 우리는, 세상은 조화롭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노자는 도라고 했는데, 도는 아낌없이 베풀어주면서 세상 모든 존재를 온전하게 해준다는 겁니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면서 적확하게 세상(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본 것 아닙니까? 정말 놀랄 뿐입니다. 이 말대로라면 저도 아직 희망이 있겠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고 하니 우리 모두 파이팅하자고요!

◆ 본래 타고난 그 밝음으로 돌아가야 행복할 수 있다

- 도덕경 51장, 52장, 56장 -

故道生之, 德畜之, 長之畜之, 亭之毒之, 養之覆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고도생지,덕축지, 장지육지, 정지독지, 양지복지.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부재,

是謂玄德.(시위현덕) - 51장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爲習常.

(견소왈명, 수유왈강, 용기광, 복귀기명, 무유신앙. 시위습상.) - 52장

知者不言, 言者不知.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

(지자불언, 언자부지. 색기태, 폐기문,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시위현동.)

- 56장


도가 만물을 생기시키고, 덕이 모든 것을 키우고 자라게 하고, 양육하고 감싸주고, 안정하게 하고 돈독하게 하며, 양성시키고 감싼다. 도는 만물을 생기시키지만 소유하지 않고, 작용하지만 거기에 의지하지 않으며, 자라게 하지만 지배하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현덕이라 한다. - 51장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는 것을 밝음이라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빛을 활용하고지혜의 밝음에로 복귀하면 몸에 재앙을 남기는 일이 없다. 이를 일컬어서 습상이라 한다. - 52장

진실로 아는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진실로 알지 못한다. 감각의 구멍을 막고 욕망의 문을 닫으며 예리함은 무디게 하고 복잡하게 얽힌 것은 풀고, 자기의 빛나는 재주와 슬기를 조화롭게 하여 혼탁한 세상의 티끌과 하나가 되게 한다. 이를 도와의 현묘한 합일이라고 한다. - 56장



노자는 도의 현실적 작용을 덕이라고 굳이 이름 붙였습니다. 이 덕으로 천지만물의 생성, 변화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자에 의하면 도와 덕은 각 단계마다 원천적으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도 없이 만물은 생겨나지 않으며 덕 없이 만물은 자기본성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도가 만물을 생성케 한다고 하지만, 만물이 생성되는 것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즉, 만물이 도에 의해 생성되고 변화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기독교처럼 별도의 주재자가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인 명(明)은 상(常)이지만 그것은 규정되어 있거나 하나로 도식화 되어있지 않고 열려있으며, 우주와 세계에 대해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명(明)이며 명은 인간의 본모습(상)인 것이죠. 이 상을 인식하지 못하면 불행하게 되는데 상을 아는 것을 명이라 합니다.


이처럼 우주만물 혹은 인간의 본질을 일원론적으로 파악함으로써 모든 대립을 피하고, 도의 반복성으로 인해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 본성이 원래 밝음[명(明)]이니 스스로 그 밝음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로 무욕, 무소유, 허정, 유약, 무위의 방법으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본래 도와 같은 명(明)이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고 다행한 일입니까. 만물을 생기시키지만 소유하지 않고 자라게 하지만 지배하지 않는 도, 이런 도가 실행되는 사회라면 그야말로 누구나 다 행복한 사회가 될 텐데요. 또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볼 줄 아는 지혜의 밟음을 찾을 수 있다면 자신의 왜소함을 극복하고 타인과의 관계도 원만해질 수 있으련만… 이런 본성을 우리가 찾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노자의 말대로 지금의 재앙은 이런 본성을 우리가 찾는데 게을리 해서 발생한 것은 아닐 런지요…

현재의 자본주의에서는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또는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합니다. 합치면 ‘욕망하는 대로 소비해야 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욕망하는 대로 소비하면 행복합니까? 만약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일순간이고 곧 후회와 불행이 다가올 겁니다. 그런 경험 많으시죠? 이 혼탁한 세상에서 진정 행복해지는 길이 무엇일까요? 노자는 현동이라고 했는데, 우리도 이제 행복하며 조화로운 삶을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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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꿈

