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쓸모 없음의 쓸모
- 제 4편 인간세(人間世) -
山木自寇也, 膏火自煎也. 桂可食故, 伐之, 漆可用故, 割之. 人皆知有用之用而,
(산목자구야, 고화자전야. 계가식고, 벌지, 칠가용고, 할지. 인개지유용지용이,
莫知無用之用也.
막지무용지용야.)
산의 나무는 스스로 자신을 해치며 기름 등잔불은 스스로를 태우며, 계피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베어가며, 옻나무는 쓸모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라간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만을 알고 쓸모없음의 쓸모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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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노자보다 더욱 무의 유익함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데요, 쓸모가 없어서 쓸모 있다는 이 역설적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합니다. 시쳇말로 짧고 굵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길고 오래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죠. 저도 아직은 젊어서 짧고 굴게 사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만 이것이 인간의 만용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짧고 굵게 살든 길고 오래 살든 그것은 하늘에 맡기고, 우리는 지나치게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려 서두르지는 말자고요. 가끔 오래된 물건이 쓸모없다고 버리고 나서 그것이 쓸모 있게 되는 경험 있잖습니까. 쓸모없다고 버리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지혜가 필요하리라 봅니다. 사람 사이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겠죠.
◆ 무정한 사람아!
- 제 5편 덕충부(德充符) 중 -
旣謂之人, 惡得無情. 是非吾所謂情也. 吾所謂無情者, 言人之不以好惡, 內傷其身,
(기위지인, 오득무정. 시비오소위정야. 오소위무정자, 언인지불이호오, 내상기신,
常因自然而不益生也.
상인자연이 불익생야.)
이미 사람이라고 하면 정(情)이 있을 터인데 어찌 정이 없다고 하는가? 그건 내가 말하는 정이 아니다. 내가 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좋고 나쁨에 의해 스스로의 몸속을 해치지 않고 언제나 자연을 따르면서 삶을 덧붙이려 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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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전화 잘 안 하는 사람을 일러 무정한 사람이라고 하며 탓합니다. 그런데 장자는 그런 무정한 사람이 더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사 모두 그 놈의 정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며 차라리 무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하하)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완전 자유인이 되자는 의미입니다. 그래야만 만물제동, 제물외생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요. 정 때문에 마음고생하고 관계 틀어지는 사람 참 많은데, 이것만 놓고 보면 차라리 장자의 말대로 절대 자유인의 경지에 올라서는 게 어떨까요? 저도 그럴 수만 있다면 가끔은 그러고 싶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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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바람을 보며
거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나 자유롭고 싶네
바람을 빠져나가는 새처럼
내 마음 청아해지고 싶네
무겁고 음침하게 격동하는 내면이
어쩌면 저들처럼 초연히 흔들리고
고요하게 동요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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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로 돌아가다 - 삶과 죽음은 하나!
- 제 6편 대종사(大宗師) 중 -
夫大塊載我以形, 勞我以生, 佚我以老, 息我以死.
(부대괴재아이형, 노아이생, 일아이로, 식아이사.)
대자연은 우리에게 육체를 주어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며, 삶을 주어 나를 수고롭게 하며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주며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
孰能以無爲首, 以生爲脊, 以死爲尻, 孰知死生存亡之一體者.
(숙능이무위수, 이생위척, 이사위고, 숙지사생존망지일체자.)
누가 없음을 머리로 삼고 삶을 등골로 알며 죽음을 꽁무니로 여길 수 있겠는가. 누가 죽음과 삶, 있음과 없어짐이 하나임을 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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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입장에서 보면 선과 악, 존재와 무, 생(生)과 사(死) 등은 차이가 없습니다. 한 하늘 아래 흐린 날과 맑은 날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죠. 장자는 계절이 바뀌고 만물이 생장, 소멸하는 것처럼 삶과 죽음은 자연의 이치대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을 기뻐하고 죽음을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장자에 따르면 인간은 형체를 하고 태어나 고생하며 살다가 늙어서는 마음을 편안히 하고 죽어서는 영원히 후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평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긍정한다면 죽음도 긍정해야 합니다. 스승인 노자가 죽었을 때와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 슬퍼하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죠. 장자는 인간의 삶이란 기가 모인 것이고 죽음은 기가 흩어진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장자에겐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삶이 있는 것이며 그것은 같은 것입니다.
장자는 삶과 죽음뿐만 아니라 크고 작음, 아름다움과 추함, 이것과 저것, 선과 악 등의 차별을 거부하고 모든 사물의 현상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장자는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는 마지막 단계를 죽음과 삶의 경계마저 허무는 경지로 보았던 것입니다. 피안의 세계가 바로 우리가 존재했던 근원적인 곳이 아닐까, 하고 장자는 생각한 것이죠. 그것이 바로 장자의 죽음관입니다. 삶과 죽음의 구별도 극복하여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절대적인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 사상이 바로 장자의 사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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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어른이 죽었을 때 ‘돌아가셨다’라고 말합니다. 어디로 돌아갔다는 말일까요? 바로 하늘입니다. 하늘, 즉 저세상이 ‘본래’이고 우리가 현세에서 살고 있는 이세상이 ‘비본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천명을 다한 어른이 죽었을 때 우리는 본래 있던 곳으로 갔다는 의미로 돌아갔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선조들의 죽음관은 참 이채롭습니다. 삶이 힘들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죽음이 싫어서였을까요? 잘 모르겠지만 삶에서 죽음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요. 누구나 두려워하는 죽음을 긍정하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재해석하고자 하는 의지와 바람을 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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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 음
볕 맑은 오후
밝은 햇살에 비끼어있는 조그마한 어두움
그 속으로 잠시 다녀왔다
깜빡!
