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의 초대

by 방정민

제 1강. 철학에의 초대

-인생의 의미(철학을 통해 인생의 의미 파악하기)-


1. 인생의 의미- 인간이해의 중요성

살면서 ‘인생 참 힘들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인생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은 인간을 둘러싼 세상(또는 자연이나 우주)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는 곧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은 인간 자신에게 던져진 가장 심각한 물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물음은 결코 중단되거나 포기될 수 없는 물음이며 궁극적인 해답 또한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들은 시대와 민족, 역사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왔다.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성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강조하는 것은 철학의 표징이다. 이성에 대한 요구는 철학을 종교나 예술과 구분시키는 특징이다. 종교에서도 때때로 이성이 요구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믿음, 계시, 예배, 복종이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하고 이성은 부수적이다.

물론 과학자도 우리 본성을 새롭게 발견하여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자신의 발견을 공표하려고 노력하면서 진리 추구에 참여한다.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합리적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시간에 시작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말해 주거나, 무엇이 옳은지, 인간본성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실험이나 관찰은 없다. 즉 합리적 탐구는 가능하지만 과학적 방법으로는 탐구가 불가능한 이런 문제들은 철학자에게 넘겨진다.

그런데 철학, 과학, 예술이 탐문하는 것은 바로 이 ‘세계’다. 철학, 과학, 예술은 모두 세계나 인간의 문제와 직면하는 것으로 이들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우리의 철학적 작업은 인간 삶의 문제에 대한 합리적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차원에서 인간이해와 관련된 다양한 견해들을 비판적으로 탐구하고 음미하고 평가할 것이다.


2. 인간의 사회적(합리적) 본성에 관한 이론

1) 고대 철학 사상


가장 일반적 명제로 “인간은 이성적 동물”(Sokrates)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충동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이성에 따라 사는 삶이 행복하고 선한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사회생활에서 도덕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이다. 이성을 강조하는 것은 철학의 표징이다.


2) 근대 이성주의

서양 고대 이성주의적 인간관은 16세기 르네상스를 거쳐 당시의 인문주의 종교 개혁 자연과학의 기초를 제공하였고, 계몽주의 사조 및 근세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 전통에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근세 이성주의는 고대 그리스 이성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그리스의 인간 이성은 인간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의 본질로서 세계 이성과 동질적인 것이다. 즉 고대의 이성주의는 자연(우주)의 일부분으로서의 인간을 말하고 있으며 자연은 곧 조화와 질서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삶은 자연의 원리에 일치하는 삶을 뜻하며 그러한 삶이 선한 삶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사람은 자연의 원리에 따라 조화로운 삶을 살아야 하며 그런 능력이 사람의 안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런 능력을 동양에서는 도(道)나 인(仁)으로 보았고 서양에서는 이성, 로고스(Logos)로 보았다.

그러나 근세는 다르다. 근세 이성주의 선구는 데카르트로, 다음과 같은 명제를 남겼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agito ergo zum).” 이 유명한 명제는 확실성의 기초가 더 이상 신적 존재가 아닌 ‘생각하는 나’ 즉 이성적 사유 주체로서 인간임을 선언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곧 정신이라는 결론을 통해 세계가 궁극적으로 다른 두 종류의 실체, 즉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견해에 이르게 된다.

동서양의 고대 철학 사상에서 근세 이성주의에 이르기 까지 이성주의에 서 있는 사상들은 대부분 인간의 합리적 이성적 성격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의 존재와 근원에 대해서도 형이상학적으로건 종교적으로건 선천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특히 서양의 이성주의적 전통은 기본적으로 관념론적 성향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3) 공리주의


인간의 삶을 경험적으로 잘 관찰해 보면 인간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사회를 유지해 가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입장이 철학사적으로 경험주의와 쾌락주의 전통으로 분류되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 입장이다. 공리주의에 의하면 인간성이 선천적인지 아닌지, 그것이 선한지 악한지 알 수도 확인할 수도 없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모두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멀리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공리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간 심리에 대한 쾌락주의적 전제 위에서 출발한다. 공리주의의 이러한 출발은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공리주의적 이해가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심부터 생기게 한다. 인간 각자의 쾌락 추구는 서로 간에 상충하기 마련이고, 그 상충은 사람들 간에 이기적 갈등과 반목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공리주의 사상은 비록 쾌락을 행위 동기의 기초로 간주하고 있긴 할지라도 그 행위 과정에 인간의 합리적 사회적 특성이 깊숙이 매개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되 쾌락을 늘리려는 자기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일으키면 그것이 나에게도 결코 쾌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구체적인 경험적 삶의 과정에서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새치기를 하면 그 때는 편해도 결국은 자기에게 해로 돌아오므로 결국 줄 서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생각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공리주의를 확립한 벤담이 말하는 효용의 원리(the principle of utility)이다. 벤담은 쾌락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관계자의 쾌락까지 포함하는 공중적 쾌락이다. 결과적으로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쾌락 추구라는 이기적 행위를 긍정적으로 도덕적 행위 양태 속에 수용하고자 하는 벤담과 밀은 공리주의 사상은 자유 방임적 이기적 이윤 추구가 곧 국가적 부의 증대로 여겨졌던 당시 영국 자본주의의 낙관적인 전개 상황에서 성립된 사상이다.