하늘에 떠 있는 나비는

하늘이 그리워 집을 짓지 않는다

제 한 몸 하늘 아래 맡겨

언젠간 썩어서 하늘로 돌아가려고

나비의 날갯짓에 하늘은 파래지고

나비의 날갯짓에 하늘은 검어지고

나비는 하늘을 제 자궁에 심어놓는다

고요함 속으로 세상이 들어온다

홀로 집이 없어도 나비는 외롭지 않다

날개를 펴면 돈박(敦樸)한 순수가

한계 없이 흘러가는 꿈을 좇아

꼼 속에서 저가 잉태한 수컷과 몸을 나눈다

조용히 귀 기울이면 흙에서 나비가 피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하늘이 썩어 흙이 되고…

꿈은 가장 낮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며

낮은 꿈을 피운다

나비가 삶의 허물을 벗고 꿈으로 돌아가자

하늘과 땅이 텅 비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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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문명이 인간성을 파괴한다 - 무위지치는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 도덕경 57장 -

以正治國, 以奇用兵, 以無事取天下, 吾何以知其然哉, 以此. 天下多忌諱, 而民彌貧,

(이정치국, 이기용병, 이무사취천하, 오하이지기연재, 이차. 천하다기휘, 이민미빈,

民多利器, 國家滋昏, 人多伎巧, 奇物滋起, 法令滋彰, 盜賊多有.

민다리기, 국가자혼, 인다기교, 기물자기, 법령자창, 도적다유.

故 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고 성인운, 아무위이민자화, 아호정이민자정, 아무사이민자부, 아무욕이민자박.)

정의로운 도로 치국하고, 기계(奇計)로 용병(用兵)하며, 무사(無事)로 천하를 취한다. 나는 어떻게 천하가 그러한가를 아는가? 천하에 금지가 많으면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들에게 문명의 이기가 많으면 국가는 더욱 혼미해진다. 인간에게 교묘한 기술이 많으면 기이한 물건이 더욱 많이 제작된다. 법령이 더욱 번성해서 조목이 많으면 도적이 그만큼 많아진다. 그러므로 내가 무위하면 백성이 스스로 교화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이 스스로 중정하게 되며, 내가 무사하면 백성이 스스로 부자가 되고, 내가 무욕이면 백성이 스스로 순박하게 된다고 성인이 말했다.


무위치지(無爲之治: 무위로 나라를 다스린다)의 뜻은 자유방임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 에너지가 저절로 자연스럽게 솟아나도록 도와주는 사회구조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성이 생기를 발하는 구조를 만들어 놓으면 본성이 스스로 모든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무위치지의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경제 시스템은 자본주의 시장체제를 이루고 있죠. 시장은 이기심이 서로 부딪치면서 자동 조정을 해나가는 체제이므로, 거기에는 이기심과 소유욕이 합쳐집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므로 더 많은 소유를 하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고자 하는 이기심이 무한대로 뻗어나갑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도 사회도 국가도 계속 무엇인가를 채우고 팽창해야 하며, 끝없이 소비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은 본래 타고난 밝음을 잃어버리고 계속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욕망을 드러내면서 타인을 착취하게 되고 성격도 공격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인간은 정신적으로 고립되어 가고 황폐화되어 가며, 사회도 분열과 대립으로 점철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국가 간에도 전에 없던 전쟁과 테러로 국민들은 극도의 공포와 절망, 불행 속에 놓여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꿈꾸는 전쟁 없는 평온한 사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인류의 희망은 바로 노자의 무위사상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비현실적이라고요?



천하에 금지가 많으면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법령이 더욱 번성해서 조목이 많으면 도적이 그만큼 많아진다는 노자의 말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경찰노릇을 하고 있는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지금 미소냉전 때보다 전쟁과 테러는 몇 배로 증가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떨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최고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인구대비 재소자들의 비율은 세계 최고입니다. 온갖 법령과 금지가 만들어 낸 결과물들인 것이죠.