이 찰나의 순간에
생과 사의 길이 열려 있다니,
…나는 어느 지점에 와 있는가
죽은 이의 귀엣말이 조금씩 들려오는 나이
나는 죽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이승의 너머에 저승이 있다는
그 의미 없는 말이 너무나 무의미하게 들리는 이 순간
죽음보다 멀리 온 산자의 마음이
왜 이리 가쁘게 뛰고 있는가
짧았던 졸음에서 깨어 고개를 들면
이미 내 얼굴의 반을 넘어가고 있는
삶의 그늘, 죽음
어둠은 수굿해진 햇살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아직 졸음에서 깨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졸음의 공간 속에서 알아버린
시간의 의미
짧은 것은 우리네 인생만이 아니다
삶의 다른 지표, 죽음도 그네들에겐 짧은 것이며
흘러가는 모든 것은
마음 습한 공간 속에서 짧을 수밖에 없는 운명
얼마 남지 않은 하루가 번민하며 또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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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 타고난 본성대로 살아야
- 제 8편 변무(鴘拇) 중 -
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 故性長, 非所斷, 性短, 非所續, 無所去憂也.
(부경수단, 속지즉우, 학경수장, 단지즉비.고성장, 비소단, 성단, 비소속, 무소거우야)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지만 이어 주면 슬퍼하고 학의 다리가 길지만 자르면 슬퍼한다. 그 때문에 타고난 본성이 긴지라 잘라야 할 것이 아니며, 타고난 본성이 짧은지라 이어 줄 것이 아니며 근심거리로 여겨 없앨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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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엄마들은 참으로 스스로 힘든 삶을 삽니다. 자신의 삶은 없고 오로지 자식을 위한답시고 일분일초로 시간을 쪼개어 자식을 관리합니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합니다. 그것이 자식을 위하는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 어머니는 행복할까요? 행복하다고 착각할 뿐, 자식을 위한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을 뿐 누구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자식의 타고난 재능(본성)을 무시하고 남 하는 대로 유학 보내고 고급영어 가르치고 온갖 학원 다 보내고… 단언컨대 그런 어머니들 결국 자식한테 버림받습니다. 헛소리라고요? 아닙니다. 그런 식의 교육은, 사랑은 어마어마한 기대를 반드시 전제하는데 그 기대는 자식이 어떻게 하더라도 결코 100% 만족할 수 없는, 완전 충족이 안 되는 기대입니다. 그래서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불행으로 만든 엄마를 미워합니다. 그러면 어머니와 아이 모두 불행해집니다. 실제 그런 엄마와 아이를 상담한 적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아무리 부모자식 사이라도 행복은 본인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즉, 어머니 스스로 행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이 행복한 법입니다. 대리 행복이 아니라 어머니가 본인을 위한 행복한 삶을 살아야 그것을 본받고 자식들이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행복은 그런 식으로 대물림 되는 것이거든요. 행복은 타고난 본성을 무시하고 억지로 무엇을 하려할 때 절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근심만 늘지요. 불행만 더해지지요. 그 결과 결국 어머니, 자식 모두 우울증에 걸리고 다투게 되고 심하면 자살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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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철학은 광범위하고 복잡합니다. 그의 철학은 현실을 초월한 것 같으면서 때때로 현실적인 측면을 보이기도 합니다. ‘나’의 관점에서만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지 않으면 세상 모든 것이 하나가 되며, 그 하나의 지극한 경지에 도달하면 그 하나조차 무의미하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모순, 즉 분열과 파편, 소외와 대립의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즉, 이제 문명의 세계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있어야 할 때라는 말입니다. 현대의 문명, 자본, 기술의 병폐를 현대적 시각만으로 해결해 나가려는 생각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비록 장자의 사상이 현대에 전면적으로 적용되기는 힘들다 할지라도 분명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는데 그 단초의 역할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생명 순환과 상생을 꿈꾸는 장자의 철학은 원천적으로 약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장자를 통해 고민과 번뇌에서 해방되고 정신적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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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낮은 수준의 농경사회를 이상적으로 바라본 노장사상을 현재의 사회에서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사회에서 발전이란 미명아래 생태계 파괴, 인간소외, 인간성 파멸이라는 후유증을 깊이 앓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노장사상은 이런 현대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반추하게 하는 지침서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리라 봅니다. 따라서 21세기는 이 노장사상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