초기 자본주의의 이런 전개는 바로 사회적 빈부 격차의 심화와 그에 따른 갈등을 증폭시키면서 한계에 부딪히고 급기야 사회주의 사상을 태동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공리주의는 자유주의 사상으로서 이기심의 공존 가능성을 기초 지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사상인 까닭에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주의 윤리 사상 대부분은 공리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4)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는 인간성이란 사회 관계의 변화와 맞물려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사회 관계와 무관한 어떤 고정적인 또는 선천적인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을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원초적인 사회 관계 속에서 인간성은 근본적으로 이웃에 대해 선하고 우애적이며 협동적이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사적 소유의 발생이 그러한 인간성을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사적 소유는 개인에게 타인에 대한 사회적 지배를 발생시키고 개인은 그 지배를 통해 더욱 이웃을 해치게 되며 그 사적 소유의 증대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그 소외를 창출했다고 여겨지는 계층에 대해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관계는 더더욱 배타적이고 경쟁적인 관계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악순환 된다. 그것의 대표적인 모습이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이다. 따라서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모든 재화 및 생산 수단을 공유하는 사회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이러한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적 사회 관계가 수립되면 사회 구성원 누구라도 그 공유된 생산 수단과 물적 생산물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됨에 따라 공동체적 상부 상조적, 협동적 본성이 고양되고, 나아가 인간 모두가 그 본성에 부합한 사회경제적 구조를 가지게 됨으로써 평등하게 자기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을 실현하는 이상 사회가 정착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사적 소유욕은 인간의 본능적이고 근원적인 공격적 성향의 일부일 뿐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은 유아 시 식욕, 성욕 등과 공격욕도 함께 가지고 있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마르크스가 인간성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낙관적인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았다.


3. 인생관

1) 낙관주의(낙천주의, optimism)

역사 변화의 전반적 과정에 관한 견해로서, 현실은 언제나 보다 좋은 이상적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지닌다는 견해이다. 낙관주의는 선의지가 궁극적으로 악을, 정의가 불의를 이긴다는 확신이며, 인간의 능력은 무한한 사회발전과 도덕적 진보를 이루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비관주의의 반대이다. 하나의 사회적 태도로서 그리고 하나의 철학 및 윤리학적 견해로서 낙관주의는 사회-역사적 진보와 도덕적 진보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 도덕과 중세 철학이 악은 궁극적으로 극복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지만(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 선의 승리는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고 그 승리는 다음 세계로 이관된 것이었다. 현 세계에서의 삶은 비애와 고통의 그것이며, 원죄와 죄의식이 인간 본성의 본질적, 본유적 속성이라고 선언되었다.

근세에 있어, 라이프니쯔(Leibniz)는 절대적 낙관주의 개념을 지지했다. 그는 세계가 불완전한 존재들로 깃들어 있고 오직 하나님만이 무한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사회에서의 악은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해 아량을 베푸시는 존재인 신은 악의 세계를 창조하실 수 없기 때문에 선의지는 궁극적으로 악을 설복시킬 것이다. 더구나, 악은 선의 승리를 위해 마련된 배경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이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상의 그것이다. 그에 의하면 직접적으로는 전지전능한 신앙은 아니지만 선을 향해 노력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에 기초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점은 결국 사회악을 긍정한다든가 또는 경시한다든가 하는 태도에 그치고 말아 그 본질상 현존하는 사회의 모순·해악·궁핍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입장은 아니다.

맑스주의의 사회-윤리 사상 또한 낙관주의적이다. 비록 그것이 지구적 문제들(전쟁과 평화, 환경, 인구, 에너지 등의 문제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생긴 어려움들로 인해서 세계의 현재 상황이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수시로 비관론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의 부정적 요소들을 사회 생활의 특수한,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조건들로 인한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조건들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서 발생된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인간은 그것들과 적극적이며 양심적인 투쟁을 해야만 한다. 마르크스-레닌의 낙관주의는 인간 사회의 발전 법칙의 구체적인 규명에 기초하여 내린 결론이고 견딜 수 없는 악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근로 인민의 계급투쟁에 의한 사회의 개혁 및 혁명의 종국적 승리에 대한 일관된 확신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곤궁이나 희생에도 불구하고 최후로는 이들 제반 모순을 꿰뚫고 민중의 승리를 획득할 수 있는 필연성에 대한 확신인 것이다. 이 투쟁의 궁극 목표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모든 능력을 꽃피운다는 데 있다.

