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이름은> 리뷰

by 방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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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80대 노장 감독의 역작이 탄생하였다. 정지영 감독의 신작 <내 이름은>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영화를 만들어 온 정지영 감독이 이번에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영화를 내놓았다. 아직도 극우세력들은 제주 4.3사건을 빨갱이들의 폭동이라고 말한다. 무도한 정부(정책)에 반대하거나 저항한 시위는 무조건 빨갱이 공산당 폭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47년 ‘제주 4.3’뿐만 아니라 48년 ‘여수ㆍ순천사건’, 80년 ‘광주 5.18’ 등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모든 양민학살 사건을 빨갱이 공산당의 폭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어찌 인간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인간들과 한 하늘 아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제주 4.3을 다룬 영화는 최근 제법 나왔다. 다큐와 극영화, 단편영화까지 하면 내가 최근 몇 년 사이 본 영화만 대여섯 편은 된다. 그러면 이번에 정지영 감독이 내놓은 <내 이름은>은 제주 4.3을 다룬 영화와 어떤 점에서 차별점을 갖고 있을까? 또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감독은 제주 4.3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고 한발 물러선 채 역사적으로 관망하면서 이 거대한 폭력이 어떻게 대물림되는지 분석한다. 제주 도민에게 집단적 트라우마인 이 4.3은 ‘기억의 저편에서 나(주인공 어머니 정순)를 짓누르고 있는 근원적 아픔, 불안, 공포’다. 영화는 이 아픔과 공포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인간의 이 아픔과 공포는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아니면 최소한 인간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이고 인간의 폭력이 어떻게 대물림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인간 역사의 ‘핏빛 폭력의 연대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 든 제주도민들에게 이런 근원적 아픔과 공포가 있다면 이것은 융이 말한 ‘집단적 무의식’이다. 이 집단적 무의식은 세대를 통해 대물림되면서 알 수 없는 아픔과 공포, 슬픔을 형성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정순이 경험한 4.3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 경험이 너무 끔찍해 기억을 스스로 지워버렸다. 살기 위해서… 그러나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 그 끔찍한 경험은 결국 자식 세대로 대물림된다. 집단적 무의식이 자식으로 대물림되면서 그 폭력이 자식들에게 현재 재현되는 것이다. 집단적 무의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역사는 곧 폭력의 역사이고 이 폭력이 어떻게 대물림 되고 재현되는가, 라는 질문으로 영화를 해석할 수 있다.


전자이건 후자이건 공통점이 있다. 바로 끔찍한 기억과 경험, 즉 폭력은 제대로 치유되고 사회적ㆍ정치적으로 해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전히 한 개인의 일순간 폭력으로 끝나버린 사건이라면 모를까, 사회적ㆍ국가적으로 큰 폭력이었던 사건은 반드시 국가 차원에서 그 원인을 제대로 밝혀내고 가해자를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에게 정신적ㆍ물질적으로 보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피해자를 끝까지 보살피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는 그런 폭력이 일어나지 않게 사회나 정부 차원에서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피해자들은 그 끔찍한 폭력의 기억에서 조금이나마 치유될 수 있고 평온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래야 끔찍한 폭력이 대물림 되지 않는 것이다. ‘폭력의 연대기’를 끊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융 식으로 말하면 집단적 무의식이 치유되어 알 수 없는 아픔과 슬픔과 공포를 겪지 않는 것이다.

정순(염혜란)은 제주에서 전통춤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아들 영옥(신우빈)은 자신의 이름이 여자이름이라고 항상 불만이다. 정순은 알 수 없는 아픔과 슬픔, 그리고 공포와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 정신과 약을 항상 먹고 있다. 그런데 서울에서 새로 온 정신과 의사(김규리)가 제대로 된 심리치료를 하자고 제안한다.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결국 받아들인다. 서울 의사와 정신적 치료를 하면서 정순이 저 멀리 밀어낸 기억의 단편들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바로 제주 4.3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자신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게 된다. 그러면서 아들이 아들이 아니고 손자였다는 것도 밝혀진다. 딸이 아빠의 폭력과 엄마(정순)의 슬픔이 자신에게 대물림 될까 봐 제주를 피해 광주로 대학을 갔는데, 대학 때 광주 5.18이 터지고 남자친구가 죽게 된 것이다. 자신은 고향 제주로 피신하여 아들을 낳지만, 불행히도 출산 후유증으로 자신도 죽고 만다. 그래서 정순이 손자를 아들로 키운 것이다. 그런데 이 아들은 서울에서 전학 온 친구 경태(박지빈)와 사귀면서 학교폭력의 당사자가 된다. 경태의 도움으로 반장이 되지만 친했던 부반장이 경태로부터 폭력을 당하는데 영옥은 방관자가 된다. 폭력의 방관자가 폭력의 가해자가 되고 다시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이 ‘폭력의 아이러니’, ‘폭력의 뫼비우스 연대기’가 딸을 넘어 손자까지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제주 4.3 때를 직접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아주 폭력적이고 비참한 4.3의 장면은 많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선택이 과연 얼마나 관객에게 큰 울림을 줄지는 의문이지만, 대신 폭력의 연대기를 통해 사회적ㆍ국가적 폭력이 어떻게 대물림되고 이 폭력의 역사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 거대한 폭력은 그 사람의 삶을 완전히 장식하여 끝끝내 좀 먹고 만다. 이유 모른 채 아프고 슬프고 방황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이 공포를 깨끗이 치유하지 않은 채 살아가면 그 자체가 불행이고 이 불행은 대물림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의 본성이 악해서 이 거대한 폭력의 역사, 폭력의 연대기를 도저히 끊을 수가 없다. 사회도 국가도 완전히 이 악의 고리를 끊어내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가해자를 철저히 찾아내 단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아픔과 고통과 불행이 세대를 이어 대물림 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시대와 세대로 대물림되는 불행을 끊어내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극우세력을 발본색원하여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인간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만이 폭력의 역사, 핏빛 폭력의 연대기를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영화는 직접적으로 제주 4.3을 보여주는 대신 간접적으로 폭력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대물림되는 이 폭력의 역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고 있다. 그래서 아주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은 많지 않다. 대신 인간의 폭력의 역사를 생각하게 하면서 인간 본성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꼭 이 영화를 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인간이라면, 인간의 이름을 온전히 되찾으려면.


뛰어난 염혜란의 연기를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개인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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