그러나 노르웨이의 지상낙원 교도소라 불리는 ‘바스토이 아일랜드 교도소’는 미국과 대조되는 ‘열린교도소’입니다. 연쇄살인범, 성폭행범, 마약사범 등 각종 중범죄자들이 있는 이곳은 재소자들에게 그 어떤 감시의 눈길이나 자유가 박탁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섬에서 독립공간에 거주하며 스키와 승마, 테니스 등 취미 생활은 물론이거니와, 시간의 제약은 있지만 친구들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철문이나 높은 담장은 아예 없으며 교도관들에게도 총이나 방망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의 (재)범죄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라고 합니다. 재소자들은 지상낙원 같은 섬에서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며 친생태적으로 생활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연과 동화되어 인격이 순화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노르웨이 지상낙원 교도소가 보여주는 교훈은 참으로 큽니다. 단순히 재소자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넘어 왜 그들이 범죄자가 되었는지, 범죄자들이 어떻게 하면 선한 마음을 되찾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인간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지나친 욕심과 욕망을 부릴 때 흉포해지고 불행해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면 인간(백성)을 그렇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노자가 말한 금지가 많고 문명의 이기가 많고 법령의 조목이 번성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청정하고 맑은 자연의 도를 따라 저절로 그렇게 내버려두는 무위의 다스림이야 말로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위 노르웨이 교도소에서 보았듯 결코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만 비현실적인 것이라기보다 문명의 이기를 버릴 수 없는 우리의 용기 부족 때문에 실현 불가능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 큰 나라가 작은 나라 아래에 처해야 평화가 온다

- 도덕경 61장 -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故大國以下小國,

(대국자하류, 천하지교. 천하지빈, 빈상이정승모. 이정위하, 고대국이하소국,

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 則取大國. 故或下以取, 或下而取. 大國不過欲兼畜人,

즉취소국, 소국이하대국, 즉취대국. 고혹하이취, 혹하이취. 대국불과욕겸축인,

小國不過浴入事人. 夫兩者各得其所欲, 大者宜爲下.

소국불과욕입사인. 부량자각득기소욕, 대자의위하.)

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아서 세상의 모든 흐름이 만나는 곳이고, 또한 천하가 사모하는 암컷이기도 하다. 암컷은 항상 고요함으로 수컷을 이기고 고요함으로 항상 아래에 있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자신을 낮추면 작은 나라를 얻게 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자신을 낮추면 큰 나라가 그를 받아들인다. 어떤 것은 낮은 자세로서 남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낮은 자세로서 남에게 받아들여진다. 큰 나라가 바라는 것은 아울러 기르려는 것뿐이고, 작은 나라는 속하여 보호를 받고자 할 뿐이다. 만약 양쪽이 각기 바라는 대로하고 싶다면 마땅히 큰 쪽이 아래가 되어야 한다.


현실의 국제정세를 보면 정말 이 말은 천당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죠. 인류사를 보면 나라 간에 힘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항상 전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힘의 균형이라 하면 다른 나라의 힘을 이용할 줄 아는 것도 포함해서죠. 그러나 아무리 다른 나라의 힘을 이용한다 해도 자신들에게 힘이 없으면 언젠간 전쟁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작은 나라의 운명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금의 미국이나 중국, 그리고 러시아, 일본을 보십시오. 우리나라를 도와주는 척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미국은 일본과 관계된 일이면 일단 일본을 편들고 보지 대한민국에게 먼저 편들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만 미국을 짝사랑하고 있을 뿐이죠. 참 답답하고 안타까운 현실인데요,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힘없는 국가일까요? 이 지면에서 이것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통일하여 힘을 키웁시다. 그러고 나서 지금의 강대국처럼 힘으로 타국을 누르려고 하지 말고 노자의 말대로 스스로 낮추어 작은 나라의 존경심을 받도록 합시다. 그러면 나라가 진정 부강해지고 강해지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힘을 키울 때!!!

◆ 성글지만 빠트리는 법이 없는 하늘의 그물이여!

- 도덕경 73장 -

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 此兩者或利或害. 天之所惡, 孰知其故, 是以聖人猶難之.