2) 비관주의(염세주의=페시미즘=pessimism)


최악을 뜻하는 라틴어 ‘pessimum'에서 유래한 말로 낙천주의에 대응된다.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하고 있고 사람이 사는 동안은 이를 없앨 수 없다는 생각이며 흔히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한다. BC 6세기 그리스의 시인 테오그니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빛나는 태양을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태어난 바에는 서둘러 죽음의 문에 이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라고 노래하였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두 개의 실재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이원론적 신앙은 필연적으로 페시미즘에 귀착된다. 지상에서의 육체적 생존 자체가 악이고 더렵혀진 것이라면 인간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구제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육신을 지니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한, 인간은 생식과 죽음의 법칙에 얽매여 암흑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이 세상에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일 것이다. 죽음에 의해서만 목숨의 죄가 보상되고 일자(一者)안에서, 즉 광명에 싸인 통일 속에서 영혼이 소생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이러한 염세사상은 영육분리적인 오르피즘(신화상의 시인 오르페우스가 창시했다고 전해지는 고대 그리스의 밀 종교로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됨으로써 신과 합일할 수 있다고 함)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인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근대에 와서 페시미즘의 철학을 역설한 사람은 쇼펜하우어로 그의 말을 따르면 세계는 불합리하고 맹목적인 의지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은 괴로움이며 이 괴로움에서 해탈하려면 쾌락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무욕의 상태 즉, 완전한 의지부정에 의해 현상세계가 무(無)로 돌아가는 열반의 경지에 달해야 한다고 한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를 비교․ 종합하여 말한다면, 윈스턴 처칠은 “비관주의자들은 기회 속에서도 어려움만 보려하고, 낙관주의자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기회를 잡으려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낙관적인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 건강하다. 낙관적인 사람은 암 사망률이 낮거나 수술 후 회복속도가 빠르며 낙관적인 산모는 산후우울증을 겪는 비율이 낮고 유산을 경험한 후에도 이를 잘 극복하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도 보고되고 있다. 이렇듯 낙관적인 성향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적당한 비관주의가 득이 될 때도 있다.

미국의 센트럴미시간 대학의 연구진은 개인의 성향이 도박행태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한 결과 성격이 비관적인 사람은 낙관적인 사람들보다 냉정하게 베팅을 하고 손을 털고 그만둬야 할 시점을 더 잘 아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비관적인 사람은 지는 게임에서 이길 것이라는 기대를 빨리 버리거나, 몇 번 지고난 후에 베팅횟수와 규모를 줄였다. 낙관주의자는 패배 후에도 이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 하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게임을 지속하는 반면, 난관주의자들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면 그 다음 게임에서 베팅을 줄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연구진은 낙관주의자가 비관론자에 비해 도박을 더 많이 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다만 사람의 성향이 도박 횟수가 아니라 도박을 하게 만드는 동기와 관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낙관론자들은 주로 돈을 벌기 위해서 혹은 게임에서 이길 것 같다는 기대로 도박을 하는 반면, 비관론자들은 게임 자체를 즐기거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도박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즉 이기기 위해 도박을 하는 횟수를 낙관론자가 많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도박 횟수는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두 성향에 대한 분석은 건강관리 측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과도한 낙관주의에 취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증가하고 음주와 흡연량이 늘기 쉽다. 처음부터 목표를 설정할 때 적당하게 비관적이라면 자신의 건강을 해치지 않고 현실적인 시각에서 즐기며 일을 할 수 있고 자기가 한 일에 만족할 수 있어 건강에 도움이 된다.

기회가 많고 자원이 풍부한 상황에서는 낙관주의적 접근이 바람직하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이 밝지 못한 상황에서는 적당히 비관적인 것이 건강에 차라리 이롭다. 우리사회의 경제상황은,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는 여전히 길고 어두운 터널이다. 어두운 현실을 극복한다는 명목으로 미래를 장밋빛으로만 보다 크나큰 실패와 맞닥뜨리면 이를 일시에 만회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하고 건강을 잃을 수도 있다. 무조건 어두운 측면만 보고 주저앉는 극단적인 비관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현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직시하여 얻는 적당한 비관주의는 헛된 노력을 최소화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완충제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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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은 끊임없이 물음, 질문하는 것이다. 오늘의 철학함! ★


♧ 내가 생각하는 인생이란? 자신의 경험을 살려 내가 비관론자인지 낙관론자인지 생각하며 써보자.(시나 산문 등)

♧ 당신은 전차 기관사이고, 브레이크가 고장난 전차가 시속 100킬로미터로 철로를 질주한다. 저 앞에 인부 다섯 명이 작업 도구를 들고 철로에 서 있다. 앞에 비상철로가 있다. 그곳에는 인부가 한 명이다. 전차를 비상철로로 돌리면 인부 한 명만 죽는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번엔 당신은 기관사가 아니라 구경꾼이다. 앞의 상황과 같다. 단 당신 옆에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있다. 이 사람을 밀면 이 남자만 죽고 인부 5명은 살릴 수 있다. 그러면 덩치 큰 남자를 철로로 미는 행위는 옳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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