(용어감즉살, 용어불감즉활. 차양자혹이혹해. 천지소오, 숙지기고, 시이성인유난지.

天之道, 不爭而善勝, 不言而善應, 不召而自來, 繟然而善謀. 天網恢恢, 疏而不失.

천지도, 불쟁이선승, 불언이선응, 불소이자래, 천연이선모. 천망회회, 소이부실.)

과감하게 용감하면 죽고 과감하지 않음에 용감한즉 산다는 것은 만물의 일반적 이치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에 어느 것이 살게 하고 어느 것이 죽게 하는지 쉽게 사량하기가 어렵다. 하늘이 미워하는 까닭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이로써 성인도 오히려 그것을 어렵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으면서 잘 이기고, 말하지 않으면서 잘 교응하며, 부르지 않았는데 저절로 오고, 또 느슨하면서도 잘 의논한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서 성글지만 놓치는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넓고 넓어서 성글지만 빠트리는 것이 없는 하늘의 그물이 될 수 있을까요? 참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다투지 않아도 이기고 말하지 않아도 교응하며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오고 느슨하면서도 잘 도모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최고의 사람이 아닐까요. 어쩌면 하늘만이 가능한 이 일을 그래도 저는 한 번 꾸어 봅니다.


연꽃

풍부한 영양의 진흙뻘이 좋았을 뿐

연꽃은 스스로 깨달은 바가 없다

하늘을 나는 솔개 한 마리 홀로

그 사실을 아는 듯

연못에 앉아 부처를 흉내 낸다

연못 속에서 도를 닦던 물고기

부처에게 살신보시하고

하늘로 돌아갔다

하늘은 피곤한 척 무심히

아무 하는 일 없이 쉬엄쉬엄 돌고 있다.

이제 어디부터 시작하여

어떤 깨달음을 부여해야 하는가

유유자적하던 연못의 연꽃은

그 소박했던 욕망을 버리고

자신들이 감당하기 힘든 깨달음을

부여받은 채 자꾸만 깨달아야 했다

정결한 아름다움, 맑은 향기,

저들이 피워내는 깨달음에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연꽃은 제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삶은 이런 것이다

경전 속에 핀 연꽃의 성스러움을 위해

진흙은 타락의 누명을 쓴 채 더러움이 되고

부처를 먹고 영혼을 살찌운 솔개 한 마리

진흙 속에서 연꽃을 꿈꾸며

거짓으로 촘촘한 사바세계를 빠져나가려 하면

하늘은 넓고 성긴 그물로

깨달음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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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러움이여! 우리가 본받아야 할 최고의 덕!

- 도덕경 76장 -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强者死之徒,

(인지생야유약, 기사야견강. 만물초목지생야유취, 기사야고고. 고견강자사지도,

柔弱者生之徒. 是以兵强則不勝, 木强則折, 强大處下, 柔弱處上.

유약자생지도. 시이병강즉불승, 목강즉절, 강대처하, 유약처상.)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유약하고, 죽으면 견강해진다. 초목이 살아 있으면 유연하고 취약한데, 죽으면 메마르고 바싹 바싹하다. 그러므로 견강하다는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유약하다는 것은 생명의 무리이다. 이로써 군대가 강하면 이기지 못한다. 나무가 강하기만 하면 묘지의 공목이 되기 위하여 잘린다. 강대한 것은 아래에 처하고, 유학한 것이 위에 처한다.

참으로 세상의, 인생의 진리를 이렇게 꼭 집을 수 있을까요. 9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몸을 보니 정말 이 분이 아버지가 맞나 싶더군요. 아버지의 몸이 너무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유연한 것은 살아 있는 존재의 기쁨이요 행복이라는 걸 그 이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에서, 살면서 우리는 너무 강하려고만 하는 것 같습니다. 저부터 말입니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것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살아 있는 생명체의 전유물인 이 유연함! 이 황홀한 사실을 자꾸 망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모나고 강하면 빨리 베이고 꺾인다는 것을, 유연함만이 아름답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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